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은 훨훨, 소리를 타고 비상만 남았다

인생의 깊이와 노련함으로 무르익은 거장의 힘

2007-02-27     신성아 기자
평생 동안 한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보통의 일이 아닐 것이다. 마음은 한결 같기를 원하지만 때로는 질풍노도의 인생 격변기를 넘기면서 무너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한다. 또, 그러다보면 어느덧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장인의 위치에 올라서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임권택 감독, 이름 석 자만으로도 그 존재감이 크게 느껴지는 한국 영화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그는 칠순이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잠시도 영화를 손에 놓지 않는, 오로지 한 길만을 걷는 묵직한 장인임에 틀림없다.


임권택 감독을 말할 때, 참 많은 수식어가 뒤따르게 된다. 한국의 대표적인 영화감독, 거장의 반열에 올라선 세계적 감독, 가장 한국적인 영화를 만드는 감독, 한국영화계의 거목 등 말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수식어들이 임권택이라는 거대한 아우라를 이야기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는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우리에게 결코 낯설지 않으며,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자신이 가진 것들에 관해 공유하고 즐기기를 원하는 가장 한국적인 감독이다. 그리고 마침내 100번째 영화 <천년학> 촬영을 마친 임권택 감독을 강남에 있는 영화사 키노2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올해가 일흔 둘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결코 녹록치 않은 거장의 힘이 느껴졌다.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임 감독은 말한다. “자, 무엇이 궁금해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물어보세요.” 일관된 템포로 말하는 느긋함을 지닌 위대한 감독의 내면으로 안내한다.

[Scene No.1] 임권택 감독은 부담스럽다

세월이 변하는 만큼 사람도 바뀐다고들 한다. 임권택 감독에게도 세월의 흐름은 좀 더 여유 있게 관망하는 자세로의 변화를 가져왔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 특히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어진다는 것은 떨림과 동시에 말 못할 감정들이 생성된다고 말하는 노장. 그런데 이번 100번째 영화 <천년학>에 대해서는 예전과 사뭇 다른 반응을 보인다. 2004년 <하류인생> 이후, 영화 <천년학>이 오는 4월 개봉될 예정이다. 하지만 영화가 완성되기도 전에 이미 각종 미디어에서는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라는 타이틀을 시작으로 해외 영화제 진출의 기대 등 몹시도 그를 부담스럽게 하고 있는 요소들이 여기저기 자리하고 있다. 지난 99번째 영화 <하류인생>을 끝냈을 때, 노장에게 곧바로 쏟아진 질문은 하나같이 100번째 영화는 언제쯤, 무엇을 주제로 찍을 것인지에 대해서였다. 그래서 단지 100이라는 숫자일 뿐인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주위의 시선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100번째라는 숫자에 사람들이 너무 열을 올리고 있어요. 그냥 지나가는 과정인데 말이죠. 그만큼 관심과 기대가 크다는 면에서는 좋은 일이겠지만, 그런 관심들 때문에 정신적으로 두렵고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에요.” 그러나 100편을 찍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임 감독 자신은 굉장히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고 이야기한다. “제작이 진행되는 동안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촬영은 평탄해서 다행이었죠. 애초에 영화 속에 그리려고 했던 것들이 생각했던 것 보다 많이 나와 줘서 백 번째 영화를 정말 보람 있게 끝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Scene No.2] 천년의 사랑, 그리고 그리움

2006년 12월 16일, 충남 논산시에서 진행된 영화 <천년학>의 마지막 촬영은 임권택 감독의 “OK, 땡이다!”라는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 나옴과 동시에 뜨거운 감격과 환희의 순간으로 마무리 지었다. 이날 촬영된 마지막 장면은 군 복무 중인 동호(조재현)가 마음속에 두고 있는 배다른 누이 송화(오정해)를 생각하며 탄피로 반지를 만드는 모습이다. 그리고 이어 동호는 같은 부대로 들어온 고향 후배로부터 누이가 눈이 멀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당시 촬영을 끝낸 임 감독은 “영화가 나오기까지는 편집이나 녹음 등 아직 많은 것이 남아있으니 이제 시작이다”고 소감을 밝혔다.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주목하는 이번 영화 <천년학>은 소설가 이청준 작가의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삼은 영화로 영화 속 주인공들은 과거 <서편제>의 동일 인물이다. 그러나 <천년학>은 <서편제>와 <선학동 나그네>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 아니며, 어쩌면 사람들에게 익숙한 소재의 사랑이야기를 다시금 시작한다. <선학동 나그네>가 닿을 수 없는 그리움에 대한 깊은 한과 슬픔을 그려냈다면 영화 <천년학>은 종국에 서로에게 가 닿는 사랑의 깊은 감흥을 담아냈다. 또한 <서편제>가 소리로 승화된 한을 표현했던 반면에 <천년학>은 소리를 타고 한없이 날아오르는 남녀의 사랑과 그리움을 나타내고자 했다. “눈먼 소리꾼 소화역으로 오정해가 나오고 소리를 주제로 했다는 비슷한 이야기 구조 때문에 <서편제>의 속편 격으로 많이 아시는데, 영화를 보신 사람은 아마 <천년학>은 전혀 다른 내용의 영화라는 것을 느끼실 거에요.” 그렇다면 그가 100번째 영화를 이청준 작가의 작품을 선택한 것과 <선학동 나그네>를 <천년학>으로 영화제목을 변경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이청준 선생님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얕은 재주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삶의 진솔함이 자연스럽게 풍겨져 나와요. 특히 토양이 주는 정서, 어렸을 적 우리가 살고 자란 땅의 정서가 그대로 담겨 있어요. 솔직히 함께 작업했던 <축제>가 흥행은 못했지만, 제일 아끼는 작품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영화제목을 <천년학>이라고 바꾼 것은 학이 장수를 의미하는데, 여기에 천(千)자가 붙으면 영원하다는 뜻이 되죠. 사랑이라는 것이 세속적으로 보면 이뤄질 수도 있지만,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의 관계에 놓인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런 사랑의 한이 정신적으로 승화되어 가는 과정을 판소리로써 풀어나가는 영화가 바로 <천년학>이에요.”

[Scene No.3] 역시 국민감독, 그러나 개운하지 않다.

지난 해 한국영상자료원이 발표한 한국영화 100선 중 임권택 감독의 작품이 무려 9편이나 선정되었다. 한국영화 100선은 영상자료원 이사, 자료위원, 연구원 등 한국영화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1996년 이전 자료원이 필름을 보유한 작품 중 사료적 가치가 높고 사회문화적, 영화사적으로 의미 깊은 작품들로 선정했다. 이 100편 가운데 임권택 감독은 1980년 찍은<짝코>에서 81년 <만다라>, 82년 <안개마을>, 85년 <길소뜸>, 86년 <티켓>과 <씨받이>, 89년 <아제아제 바라아제>, 93년 <서편제>, 마지막으로 96년 <축제>까지 총 9편의 이름을 올렸다. 지금까지 99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곧 1편의 영화를 개봉 예정인 임 감독은 100편의 영화를 머릿속에 나열해 볼 때, 정작 제대로 찍은 영화는 30여 편 정도에 불과하다고 고백한다. 73년 영화 <잡초> 이전의 대부분 50여 편의 영화를 두고 스스로 흐트렁 망트렁 찍어낸 남작(濫作)의 저급한 영화라며 “초기에 50편은 마구잡이로 찍었어요. 개인적으로 100편이 제대로 맞는지 개운하지 않아요. 여기서 개운한 영화라는 것은 뜻이 정말 좋았던 영화를 두고 말해요”라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임 감독이 직접 펜으로 체크한 30여 편의 영화를 쭉 나열해보면, 62년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을 비롯하여 망부석, 증언, 울지 않으리, 왕십리, 깃발 없는 기수, 짝코, 만다라, 안개마을, 길소뜸 씨받이, 아다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장군의 아들, 개벽, 서편제, 태백산맥, 축제, 춘향뎐 취화선 등이 그것이다.

[Scene No.4] 시작은 미약, 나중은 창대

1936년 전남 장성에서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임권택 감독은 6.25 전쟁을 전후로 한 좌우이념 대립의 혼란기에 유년시절을 보냈다. 중학교 3학년을 중퇴하고 나서 무작정 부산을 거쳐 서울로 올라온 그는 영화판 일을 하면 밥은 굶지 않는다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그때부터 충무로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 시절에는 단지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영화 일을 시작하게 된 임 감독이었다. 처음 1955년 정창화 감독의 <장화홍련전>에서 영화제작부 일을 한 그는 이후 정창화 감독의 영화들에서 잔심부름과 소품조수, 조연출 등을 맡았다. 그러다 1962년 스물여섯 살 때, 전쟁영화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영화감독으로 데뷔하였다. 현재 임권택 감독의 이력은 화려하다. 그는 1981년 영화 <만다라>로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본선에 진출했으며, 86년 개봉한 임 감독의 영화 <씨받이>에 출연한 강수연은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그로부터 2002년, 천재화가 오원 장승업의 자유분방한 사랑이야기와 예술세계를 그린 영화 <취화선>으로 칸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감독으로 거듭났다. 더구나 1993년 프랑스 시네마테크에서 ‘임권택 주간’이 열린 다음부터 꾸준히 미국, 일본 독일 등지에서 감독전과 회고전이 열리고 있으며, 2005년 제55회 베를린 영화제에서 명예황금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영화 <천년학> 역시 칸국제영화제에 출품할 계획이다. 노장은 “꼭 상을 수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 영화를 계속 해외에 알리는 것이 가장 일차적인 목표에요. 개인적으로 작품상을 받는다면 당연히 좋죠. 왜냐하면 개인의 명예도 있겠지만, 더 많이 얻어지는 것이 있거든요. 나라의 위상도 높아지고, 세계적으로 국산 영화가 수출하는 데 엄청난 도움이 돼요.”

[Scene No.5] 농담을 건네는 거장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다”는 말처럼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우리나라 4계절과 곳곳에 숨어 있는 자연의 빼어난 절경을 잡아내며 진정한 한국의 미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더 공간적, 시간적 제약이 가해져 때로는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기도 한다. “매화마을을 배경으로 영화를 찍었어야 됐는데, 계절을 놓쳐 1년을 기다려서 작년 봄에 다시 촬영했어요. 다행히 매화꽃이 그 전 해보다 훨씬 만개해 흐드러지게 펴서 마음에 드는 장면을 담을 수 있었지만요. 명신 중의 하나이기도 해요.” <천년학>이 장기간 지방촬영이다 보니 현장에 부인이 많이 찾아오게 됐다는 임 감독은“제가 여자 스텝들한테 뜻밖의 인기가 있거든요. 감시가 아닐까요.”그리고 이어 “영화 작업을 하지 않고 집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아내가 그래요. 육신은 자리에 앉아 있고, 정신은 멀리 있다고요”하고 이를 보일 정도로 허허 웃었다. 이런 작은 농담을 건네는 노장의 모습에서 처음 가졌던 긴장감과 조심스러움은 어느 덧 사르르 녹아들었고, 또한 어릴 적 할아버지가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편안하고 다정했다. 아울러 소화 역을 맡은 오정해 배우가 병원에 입원한 사연에 대해 말하기를 “결혼을 하고 난 뒤 아줌마 티가 나더라. 20대에서 30대가지의 역할을 감당해야 했기 때문에 살을 빼서 영화에 맞는 캐릭터를 만들어야 했어요. 그래서 살을 너무 열심히 빼다 보니 결국에 병원에 입원하게 된 거에요. 눈물겨운 노력에 매우 감사할 따름이죠.” 그러면서“병원에 입원하는 것을 보니 걱정은 됐지만 마음속으로는 기뻤어요. 제가 원하는 모습이었거든요. 영화를 보시면 알겠지만 오정해 양이 없었으면 <천년학>은 소화해낼 수 없는 그런 영화이기 때문에 더 절실했죠.” 한편, 노장은 자신은 연기자들에게 거의 화를 내지 않고, 작업에 임할 때는 아첨을 잘 하는 사람인데, 한 번 화내는 것을 TV에 보여 진 뒤로 무서운 감독으로 각인되었다고 다소 억울해 했다.

[Scene No.6] 완벽이 아닌 완성을 지향하는 것

영화 <서편제>로 한국영화 최초로 서울 100만관객의 신화를 이뤄낸 임 감독은 영화 <천년학>의 흥행여부에 대해 묻자, 왠지 관객이 많이 들 것 같다고 예감했다. “이번 영화가 잘 될 것 같은 막연한 느낌이 와요. 영화를 찍다보면 귀신이 돋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그러면 영화가 꼭 잘되더라고요. 또, 배우나 스텝들을 보면서 그런 조짐이 보이기도 하고요.” 자신도 사람이기에 1000만이라는 흥행영화가 부러울 때가 있다는 그는 천만 관객이라는 높은 성과가 더 많이 나오길 바란다며 “흥행이 안 될 영화가 흥행이 되는 것은 오래전부터 그래왔어요. 하지만 그것도 환영해줘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다음 작품을 찍을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니까요.” 그는 매 작품마다 아쉬운 부분이 없을 만큼의 영화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항상 있다. 그러나 작품은 늘 아쉬운 점이 남기 마련인 것을 스스로 잘 알기에 100% 완벽한 작품이 아닌 100% 완성을 지향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한국 사람들의 삶을 영화로 계속 만들 거 에요. 더불어 한국 사람만이 갖는 개성, 문화적, 개성, 선대가 내려오는 전통, 그리고 예술 등을 영화에 오롯이 담는 감독으로 보여 지기를 원하고요.”
어느 누구에게나 변화라는 것은 존재한다. 한 해 한 해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노장 임권택 감독에게는 단순한 숫자적 의미를 뛰어넘는 부분이다. 사람의 나이를 먹어가듯이 영화 또한 나이를 먹고, 나이를 삼킨 영화는 또 다른 모습으로의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끝없는 자기와의 싸움, 영화를 통해 자신내면의 세계를 표출하고, 대중과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는 것이 장인으로 향하는 영화감독의 업일 게다. “<서편제>에서는 소리를 빠르게 하고 소리의 감흥을 느낄 수 있게끔 소리와 영상을 조화롭게 해 감흥을 극대화 시키고자 노력한 작품이에요. 그런데 <천년학>은 더 근원적인 우리의 삶,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대끼는 여러 감정들을 판소리와 맞닥뜨리면서 감흥을 더 크게 늘렸어요.” 자신만의 색깔을 작품에 입히며 새로운 것에 도전을 시도하기도 하는 임 감독은 더도 덜도 말고 딱 지금만큼 영화에 관한 사랑과 열정을 고스란히 담아 시간이 지나도 빛바래지 않는 곳에 간직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의 영화 행진은 멈추지 않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