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어의 10년, 잃어버린 10년인가
영국을 구하고, 영국인을 잃다
2007-06-29 장인혜 기자
여론에 밀리고, 당내의 사임 압력에 밀려서 퇴임하는 토니 블레어 영국 전 총리였지만 그의 10년에 대한 영국 내부의 평가는 공정했다. 분명 그가 이룩한 눈부신 성과들이 있었고 그에 대한 만족스러운 평가가 따랐다. 하지만 영국 역사상 길이 남을 블레어와 이라크 참전이라는 주제는 여전히 외면 받고 있고, 앞으로도 이에 대한 역사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영국인들이다. ‘블레어 10년’이 이루어낸 경제성장률, 보건 복지 체제 확립, 교육환경 개선, 일자리 창출 등의 굵직한 성과를 분명 인정하는 분위기지만 그것들을 한데 놓고 마지막으로 포장할때는‘이라크 참전’을 사용한다. 그만큼 영국 사회에서 이라크 참전이 가지는 영향력은 우리의 이라크 파병 반대에 비할 바가 아니다. 블레어 전 총리의 이라크 참전 이후 영국 언론들은 보수·진보를 가리지 않고 총리의 오판에 대한 경종 울리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을 만큼 여론의 이라크 참전에 대한 반감은 절대적이었다.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채 물러난 블레어 전 총리의 사임 역시 결국 이라크 전쟁에 대한 영국 정부의 결단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미디어 정치인 토니 블레어
떠나는 마당에 언론에 대한 노골적인 감정 표현을 일삼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도 친숙한 장면이 되고 있지만 지난 달 27일 물러나는 순간까지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언론과의 마찰에 시달려야 했다. 자신의 재임기간 동안 정부와 언론의 악화된 점을 상기하며“올바른 정책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정부의 역량을 떨어뜨리는 것이 언론”이라는 발언을 해 마지막까지 언론의 따가운 질책을 받으며 물러나야 했다. 블레어 전 총리는 정치인의 말이 정확하게 전달되는 신문을 찾아보기 힘들다며 사실 보도와 논평의 구분이 갈수록 흐릿해진다고 표현하며 10년 집권의 세월 동안 언론에 쌓였던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현재 토니 블레어 영국 전 총리는 새롭게 신설되는 EU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고 있고, 벌써부터 퇴임 후 그가 벌어들일 부수입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총리 퇴직금으로 12만6000달러를 벌어들이고 하원 의원 급여로 해마다 12만달러를 버는데, 연설의 달인이라 불리는 블레어 전 총리의 강연 등을 통한 활발한 활동은 그에게 엄청난 부를 가져다 줄 것으로 예측된다. 블레어 전 총리의 탁월한 연설 실력은 이라크 참전이라는 그가 가진 치명적인 결점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를 응원하는 순수한 팬이 영국에는 다수 포진해 있다는 것과 즉흥적인 연설에 능하며 미디어를 이용하는 정치에 능수능란하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영국 언론들은 블레어 전 총리를 가리켜‘소파 대화’의 달인이라고 부른다.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참모들과의 대화를 통한 설득력이 블레어 총리의 최대 정치적 기술이라고 알려져 있다.
지지율 83%로 시작, 평점 6.5로 마감
토니 블레어 영국 전 총리가 10년 전 집권을 처음 시작할 당시 추진한 것이‘제 3의 길’이라고 불리는 신노동당이 내건 정책 모토였다. 경제적 효율성과 사회적 정의를 동시에 추구하려 했던‘제 3의 길’정책은 절반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다는 평이 다수를 차지한다. 신노동당은 중도 좌파로서 사회적 정의와 경제번영을 결합시키는 개혁 프로젝트를 발전시키고자 소득세를 올리지 않으면서도 전반적으로 사회적 재분재를 실현해냈다. 먼저 공공서비스 분야 확충에 주력했다. 공공분야의 투자를 늘려 국내총생산(GDP) 가운데 45.5%까지 늘렸고 그 결과 10년 동안 270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취업률은 78%까지 끌어올렸고, 실업률은 97년 7.2%에서 현재 5.4%까지 끌어내렸다. 특히 보건, 교육 분야에서만 각각 22만4000여개, 30만개의 일자리를 만들어 영국의 역대 어느 정권보다도 공공서비스를 확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저임금제를 시행해 사회 극빈층을 보듬었고, 세금공제정책 등으로 53%의 빈곤층에게 혜택을 주었다. 급식여건을 개선하고 스포츠 문화 활동, 방과후 수업 강화로 공교육 환경 개선에 눈에 띄는 진전을 가져왔으며, 노동시간의 유연화, 유급 출산휴직제 등으로 여성 근로조건도 대폭 개선됐다. 블레어 전 총리는 자유시장경제, 노동신장의 유연화, 자유기업 정신 고양 등을 앞세워 지금까지의 노동당과는 차별화된 정책을 폈던 것이다. 대처 총리 이래 보수당 정권이 과도한 성장을 추구하며 남긴 계층 간의 갈등을 완화시키고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두루 보살피는 관용 정책을 실천한 것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성과를 내기 위해 사용됐던 위험요소들이 하나둘씩 발견됨에 따라 브라운 총리가 떠 안아야 할 정치·경제적 부담이 늘어나고 있다. 소비자물가지수(CPI)가 매해 급상승 중이고, 물가 상승에 따른 인플레 현상도 가속화 되고 있으며, 부동산 가격의 급등과 가계부채도 천문학적인 액수를 기록하고 있다. 이라크전과 친미 외교정책으로 노동당 지지층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진보 언론에게도 버림받은 블레어 전 총리의 사임 결정에 영국 언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환영의 깃발을 들어올렸다. 취임 당시 80%에 육박하는 절대적인 지지 속에 출발했던 블레어 전 총리는 비록 이라크 파병으로 빛이 바랜 대미를 장식했지만 역대 총리 가운데 중상위권에 달하는 평점(10점 만점에 6.5)을 받고 물러났다. 블레어 전 총리는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의 인권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블레어재단’을 마련해 순회대사로 당분간 활동할 계획이다. 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