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탁을 두드리는 소리에 마음의 리듬을 맞추다

겨울의 사찰은 쓸쓸했다. 모든 생명이 숨을 죽이고 절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청명하게 들여다보는 듯 했다. 그 곳에서는 마치 얼음물이라도 마시는 듯 마음이 차가워지면서 현실을 명료하게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그 안에서 자신의 생을 보내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해가 바뀌고 사람이 바뀌고 풍경이 변하는 우리들의 일상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임보연 기자/ 사진 양호운 기자

겨울의 한 가운데에서 새해를 맞았다. 살아감에 대하여 스님의 지혜를 빌어보고자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 미처 뒤를 돌아다볼 여유도 없었다. 현재에 충실하고자 살아가다보면 어느새 과거는 무의미해지고 미처 미래의 삶에 대해 고민할 시간  조차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가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졌다. 몇 번이나 모래시계를 뒤집어도 잘 살아간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 어리석은 우리들은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인연

바람이 유난히도 차갑던 날 아침,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봉선사로 향했다.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절의 모습이 아름다운 곳으로. 절은 꽤 컸고 그 절에 머무르는 스님은 40여명이나 된다고 했다. 하지만 스님의 모습을 찾기란 좀처럼 쉽지가 않다. 그곳에서 만난 혜만(慧滿)스님. 그 분에게 잠시 여쭤보았다. 그리고 그 분에게 들어본 우리들 삶의 자세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전해보고자 한다.
스님 말씀에 따르면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하는 고민들의 대부분이 자기의 신변에 대한 것들이라고 한다. 현실에 집착이 삶의 고통으로 이어진다는 말씀이다. 스님이 생각하는 불교는‘자기로부터의 벗어남’이라고 하더라. 하지만 그것에 결코 쉬운 일은 아니리라. 삶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일 수도 있다고 했다. 사람들은 늙고 병들어가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많은 노력들을 쏟고 있다. 생명연장에 대한 꿈을 이루기 위한 과학기술의 노력이 인간의 욕망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때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살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죽는 것 역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화가 사람 사이의 인연에 대한 것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인연이라는 것에 대하여 분석해보았다. 스님은 씨앗을 의미하는 것이‘인’이며 그 씨앗을 발아시키는 것이‘연’이라는 글자라고 했다. 스님과 기자와의 인연 역시 아직은 씨앗일 테지만 한 번의 만남이 두 번으로 이어지고 만남이 계속 거듭되는 것으로 삶의 한 부분을 채워나가는 것이리라. 기자는 스님의 이야기에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해본다. 사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관계를 맺어나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무상함

사찰의 일정이라는 것이 새벽 4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학림의 스님들은 7시부터 수업을 시작하고 선방 스님들은 8시간씩 정진을 한다고 하신다. 절을 찾는 신도들이 가끔 물어온다고 한다. 왜 절에 스님들이 안 보이느냐고 말이다. 실은 기자도 가끔 절을 찾을 때마다 궁금하였던 것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스님들은 저마다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절의 어딘가에서 끊임없는 수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네들이 수행을 통하여 얻은 깨달음을 우리는 또 전해 들으며 삶의 밀도를 높여가고 있는 것이리라.
사실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에 대하여 두 손을 들어 반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속세와 떨어져 절이라는 공간에서 보내는 인생에서 시간의 흘러감은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 스님은 그저 무덤덤하게 바라보고 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감을 그리고 한 해가 가고 또 새해가 오는 것을 무덤덤한 눈길로 바라본다고 한다. 인생에 대하여 집착을 하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욕심이 생겨나는 것인가 보다. 스님은 한 말씀 하신다.“인생의 무상함을 안다면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세상은 그저 한낱 꿈과 같이 무상한 것이다. 집착을 버리고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좀 더 자유로워 질 수 있을 것이다.”

행복

요즘 내가 집착하고 있는 단어가 있다. 바로‘행복’이라는 달콤한 두 글자이다. 그럼 집착을 버린다면 모두 행복해질 수 있을까.“사람들은 뭔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괴로운 것이다. 그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면 진정으로 행복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욕망과 자본주의라는 구조 안에서 행복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불교라는 것은 버림의 미학을 가지고 있다. 버림의 미학. 뭔가 솔깃해지는 말이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주먹을 꽉 쥐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으나 손을 쫙 펼치면 세상을 가질 수 있다고 말이다. 움켜쥐려고 하면 할수록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행복이고 놓아버리는 순간 어느새 내 손바닥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이 또 행복이라는 놈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혜만 스님은 삶의 주인공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사실 인간은 유한적인 존재이지 않은가.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의 흐름은 당연한 일이다. 인연이 모였다 흩어지는 과정에서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삶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씀을 하신다. 알 것 같다가도 모르겠는 이야기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그 의미가 전해진다.
불교에서 수행은 고통에 버텨내는 것이다. 고통을 택한다는 것이 때로는 어리석어 보일 수 있으나 그 안에서 더 큰 깨달음을 얻어간다면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자본주의라는 경제원리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계산적인 논리를 펼치고 말았다. 살짝 부끄러워지지만 잃어버리는 것이 있다면 얻는 것도 있는 것이 조금은 더 반가운 속세의 사람이니 용서를 구한다. 마지막으로 스님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마음에 남는다. 이 세상에 날아다니는 짐승 중에 매라는 놈은 하늘에서 정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조류란다. 바람 속에서 날개를 정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리는 날아가기 위해서 쉼 없이 날개를 파닥거려야 한다. 때문에 못보고 지나치는 일들이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람을 거슬러 하늘에 정지할 수 있는 매는 오리가 보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을 볼 수 있다.

마음의 얼음을 깨다

스님과의 이야기를 끝내고 혜문(慧門)스님과 이른 점심을 하기 위해 절 밖으로 나섰다. 가는 길에 겨울의 찬 바람에 얼어붙은 연못을 지났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연못의 가운데 한 부분은 얼지 않았으며 물웅덩이에 오리가 두 마리 유유자적하고 있다. 스님이 그 모습을 보시더니 오리가 있는 부분만 얼지 않은 것이 신기하지 않느냐고 물어 오신다. 한 번은 오리들을 지켜보니 밤새도록 발을 저어 물이 얼지 않게 하더란다. 그래서 자신들을 헤치는 무리로부터 떨어져 보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거의 도착할 때 즈음하여 연꽃 밭을 보았다. 꽃은 다 떨어지고 갈색으로 변하고 흔적만이 밭 위에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스님의 말씀이 연꽃이 죽은 것은 아니란다. 날이 풀리면 어느새 다시 살아나 아름다운 연꽃을 피워낸다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심란하다. 가만히 그것들을 들여다보며 앞으로 피우게 될 연꽃의 모습을 상상해본다.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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