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불균형한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 근본대책 세워야
2008-03-03 장정미 기자
지난 1월 서울 동대문구에 위치한 한 대형할인점에서 40만원 상당의 생선과 김치, 고무장갑 등 생필품류를 훔친 70대 할머니와 두 딸이 경찰에 붙잡혔다. 일정한 수입 없이 지하 단칸방에서 살던 L씨와 맏딸(41)은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서에 연행된 할머니의 손에는 15살 된 손녀에게 줄 학용품과 옷이 들려 있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지난 2월에는 80대 노부모에게 쇠고기 반찬을 해주려고 대형마트에서 고기를 훔친 60대 할머니가 경찰에 입건되기도 했다. 60세 K씨는 면목동의 한 대형마트에서 쇠고기 1kg 값 3만원을 안 내고 몰래 빠져 나오려다 이를 눈치 챈 점원에게 붙잡혔다.
경찰청에 따르면 생활비를 이유로 한 생계형 범죄는 2002년 4만852건, 2003년 4만2100건이었으나 2004년에는 5만4856건, 2005년에는 4만9708건으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개인소득 2만 달러 시대를 바라보는 상황이지만 더 팍팍해진 생활고에 절망하는 서민들이 늘어나는 우리사회의 어두운 단면이 아닐 수 없다.
대상과 장소 가리지 않는 생계형 범죄 급증해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의 주인공인 장발장은 굶어 죽어가는 조카들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치다 잡혀 19년의 징역형을 받는다. 감옥에 가게 된 장발장은 수차례 탈옥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결국 19년만에 가석방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계속되는 경기 침체로 한국판 장발장들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제주에서는 호텔의 불우이웃돕기 모금함 속의 현금 8만원을 훔친 30대 남자가 경찰에 붙잡혔으며, 대구에서는 체육복 차림의 20대 남성이 경로당에 들어와 옷걸이에 걸려 있던 노인들의 겉옷에서 경로당 회비 7만 3000원과 최씨(85)의 돈 현금 3만원을 훔쳐 달아났다. 외부에 설치된 자동판매기 동전 몇 천원을 빼내는 범죄도 갈수록 늘고 있는 실정이다. 울산에서는 학교의 철제교문과 급수대 덮개 등을 훔쳐가는 사건이 최근 들어 10여건 이상 발생했다. 기름값이 고공행진을 계속하면서 강원도 홍천에서는 중장비 차량에서 기름을 빼가는 도둑들이 급증하고 있어 중장비 운전기사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중장비 차량은 인적이 드문 공터에 세워놓는 경우가 많아 범죄에 취약한데다 기름탱크의 용량이 커 한꺼번에 수십만원어치의 기름을 도난당하기 때문. 이처럼 대상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 무차별 생계형 범죄가 잇따르는 것에 대하여 전문가들은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한계상황에 이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한다. 동국대 최응렬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좀도둑이 늘어났다는 것은 그만큼 살기가 어려워졌다는 방증”이라며 “이런 유형의 범죄자들을 예방하지 않는다면 결국 중범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사회와 국가가 나서서 근본 원인을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천태만상 생계형 범죄
전국적으로 별의별 도난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경기도 안양시는 최근 누군가 가로수 보호용 철제 덮개를 집어가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지난 1월 범계동 범계로 구간에서 가로수 보호용 철제 덮개 9개가 사라지는 등 지난해 10월 이후 모두 7차례에 걸쳐 91개의 보호덮개를 도난당했다. 또 울산 남구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별관 1층 급식소의 식기 건조기 안에 보관하고 있던 식판 1450개와 수저 1450벌을 몽땅 집어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울산시에서는 지난해 말 학교 교문이 밤새 감쪽같이 사라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충북 영동경찰서는 지난 1월 부산·대구·김천·구미 등 전국의 아파트 단지를 돌며 구리로 만들어진 소방호스 노즐 4000여개를 훔친 형제 절도범을 검거했다. 이밖에 화장실의 변기 밸브, 등산로의 안전용 펜스, 구리 전선, 승용차 바퀴 등 고물상이나 중고용품점에서 당장 현금화할 수 있는 물품 등도 절도의 표적이 되고 있다.
◈배가 고파서=두부 배달원인 H씨(29)는 임신 중인 아내와 세 살배기 아들이 있었다. 아내와 아들 모두 두부를 좋아했지만 빠듯한 월급으로 이조차 마음껏 사 먹일 수 없어 H씨는 가족들에게 언제나 미안함 마음이 가득했다. 미안함을 참지 못한 H씨는 결국 매장에 진열된 두부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10여 차례에 걸친‘두부 절도’는 지난 2007년 12월 서울 동작구 A할인마트에서 두부를 훔치다 범행 장면이 CCTV에 잡히면서 덜미가 잡혔다. 절도 혐의로 불구속 입건된 H씨는 “나쁜 짓인 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고, 가급적 유통기한이 얼마 안남은 것만 훔쳤다”고 말했다. 자녀들이 먹고 싶은 부대찌개 재료를 마련하게 위해 자전거를 훔친 40대도 있었다. 지난 2007년 3월 서울 지하철 장한평역 앞에서 K씨(42)가 자전거 3대를 훔치다 경찰에 붙잡혔다. 그러나 K씨가 훔친 자전거는 고물상에 팔아도 채 1만원이 안 되는 고물 자전거였다. K씨는 지난 2000년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해 5년 동안 입원치료를 받았고, 그동안 부인은 집을 나갔다. 결국 기초 생활 지원비 60만원과 고철을 주워 팔아 버는 수입만으로는 두 아이를 키우기가 버거웠던 것. K씨는“아이들에게 끓여줄 부대찌개 재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낡은 자전거를 훔쳤다”며“아이들은 먹고 싶은 게 많은데 단 돈 1000원이 없어서 사 주지 못해 가슴이 아프다”고 털어놓았다. 뿐만 아니라 직장을 퇴사한 뒤 생활비가 떨어져 대형마트에서 옷가지와 먹을 것을 훔치거나, 아기 분유값을 마련하기 위해 20대 부부가 빈집을 터는 등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일어나는 범죄들도 잇따르고 있다.
◈돈 되는 것은 뭐든지 훔쳐=생계형 범죄가 기승을 부리면서 승용차 바퀴·소방호스 노즐·등산로 펜스까지 홈쳐가는 웃지 못 할 일들도 벌어지고 있다. 소위 돈으로 교환이 가능한 것들은 모두 생계형 범죄의 표적이 되고 있는 것이다. S씨(46) 부부는 쪼들리는 생활을 견디다 못해 지난 4월 전남 무안군 일로읍 농공단지 내에서 시가 750만원 상당의 지하수 시추 파이프 50개를 훔쳤다. S씨는 경찰 조사에서 “어려운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이 같은 일을 벌이게 됐다”고 힘없이 말했다. 또 지난 5월 인근 주민들의 산책로이자 쉼터인 대구 북구 침산동 침산공원 입구에 설치돼 있던 약 15m 길이의 스테인리스 펜스가 기둥 부분이 날카롭게 잘린 채 감쪽같이 사라졌다. 누군가 도구를 이용해 50m 높이에 설치된 수십㎏이 넘는 펜스를 잘라 간 것이다. 이는 최근 스테인리스 값이 ㎏당 2~3배나 올랐고, 용도가 다양해 단가가 높기 때문이다. 경찰 관계자는 “공원 화장실의 변기 뚜껑, 전구, 출입구 손잡이나 하수구 뚜껑을 훔쳐가는 경우는 있었지만 등산로 펜스를 도난당한 것은 처음”이라며 혀를 찼다. 한편 지난 4월에는 순천시 풍덕동과 남정동 일대 주택가 이면도로에서는 주차돼 있던 승용차 3대의 앞뒤 바퀴를 모두 빼가는 황당한 절도사건도 있었으며 광주지역 아파트 단지에서는 같은 달 14일부터 4일 동안 옥내 소화전 구리노즐 1300여개가 잇따라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한편 돈이 없어 절도·사기 등 생계형 범죄가 늘어나는 동시에 아예 감방에 있기를 자청하는 이른바 환형유치(換刑留置)도 증가하고 있다.
한나라당 이한구 의원에 따르면 경기침체로 벌금을 내지 못해 노역형으로 이를 대신하는 인원이 IMF 당시보다 2배 이상 늘었다. 법무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인용해 이 의원은 지난해 노역형으로 벌금을 대신한 인원이 3만4천19명으로, 하루 평균 93명이 집대신 감방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지난 98년 외환위기 당시와 비교하면 1만5천139명(하루 평균 41명)이었던 것이 노무현정부 4년차에 이르러서는 2.2배나 많아졌다. 지난해 벌금액수만 무려 총 5천453억원으로 1998년(946억원)보다 무려 5.8배가 늘어났다. 특히 참여정부 출범 이후 환형유치 건수는 더욱 증가하고 있다. 2003년 2만1천104건이던 것이 2004년 2만8천193건, 2005년에는 3만2천643건으로 노무현 정부와 대비해 점점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또 전체 벌과부과 인원 중 환형유치비율도 IMF 당시 1.4%보다 1.9배 증가한 2.7%로 나타났다고 이 의원은 밝혔다.
양극화로 인한 빈곤층 확대로 생계형 범죄 증가
경찰은 생계형 범죄 급증을 막기 위해 주택가나 골목, 귀금속 상점 등 범죄발생 가능성이 높은 지역에 검문을 강화하는 한편, CCTV 설치 등 치안활동에 주력한다는 방침이다. 이에 따라 범죄 다발지역 265개소를 치안강화국역으로 지정, 순찰을 강화하고 범죄정보관리시스템 분석자료를 활용해 범죄 장소 및 시간을 정밀 분석하는 맞춤형 치안활동도 함께 벌일 계획이다. 또한 범죄양상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각 시도 지역의 경찰서와 협조를 강화하는 한편 경계지역에 대한 검문도 엄격히 하기로 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양극화로 인한 빈곤층 확대로 생계형 범죄가 증가하고 있다”며 “불균형한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 근본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또 “사회전반에 걸친 불평등에 대한 인식을 제고해야 하며, 더불어 지도계층의 각성으로 원칙과 법을 준수하는 사회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사회지도층의 범법행위가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삶에 대한 가치가 혼돈에 빠져 상대적 박탈감으로 이어진다는 것. 이 교수는 “이들의 어려운 사정은 알겠지만 처벌은 법이 정한 바에 따라 엄격해야 한다”며 “그러므로 강력범죄 발생 가능성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생계형 범죄가 늘어나는 이유로 최근 절대적 빈곤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개인이 느끼는 상대적 빈곤감이 커진 것이 큰 원인이라고 의견을 나타낸다. 경찰대학교 표창원 교수는 “전반적으로 사회복지수준이 높아져 저소득층도 국가의 지원을 받고 있어 생계형 범죄가 굶주림에 의한 범죄라기 보기는 어렵다”며 “개인이 느끼는 지나친 상대적 빈곤감의 증가로 이러한 범죄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표 교수는 “생계형 범죄는 먹고 살 수 없어서 선택하는 범죄 행위라기보다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며 “맨홀 뚜껑이나 건축현장의 자재를 훔치는 것은 생계형 범죄로 정의하기 보다는 파렴치한 행위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생계형 범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가치관 재정립과 법집행의 확실성 회복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인 가치관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복지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개인의 입장에서 만족하고 최선을 다하는 기본적 가치관을 성립할 필요가 있다 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