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People - “무념무상, 세월을 낚는 일”
국내 1호 예술제본장정가, 백순덕씨
2007-10-01 이나라 기자
‘무념무상’은 불교에서 유래된 말로, 무아의 경지에 이르러 일체의 상념에서 떠남을 의미한다. 영화 속 남자주인공은 처참한 전쟁의 폐해로 기억상실증을 앓는다. 그런 그를 위로하는 일이 금박 제본 작업이었으니, 이는 긴 시간 동안 그의 마음을 치유하는 일이자 모든 상념에서 벗어난 무념무상의 일이었으리라. 그러나 이 작업을 복잡한 상념을 달관함과 동시에 황홀한 평화의 시간을 제공하는 일이라 단정 짓는다면 큰 오산이다. 몇날며칠이고 먼지 날리는 작업실에서 접착제 냄새의 고역을 견뎌가며 인고의 시간을 거쳐야 비로소 새로운 생명을 담은 책 한 권이 완성되는 것이다. “자칫 표지만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책의 낱장을 일일이 분해해 다시 꿰매는 것부터 시작해요. 무척 손이 많이 가고 힘든 작업이기 때문에 책을 좋아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죠.” 백순덕씨는 여자 손이라고하기엔 무색할 정도로 거칠어진 손을 내보이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예술제본, 그 한없는 매력에 빠지다
예술제본장정은 본래 유럽식 제본과 장정을 뜻하는 것으로, 이미 인쇄된 책이나 낱장의 그림 등을 다시 분해해 제본함으로써 표지 장정을 새롭게 하는 작업이다. 그 본격적인 출발은 중세 수도원에서 신과 성인에게 바치는 책을 튼튼하고 화려하게 엮어내면서부터였고, 르네상스 시대엔 왕립 도서관 소속의 제본가들에 의해 프랑스를 중심으로 주변 나라들에서 발전해왔다. 지금은 책의 새로운 문화로써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확산되고 있지만, 그 바탕에는 주로 왕이나 귀족, 성직자들을 위한 상류 고급문화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새로운 길을 찾겠다며 떠난 프랑스 유학길에서 처음으로 예술제본을 접하게 된 백순덕씨는, 고풍스러운 예술제본학교에서 풍기는 중세의 아날로그적 분위기에 푹 빠져들었다. 한 순간 새로운 세상을 선사한 예술제본은 그녀에게 있어 신선한 문화 충격이자, 또 다른 길을 알게 한 값진 선물이었다. 그렇게‘파리예술제본학교 UCAD’에 입학한 그녀는 3년간 전통적인 예술제본장정을 배우면서, 프랑스 정부로부터 한국인 최초로 예술장정분야 직업교원자격증(CAP)을 따냈다. 현대적인 예술제본장정에 관련된 다양한 실무 기법을 익히기 위해‘베지네’에서 3년을 더 공부한 백순덕씨는 지난 1998년 귀국하여 예술제본 불모지였던 한국에 예술제본문화를 알리기 위해 앞장서기 시작했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책 또한 여러 사람의 작업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요. 책 한권이 완성되기까지는 그 글을 쓴 작가부터 시작해서 편집자, 식자공 등 수많은 사람의 노력이 필요한데, 그렇게 수많은 작업을 거쳐 마지막으로 제게 온 책을 접하는 기분은 말로 형용할 수 없죠. 많은 사람들이 그 책 속에 담았을 정신을 기억하며 최종적으로 제 생각을 담을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기쁨이에요.” 백순덕씨는 고된 실제 작업과정 속의 고독한 싸움 속에서도, 마지막으로 책 속에 자신의 영혼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것을 예술제본의 가장 큰 매력으로 꼽았다.
‘RECTO VERSO’오픈부터 지금까지
국내 1호 예술제본장정가인 백순덕씨는 지난 1999년 1월, 서울 홍대 앞에 국내 유일의 예술제본 전문 공방인‘렉토베르쏘’를 열었다. ‘RECTO VERSO’는 프랑스어로 책의 앞장과 뒷장을 의미하는 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가치 있게 만든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백순덕씨가 귀국했을 당시, 국내에는 예술제본장정에 대한 개념 정립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생소한 분야에 대한 거리감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이미 외국에서는 많은 예술제본장정가들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예술제본이 북 아트의 한 영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얼마만큼 인정받을 수 있을지 심리적인 불안감이 적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에요. 우리나라는 기술, 문화면에서 예술제본이 정착되기 힘든 분야였다고 볼 수 있죠. 가까운 일본만 보아도 그 시스템에는 차이가 있지만 이미 40년 전에 예술제본 작업이 시작되어, 이제 막 활성화되고 있어요. 그렇게 보면 우리나라는 예술제본 역사가 불과 7~8년밖에 되지 않은 것이죠. 아직 시작하는 단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점차 익숙해지리라 생각해요. 지금까지의 변화만 보아도 충분히 발전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하고요.” 8년 전, 그녀는 국내 여러 출판사에 작품을 들고 다니면서 적극적인 홍보 활동을 펼쳤고, 한 출판사의 의뢰로 이청준, 김주영, 황석영 등 이름 있는 문인들의 책을 영구 소장할 수 있도록 예술제본장정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 때부터 백순덕씨는 개인전을 비롯하여 수많은 예술제본 강의를 해나갔고,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많은 이들이 찾아오는 등 점차 긍정적인 반응을 얻기 시작했다. 예술제본장정에 대한 그녀의 확고한 믿음이 꾸준히 빛을 발휘해오고 있는 것이다.
현재 예술제본 교육과 함께 다양한 주문제작을 토대로 한국의 제본문화를 주도해나가고 있는‘RECTO VERSO’는, 내실을 귀하던 시기에서 외부로의 활동을 중시하는 시기로 바뀌어가는 과도기에 있다. “이제 제법 실력 있는 학생들이 7명이나 되요. 다들 5년 이상 꾸준히 배워온 사람들이죠. 그래서인지 또 다른 공간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됐어요. 예전에는 학생들이 배우느라고 정신이 없었는데, 지금은 학생들 스스로도 배운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작품을 개발하고 싶어 하는 마음도 있고요. 이제 저 스스로도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할 수 있으니, 제 2의 공간을 찾아 나설 때인 것 같아요.” 백순덕씨는 지금의 공간이 너무 숨어있다는 생각이 들어 일반인들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변화를 꾀하고 있다. 예술제본 교육에도 큰 힘을 쏟고 있는 그녀는, 요즘 학생들이 너무 디지털에 익숙해져있어 미대 학생들조차도 손으로 하는 작업이 익숙지 않다며, 좋은 손재주를 십분 발휘할 수 있도록 다양한 기회들을 제공할 계획이다. 교육에 있어서 백순덕씨가 학생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기본이다. 어느 기간까지는 기본에 충실하여, 그 기본을 바탕에 둔 응용작업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학생들 또한 그녀의 교육 방식을 잘 따라주고 있어, 매번 가르치는 보람과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며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예술제본문화 정착의 서막을 지나
예술제본 불모지였던 한국이 새로운 문화 정착의 알찬 유년기를 지나, 더 성숙한 제본문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 사이 예술제본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이 있었고, 그것을 자양분 삼아 지금의 성과를 이룩할 수 있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예술제본과 관련된 업체들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예술제본이 생소한 분야였던 만큼, 서로 함께 발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백순덕씨는 예전에 비해 책의 복원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긴 했지만 가끔은 한계를 느낄 때도 있었다고 한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예술제본을 할 만큼 좋은 책이 많이 없다는 게 사실이에요. 지금도 제가 작업하고 있는 대부분의 책들이 외국서적들이죠. 재료들도 수입에 의존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단가가 높을 수밖에 없어요. 애서가라 하더라도 높은 값을 호가하는 책 복원에 경제적 가치를 두기에는 아직 힘든 부분이 많죠.”
예술제본장정은 높은 단가 때문에 대중화되기 쉽지 않은 어려움도 있지만, 현재 일부 애서가들과 출판사를 중심으로 두터운 고객층이 형성되어 있다. 출판사에서 작가들에게 소장본으로 선물하거나, 일반인들이 개인적인 소장이나 선물용으로 주문하는 경우를 포함해 취업을 위한 포트폴리오 작업이 실용성이 있는 만큼, 그에 대한 가장 많은 문의가 들어오고 있다. 백순덕씨는 글을 직접 쓴 사람의 책을 제본하는 일도 큰 가치가 있지만, 개인적으로 연인이나 가족, 스승을 위한 책을 선물하기 위해 찾아오는 이들을 보면 그 따스한 마음이 저절로 느껴진다고 한다.
내년 봄쯤,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로 개인전을 크게 열 생각이라는 그녀는 현재 작품 준비에 여념이 없다. “사람들에게 진정한 감동을 안겨줄 수 있는 예술제본을 하고 싶어요. ‘정말 이 사람의 작업 속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구나’라는 느낌을 줄 수 있다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을 것 같아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통해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백순덕씨는 인터뷰 내내 미소를 잃지 않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선택한 일을 감사히 여기고, 그 일을 통해 행복을 찾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아름답게 제본된 책처럼 영원히 간직될 것 같다는 생각에 벅찬 마음이 들었다. 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