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경쇠 소리에/ 다시 햇차를 따라 난간에 기대니/ 묵은 비 겨우 개고 가볍게 바람 쐬어/ 빈 발의 낮기운 수정처럼 차갑네.’(한용운의 중상사 난간에서 차 마시기 中) 한 잔의 차는 고요와 안정을 가져다준다. 차를 마시는 것은 곧 마음을 닦는 일이다. 그래서 당나라 조주선사는‘끽다거’(喫茶去, 차나 한 잔 마시고 가게)라는 화두를 던지지 않았던가.
예전에는 다도(茶道)라고 하면 참 멀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내적인 문화와 함께 성장해 온 다도문화가 웰빙 바람을 타고 크게 대중화되고 있다. 아울러 차가 성인병 예방에 좋다는 연구결과가 알려지면서 차를 음용하는 인구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일반적으로 다도라고 하면 단순히 녹차 위주의 차를 마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다도에는 철학과 사상, 예술 등 우리의 전통문화를 나타낼 수 있는 정신이 촉촉히 스며 있다. 그리고 생활 속에서 한 잔의 차를 즐겨 마셨던 선조들의 전통이 살아나는 느낌이다.
자연을 닮은 그곳에는 소우주가 있다
“도(道) 즉 성(性)이요, 도 즉 심(心)이라 했다. 도는 성품이요, 도는 마음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다도는 성품이고, 마음이라 할 수 있다. 마음으로부터 분리된 말과 생각은 마음 자체가 아니고 형식이 정해지면 성품은 떠나버린다. 차의 근본과 나의 성품은 오로지 이심전심으로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서울시 강남구 청담동에 자리한‘명진회’는 우리의 다도문화와 행다예법(行茶禮法)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의 김리언 회장은 차 문화를 30년간 연구하면서 한국 전통차의 오롯한 맥 계승과 새로운 대중화를 위해 누구보다 애 써온 1등 공신이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김 회장의 차실. 방안 가득 다기(茶器)와 차향기가 오감을 자극한다. 예사롭지 않은 목가구들은 지인들이 보내준 것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차실공간은 투박한 도자기들과 어우러져 한층 더 격조 있고 고풍스러워 보였다. 온 우주와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은 소중한 존재다. 굳었던 대지의 가슴에 불을 놓고, 북으로 향하는 바람처럼, 그 어느 곳 하나 빠트리지 않고 골고루 내리쬐는 햇살처럼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 차의 살림살이 역시 마찬가지다. 간장종지보다 더 작은 찻그릇 속에서 우리는 온 우주를 담아내는 자신의 살림살이를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 같은 살림살이를 살아왔고, 바로 한 잔의 차에 정성을 다하는 김리언 회장이다.“차의 성품은 검소하며, 차는 바른 행실을 하는 검덕한 사람에게 어울리는 마실 거리에요. 차와 차를 마시는 사람이 모두 같은 검소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여기서 검소하다는 것은 무조건 아끼는 궁색함이 아니라, 규모 있는 살림살이를 말하고요.”그녀의 인품과 격을 말해주듯, 공간 여기 저기 묻어나는 소박하고 예스러운 다구(茶具)들과 장식품들은 마치 자연우주가 이곳에 다 포함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조금은 정리가 되지 않은 것 같지만 천체의 운행처럼 질서 정연한 명상적인 공간배치가 인상적이다.“차실은 사치스러워서는 안 됩니다. 예로부터 문인차 생활은 고급스러우면서 세련됨이 있었고, 사찰이나 서민들의 차 생활은 소박했어요. 더욱이 차실은 다담(茶談)만 해야 합니다.”단아하고 섬세함이 엿보이는 김 회장은 차분하면서 단호한 어조로 차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차를 대하는 마음은 정성스러워야 한다
차는 많이 마셔보고 많이 만들어야 차의 진미(眞味)를 알 수 있다. 수행을 아무리 오래하고 별스럽게 했더라도 대오(大悟)하지 않고는 선(禪)을 말할 수 없고, 차를 아무리 오래 만들고 마셨다 하더라고 완벽한 차를 만들어보지 않고는 차를 말로 해서는 안 된다. 완벽한 차란 사실 불가능한지도 모른다. 그래서 차와 선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다선일미(茶禪一味)라고 차를 제조하고 마시는 것 자체가 참 선이지요. 아마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운치 있고 격조 있는 수행방식이 바로 차를 만들고 마시는 행위가 아닐런지요.”김 회장의 차 이야기는 은은한 차향이 흘러 청량한 목소리와 함께 절묘한 운치를 빚어내고 있었다. 자신에게 있어 차는 신앙이고 종교와 같다는 그녀는 차를 대접할 때마다 작은 움직임에도 내면에 자리한 차에 대한 애정과 많은 관심을 엿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겉으로는 소탈함이 보이지만 속내는 엄하고 섬세함이 함께 공존하는 품위와 절제된 모습으로 “자연에 대해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꼭 한다고 한다. 또한 차는 귀한 사람에게만 준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차를 왜 하느냐는 질문에 김 회장은 한 마디로 자연에 대한 감사라며 자기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춤으로써 배워서 행하는 정말 아름다운 일이라고 답했다. 다도란 다와 더불어 심신을 수련하여 다도의 멋 속에 인간의 도리를 추구하는 다에 관한 전반적인 수련의 길인데 반하여, 다례란 다를 마시는 데 있어 이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예절과 심신수련을 말함이다. 김 회장은 30년 전부터 차를 배워왔지만, 여전히 지금도 다도와 다례 등 차에 관한 모든 것을 공부하고 있다.“다도는 의식부터 가르쳐요. 먼저 격식을 배우게 하는 것이죠. 다도는 우리 인간들의 정신적으로 사심 없는 맑고 깨끗한 마음씨를 기르고, 더 나아가서는 봉사와 일하는 실천력을 길러줍니다. 이를 통해 너와 나 할 것 없이 다 같은 마음으로 한없는 기쁨 속에 깨달음을 얻지요.”그리고 그녀는 예법은 모두 사물에 대한 공경으로, 명진회에서 배운 학생들은 그들의 집에 대부분 차실을 만들어 놓고 있다고 했다. 김 회장 곁 제자 한 분에게 역시 다도를 배우는 이유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자 스승에 대한 예를 갖춰 먼저 김 회장에게 답을 해도 좋은 지 허락을 구했다. 선비들의 군자다도와 같은 모습에 질문을 하는 사람을 오히려 부끄럽게 만들었다.“사업과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생활이 너무 무미건조했는데, 차를 우려내면서 마음을 다스리게 되어 참 좋습니다.”라고 응했다. 그리고는“커피마니아처럼 차는 배울수록 점점 더 빠져 들어가 거친 사회에서 내 자신이 유화되거나 인성을 순화하는 작용을 해요. 모든 것에 대해 긍정적인 사고와 아름다움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느낍니다.”라고 덧붙였다.
차의 맛은 색깔과 맛, 그리고 향기에
잘 우려진 차를 찻잔에 따르는 것은 새로운 만남이다. 낼 때마다 미묘한 색과 향, 그리고 맛의 변화가 일어나는 차 한 잔. 그 차 한 잔을 따르는 것도 그리 쉽지 않다. 그리고 차를 마실 때‘차를 감상한다’는 표현을 흔히 쓴다. 사람은 다섯 감각기관으로 사물을 느끼고 헤아리며 판단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혀로 맛보고, 코로 냄새를 맡으며 피부로 감지하는 것이다. 그 어느 기관도 가벼이 여길 수 없기에 모두 다 존귀하게 대접받아야 한다. 차는 세 감각기관에 의해 평가받는데, 우려냈을 때의 향기, 차의 색깔, 차의 맛이다. 즉, 차의 삼요소는 차가 지닌 세 가지 특성인 향(香), 색(色), 미(味)를 말하며, 차의 존재는 이 삼요소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향기는 가장 위에 놓인다. 차를 마시되 찻잎을 하나하나 땄을 손길을 생각하고, 그것을 덖고 비비는 이의 손뜨거움과 끈질긴 참을성을 생각한다는 김리언 회장.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 자는 가마 메는 자의 고달픔을 알지 못하고 타는 즐거움만 아는 자와 같다는 것이다.“저는 차를 우릴 때 반드시 차 주전자 뚜껑을 반쯤 열고 번져오는 차향을 맡아요. 찻잔에 코를 대고는 심호흡을 하듯이 향을 맡는데, 그 향을 허기 들린 듯 맡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죠.”차 주전자에 차를 넣고, 맥박이 뛰는 속도로 하나, 둘, 셋... 이렇게 아홉을 세고 또 다시 아홉을 헤아리면 애벌차가 우러난다. 그런데 그 첫 번째 아홉을 헤아렸을 때 뚜껑을 살짝 열어보면 향이 스며 나오는데, 이 향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그윽하고 신비로운 향이라고 김 회장은 이야기한다. 다신(茶神)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갓난아기를 따스한 물에 멱을 감긴 다음 살갗에 코를 댔을 때 나는 배냇향 같은 이 향은 우주를 생성시킨 은근하고 그윽한 기운이다. 이렇게 차향은 영혼을 움직이게 하고 날아가게 하며, 귀신까지도 움직이게 하는 신령스러운 힘을 가졌다. 그녀가 따르는 차의 배릿한 향으로 몸과 마음이 저려진다. 초의 스님을 알고 나니 세상이 훨씬 향기롭더라
「대망」이라는 책을 읽은 뒤, 차 생활에 입문하게 됐다는 김 회장은 고 김미희 여사의 가르침 아래 정신적인 스승은 초의선사(艸衣禪師)라고 한다.“다성(茶聖)으로 불리는 초의선사는 차를 마시는 사람 수에 따라 혼자서 마시면 신비의 경지에 이르다고 해서 신(神), 두 사람이 마시면 더 이상 좋을 수 없대서 승( ), 서너 사람이면 그냥 좋아 마신다고 핍(乏), 8명 이상이 되면 평범한 음료수를 베푸는 것에 불과하대서 시(施)라고 했지요.”초의 스님은 살아 계실 당시‘호남 칠고붕(湖南七高朋)’으로 추앙받은 뛰어난 선승이었다. 스님은 시와 글씨, 그림에 모두 능한 삼절(三絶)로서 당대의 지식인들과 폭넓게 교유했을 뿐만 아니라, 차(茶)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 차를 손수 따고 만들었으며,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을 일깨우려고 했다. 가히 한국 차의 중시조라고 이를 만한 큰스님이다. 추사 김정희는 초의스님과 동갑으로 평생 마음을 열고 살았고, 정약용은 아버지처럼 받들고 사귀었다고 한다. 초의 스님과 김정희, 다산의 둘째 아들 정학유는 동갑이면서 벗이었다. 현재 해남에는 초의선사를 기리는 축제행사가 해마다 열린다. 초의선사의 다도정신을 기리는 이‘초의문화제’는 1992년부터 초의선사의 입적일인 음력 8월 2일에 그가 40년간 거했던 대둔산 일지암에 모여 헌차제례를 올려오던 것을 더욱 내실 있게 확대하여 불교 문화재가 산재한 대둔사 일지암 등에서 거행되고 있다. 주요행사로는 초의상시상과 행다시연, 초청다회, 다기전시, 공연이 어우러져 초의문화제가 거행되는데, 명진회 김리언 회장은 지난 1999년‘제8회 초의상’수상자이기도 하다. 그녀는“초의스님의 <동다선>과 <다신전>을 깊이 읽으면 누구든지 차 만드는 장인이 될 수 있지요. 중국 <다경>말고, 제다법에 대한 책은 따로 전해오지 않는데, 차에 대해서 아는 체하는 사람이면 다 초의스님의 책을 읽은 사람들이에요”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초의스님의 정신을 알고 난 지금, 세상이 훨씬 아름답고 향기로우며, 넓어 보이고,‘세상은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로구나’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단다. 그녀가 초의스님 속으로 들어가고, 초의스님이 그녀 속으로 들어와 있음이다.푸른 찻잎을 닮는 참다운 삶
우리는 일본차인 녹차를 한국 전통차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한국 전통차와 일본의 녹차는 차나무가 다르고 만드는 방법이나 향, 색깔, 맛, 효능이 전혀 다르다. 녹차는 일본의 풍토에서 입맛과 체질에 맞도록 쪄서 만든 차로 데쳐서 말린 것이어서 우려내면 녹색이 나 녹차라고 말하며, 약간 역겨운 듯 한 풋 비린내가 난다. 반면에 한국 전통차는 선조들이 우리 풍토와 체질에 맞게 덖어서 만든 차여서 우려내면 말 그대로 다갈색이 나고, 맑은 생각의 샘을 파놓는 구수한 숭늉 내가 난다. 김 회장은“한국 전통차의 우수성을 지켜내 세계적인 문화상품으로 만들어야 합니다.”라고 강조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전통차의 본질을 잘 알고, 우리 차의 뛰어남과 차 문화를 시급히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우리역사에서 차는 어둠 속 깊은 창고에 갇혀 있었다. 먼지를 털어내고 빛을 쪼여주기 위해서는 과학적 세밀함과 규명작업도 서서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참된 자와 참된 물을 찾는 사람들. 그것이 바로 차를 마시는 사람들의 이름입니다. 참된 차와 참된 물을 지키는 일은 자연과 환경을 지키는 일이고요.”푸른 찻잎을 닮는 삶, 차의 향기를 나누듯이 삶의 향기를 나눌 줄 아는 삶. 바로 명진회 김리언 회장의 즐거운 차 생활의 시작이다. 그리고 차 생활을 한다는 것은 차의 지식을 늘리는 것이 아닌, 그녀의 삶의 깊이를 더하는 것이다. NP
차의 음용법 찻잔을 왼손바닥에 올려놓고 오른손으로 잡고 마신다. 차의 색과 향기, 맛을 느끼며 마시되 3∼4번에 나누어 마신다. 찻잔에 전해지는 차의 온기와 도자기의 질감도 음미한다. 차를 입안에 넣고 머금었다가 삼킨다. 그래야만 차의 다섯 가지 맛을 고루 맛보고, 차의 풍취도 느낄 수 있다. 차의 여향은 차 맛의 으뜸이므로, 여향을 놓치지 않도록 한다. 녹빛 찻물이 모세혈관까지 퍼진다는 생각을 하며 마시면 심리적 평온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차를 차갑게 마시는 것보다 따뜻하게 마시는 것이 좋고, 그때그때 우려 마시는 것이 바람직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