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깊고 넓게, 사람을 위한 예술을 해요”

홀로와 더불어 은은한 추억의 Ing

2006-11-24     신성아 기자
오랜 된 것이 항상 동시대의 감성에 뒤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희미하게 바랜 색채를 띠고 있지만, 그 안에 은은히 풍겨 나오는 그윽한 향기로 사람의 감성을 살포시 감싸오며 기분 좋은 느낌을 선사한다. 5년 만에 6집 나무’를 발표한 가수 권진원은 청아하고 결이 고운 목소리로 나직하게 읊으며, 여전히 듣는 사람의 귓가와 가슴에 편안하게 내려앉는다. 그리고 그녀의 노래는 오래된 나무처럼 사람들의 가슴에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싹을 틔워 또 다른 거대한 나무로 성장시켜준다.

해는 이미 모습을 감춘 지 오래인 11월의 어느 저녁, 가수 권진원을 만났다. 엷은 미소를 띠며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그녀의 목소리는 천성적으로 다정한 억양을 띠고 있어 마치 미풍처럼 가벼웠다. 그리고 이야기를 통해 권진원에 대해 한 겹 벗겨내니 그녀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는 것 같았다. 낯설고도 익숙한 만남 속에 수줍은 듯 띄엄띄엄 대화하는 사이, 어느새 우리의 대화는 무르익어가고, 또 그녀에게 동화되기 시작하면서 시간은 한없이 유쾌하게 흘러갔다.

마흔 살의 청아한 목소리로 삶을 위로하다

그동안 <살다보면>, <Happy Birthday To You>, <노란 풍선> 등의 히트곡을 남긴 가수 권진원은 85년 강변가요제에서 <지난여름 밤의 이야기>로 은상을 받은 뒤, 88년부터 91년까지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로 활동했다. 2001년 5집 이후, 5년의 긴긴 시간 끝에 발표한 권진원의 여섯 번째 새 앨범 ‘나무’는 사랑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가 더욱 더 우아하고 고급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눈물을 짜내는 격한 슬픔은 없지만, 대신에 삭여냄과 참아냄이 주는 그윽함과 함께 절제된 호소력이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다독여주는 듯하다. 정규앨범으로는 6번째 앨범인 <나무>는 모두 11곡으로 그 중 자작곡 10곡은 모두 피아노로 만들었으며, 피아노, 콘트라베이스, 바이올린, 첼로를 앞세워 재즈와 클래식, 샹송의 익숙한 리듬을 자연스럽게 가요에 접목시켰다. 권진원이 편곡해 피아노 반주에만 맞춰 부른 첫 번째 곡‘아리랑’은 그녀의 해석이 실린 곡으로 여전히 청초하고 유려한 비음이 매혹의 깊이를 더한다. 두 번째 곡 ‘봄이 가네’는 왈츠풍의 발랄함과 경쾌함이 느껴지며, 권진원의 이미지를 하나로 대변하는 노래 ‘피아노’는 그녀가 처음 피아노를 배우던 아홉 살 시절의 이야기를 형상화해 추억을 회상한다. 또, 서정성에 평화와 반전 메시지를 담은 ‘어느 소년 병사의 죽음’은 하림의 하모니카 연주가 아주 인상적이다. 특히, 그녀를 지금까지 아껴주고 기다려준 팬들을 위한 히든 트랙 ‘아직도 내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어’는 <서른 즈음에>의 작곡가 강승원이 선물한 곡으로 일상의 서정을 보사노바 리듬에 포근하게 실었다.

#. She's real

스치듯 찾아와서 떠나지 않고 늘 든든하게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있고, 소란피우며 요란하게 다가 왔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훌쩍 떠나가는 사람이 있다. 두드러지는 존재, 으뜸인 존재가 될 필요는 없다. 오래 보아도 물리지 않는 느낌, 늘 친근하고 스스럼없는 상대. 5년 만에 돌아온 가수 권진원이 그런 사람이 아닐까 한다. “5년 동안 여행을 다니며 책도 많이 읽었어요. 개인적으로 박완서 선생님의 책을 참 좋아하는데, 가장 최근에는「그 남자네 집」을 읽었죠. 많은 분들은 제가 그저 쉰 걸로만 아시는데, 현재 경희대 대학원에 다니면서 음악공부를 꾸준히 하고 있었고, 또 같은 대학 포스트모던학과 겸임교수직도 맡고 있어요. 항상 음악 안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던 거죠. 대학원에서 새롭고 다양한 음악을 배우는데, 정말 공부할 게 너무 많아요. 처음에는 대학원 진학에 대한 그 선택이 조금은 두려웠는데, 지금은 잘 선택했다고 생각해요. 대학원에서 리얼 뮤직, 즉 연주와 함께 노래를 하는 법을 배우고, 컴퓨터 음악도 배우는데, 편곡작업에 도움이 많이 되고 있어요. 몰랐던 음악세계를 알아갈 수 있다는 게 정말 좋아요.”

#. Kwoon JinWon Tree

타이틀곡 ‘나무’는 피아노의 영롱한 울림에 바이올린의 절제된 숨소리와 콘트라베이스의 속삭임이 어우러져 클래식과 재즈를 더했음에도 더욱 투명하고 순수한 느낌이다. 이 노래의 특징은 정확한 박자를 요하는 메트로놈 없이 녹음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5집의 음악적 방향은 기타 대신 피아노로서 울림이 큰 피아노 앞에 클래식하게 그녀가 앉아 있다. “비록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제 노래들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들려질지 너무 궁금해요. 다른 음악인에 비해 느린 걸음으로 온 20년인 것 같아요. 예전에는 적어도 2년에 한 번씩을 음반을 내야 한다는 룰이 있었는데, 어느 날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좀 여유 있게 제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 인생의 새로운 2장이 펼쳐진다는 느낌으로 곡을 쓰고, 가다듬고, 리코딩과 편곡을 하다 보니 그 전에 비해 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요. 타이틀곡과 앨범명 모두 <나무>인데, 나무처럼 순수하고 고요하게 오랜 시간과 많은 이야기를 감싸 안을 수 있는 것들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과거에는 리드미컬하고 소프트한 노래들이 많은 반면, 이번에는 음악적 색깔이 조금 달라졌는데, 그 대표 격이 나무였어요. 그래서 타이틀곡을 나무로 정한 거 에요.”

#. She's music

권진원의 음악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비록 단순한 악기와 리듬에 짜여 져 있지만 좀처럼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그 단순한 리듬의 포스는 너무도 강력해 저절로 흥얼거리게 만드는 맹독성의 중독 증세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창작이다 보니 경험과 간접 만남을 통해 음악에 대한 많은 영감을 얻고 있어요. 조용한 밤 시간대에 정리를 하거나, 우리 집에서 15분 정도 걸으면 한강 변이 나오는데,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산책을 해요. 그러다 노랫말이 떠오르기도 하죠. 80년대의 음악활동은 지금까지도 저에게 값지고 의미 있는 시간이에요. 늘 제가 강조하는데, 힘겨운 세상에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예술을 해야겠다는 거 에요. 저는 대중음악도 하나의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쉬운 길이 될지 어려운 길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 음악은 예술성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 하에 사람을 위한 노래라고 정의하고 싶네요.”

# Change

음악이 이성보다는 감성을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매체인 탓에, 그리고 대량 복제가 가능해지게 된 이후 자본주의라는 구조 안에서 철저히 산업화되고 규격화된 제작과 유통 시스템을 통해 효용을 가질 수 있게 된 탓에, 음악의 진보는 그 자극의 강도를 더하는 쪽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 사실이다. “아직 제 피부에 와 닿진 않지만, 가요계와 음반시장이 급속도로 바뀌고 있다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저는 음악인이고 창작하는 사람으로서 좋은 음악은 어떻게든 사람들의 마음에 전달된다는 단순한 진리를 따르려고 해요. 그래서 요즘의 흐름에 유염하지 않고 권진원답게 가고 싶은 음악을 할 생각이에요. 그리고 복잡한 음악사운드에 지쳐 있는 분들이라면 자유롭고 은은하게 흘러들어가는 제 음악을 더 반기지 않으실까요?”

#. I will

오는 12월 29일 대학로 동덕여대예술센터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게 될 권진원은 너무 소비적이고 자극적인 국내 대중음악 현실을 벗어나 장미꽃의 깊은 훈향 같은 진한 감동의 무대를 계획하고 있다. 그리하여 마음 한편이 점점 허전해가는 한 해의 마지막 길목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음악을 찾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6집은 지난 5년 동안 음악적으로 좀 더 정돈을 했고, 담담한 것 같지만 감정의 변화가 짙게 깔린 섬세한 변화의 앨범이에요. 제가 음악을 처음 시작했던 그때와 같을 순 없겠지만, 음악에 대한 첫 희열은 그대로 간직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음악은 늘 제게 새로움 속에 또 다른 형태의 감흥으로 다가오죠. 마지막으로, 제가 사인할 때 항상 ‘맑고 깊고 넓게’라는 말을 함께 적는데, 슬프고 힘겨운 이 세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맑고 깊고 넓게 살아가는 음악인이 될 게요.” 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