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인 문구가 파라오의 저주로 비약돼

감정적인 지배를 받았던 이집트 신들의 평범한 삶

투탕카멘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호화로운 유물 때문이기도 하지만, 발굴에 관계된 사람들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소위‘파라오의 저주’라는 전설 때문이었다. 이집트 파라오의 관에는 일반적으로‘왕의 영원한 안식을 방해하는 자에게 벌이 내릴 것이다’라는 저주의 글이 쓰여 있다. 이것이 이른바 파라오의 저주로 비약된 것이다.‘파라오의 저주’그 진실을 찾아 파헤쳐보자.

머리가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했던 이집트인들

19세기 말 유럽에는 이집트 열풍이 일었다. 그들은 이집트를 여행하거나 유물을 소유하는 것을 대단한 자랑으로 여겼다. 도처에 유물이 널려 있었고 이집트 정부는 발굴권을 부여하고 반분하는 정책을 폈다. 끊임없이 나타나는 유물을 이집트 정부는 수상히 여겼다. 박물관장은 이 문제에 대해 흥미를 느끼고 유물 수집가로 위장해 전문 도굴꾼을 만났다. 그 도굴꾼은 기소면제를 받는 대신 왕가의 계곡 비밀장소를 공개했다. 투탕카멘왕의 무덤이 발견된 것은 1922년 10월 26일 영국의 카나본 경과 고고학자인 카터에 의한 것으로‘왕가의 계곡’에서 거의 완벽한 상태로 발견됐다. 왕가의 계곡은 피라미드를 더 이상 만들지 못하게 되자 계곡에 파라오의 무덤을 만들게 된 것으로 기원전 2000년~1000년 사이의 이집트의 파라오의 무덤이 있는 곳이었다. 투탕카멘의 이마에 이집트 상징물인 코브라와 독수리를 정교하게 빚어 놓았다. 이들이 가면을 미라 위에 안치하는 것은 어떤 사정으로 육체가 사라지게 되었을 경우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이집트인들은 머리가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투탕카멘의 미라가 공개되지 않았다면 파라오의 저주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라를 만들 때 심장은 미라 속에 남겨두고 내장은 따로 빼내 4개의 카노픽 단지에 보관했다. 투탕카멘의 탄생과 같은 시기에 그의 어머니는 사라졌다. 투탕카멘이 살해되었다는 가설은 연구진의 X선 촬영 결과였다. 당시 이집트의 왕위는 파라오의 딸들을 매개로 계승되었다. 즉 왕권을 물려받은 여성의 남편이 파라오가 되는 것이다. 파라오는 신이었기 때문에 일반 백성과 결혼할 수 없었다. 근친 결혼한 파라오는 왕자들 중 한 명이 왕위에 오르면 나머지 왕자들은 신분을 상실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권력 다툼은 없었다. 아버지 파라오는 외교에, 아들 파라오는 내정을 관할했다. 클레오파트라 7세가 자신의 동생과 결혼해 이집트를 공동으로 통치한 것도 같은 이유다.

‘파라오의 저주’실질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카나본경이 여러 차례 발굴을 하면서 결국 돌뚜껑을 발견했다. 그 안에 채리어트, 실제 크기와 똑같은 신상, 온통 금박을 입힌 소파와 금을 박아 넣은 왕자를 발견했다. 당시 새로운 발견은 상형문자와 점토판이었는데, 그 점토판에는“죽음은 그 날개로 파라오의 평안을 교란시키는 자를 모두 죽이리라”라고 쓰여 있었다. 카터는 이 점토판의 내용을 옮겨 적고 그 점토판을 숨겼다고 전해진다. 물론 후대에 이 구절이 정확하지 않다는 설들이 있었다. 어떤 이는 당시 발견되었다는 이 점토판의 문구가 파라오의 관에 일반적으로 써진“왕의 영원한 안식을 방해하는 자에게 벌이 내릴 것이다”라는 저주의 글이었다고 말한다. 놀라운 것은 실제로 발굴에 참여한 카나본경이 다음해 4월에 말라리아모기에 물린 후의 증세로 죽는다. 그리고 당시 이집트 카이로시가 정전되는 상황을 맞게 된다. 사람들은 이것이 신의 저주라고 말했다. 때문에‘파라오의 저주’라고 알려진 것이다. 당시 신빙성을 더하는 것이 영국의 카나본경의 집에 있는 개까지 죽었다고 하니 사람들은 파라오의 저주가 마치 진실인냥 믿게 된 것이다. 당시 죽은 사람은 카나본경만은 아니었다. 아서 메이스라는 미국 고고학자 역시 카나본경이 사망한 직후에 사망했고, 미국의 유명한 민간 금융업자의 아들인 조지 J.굴드도 무덤으로 안내된 다음에 다시 이튿날 고열로 죽음을 맞았다. 조엘 울이라는 영국의 실업가 역시 무덤을 견학한 후 귀국 도중에 고열로 사망했다.‘파라오의 저주’를 책으로 낸 필립 반덴버그는 투탕카멘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거나 연관이 없이 죽은 사람을 모두 정리해 두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많은 경우에 심신이 소모적인 상황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카터 자신도 우울증의 발작과 심신 소모에 시달리고 있었다. 저자는 고대 이집트의 승려가 효과를 수천 년이나 지속할 수 있는 유독물질이나 세균류를 알고 있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수많은 이들이 죽기는 했지만 정말로 파라오의 저주란 증거는 거의 없다. 죽은 사람의 대부분이 나이를 들어 죽은 경우와 우연을 제외하고 나면 별 신기한 케이스도 아니고 발굴에 관련되어 있는 약 1500명 이상의 사람 중에서 20명 남짓 죽은 것은 그다지 대단한 일이라고도 볼 수 없다. 카나본경이 죽을 때 전기가 나갔다고는 하지만 그 당시 전기 사정이 매우 안 좋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문의조차도 하지 않았다. 일부 사람들이 곰팡이에 의해 죽었을 가능성도 말하고 있고 특히 일부 곰팡이류의 아플라톡신을 말하고 있는 이들도 있지만 실질적인 가능성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죽은 이들은 대부분이 파라오의 저주 때문이 아닌 보통의 평범한 죽음을 맞이했다. 다만 파라오의 저주를 믿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저주를 받지 않을까 전전긍긍 하다가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어하고 결국엔 병에 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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