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진영치 (가족 제공)

 [시사뉴스피플=진태유 논설위원] 4·19 민주혁명의 마중물 역할을 했던 진영치(80) 민주열사가 지난 10월27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유족 및 친지들과 많은 조문객들이 참석한 안장식을 치른 후,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국립3.15민주묘지에 안장됐다.

기억하기조차 가슴이 서늘한 4·19 민주혁명은 마산 3·15의거를 시발점으로 해서 전국적으로 진행된 시위였다. 3·15부정선거의 무효와 재선거를 요구하며 시위에 참여한 김주열 학생이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왼쪽 눈에 박힌 채 시체로 발견되자 전국적으로 격화된 혁명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장기집권을 위한 무단정치와 부정선거는 그 당시 깊은 침묵 속에 빠져있던 시민의식을 깨웠다. 학생들이 중심이 된 성난 불길은 무장한 경찰의 진압과 맞섰다.

1960년 진영치 민주열사는 경남대학교(당시 해인대학) 학도호국단 학생운영위원장이었다. 지금의 총학생회장 격이다. 그는 3·15의거가 정점에 이를 때쯤 경남대 학생 200명을 이끌고 이승만 자유당정권의 폭정과 부정부패·부정선거를 비판하며 투사의 한 몸을 던졌다.

멸치어장업을 하던 부친 고(故) 진홍선씨의 8남3녀의 2남으로 출생하여 유복하고 화목한 집안 출신인 진영치 민주열사는 3·15 제1차 마산의거 초기 때는 감정에 치우치기보다 신중하게 사태를 관망하며 이승만 정권이 이성을 찾기를 기다렸다.

그가 본격적으로 민주화 투사의 길을 들어선 계기는 1960년 4월11일 마산도립병원에서 김주열 학생의 참혹한 시신을 직접 목도한 후 불의에 대한 분노였다.

처참한 김주열의 시신과 민주와 정의를 할퀴고 지나가는 잔인한 시대의 아픔은 진영치 민주열사의 영혼을 일깨웠다. 그의 젊은 혈기는 정의감에 휘둘러 치열한 고뇌의 불길이 되어 직접 행동에 나서게 했다.

그는 투쟁에 대한 결단이 서자 뜻있는 학생들을 규합하여 거리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시국이 어수선한 까닭에 이승만 정권의 경찰들은 사복으로 위장한 채 학내를 감시하고 있었다.

마침내 4월13일 오전, 사복경찰들을 따돌리고 학생간부들이 솔선수범하여 교문을 나섰다. 끝없이 출렁이는 갈대의 바다처럼 등교하는 200여명의 학생들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세상은 무거운 잠을 털고 일어서는 듯하지만 오히려 진영치 민주열사는 죽음을 향해 잠을 재촉하는 투사로 변모했다. 그 당시 진압경찰은 언제라도 발포명령이 떨어질 기세였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형제가 있으니 자기 하나 없어도 괜찮지 않겠느냐는 유서를 남기고 허름한 바지와 점퍼를 입고 시위대의 선봉에 섰다.

역사의 어둠을 헤쳐 나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경찰은 시위주동자인 진영치 민주열사를 겨냥한 사냥이 시작되었다. 그는 사복 경찰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도망갔다가 또 절망적인 투쟁을 반복하며 몽유병 환자처럼 거리를 돌아다니며 정의를 외쳤다.

무섭도록 고독하고 괴로웠던 수배기간 중에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다. 다음 날 4월27일, 마산지역 계엄사령관인 김희덕 소장이 지역안정을 위해 학생 리더인 진영치 민주열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당시 일부지역에선 폭동이 빈번했고 치안은 극도로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진영치 민주열사는 이 혼란기를 틈탄 정치 선동꾼과 지역깡패들, 불순분자들에게 현혹된 시민들을 설득해야만 했다. 그는 경남 중부지역을 돌아다니며 설득방송을 했다. 이승만 독재가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회복되고 있으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시민운동을 했다.

이승만 자유당정권 붕괴 후 허정 과도정부를 거쳐 국회를 주도한 민주당은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통과시켜 장면 내각을 성립하였다. 그 이후 1961년 5·16 쿠데타로 박정희 군사정권이 등장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4월 혁명의 결과로 등장한 민주당 정부를 전복시키고, 억압적인 군부 통치와 산업화와 ‘개발독재’를 추진하였다.

진영치 민주열사는 박정희 공화당 정권에서도 핍박과 박해, 차별을 받았다. 군 입대에 즈음해서 간부후보생에 지원했다. 그러나 간부후보시험의 필기시험과 체력시험에 우수한 성적임에도 불구하고 불합격했다.

4·19 민주혁명의 시위주동자의 그의 이력은 박정희 정권에서도 블랙리스트에 올라 부당한 차별을 받기도 한 것이다. 그는 공직생활을 원했지만 계속되는 “시위주동자” 딱지로 말미암아 거절되기 일쑤였다. 박정희 정권에서 있었던 무수히 많은 시위가 행여 그와 관련이 있지는 않은지 공안기관은 알게 모르게 감시가 있었다고 한다.

그의 시위주동자라는 악령은 역설적으로 전두환정권에서 풀렸다. 신원조회에서 시국 관련자의 블랙리스트가 말소된 것이다. 마침내 2007년 노무현 정부는 제47주년 4·19혁명 기념일을 맞아 4·19혁명에 주도적 역할을 한 공로를 인정하여 건국포장을 진영치 민주열사에게 수여했다.

그러나 그가 일상 생활전선에서 겪은 고초는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 때 젊은 시절의 정의감은 속세의 생활인으로 거세되면서 오히려 가정의 경제적 빈곤의 악순환을 가져왔다.

말년에는 죽음과 허무의 냄새를 풍기며 자신이 혁명투쟁에 참여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고 한다. 자신의 자녀들이 부득이 사회참여를 하게 되면 선두에 서지 말고 적당히 중간에 서기를 당부했다고 한다. 그것은 그의 굴곡 많은 인생사에서 나온 솔직하고 인간적인 회한의 한 단면이다.

4·19 민주혁명은 “젊은 날의 그의 초상” 그 자체일 것이다. 1960년대 자신의 젊은 인생은 역사의 비애를 뛰어넘은 뜨거운 가슴이 폭포처럼 퍼부었던 시기였다.

미완의 혁명가였던 진영치 민주열사는 이제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고 미완으로 남아있는 4·19정신은 그 후세가 넘겨받을 때이다.

유족으로는 배우자 신소자 씨, 장녀 경혜 씨, 장남 태광 씨, 차남 기건 씨가 있다. NP

 

 

 

저작권자 © 시사뉴스피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