회화주의 사진부터 다큐멘터리 사진까지

우리는 ‘사진’으로부터 정확하게 어떤 것을 말할 수 있고, 어떤 목적에도 사용될 수 있는 수단을 만들어 낸다. 사진은 진부한 것을 개성 있고 생생한 것으로 변화시키기도 하며, 단순한 대상뿐만 아니라 그 성격까지도 포착해 낸다.

신성아 기자

사진의 역사는 다른 예술의 역사보다 현저히 짧지만 현대생활에서 사진은 예술로서의 사명과 임무를 그 어느 예술보다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사진은 항상 누구인가를 위하여, 누군가를 향하여 말해야 하며 어떠한 사회적 입장에서 보이는 현실을 그러한 사회적 입장에서 보이도록 반영해야 한다. 사진의 가장 간명하고 개관적인 공시는 호소이고, 도전이며 제압이다.

50년대 이전 사진의 역사
사진은 카메라 옵스큐라에서 부터 시작된다. 어두운 방이라는 뜻으로 16C 르네상스 시대에 회화에서 밑그림으로 쓰이기 위해서였다. 1839년 사진이 공표되었고 다게르의 다게레오타입과 니엡스의 헬리오그라피, 탈보트의 칼로타입이 발명되었다. 이때 당시의 사진은 노출시간이 길고 지금처럼 화상이 뚜렷하거나 좋지 않았다. 칼로타입 같은 경우에는 현대사진술과 흡사함을 볼 수 있다. 존 허셀 경은 네거티브, 포지티브, photography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정착을 발명했다. 이렇게 사진이 발명되고 공표되었으며, 1840~1880년대까지 예술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사진이 예술이냐 아니냐는 것을 두고 일어난 논쟁이다. ‘회화에 밑그림으로 사용하였던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있느냐. 그저 도구일 뿐이다’라는 것이었다. 이때 유명한 비평가로는 샤를르 보들레르가 있다. 이 시기에 귀스타브 르그레, 오스카G 레일란더, 헨리피치 로빈슨이 등장했다. 귀스타브 르그레는 합성사진, 오스카G 레일란더는 조합사진(인생의 갈림길, 시련) 헨리피치 로빈슨(임종) 같은 경우에는 사진가를 위한 지침서라고 하여 책을 출간하기도 하였고 그 당시 유명한 사진가였다. 그리고 예술적사진이 되기 위해서는 속임수 조작도 필요하다고 하였던 사람이다. 1880~1890년 피터 헨리 에머슨이 로빈슨의 작위적인 사진에 반대하여 자연주의를 외치며 등장하였다. 그리고 사진의 기술적 혁명으로 소형카메라, 롤필름, 젤라틴건판 등의 등장으로 사진이 대중화 되었는데, 이때 대거의 사진가들이 등장하였다. 사진이 대중화가 됨에 따라서 기존 사진가들이 새롭게 등장한 사진가와 분리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 픽토리얼리즘이다. 픽토리얼리즘은 사진에 여러 기법과 방법을 만들어서 그 틀에 맞추어 사진을 만들어내었다. 1890년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유럽의 사진과는 달리 미국만의 사진을 정립하고자하여 미국에서 사진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이때 291화랑 카메라워크 등 여러 활동을 하였다. 그는 스트레이트 사진을 이끌어간 사람으로 근대 사진의 아버지라고도 불리 운다. 그 이후 폴 스트랜드, 에드워드 웨스턴이 뒤를 이어가고 F64그룹도 만들어진다. 1930년대 미국대공황 중 FSA가 만들어지고, 이들은 미국대공황 중 노동자, 농민들의 생활상을 사진으로 담아내기 위해 만들어진 그룹으로 도로시어 랭, 워커 에번스, 벤샨 등이 있다. 이 이후에 1950년대 사진이 시작되는 것이다.

현대사진의 흐름
현대는 이미지시대로 불리고 있다. 그것은 이미지가 범람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눈을 통해서 사물을 보기보다는 제 2의 눈인 카메라를 매개체로 하여 사물을 본다는 점일 것이다. 1826년 니엡스가 세계최초로 사진촬영에 성공한 이래 빠른 속도로 인간의 문화는 사진에 의해 정의되었다. 이 사진 이미지의 출현이야말로 인간의 역사 중에서도 획기적인 사건으로 남을 것이다. 사진술은 초기에는 기록의 수단이나 회화의 보조적인 수단으로 인식되었으나, 초기 사진가들의 노력으로 예술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사진예술 초기에는 예술로서 인정받기 위해서 당시의 주류예술인 회화의 여러 표현방법들을 모방하였다. 그 이후 사진의 본질로 돌아가자는 스트레이트 포토운동이 일어나서 1950년대 말 현대사진이 태동되기 전까지는 절대 비연출, 절대스냅 사진만이 사진으로 인정받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현대사진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이전 윌리엄 클라인이나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에서도 스트레이트포토에서 중요시 여기던 안정된 구도, 풍부한 계조, 정확한 초점 등의 원칙들이 무너졌지만, 70년대의 사진에서는 더욱더 난해하고 모호한 모습의 사진들이 선보인다. 이러한 사진들은 객관성 보다는 사진가의 주관성을 공론적인 시각 보다는 사적인 시각을 더 중요시 여겨서 나타난 결과들이다. 1980년대 이후의 사진의 테마는 더욱 더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들로 나타난다. 그만큼 사진의 내용 면에서도 다양해지고 개성적인 모습들을 보인다. 장르간의 벽도 허물어지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다른 매체와의 경계뿐만 아니라, 장르 안에서도 순수사진과 다큐멘터리사진의 구분도 모호해지고 있다. 다큐멘터리사진의 주제가 공론 적이고 객관적인 것에서 일상적이고 주관적인 것으로 변화되었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가 마틴 파의 다큐멘터리작품이다. 그는 매그넘의 회원이면서도 작품의 내용이 저널리즘 적이지 않고, 순수사진에 가까운 내용과 형식을 선보이고 있다. 이것은 과거보다 현대사회가 그만큼 복잡해지고 다양화해짐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생활모습과 생각도 개성적이고 주관적으로 바뀐 결과이다.

근대 사진의 아버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는 20세기 미국 사진 계 그 첫머리에 존재한다. 그는 미국 사진 초창기를 풀어나간 위인이며 스트레이트 사진의 매듭을 지어 놓은 천재라는 의미로, 이후의 미국 사진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를 일러 ‘근대 사진의 아버지’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1864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난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는 미국 예술 사진운동을 이끈 주도자였다. 1881년 그의 나이 16살 되던 해에 독일로 기술공학을 수학하러 갔다가 전공을 바꾸어 사진술을 익히게 된다. 1887년 스티글리츠는 영국의 사진협회에서 최초로 인정을 받는데, 영국 주관지 ‘아마추어 사진가’가 개최한 콘테스트에서 ‘재미있는 농담’이라는 작품으로 수상하였다. 이 때 심사위원 이었던 피터 헨리 에머슨이 단독 심사였는데 그가 말하기를 “스티글리츠 작품이 강렬하지는 않았지만 억지로 효과를 내려 하지 않고 직접적이고 정직하게 찍었으며, 또한 구성상의 형식적 틀에 얽매이지도 않았다고 평하였다. 그러나 스티글리츠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시기는 1887년 22살 되던 해에 학생의 신분으로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이 런던에서 공모한 현상에서 1등으로 당선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로부터 채 3년이 안 되는 기간 동안 150개가 넘는 상을 받을 만큼 그는 사진 활동에 전념했고, 사진은 그의 전부가 되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는 1902년 사진 분리파(Photo Secession)을 결성, 사진 그 자체의 순순한 기계적 기록성을 되찾자는 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그의 생각은 다른 사진가들에게 사진적 리얼리티를 기초로 한 스트레이트 사진의 올바른 자각을 유도했다. 이것은 사진 역사의 흐름을 뒤바꾸어 놓은 새로운 지표가 되었다. 그가 주장한 ‘스트레이트 사진’이란 사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능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대상을 표현하고자 하는 곧은 의지의 산물이다. 스티글리츠의 사진세계는 1917년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그의 전기 사진은 철저한 사실주의의 추구이고, 후기는 사실주의를 딛고 넘어서 은유적 사실성의 세계를 새롭게 전개한 시기이다. 전기를 대표하는 사진으로는 <Winter on Fifth Avenue : 5번가의 겨울>, <The Steerage : 삼등선실>등을 들 수 있다. 특히 <Winter on Fifth Avenue : 5번가의 겨울>는 추운 거리에서 3시간이나 버틴 끝에 찍은 작품이며, 명암의 배분과 원근 구성이 완벽할 뿐만 아니라 하물마차의 모습이 인상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후기를 대표하는 사진으로는 1920년대부터 구름을 주제로 한 <Equivalent : 이퀴벌런트>시리즈를 들 수 있다.

현대 다큐멘터리 사진의 선구자 ‘로버트 프랭크’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난 로버트 프랭크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 196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현대 다큐멘터리 사진을 이끈 선구자적인 역할을 맡은 사람이다. 초기에는 스위스에서 사진가로 교육을 받고 훈련을 쌓았으나 1947년 되는 해에 사진을 위해 뉴욕으로 건너와 ‘하퍼스바자(Harper's Bazaar)’지를 위해 패션 사진을 찍었다. 그 후 프리랜서 사진가로 활동하면서 1955년까지 라이프, 루크 등의 잡지에 자신의 작품들을 실었다. 로버트 프랭크가 세계 사진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1958년에 <미국인들 The Americans>이라는 사진집을 출간하면서의 일인데, 1955년에 미국의 구겐하임 재단으로 부터 지원금을 받아 약 1년에 걸쳐 미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자신의 관점에서 바라본 1950년대의 미국의 모습을 다큐멘트 하였다. 세계 공황기를 딛고 발전해나가는 미국의 모습보다는 고도화된 물질문명과 현대사회의 차가운 이면에 미국의 꿈에 대한 의심을 품고 현대문명이 몰고 온 인간의 소외와 인간성의 상실을 느껴 그의 내면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현대사진의 전반기는 1950년대의 10년간 앙리까르띠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의 결정적 순간이 궁극적인 표현방법이었다. 즉 사진은 지각력과 직관에 따라 그 밑바닥에 숨어있는 미와 조화를 나타내기 위하여 이세상의 혼란과 복잡함을 표현하였다. 1960년대부터 현대사진의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로버트 프랭크는 그전까지 법칙처럼 내려오던 구습을 타파하여 사회적 대상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현대적 의미의 사적 다큐멘터리를 만들어갔는데 표현형식면에 있어서나 내용면에 있어서 그 전시대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프랭크의 사진에는 감정이입의 수법을 도입하여 현실에 존재하고 보이는 것을 대상으로 무엇인가를 찍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의식세계를 대상화하였다. 내면세계를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내면에 깔려진 복잡하고도 아이러니한 표현을 이분법적으로 명쾌하고도 정확하게 표현할 수 는 없었다. 다만 자신이 느낀 그러한 감정들을 분위기로 느끼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사적 다큐멘터리는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일종의 개인적인 진실 추구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한 장의 사진이 왜, 어떻게 찍혔는지 알지 못하고 그 사진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힘들다. 이야기하기 힘들면 그 사진의 의미에 대해 폭넓고 깊게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현재와 미래의 세대들이 과거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많은 사진들이 창작되고 보존되며, 연구되고 있다. 사진의 힘은 오늘, 아니 언제든지 가장 강력한 지렛대인 것이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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