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정권교체- 메드베데프 대통령 - 푸틴 총리
러시아의 정치 실험 세계가 집중
2008-03-28 장인혜 기자
지난해 12월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제1부총리 메드베데프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리고 메드베데프가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될 경우 자신은 그 정부의 총리로 남겠다고 선언했고, 전 국민의 예상대로 푸틴의 후광을 등에 업은 메드베데프가 러시아의 5대 대통령이 되었다. 오는 5월 7일 취임식을 가지는 메드베데프 차기 대통령은 42세의 러시아 최연소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메드베데프는 70%가 넘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경쟁후보였던 공산당 쥬가노프 후보(17.75%), 자민당 지리노브스키 후보(9.36%), 민주당 보가노프 후보(1.3%)를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뻔한 선거 결과였기에 러시아의 이번 대선은 싱거웠고, 정부는 투표율이 저조할까봐 축구경기 입장권이나 세탁기 등을 경품으로 내놓기도 했다.
명함만 바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임기 4년에 중임이 가능하다. 선대 대통령인 옐친과 푸틴이 각각 중임을 해 8년씩 정권을 잡았고, 메드베데프의 새로운 4년이 시작되는 기로다. 그러나 러시아 여론뿐만 아니라 세계의 여론은 메드베데프의 새 시대가 열릴 것이라기 보다는 푸틴의 또 다른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푸틴 대통령은 직책을 바꿔 총리로 재직하면서 자신의 후계자인 메드베데프를 조정할 것이라는 관측 때문이다. 임기 말까지 80%가 넘는 지지율을 확보하고 있는 푸틴 대통령은 4년 임기, 중임가능의 러시아 대통령법이 아니라면 장기 집권이 가능할 정도로 절대적인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다. 따라서 푸틴의 신임을 받고 푸틴이 후계자로 지목한 메드베데프에 대한 국민들의 맹목적인 신뢰가 형성됐고, 푸틴은 단지 명함만 바꿀 뿐 실권을 놓지는 않게 될 것이라는 여론이 지대하다. ‘메드베데프는 푸틴의 정치적 양자’,‘푸틴 정권의 연장선’,‘러시아의 양두정권 탄생’등 사상 초유의 러시아 정권 교체 특성에 대한 갖가지 수식어가 난무한 가운데 러시아 현지 여론의 일부에서는 푸틴의 권력 연장에 대한 풍자를 연일 쏟아내고 있다. 먼 미래 최고 권력을 두고 둘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대화를 상상해 글로 표현해놓는가 하면, 러시아 정치 현실을 실랄하게 풍자하는 프로그램들이 등장했다.
푸틴은“총리가 되더라도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초상화는 걸지 않겠다”고 말해 그의 정치적 실권을 놓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본래 러시아는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하고 총리는 그의 보조 역할을 담당해오던 것과 달리 푸틴 전 대통령이 총리가 됨으로 해서 총리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치가 흘러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푸틴 총리의 그늘에서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정치적 행보가 과연 얼마나 실효성을 발휘하게 될 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순간이다. 푸틴 대통령이 총리직을 맡음으로서 국정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인지가 가장 큰 관심사가 되고 있다.
푸틴 “총리가 되더라도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초상화는 걸지 않겠다”
푸틴이 집권한 2000년 이후 매년 7%의 고도성장
사실 푸틴이 보이지 않는 힘을 발휘해 주기를 러시아 국민들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푸틴은 재임 8년 동안 국정을 안정시켰고, 국가 위상을 높였다. 금융 위기, 외채상환 불능, 마이너스 성장, 정치 불안, 체첸 내전 등 러시아의 총체적 난국을 해결하는데 푸틴의 공은 세계적으로도 인정을 받았고, 그의 목표대로 러시아를 강한 국가 반열에 올려놓는 데 푸틴은 최선을 다했다. 러시아는 푸틴이 집권한 2000년 이후 매년 7%의 고도성장을 해왔고, 구매력 기준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에서 한국(12위)과 이탈리아(10위)를 제치고 세계 9위로 올라섰다. 석유, 가스를 팔아 국제적으로 돈을 벌어들였고, 그 돈으로 국력을 키웠다. 옛 소련의 붕괴와 함께 나락을 떨어진 러시아 국민들의 자존심마저도 푸틴은 챙겨주었다. 외부세계에서 권위주의 통치자로 비친 푸틴은 자국에서 그렇게 신임과 지지를 받게 된 것이다. 러시아 국민들이 바라왔던 지도자의 리더십을 푸틴이 이뤄낸 것이다. 이것이 대부분의 러시아 국민들이 푸틴과 메드베데프에게 열광하는 이유다. 대다수의 국민들이“푸틴이 러시아를 구했으며 그를 이어갈 지도자는 메드베데프밖에 없다”고 여긴다.
메드베데프 “지난 8년 간의 독립적인 대외정책을 이어갈 것”
러시아는 현재 이란 핵 프로그램과 동유럽 미사일방어(MD)체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확대, 코소보 독립 선언 등 국제 현안을 두고 대외적으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푸틴 정부가 지난 수년간 국제 외교무대에서 독불장군식 대응을 해왔기 때문이다. 정권 교체 이후 러시아의 이러한 외교대응책에 변화가 생길 것이라는 서방국가들의 기대가 있었으나 푸틴의 강경한 외교정책에 상당부분 공감을 가지고 내조해 온 메드베데프의 당선을 기점으로 러시아의 강경 외교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메드베데프는“지난 8년 간의 독립적인 대외정책을 이어가겠다. 국익을 위해서는 국제법이 허용하는 한 모든 수단을 이용할 것”이라고 대외정책을 드러냈다. 그러나 메드베데프 개인의 성향으로 보면 강경책이 아닌 온건 외교로 방향을 전환할 수도 있어 추후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메드베데프는 최근“러시아는 테러, 금융 위기, 에너지 등 국제사회 현안 해결을 위해 미국 등과 협력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참신하지 않다 or 푸틴과 같으면 됐다’
메드베데프, 자유주의 성향이 강하면서도 국가 체제에 철저히 순응
메드베데프는 그의 당선이 확정된 직후“내 임기는 지난 8년간 러시아를 통치한 푸틴 집정기의 연장선에 있을 것”이라고 말해 푸틴과의 돈독한 유대를 강조하면서 정권 교체를 받아들였다. 푸틴과 메드베데프의 인연은 1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푸틴보다 13세 연하인 메드베데프는 1990년 상트페테르부르크대 법대에서 푸틴을 선배로 만났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 보좌관이던 푸틴은 법학박사 학위를 갓 취득한 고향 후배이자 대학 후배인 메드베데프에게 조언을 요청하기도 했다. 메드베데프는 1991년부터 KGB동독지부 활동을 마치고 귀향한 푸틴 밑에서 페테르부르크 시청의 대외관계위원회 법사를 맡았고, 이후 1999년 12월 푸틴에 의해 대통령실 차장으로 임명되면서 푸틴의 곁을 지키게 되었다. 이어 2000년 푸틴의 선거운동본부장, 2000년 가스프롬(국영 가스회사) 이사장, 2003년 대통령 비서실장, 2005년 제1부총리로서 푸틴을 도와 러시아의 경제, 사회 부문 주요 국가프로젝트를 지휘, 관활해왔다.
메드베데프는 162cm의 신장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세계 정상들 가운데 최단신이라는 사실이 최근 화제가 되었다. 부인과 12세의 아들을 둔 메드베데프는 수영과 웨이트를 즐기며 하드-록 팬이라고 전해진다. 메드베데프는 1991년 공산주의 소련의 해체와 시장경제의 태동을 경험한 세대다. 그는 자유주의 성향이 강하면서도 국가 체제에 철저히 순응하며 성장해왔다고 알려져 있다. 영국 일간 더 타임스는 메드베데프에 대해“메드베데프의 자유주의 성향은 탁상공론 수준”으로“지금까지 그의 처신을 보면 결코 참신한 인물이 아니며 푸틴의 쓰레기를 담는 낡은 자루일 뿐”이라고 혹평했고, 뉴욕타임스도“2명의 차르는 불안정 요인이지만 영리한 푸틴은 최대한 자신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사람을 간택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메드베데프는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직전의 한 연설에서 국정 운영에 관한 미래상을 제시한 바 있다. 그는 국가의 제도를 언급하며“정부 공무원의 수를 줄이고 정부 업무의 일부를 민간부문으로 넘겨 주어 부패를 척결하겠다”고 밝혔다. 또한“혁신과 투자 목표 달성의 일환으로 기업에 대한 세금부담을 낮출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가스프롬 회장 재임 시 러시아의 정책에 반대하는 나라들에 천연가스 공급을 차단하는 등의 강경정책을 사용한 이력이 있다.
당선자 임무 선 긋는 대통령 명령서
이번 러시아의 정권교체는 전례 없는 사안이 여럿 나타나고 있다.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이 투표 다음날인 지난 달 3일 당선자 지위와 임무에 관한 대통령 명령서에 서명했다고 전한다. 이 명령서는 메드베데프 당선자가 오는 5월 7일 취임식 전까지 대통령 업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대통령 행정부가 대통령 당선자의 지위를 전체적으로 조절하고 당선자의 활동을 보장하고 그 신분에 맞는 경호를 수행한다는 내용도 함께 들어 있다. 그러나 각 항목 마지막에‘러시아 대통령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명확하게 명시함으로서 당선자 이상의 업무 수행에는 일정 선을 그은 것이다. 현직 대통령이 후임 대통령 당선자에게 이 같은 명령서를 만들어 서명한 전례는 없다고 신문은 전하고 있다.
‘푸틴의 사람을 남을 것인가, 독자 노선 택할 것인가’
여러 갈래 정치 공학
러시아는 세계 최대 천연가스 매장국이고 제2대 원유생산국이다. 지속적인 생산과 개발이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시장과 자본을 필요로 한다. 국가생존에 있어 경제적 국익의 중요성을 충분히 파악해야 하는 시점인 것이다. 푸틴과 메드베데프의 팀웍은 그런 면에서 다경험에 속한다. 또한 2012년 블라디보스토크 APEC정상회의와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이 예정돼 있다.
러시아 대통령은 군통수권, 연방법 승인, 하원인 국가두마 해산권 등 막강한 권한을 가진다. 반면 총리는 법적으로 대통령 유고시 1순위 승계권을 지니기는 하지만 대통령이 지명하며 국가두마가 해임이 가능하다는 점 등 대통령의 권한에 비해 제한이 따른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법률이 정한 총리직의 권한이다. 메드베데프 대통령, 푸틴 총리 체제에서 이 권한이 지켜지리라는 보장은 없을지도 모른다. 실세 총리의 역할을 푸틴 총리가 자행할 것이라는 세계적 관심은 급기야 이제 막 시작하는 새 정부에 있지 않고,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2012년에 가 있다. 과연 그때 가서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연임을 하게 될 것인지, 총리직에 있었던 푸틴이 다시 대선에 도전할 지, 앞으로 4년 동안 두 사람의 정치적 역할 분담은 어떤 방향을 만들어낼 것인지에 세계는 집중하고 있다. 물론 권력의 속성상 대통령으로 취임 후 메드베데프가 더 이상‘푸틴의 사람’으로 머물지 않을 수도 있다. 여러 갈래의 정치공학이 취임 초기부터 점쳐지고 있다. 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