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는 영웅을 원한다

우리들은 모두 마음속에 하나의 영웅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 같다. 어린 시절에는 만화 영화 속의 주인공을 자신의 우상으로 삼아 철없던 나이를 버텨내고, 십대가 되어서는 스스로 영웅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을 치며, 이십대의 어느 날 문득 영웅은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글퍼하기도 한다. 삼십대가 되어 인생을 조금 알아가기 시작하면서 어쩌면 영웅은 우리가 만들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들을 하기도 한다.


오늘날의 사회는 영웅의 존재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영웅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는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황우석 박사가 국민적인 영웅으로 추앙되다시피 하였으며 월드컵을 앞둔 지금 사람들은 축구선수 박지성에게 열광하고 있다.

영웅은 때로는 뜨고 때로는 진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국민적인 영웅을 꼽으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황우석 박사의 이름을 거론했을 것이다. 그의 업적이 비록 마음에 와 닿지는 않더라도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그는 이미 국민들에게는 영웅적인 존재로 추앙되고 있었다. 물론 언론에서 영웅을 만들기 위한 노력과 황우석 박사의 언론플레이가 잘 맞물려져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결국 정확한 원인과 결론에 대한 정리는 할 수 없지만 많은 국민들이 황우석의 영웅 스토리에서 한 발 물러서서 조금은 객관적인 시각으로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지금 황우석의 영웅스토리가 지면서 어떤 새로운 영웅의 스토리가 시작되고 있는가. 사실 기자가 기사를 준비하는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뜨는 영웅의 대표주자는 박지성 선수였다. 물론 6월의 월드컵 열기가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그의 영웅스토리는 더없이 견고하게 구성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는 한다. 하지만 의외의 복병의 등장하여 며칠 각종 신문의 탑을 장식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 황우석 박사의 몰락 이후 새로운 영웅의 등장에 목말랐던 것일까. 언론이나 국민들에게 새로운 영웅의 등장이 필요했던 것이라고 보는 이들도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 우리의 눈앞에 나타난 차세대 영웅은 바로 하인즈 워드라는 청년이다. 제40회 슈퍼볼 MVP인 한국계 풋볼 스타 하인즈 워드에게 쏟아지는 관심은 가히 열풍이라 해도 좋을 정도이다. 대부분의신문에서 워드 선수의 사진을 1면에 싣는가 하면 방송에서 역시 앞다투어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특집물을 제작하기도 했다. 사실 우리가 언제부터 미국풋볼에 관심을 가졌는가 생각해보자. 아마도 하인스 워드가 MVP를 타면서부터일 것이다. 한국계 풋볼스타라, 하지만 사실 우리나라 국민 중의 몇 퍼센트나 미국의 풋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겠는가. 그저 MVP선수가 한국계라는 사실만으로도 미식축구가 우리의 관심사로 떠오른 것이며 졸지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물론 그의 미식축구선수로서의 자질과 성공, 주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그의 성품 등은 본받을만하고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한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사람들은 처음부터 그가 어떤 종목의 선수였던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인 어머니를 둔 혼혈인 미식 축구선수가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공한 선수로 거듭난 아름다운 스토리에 사람들은 감동하고 그를 또 하나의 영웅 신화로 만들려는 물밑 작업 중에 있는 것이다.

▲ 최근 피츠버그의 우승으로 끝난 슈퍼볼에서 워드가 MVP에 뽑히자 한국은 이 새로운 스포츠스타를 끌어안았다
이에 대해 워싱턴포스트는 최근 피츠버그의 우승으로 끝난 슈퍼볼에서 워드가 MVP에 뽑히자 한국은 이 새로운 스포츠스타를 끌어안았다는 로이터 통신의 보도를 게재했다고 전했다. 한국의 각종 매체들이 서울에서 태어난 한국계 운동선수의 사진을 일제히 1면에 실었다고 소개하면서 말이다. 방송에서 역시 터치다운을 성공하는 장면을 보여주며 위대한 한국계 미식축구선수 워드라고 소개하기에 바빴다.
어떤 뛰어난 결과물을 보여주었을 때 비로소 혼혈인 축구선수였던 워드가 한국계 미식축구선수라는 묘한 뉘앙스의 마로 탈바꿈 할 수 있었던 것은 씁쓸한 감정을 쉽게 지울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모습에 열광하는 대한민국의 국민들보다는 황우석 박사의 영웅신화가 무너질 것을 두려워하여 진실을 외면하는 모습이 아닌 우리들의 영웅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전락할지라도 진실을 규명하여 밝히는 용기 있는 국민들의 모습이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기자만의 생각일까?

한국인 히딩크, 그리고 스포츠 영웅들

이제 6월이면 뜨겁게 끓어오를 2006독일 월드컵을 생각하면 당연히 따라오는 지난 2002년의 영광의 한일월드컵이 생각날 것이다. 우리나라의 4강 신화 이룩과 그 신화의 주역이었던 23인의 태극전사들은 물론 거스 히딩크라는 2002년 가장 막강했던 우리들의 영웅이 떠오른다. 심지어는 우리나라 대표팀이 4강에 들면 우리 국민들이 히딩크를 귀화시킬지도 모른다는 우스갯소리가 떠돌기도 했었다. 당시에 히딩크의 포즈 하나하나는 모두 광고의 시안으로 채택되었으며 그의 고국인 네덜란드 역시 우리의 관심사 안으로 들어왔었다. 그의 가족들 또한 방송매체에서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명언으로 떠돌며 인터넷 사이트에 유포되곤 하였다.

▲ 뜨는 영웅의 대표주자는 박지성 선수. 6월의 월드컵 열기가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그의 영웅스토리는 더없이 견고하게 구성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히딩크는 2001년 두바이 4개국 대회 중에는“외국 강팀에 열등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 어떤 팀과도 해 볼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다.”라는 말을 남겼으며, 그 해 5월 말 컨페드컵에서 프랑스에 0-5로 대패한 뒤에는“창피하지 않다. 좋은 경험이었다. 한국 선수들은 투쟁심을 길러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오히려 적응력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경험이라고 이야기하더니, 월드컵 개막을 한 달 앞둔 시점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는“세계를 놀라게 할 수 있다.”는 한 마디로 그의 영웅적인 면모를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16강에 오른 후에 이탈리아전을 앞둔 상태에서는 수많은 패러디를 낳으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그 유명한“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우리는 아직도 영웅에 목말라 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영웅을 찾고 있다.

조금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98년 IMF로 침체되어 있던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던 또 하나의 영웅이 있었다. 당시 21세였던 박세리 선수가 LPGA에서 우승을 하면서 IMF의 시름에 빠져있던 국민들에게 기쁨을 선사했던 것이다. 추아시리퐁과 4라운드까지 동타였던 박세리 선수는 18홀 연장 라운드에서도 승부를 가리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급기야 양말을 벗고 물 속에 발을 담근 채 퍼팅을 하며 결국에는 승리를 맛보게 했다. 그 승리의 기쁨은 단순히 박세리 그녀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모든 국민들의 기쁨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또 한명의 영웅의 탄생이 예감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골프경기가 있는 날이면 사람들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박세리의 경기를 지켜보았고 신문의 1면은 그녀의 얼굴로 장식되는 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박세리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 어느 정도 남아있는 것인가. 생각해보면 영웅은 참으로 외로운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붐을 타고 떠올랐다 어느 순간 사라져버리고 마는 슬픈 존재들이다. 코리안 특급 박찬호가 신문의 1면에서 사리지는 과정을 지며보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시대가 어려우면 영웅은 더욱 위대해진다

한때 젊은이들 사이에서 박정희 전대통령의 인기가 치솟은 적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 시기에 이슈로 떠오른 인물이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박정희 시대를 살았던 어르신들은 젊은이들을 보며 혀를 차기도 했었다. 독재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벌였던 수많은 학생운동과 피 흘리며 사라져간 젊은이들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리던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젊은이들의 박정희 신드롬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에 대해 열망하던 불안한 젊은 세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카리스마와 리더십을 영웅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민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강력한 리더십을 원하게 된다.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자신들을 강하게 이끌어 줄 영웅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2004년 탄핵정부에서 이순신을 주제로 한‘칼의 노래’를 읽는다고 했던 노무현 대통령을 시작으로 사회 안에서는 물론 문화계 안에서 역시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을 불러내고 있었다. 박근혜 대표 역시 정치적 이념, 진보와 보수의 스펙트럼에 관계없이 이순신의 이미지에 자신들의 이미지를 투영시키기에 바빴다.

이순신은 강력한 리더십의 상징이었다. 그래서일까? 역사적으로 국가 경영에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불려나오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아도 조선왕조에서는 왕권을 강화하고 충성 이데올로기를 정립하기 위해 이순신 전서를 펴냈고, 이순신 후손들을 등용했던 것이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에는 단재 신재호가‘이순신전’을 펴냈으며 식민지 시기에는 소설가 이광수가‘이순신’을 쓰기도 하지 않았던가. 이어 박정희 정권에 들어서면서 이순신 담론은 본격적으로 떠올랐다. 문학평론가 장은수는 이순신 신드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기도 했다.“우리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거명되는 두 명의 영웅은 세종대왕과 이순신이다. 세종대왕이 평화 시의 영웅이라면 이순신은 난세의 영웅이다. 이순신 신드롬은 결국 시대가 난세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영웅이 떠오르고 다시 지는 반복의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과정이 썩 유쾌하지 않았음은 당연한 일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영웅이 없는 사회가 불행한 것이 아니라 영웅을 필요로 하는 사회가 불행한 것이라고 말이다.
영웅을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는 우리가 되지 않기를 국민 모두가 스스로 하나의 위대한 존재들임에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가기를 꿈꿔본다.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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