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국 조의내 기자
지난 2003년에 개봉한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했던 명대사가 떠오른다.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냐?”

실제로 성폭력 사건들에 관한 기사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연일 보도되고 있다. 정신지체 장애인 여성을 납치·감금하고 성폭행한 파렴치범, 부하직원의 딸을 성폭행해 입건됐다가 피해자측과 합의로 풀려난 뒤 다시 그 딸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40대 제조업체 사장, 11살짜리 남자아이 성추행 살해등등. 갑자기 늘어난 듯한 성폭력 사건 보도들로 시민들은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지난 2월 17일 용산에서 초등생 성폭행 후 살해유기된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작년에 5살짜리 어린아이를 성추행하여 형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상습범이었다. 열린우리당은 지난 3월 8일을 ‘성추행·성폭력 추방의 날’로 선포하면서 성추행 사건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최연희 의원의 사퇴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같은 날 뉴스에서는 강간당할 위험에 저항하던 중국 조선족 유학생이 하숙방에서 살해당했다. 가해자는 강간치상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뒤 집행유해로 풀려난 상태에서 또 다시 강간범죄를 시도한 상습범이었다.

현재 정치권과 각 부처에서는 성폭력 근절을 위한 각종 대책들을 발표하고 있다. 교정교육 확대, 성범죄자 신상공개제도 확대, 공소시효 소멸, 어린이성폭력 가해자 가중처벌, 전자팔찌법 제정, 야간통행금지 신설, 심지어 화학적 거세까지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가혹한 처벌만이 능사는 아니다. 새로운 법과 제도를 만들기에 앞서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성폭력범죄 신고율은 약 6% 정도로 상당히 낮은 수치다. 그나마도 이 중 45% 정도만 기소가 되는데, 재판부에서 모두 유죄판결을 받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위에서 거론되는 제도들은 아주 소수의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94%의 피해자들은 고소조차 하지 않는 것일까. 주위에서는 “뭔가 당할만 했겠지”, “먼저 유혹한건 아니냐”는 말들로 피해자를 괴롭힌다. 용기를 내어 고소를 하더라도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피해자의 권리인 진술녹화나 신뢰관계인의 동석제도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폭행과 협박이 있었는지, 심지어 피해자의 이전의 성력은 어떤지 등을 집요하게 묻는 인권침해까지 발생한다. 피해자들은 ‘이럴 줄 알았으면 절대로 고소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현실을 변화시키려면 수사와 재판과정의 전면적인 개혁이 먼저 필요하다. 피해자들이 인권을 존중받으며 수사를 받고 수사과정이 오픈되어 피해자들의 권리가 지켜질때 성폭력 고소율도 높아지고 범죄율도 줄어들 것이다. 지금처럼 성폭력 피해자가 오히려 비난받고, 보복과 재범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사회에서는 성폭력 피해사실을 말하는 것조차 꺼려지는 것이다. 성폭력 문제에 대한 대처에는 일시적인 관심이 아닌 사회전반적인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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