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비리의 악순환을 묵인한 판결
“법에 근거하지 않은 변형된 양형은 위법”
2007-10-01 김미희 기자
재벌총수에 대한 집행유예 판결 논란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차라리 법전에 명기하라. 그러면 최소한 법의 정의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은가.”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에 이어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것에 대해 어느 네티즌이 한 말이다.‘대한민국 사법계 치욕의 날’이라 불리는 요즘, 우리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범죄자의 사회적 지위와 권력, 부를 막론하고 저지른 범죄에 대해 응당한 처벌을 받는 풍토가 정착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재벌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 반복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재벌총수 앞에서는 공정성과 형평성을 상실해 버리는 법원의 판결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전했다.“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할 기업의 총수가 보복적 ․ 조직적 폭력행위를 저지르고도 집행유예에 불과한 처벌을 받았다는 것은 재벌이라는 권력의 특혜가 작용한 것”이라고 지적한 경실련은“이로써 법원의 판결은 그때그때 다른, 사람마다 다른, 계급마다 다른 판단기준이 작용하지 않나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고 말했다. 한편, 재판부가“대기업 회장으로서 재벌특권 의식을 버리고 몸소 실천을 통해 범행을 속죄할 수 있도록 사회봉사명령 200시간을 명한다”고 내린 판결에 대해 경실련은“하루 8시간씩 25일간만 육체노동을 한다면, 조직적 범죄 행위에 대한 속죄가 가능한 것인지 묻고 싶다”고 전했다. 이와 같은 재판부의 판결은 재벌에 대한 범죄는 솜방망이 처벌로 일관해오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해 국민에 대한 사법의 불신을 가중시켰다. 사법부는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곳이며,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법의 판단을 받을 수 있는 기관이어야 한다. 돈과 권력을 가진 자에 대한 온정주의는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된다. 이에 경실련은“공정한 법의 판단과 엄격한 법집행의 실현만이 깊이 파인 사법의 불신을 조금이나마 회복하는 길이 될 것”이라며,“법의 기본원칙 적용에 대한 의지와 행동으로 국민에 대한 사법의 신뢰를 되찾길 촉구한다”고 강력하게 말했다.
사법권 남용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촉구
“쫑긋 세우고 부릅뜬 이목(耳目)이 있으니, 더 이상 유전으로 무죄가 되지는 않는다.”하태훈 고려대 법학 교수는 이 같은 말을 전하며,“유죄는 유죄로되 유전이면 자유고, 무전이면 교도소 수감"이란 비평을 내놓았다. 정몽구 회장에게 무죄가 선고된 것은 아니지만, 집행유예를 통해 인신의 자유를 부여한 점을 지적한 것이다. 또한“사회 환원이라는 8400억원은 불로소득이거나 불법소득이나 마찬가지이므로 당연히 사회에 환원해도 아까움이 없는 돈”이라며“의당 과징금 등으로 추징돼야 할 재산”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정영진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는‘사법권 남용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촉구하며’란 글에서 정몽구 회장과 김승연 회장에 대한 항소심의 집행유예 선고를 비판했다. 정 부장판사는“헌법 규정대로 사법권의 연원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으로부터 유리된 사법권은 생각할 수 없다”며,“다른 모든 권력과 마찬가지로 사법권 역시 남용되어서는 안된다”고 피력했다. 그는 이어 두 사건의 재판부를 겨냥해“사법재량 역시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어 그 재량권의 남용이나 일탈은 법적 책임 추궁의 대상이 된다”고 강조했다.“헌법 제103조가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이상 법관은 법적 관점에서‘법대로’재판을 하여야 하고 정치적 고려 등 초법적 고려를 하여서는 안 된다.”두 사건에 대한 판결이 사실상'정치적'으로 이뤄진 게 아니냐는 입장을 간접적으로 피력한 그는“사법권 독립도 일정한 한계를 가지는 것이고, 법관들의 일탈된 행태를 비호해 주는 방패막이로 작용할 수는 없다”며,“사법재량의 한계를 넘는 행위는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고, 사안에 따라서는 법관 징계도 검토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