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행 신년특집

멀고도 혹독한 자연환경 때문에 문명오염이 지구상에서 가장 적은 곳, 모든 과학 분야에 대한 천연의 실험장 구실을 하고 있는 미지의 세계 남극! 춥지만 그 땅이 있기에 아마도 지구의 미래는 숨통이 트인다.

영웅시대
남극과 북극은 밑에 지각이 있고 없고의 차이로 나뉘어 진다. 다시 말해서 자전축에 위치 한다는 공통점은 있으나 남극은 땅위에 얼음 층이 형성 된 거고 북극은 빙하전체가 바다위에 형성 된 것이다. 때문에 대륙이라는 말을 쓰는 남극에 반해 북극은 대륙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만년설로 축적된 남극의 빙하는 지구의 생성과 변화와 관련된 중요한 연구 자료를 제공하는"냉동캡슐"로 지칭된다. 또한 환경오염에 따른 지구의 기후변화와 이에 따른 생태계 변화가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는 현대로선 이러한 변화상황을 파악하고 예측하는데 있어서 남극권은 매우 중요한 연구 대상지역으로 인식 된지 오래다. 이러한 과학적 측면에서 본 중요성 외에도 크릴로 대표되는 남빙양 수산자원, 석유와 천연가스, 금속광물 같은 그 주변 해역이 지닌 막대한 부존자원으로 인해 세계 각국의 남극에 대한 관심은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우리나라는1988년 2월17일 서남극의 킹조지섬에 과학기지인 세종기지를 건설하여 본격적인 남극연구를 해오고 있다. 지난 수 천년동안 남극반도에 미친 과거의 기후변동 및 오염물질 거동에 관한 과학정보와 기술을 통해 우리의 미래에 일어날 자연재해(가뭄, 홍수, 질병)에 대비할 수 있는 경제정책수립과 더불어 이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극소화하는데 있다. 이는 향후 교토 기후변화협약 대비를 위한 개도국의 과학적 대응논리를 개발함으로서 당면한 대체에너지개발 분담금을 최소화하는데 있다. 남극 탐험사 에서는 인간이 남극대륙에 처음 상륙한 1895년부터 1922년까지를 영웅시대라고 부른다. 한 마디로 열악한 조건 속에서 목숨을 걸고 극지를 탐험했다는 뜻이다. 남극에 대해 지식도 없는 상태에서 해도나 지도는 물론 무전기나 위치측정 장치 같은 현대장비 하나도 없이 오로지 남극을 탐험하겠다는 숭고한 의지와 위대한 사명감하나로 탐험했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망원경과 경도와 위도 측정 장치, 그리고 나무로 만든 고래나 물개 잡이 배가 전부였다. 지금은 남극이 많이 알려지고 탐험 장비와 운송수단이 워낙 발달했기 때문에 조난 사고가 줄었지만 스웨덴 남극탐험대의 조난-생존-조우-2년 월동, 벨기에 남극탐험대의 남극해에서 월동-죽음-생존, 섀클튼 탐험대의 탐험선침몰-해빙-상륙-구조-집단생존, 다글라스 모슨의 위대한 단독생존처럼 그들이 남긴 위대한 탐험이야기는 끝이 없다.

▲ 얼음에서 바다로 뛰어내리는 아델리펭귄
해양생물 자원 및 생태계
남극해는 매우 독특한 해양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극저온의 남극해에서 무기물로부터 유기물을 생산해내는 1차생산자로서의 식물플랑크톤과, 이를 섭식한 후 상위 포식자들에게 영양을 전달하는 동물플랑크톤의 역할은 먹이사슬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남극해의 먹이사슬에 있어 가장 중심은 크릴이다. 동물플랑크톤의 일종인 크릴은 식물플랑크톤을 섭취해, 그 영양을 고래, 해표, 어류, 오징어류, 펭귄을 비롯한 바다새들에게 먹이감으로 전달된다. 이와 같이 다양한 포식자들이 단 한 종류의 먹이감에 매달리는 현상은 지구상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이다. 크릴은 남극해 전체에 고루 분포하지만, 해류의 흐름에 따라 와류가 형성되는 해역에서 특히 높은 밀도로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정 해역에서 무려 200만톤이 넘는 크릴이 관측된 바도 있다. 한편, 크릴을 먹이로 삼는 포식자 가운데 가장 대표되는 것은 오징어류로서, 크릴과 상위 포식자들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고리라 할 수 있다. 크릴을 먹은 오징어류는 고래, 해표, 바다새 등의 먹이가 되는데, 이들이 일년에 먹는 오징어의 양은 무려 3,000만톤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들어서는 사람들도 크릴의 산업화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크릴은 비타민과 단백질이 풍부하여 가축과 어류의 사료로도 활용되며, 인간의 영양식품으로도 개발되고 있다. 남극에는 포유류와 해표류, 그리고 황제펭귄(Emperor) 등 고유한 생물들이 살고 있다. 펭귄은 학자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보통 지상에 18종이 있는 것으로 보고돼 있다. 남극의 연평균온도는 -23℃로, 나무는 전혀 없고 꽃피는 식물은 두 종류만이 있을 따름이다.
남극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문명세계에서 들어간 방문객들이다. 최근 우리 연구결과에 따르면, 세종기지 주변의 대기온도는 지난 27년간 약1℃ 상승하였으며, 앞바다의 해안 빙벽은 1956년이래 지속적으로 후퇴되어 2001년4월에 이르러서는 폭1.2km인 마리안 소만(Marian)의 길이가 3km에서 4km로 확장되었다. 또 이러한 양상은 과거(6m/년)에 비해 최근(81m/년)에 이르러 급가속 되는 양상을 띠어 이것이 과연 지구의 온난화 여파인지 아니면 지역적인 온난화 현상인지를 규명하기 위해 다각적인 연계 분석을 실시하고 있다. 한편, 남극 성층권에 오존구멍이 형성되는 봄철(9-10월) 세종기지 상공의 오존량은 10년마다 약 14%씩 감소하며, 지표에 도달하는 자외선 량은 반대로 약 23%씩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따른 연안환경의 피해와 적응양상을 파악하기 위해 연안 해수특성 분석과 함께 식물플랑크톤 생물량 조사가 매일 연속적으로 실시되고 있다.

▲ 산위에서 내려다본 마리안소만의 해안빙벽과 크레바스
남극의 자연과 인간
남극대륙은 남극조약에서 남위 60도 남쪽으로 정의되었다. 호주에 이은 거대한 지구상의 제7대륙으로, 평균두께 2,160m의 두꺼운 얼음으로 눌려있으며 연평균기온이 영하 23℃로 지상에서 가장 낮은 곳이다. 극지는 기온이 다 낮으나 남극이 북극보다 더 낮다. 인류의 대부분이 모여 사는 문명세계의 연평균온도가 15℃라는 것을 생각할 때 남극이 얼마나 추운 곳인지 상상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남극대륙이라고 다 사람을 죽일 정도의 저온은 아니다. 여름동안 남극반도의 북쪽과 해안지방의 기온은 때론 영상으로 올라 비를 뿌리기도 한다. 반면 안쪽 내륙고원지대로 들어갈수록 기온은 낮아진다. 그 가운데서도 대륙안쪽 고원지대 있는 러시아 보스토크기지가 남극대륙에서도 기온이 낮은 곳으로 1983년 지상에서 인류가 관측한 최저기온인 영하 89.6℃가 측정되었다. 연평균기온이 영하 55.4℃인 이곳은 영하 30℃만 되어도 아주 따뜻한(?) 날씨라고 한다. 이곳은 눈과 얼음뿐이어서 얼음을 잘라 물을 만드는 일이 가장 큰 일과 중에 하나이다. 이정도의 기온과 기압이 낮은 곳에선 산소부족으로 강한 심폐기능을 가진 사람만이 생활할 수 있다. 영하 60℃ 이하의 온도에서는 사람이 만든 모든 섬유가 견디지 못하고 면이나 동물의 털과 가죽 같은 자연섬유만이 견딘다. 북극해는 약간이라도 녹아 햇빛을 흡수하는 반면 남극은 98%가 두꺼운 얼음으로 덮여 햇빛을 반사해버려 남극의 기온이 더 낮은 이유라고 설명된다. 지구육지면적의 9% 정도를 점하는 남극대륙에는 지질학적 현상, 예컨대 활화산, 온천, 지진, 지하자원 등이 다 있다. 남극에 활화산과 온천이 존재함에 놀라겠지만 남극이 빙설로 덮여있다 뿐, 다른 대륙과 같은 땅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예컨대 우리나라 남극기지인 세종기지에서 남서쪽으로 120㎞정도 떨어진 디셉션섬은 활화산섬으로 1960년대말에 폭발해 당시 그 섬에 있던 칠레와 영국의 연구기지는 화산재로 모두 덮였었다. 남극에 있으면서도 얼음과 눈이 없는 그 섬에선 지금도 산꼭대기 분화구에서 100℃에 가까운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고 금세기 초 고래잡이의 기지이던 그 곳은 지금 관광선이 빼놓지 않고 드나드는 관광코스가 되었다. 흔히 남극과 북극은 년 중 6개월이 밤, 6개월이 낮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남극점의 경우이다. 즉 남위 66.5도보다 남쪽으로 가면 하루 24 시간이 낮이거나 밤인 날이 생긴다. 이런 현상은 남쪽으로 갈수록 심해진다. 예를 들면 남위 70부근에서는 낮과 밤이 각각 두 달이며 78도 부근에서는 각각 네 달이다. 우리나라 세종기지는 남위 62도 13분, 즉 남위 66.5도보다 북쪽에 있어 하루 24시간이 낮이거나 밤인 날은 없다. 단지 6월 하순은 해가 아침 10 시에 떠 오후 2시에 지고 반면 12월 하순에는 밤 11시에 지고 새벽 3시에 밝아져 새벽에도 조명 없이도 책을 볼 수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보스토크기지는 두께 3,800 미터의 얼음위에 지어진 기지이다. 그 아래에는 평균깊이 125미터 이상의 경기도만한 크기의 호수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현재 호수 위 100 미터 정도까지 시굴한 연구팀은 호수물을 오염시키지 않고 채수할 방법이 없어 얼음 시굴을 중지했다. 약 3,700 미터까지 시굴한 얼음에서는 지금부터 42만 년 전 까지 4번의 큰 기후변화를 읽을 수 있다. 보스토크호수로 이름 지어진 이 호수가 생긴 원인도 연구과제의 하나이다. 남극이 1819년 발견된 이래 처음에는 물개잡이배가 찾아왔고 다음에는 고래잡이배가 찾아왔다. 부드러운 물개 가죽은 중국인에게 최고의 인기였으므로 서양인들은 그것으로 중국의 차와 도자기로 바꾸었다. 물개가 고갈되자 코끼리해표와 고래를 잡아 기름을 짜기 시작했다. 무게가 3톤이 넘는 코끼리해표 한 마리에서 세 드럼 반(700 리터)의 기름이 나왔고 기름이 많은 펭귄은 워낙 불에 잘 타 한때 등잔이나 해표지방을 끓이는 연료로 쓰였다고 한다.
북극에는 흔히 에스키모라고 부르는 이누이트 족이란 원주민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유하고 독특한 문화와 역사를 만들고 살아가고 있는 반면 남극에는 원주민이 없다. 또한 북극해에 있는 섬들은 모두 주인이 있으나 남극은 그렇지 않다. 남극에 대한 영유권은 영국 등 7개국이 주장했으나 남극조약은 이를 인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영유권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막아놓았다. 남극의 발견과 탐험에 지대한 업적이 있는 미국과 러시아역시 영유권을 주장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다른 나라의 주장도 인정하지 않는다. 현재 남극조약에 가입한 국가는 44개국이다. 이중 이사국에 해당하는 남극조약협의당사국(ATCP)은 우리나라를 포함해 27 개국으로 남극은 이 이사국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 세종기지를 배경으로 빙산옆을 달리는 고무보트
▲ 헬기에서 내려다본 세종기지
빙하로 덮인 남극 연구의 당위성
남극을 과학측면에서 본 중요성은 여러 가지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문명세계의 영향으로 야기된 지구환경변화가 지상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곳이 바로 남극대륙이라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오존층의 파괴이다. 1930년대에 프레온가스를 발명했을 때 사람들이 100 년 지나봐야 오존은 불과 2% 정도가 파괴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그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 지금은 중위도지방에서까지 오존층이 파괴되고 있다. 잘 알다시피 1984년 영국의 핼리기지에서 오존층파괴가 발견되었다. 최근 남극반도에 발달된 빙붕과 빙하가 녹아내리고 있는 것이 인공위성과 항공사진으로 밝혀지고 있다. 소위 지구온난화현상이 드디어 남극에 나타났다고 말 할 수 있다. 그것이 가속화 되면 결과적으로 해수면상승으로 인해 인류는 큰 재앙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는게 학자들의 중론이다. 남극대륙에는 엄청난 양의 생물자원과 막대한 양의 석유를 포함한 지하자원이 부존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환경이 가혹하고 인간의 접근이 어려워 약간의 생물자원 외에는 거의 버려두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현재의 국제사회분위기가 남극의 지하자원의 개발에는 부정적이다. 그만큼 남극의 자연환경 보호가 중요하고 시급하기 때문이다. 그런 국제사회 분위기에 따라 우리나라의 남극연구도 남극환경을 알고 보호하려는 분야의 조사와 연구에 치중하고 있다. 현재 일부 개발되고 있는 생물자원에 반해 지하자원의 경제성도 없지만 그 보다는 국제사회 분위기가 시험개발조차도 절대 용인하지 않는 상태다. 그만큼 남극의 환경보호가 우선하고 절대적이라는 반증이다. 그러나 남극 환경보호의정서에서 지하자원개발을 50년간 금지시켰다는 것이 반드시 우리에게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보다 먼저 조사를 마친 다른 나라들의 개발을 막았다는 점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남극연구에 늦게 진출한 우리에게 조사할 시간적 여유를 주기 때문이다. 실제 상당수의 나라들이 남극일대의 해양지구물리조사를 거의 끝낸 상태나 다름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조사할 시간이 더 주어졌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물론 지하자원의 개발을 제한한 50년이라는 한시조치가 전원의 합의로 앞당겨 질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럴 가망이 희박하다. 그 기간 동안 우리는 연구와 조사에 박차를 가해 자료와 실력을 축적해야 한다. 남극연구는 한 마디로 남극대륙과 남빙양에 관한 모든 분야의 순수자연과학과 응용자연과학이 복합된 종합자연과학이다. 더구나 미래를 지향하고 연구한다는 점에서 남극연구는 글자그대로 미래지향종합과학인 것이다. 그 대가는 다음세기가 시작되면 온 인류가 미래에 이용이 가능한 부존자원의 종류와 그 양의 파악이라는 눈에 보이는 가시효과로 꼭 돌아올 것이다. NP
<자료협조:한국해양연구원 극지연구본부. 남극세종과학기지>


학자들이 주장하는 남극의 학설
최근의 지질학적 결과로는 기원전 4000년까지도 남극의 일부가 얼음에 덮여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남극대륙이 현재보다 3200킬로미터 북방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뷔름 빙기인 기원전 9600년경 지구상의 대륙들이 급격히 미끄러지면서 남극 대륙이 현재의 위치로 이동한 것이며 그때부터 얼음이 녹으면서 기온이 상승했고 특히 기원전 6000년경에는 고온기로서 남극 대륙의 대부분이 온대 지역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인정한다고 해도 학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이 있다. 그 당시에 남극까지 항해할 수 있는 배와 항해술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페니키아 인들이 활동하던 시대까지 남극이 얼음으로 덮여 있지 않았다는 가설은 많은 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들이 활동하던 기원전 2000년경의 남극은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에 설사 페니키아 인들이 남극에 도착하였더라도 흰눈과 얼음밖에 볼 수 없었으며 그들이 지도를 그릴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기원전 4000년경에 남극까지 먼 항해를 할 수 있었던 문명이 지구상의 어디엔가 존재했어야 하는데, 그당시 지구의 4대 문명인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 중국에서 과연 남극까지 갈 수 있는 배와 항해술이 발달했을까 라는 의문에 빠진다. 헌데 바로 피리 레이의 지도(1513년 터키의 왕국에서 제작된 정체불명의 세계지도)한 장이 많은 학자들을 고민에 빠지게 했다. 이 지도에 대한 설명을 뒷받침할 수 있는 흔적이 이집트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991년 9월 미국과 이집트의 고고학자들은 최소한 5000년 전에 제작된 이집트 파라오의 함대가 나일 강에서 13킬로미터 떨어진 내륙 아비도스에서 발견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총 12척의 목선으로 길이가 15~22m나 되었다. 바이킹 40여명과 말 2필을 싣고 전세계를 항해하며 중세유럽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바이킹들의 롱십(long ship:긴 배)크기가 길이24m폭이5m였음을 감안해보자. 아메리카 대륙의 첫 발견자가 콜럼버스가 아니라 바이킹이었다게 공인된 지금, 아비도스에서 발견된 그정도 크기의 배라면 바이킹들처럼 전세계의 어떤 지역이라도 항해가 가능했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이 배들은 기원전 2700~2600년경에 이집트를 통치한 제2왕조의 카세켐위 파라오의 장례신전에서 발굴된 것으로 제1왕조의 제르 파라오(기원전 3100년경)의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남극이 얼음으로 뒤덮여 있지 않았다는 기원전 4000년과는 적어도 1000년의 차이가 난다. 이 간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고학자들은 매우 명쾌한 대답을 준비하고 있다. 아비도스의 파라오 함대는 먼 바다의 악천후에서도 견딜 수 있도록 고도의 설계기술로 건조되었으며 이것은 고대 이집트의 배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항해기술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또, 나일 강 유역에서 발견된 벽화에는 유선형의 대형 배가 물 위를 달리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파라오 함대보다 1500년이나 더 오래된 6100~6200년 전의 것이다. 나일 강 유역에서는 경이로울 정도로 오래전부터 농업이 발달했다는 증거가 남아 있다. 그 시기는 북반구에서 마지막 빙하 시대가 끝날 무렵에 해당한다. 이때에 이미 이집트인들은 현대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항해술을 갖고 남극까지 항해하였으며 자신들이 본 지역을 지도로 그렸는데 그것이 알렉산더대왕 시대까지 전승되었다는 추론이다. 물론 페니키아인들이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오래된, 기원전 4000~5000년경에 발달된 항해술로 남극을 탐험했을지도 모른다는 설도 있다. 그 당시 그들에겐 충분한 기술과 능력이 있었으며 그것이 현대까지 보존되거나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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