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치] 쿠바의 50년 독재자 카스트로 시대의 종말

-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과정과 업적

2008-03-31     진태유 논설위원

[국제정치] 쿠바의 50년 독재자 카스트로 시대의 종말
-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과정과 업적
쿠바 최고지도자 피델 카스트로(82)가 국가평의회 의장과 군 최고사령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퇴임 열흘쯤 전부터 언론매체 기고를 중단할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오래 침묵할 권리조차 내겐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 2월 19일 썼다는 글은 22일 관영언론이 보도하였다. 혁명과 폐쇄의 나라 쿠바는 이제 변화가 불가피하다. 49년간 이어져온 피델 카스트로의 시대가 끝나고 또 다른 역사의 장을 열게 됐기 때문이다.


피델 카스트로는 1958-1959년 쿠바혁명이후 2008년 2월 24일까지 쿠바 섬의 지도자였다. 그는 Fulgencio Batista 장군의 독재를 무너뜨리고 권좌에 올랐었다. Fidel Castro, 그의 동생이자 육군 중위인 Raul과 혁명가 Ernesto Che Guevara는 혁명에 성공한 후, 국가주의로 출발하여 시대의 이어진 미국 행정부와 대치상태에 있을 때, 1960년 초에 막스-레닌주의와 친 소련 노선을 견지하였다. 혁명에 이어, 카스트로는 공식연설을 통해 국가사회주의에 의한 정당한 독재정부를 건설하겠다고 선언하게 된다, 매우 통제된 언론의 자유와 더불어 유일정당에 의해 운영되고 강력한 국가주의적 정부였다. 카스트로는 우선 1959-1976의 쿠바공화국의 수상을 역임하였고 1976년 이후에는 국가의장(국가수반)직과 국가국무총리(정부수반)직을 수행하였다.

가족관계
1926년 8월 13일 Biran에서 태어난 카스트로는 그의 모든 유년시절을 부유하지만 매우 복잡한 가정의 농장에서 보냈다. 스페인의 이민자였던 그의 아버지 Angel Castro y Argiz는 문맹인 이었지만 토지소유로 부자가 되었으며 그의 식민지 태생의 백인 가정부 Lina Ruz Gonzalez와 결혼하고 그녀를 돌보지 않았지만 이혼은 하지않았다. 혼외정사로 4명의 아이들을 두었고 피델(카스트로)은 3번째고 라울은 4번째 아이였다. 사생아인 피델(카스트로)은 5살 때 쿠바의 산티아고에 정착하였고 1935년에야 아버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채 세례명을 받게 되었다. 그는 1943년 12월에야 공식적으로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성 카스트로를 얻게 되었다. 4살 아래인 라울은 사실 이복 동생이다.

학업기간과 사회참여의 시작
예수교학교, 특히 하바나의 브렌 중학교에서 공부한 피델 카스트로는 1945년 하바나 대학에 입학하여 1950년 법학학위를 받았다. 1948년 4월 그는 미주기구(OEA)창립을 반대하여 극좌지배 세력들이 주동한 3000명이 희생된 보고타 소요 사태 보고타조에 참여하였다. 이 사건들 속에서 피델 카스트로의 역할은 잘못 알려져 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무장행동주의 단체에 가입하고 여러 번 테러에 얽히기도 하였다. 그의 전력(前歷)에 따르면, 1948년 무렵에 소련 KGB의 보수를 받는 요원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설은 카스트로 혁명에 대해 연구하는 역사가들에 의해 주장된 것이 아니고 반대로 그 당시에 카스트로가 공표한 것이었다.

결혼과 바티스타에 대한 저항
1948년 10월 카스트로는 부르주아 가정 출신의 그의 첫 부인인 미르타 디아즈 바라르트와 결혼하였다. 그들은 신혼생활을 뉴욕에서 보냈다. 결혼생활은 단지 몇 년 동안만 지속되었을 뿐이었다. 1950년부터 1952년까지 그는 법에 몰두하였고 교조주의당의 국회의원으로 국회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카르로스 프리오 소카라스의 정부를 전복시킨 풀잔시오 바티스타 장군의 쿠데타는 이들 선거들을 무효화 시켰다. 카스트로는 바티스타 장군을 헌법을 위반한 죄로 법원에 고발하여 그를 공격하였으나, 그의 요구는 받아드릴 수 없다는 판결을 받았다.

무장투쟁단체의 결성과 추방
그래서 카스트로는 무장반동세력을 규합하여 1953년 7월 26일 몬카다의 병영을 공격하였으나 참담한 패배를 하였다. 80명의 무장 공격자들이 살해당하고 카스트로는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선고 받았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행위를 옹호하면서 그리고 자신의 정치이론을 명시하면서 “역사(歷史)가 나에게 무죄를 선고할 것이다”라고 언급한 계기가 되었다. 1955년 5월 대대적인 사면바람이 불면서, 그는 멕시코로 그리고 나서 바티스타에 대한 저항세력을 다시 규합하게 되는 미국으로 동생 라울과 추방되었다. 이것을 7월 26일 운동이라 부른다. 그 당시에 카스트로는 제프슨 철학의 추종자로 자처했으며 노동과 자본의 협력을 주제로 하는 링컨 서식(書式)에 신봉자가 되었다. 1959년 그는 어떠한 산업도 국영화 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U.S. News and World Report에 밝혔다.

게릴라 대장
1956년 12월 2일,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 포함 다른 82명의 추방자들과 함께 쿠바의 남동쪽 라 프로벵스 오리앙탈에 “그란마”라는 이름의 유람선을 타고 몰래 다시 들어왔다. 카스트로 무리들이 상륙하는 순간에 바티스타 군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몇일 간의 전투 후, 전투에 참여한 82명 중 12명만이 살아 남았다. 그들은 라 시에라 마에스트라로 피신하여 거기서 바티스타 군대와 대결하며 게릴라생활을 하였다. 그때에 그들은 미국정부로부터 돈과 무기를 원조 받았다.

미국의 지지와 권력의 장악
민중의 지지를 얻은 운동은 곧 800명이 재집결 되었다. 게다가 혁명운동은 미국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고, New York Times와 CBS는 기자들을 보냈다, 카스트로는 민주주의의 영웅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바티스타 정부의 난폭함에 질린 미국정부는 그에게 지원하고있던 군용원조를 철수하였고 바티스타 대신에 카스트로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1958년 5월 24일, 혁명 세력들은 쿠바의 두 번째 도시인 산티아고를 차지하였고 이어서 산타 그라라도 점령하였다. 1958년 12월 31일, 상황이 매우 불투명하여 바타스타는 4천만 달러를 갖고 도미니크공화국으로 도망갔다가 프랑코 집권 스페인으로 도주하였다. 1959년 1월 1일 카스트로와 대통령으로 선출된 카르로스 리베로 아귀에로는 나라를 비행기로 순회하였고 카스트로 지지 세력들은 1959년 1월 8일 하바나를 지배하였다. 쿠바 국민들의 카스트로에 대한 신임은 대단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보수파이자 민주주의자로 행동하였다. 제1임시정부는 바티스타에 대한 모든 반대 세력들과 연합하여 구성되었다. 이 임시정부는 18개월 후 쿠바의 모든 선거들을 준비하는 임무를 가졌다. 쿠바는 카스트로가 발전에 필요한 재원들을 국민들에게 다시 돌려주기 위해 폐쇄된 산업들을 국유화하고자 하는 국가주의 개혁들에 미국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게 되었다. 그는 갑작스레 한정된 선택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열망하는 국가주의 개혁들을 포기하던지 산업, 은행, 사회주의의 완벽한 국유화를 지향하던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금융 대기업들과 미국 기업들에 대한 국가감독의 철폐요구를 거절하고 카스트로 정부는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갔다.

공산주의정부의 설립
무엇보다도 카스트로는 갑작스레 권력자가 되었고 혁명의 혼란에서 살아 남는 쿠바에 조직된 유일한 세력은 공산당이라는 것을 알았다. 카스트로는 자신이 게릴라를 이끌 때 소극적이었던 공산당과 재빨리 손을 잡았다. 카스트로는 공산당에 즉각적으로 믿음직한 약속을 준다: 바티스타의 옛 지지자들, 즉 무장세력 우두머리 혹은 과두정치 책임자들과 아울러 경찰간부들을 제거하기 위한 신속한 소송절차를 조직하면서, 경제, 에너지와 제당공장의 폐쇄된 산업분야의 국유화를 추진한다.


권력을 쥔 카스트로
미국은 매우 신속하게 새로운 정부를 인정하였고 피델 카스트로는 1월에 수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미국산업기지들을 접수하기 시작하고 미국은 토지세에 근거한 유일한 보상을 요구하면서 긴장감이 돌았다. 1959년 4월, 카스트로는 백악관에서 리차드 닉슨 부대통령을 만났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골프모임의 핑계로 카스트로를 회피했고 닉슨은 카스트로가 공산주의자인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묻고 그와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백악관은 카스트로의 경제정책이 소련에 충성할거라고 판단하고 걱정하게 되었다. 이 만남 이후에 닉슨은 카스트로는 고지식하지만 골수 공산주의자는 아니라고 설명하였다. 카스트로는 휴머니스트 개혁주의자일뿐이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자본주의는 인간을 희생시킨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권리들을 희생시킨다.”그가 소련의 미꼬얀과 친분을 갖고 소련정부에 급변하게 가까워진 것은 단지 1960년이었다. 1960년 1월, 쿠바에 미국정제공장의 설립의 거절에 이어 석유매입을 위해서 카스트로는 소련과 계약에 서명 하였다. 미국은 쿠바와의 외교관계들을 거의 중단하였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고심이 증대되면서, 쿠바는 소련과의 관계를 점차적으로 긴밀히 하였다. 많은 협정들이 경제적 그리고 군사적 실질적 원조를 포함한 피델 카스트로와 니키다 쿠루츄체브 사이에서 맺어졌다.

‘지론’상륙작전의 실패
미국은 쿠바에 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던 반-카스트로 쿠바 추방인들 에게 장비와 훈련을 지원하였다. 추방인들 사이에 이중첩보원과 쿠바공무원들이 낀 KGB가 주도한 첩보전은 상륙작전 준비이전에 오랫동안 카스트로 정부에 정보를 제공하였다. 상륙작전이 임박한 시점에 피델 카스트로는 1961년 4월 17일 그의 혁명의‘사회주의자’성격을 선언하였다. CIA에 의해 훈련과 급료를 받는 쿠바 추방인들 1만4천명으로 구성된 2506여단의 상륙작전은‘지론’해변가 쿠바의 남쪽에서 펼쳐졌다. CIA는 이 상륙작전이 카스트로에 대한 민중봉기를 유발할거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상륙작전무장세력들은 체포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마지막으로 작전 지원부대를 철수시켰다. 병사와 병기를 싣고 온 미국군함 두 척이 쿠바 전투기에 의해 침몰되고 9명이 이 실패에 따라 처형되었다. 전쟁터에 개인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카스트로는 쿠바인들에게 추가로 인기를 얻었다. 같은 해 12월 2일 텔레비전 연설에서 카스트로는‘막스-레닌주의자’임을 밝히고 쿠바는 공산주의를 채택한다고 알렸다. CIA에 의해 조직되고 보수를 받는 쿠바 추방인들은 트리니다드 근처 지역 시에라에서 특별작전을 하는 게릴라를 조직하면서 카스트로 혁명을 모방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그 후로 쿠바정부는 중장비무기로 무장하였다, 게릴라는 카스트로 혁명세력들에 의해 분할방식으로 나뉘어졌고 지방의 소수의 민중들이 이“산적의 전투”에 지지를 보냈지만 그들은 마침내 체포되었다.

쿠바의 미사일 위기
소련의 쿠루츄체브는 쿠바와 직접적으로 소련을 공격하려는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1961년 4월 17일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려는 생각을 하였다. 소련참모부와 상의를 하면서 그는 미국견제방식을 명확히 하기 위해 라울 카스트로가 이끌고 온 쿠바대표부를 만났다. 중거리포 탄도미시일 R-12가 쿠바영토에 배치될 듯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그 전에 1962년 10월 15일 미사일발사장치 건설을 시작하였다. 미국정부는 마이아미에서 90마일 떨어져있는 소련핵무기배치는 미국 안전에 직접적 위협과 공격으로 간주하면서, 그들의 시도를 국민들에 알리고 쿠바 반경 40여 마일 내에 쿠바를 향하는 모든 배들을 나포하겠다고 결정하였다. 1962년 카스트로가 쿠루츄체브에게 보낸 편지에서 만약 쿠바가 침략을 당한다면 핵무기로 대항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제1서기관은 카스트로의 부탁을 거절하였다. 반면에 쿠바에 나타난 소련군병력은 미국의 공격 시 핵 전술무기들을 사용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쿠루츄체브는 미국이 쿠바를 침략하지 않고 터키의 미국 미사일의 철수약속을 대신하여 마침내 미사일발사장치들의 철수를 받아들였다. 이 사건에 이어, 미국은 더 이상 쿠바침략 시도를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관계는 특히 금수조치로 인해 경색되었고 CIA는 그 이후 여러 해 동안 수많은 암살계획을 계속해서 도모하였다. 1992년 1월 하바나의 회의에서 미국 전직 국무장관인 로베르트 맥나마라는“카스트로는 쿠바에 소련 핵무기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있다면 이 상황들에서 미국 침략 시에 공격을 할 것이지 그리고 하바나에서는 어떤 일이 발생할지”를 카스트로에게 물었다. 카스트로는 두 번째 질문에 대답하기를 이 경우에는 쿠바는 지도에서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하였다.

외국에 대한 쿠바의 군사개입
1960년대부터, 쿠바는 다소 비밀리에 카라이브 해안의 남미 공산주의 게릴라운동들을 지원하였고 1975년부터는 아프리카에서, 쿠바군이 이 지역 분쟁들에 직접적인 방식으로 개입하였다. 쿠바는 1975년 여름, 앙고라가 독립하였을 때 정권을 잡은 MPLA(앙고라 자유인민운동)에 군사 고문관들을 파견하였다. 11월 앙고라 영토에 남아프리카군의 개입의 결과로 규칙적으로 군병력이 집결하게 되었다: 항구적으로 5천명 있게 되고 30만명의 쿠바군인들이 분쟁 13년 동안 주둔하였다. 앙고라에 대한 쿠바의 이 군사원조는“카르로타 작전”으로 알려져 있다. 쿠바군대는 그의 참모부를 설치하고 포병과 기갑연대와 더불어 사실상 MPLA의 주된 군사세력을 구성하였으며, 반면에 MPLA 세력들은 수색임무를 맡은 보병대를 구성하였다. 소련은 항공임무를 맡고 역시 쿠바군대에 조종사와 함께 MiG-21기들을 제공하였다. 앙고라에 쿠바인의 출현은 사실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앙고라독립 후 즉각적으로 있었고 국가독립부터 MPLA를 추격하고자 했던 자이르, 미국과 남아프리카에 의해 지원 받던 민병대를 무찌르는데 결정적이었다. 북쪽에서 공격하고 있었던 종대는 초기에 패배를 당했고 자이르는 분쟁에서 철수하기를 강력하게 원했다. 남쪽에서는 전투진전이 더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앙고라 군대와 쿠바병력은 결국에는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게 되었다. 앙고라 독립을 인정하는 평화협정이 열렸고 남아프리카는 앙고라에서 체제전복운동을 더 이상 지원하지 않겠다는 타협을 보고 쿠바인들은 점차적으로 철수를 하게 되었다. 두 번째 쿠바인들의 파견은 쿠바병력들이 거의 완전히 철수할 시점에 일어났다, 남아프리카 무장세력은 이 시점을 이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나미비 지역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1988년 1월, 키이토 쿠나발르 전투는 2만 명의 앙고라 군인과 5000명의 쿠바군인들에 대항한 7천명의 남아프리카 군인들과 UNITA의 만 명의 전투자 들이 집결하여 싸웠다. 2차 대전 이후 아프리카대륙에 참가한 가장 중요한 이 전투는 서로가 승리를 선포함에도 불구하고 참여한 모든 무력세력들의 관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군사적 해결은 한계를 드러냈다. 쿠바군과 앙고라군의 수많은 전사자들 덕분으로 UNITA 에게 영토를 내주지 않았다. 1988년 7월 20일, 남아프리카, 앙고라와 쿠바 사이에 14개항의 협정을 맺었다. 그들 사이에서, 쿠바 할당병력이 철수하고 UN의 감시하에 나미비에서 선거를 준비하면서 435개의 해결책을 이행하는 것이다. 제네바의 의전서는 8월 5일과 8월 22일 서명하였고 평화협정은 루아카나에서 앙고라와 남아프리카 사이에서 채택되었다. 브라자빌의 협정에 의해, 해결책 이행에 대한 일정과 앙고라의 쿠바군의 철수일정이 분쟁에 참여한 모든 세력들에 의해 비준되었다. 분할정책에 반대하는 쿠바의 지지는 넬슨 만데라가 석방되었을 때 그리고 나중에 남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에 의해 인정 받았다, 쿠바는 만데라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방문한 최초의 나라가 되었다. 멘지스티 헬 마리암이 이끄는 혁명정부가 소련과 동맹을 맺을 것을 결정한 순간부터, 1977년 이디오피아에 역시 쿠바 군대를 보냈다. 1980년대에는 군사고문의 여러 민병들이 니카라구아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보내졌다.

캐나다와의 관계
1976년, 캐나다 수상인 삐에르 엘리오트 트뤼도는 미국에 의한 금수조치가 있는 동안 쿠바를 방문한 첫 번째 서방지도자 중에 한 사람이다. 카스트로와 트뤼도 두 사람의 이념적 차이를 감안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트뤼도는 4백만 달러의 캐나다의 원조를 가져갔고 부가로 천만 달러의 대금을 빌려주었다. 그의 연설 중에 “피델 카스트로 사령관의 영원하길. 쿠바-캐나다의 영원한 우정”이란 문구가 그들의 관계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두 사람의 우정은 트뤼도가 수상을 그만둔 이후에도 지속되었고 트뤼도는 1980년과 1990년대에 쿠바를 여러 번 갔었다. 카스트로는 트뤼도가 죽었을 때 그의 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해 2000년 캐나다의 몬트리올에 갔었다. 게다가 카스트로가 공식석상에서 초록색 전통군복을 입지 않았던 매우 드문 경우의 하나였다.

망명 요구자들의 문제
1980년 3월 28일, 망명 요구자들의 버스 한 대가 하바나 주재 페루대사관의 문을 부수고 돌진하였다. 만 명 이상의 쿠바인들이 24시간 동안 대사관 안으로 들어갔다. 4월 20일, 카스트로는 망명을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바나의 마리엘 항구를 통해서 나라를 떠날 수 있다고 발표하였다. 망명쿠바인들은“자유의 표류”라고 불리어진 마리엘 항구를 향해 뱃머리를 돌리기 시작하였다. 미국국경경비원들에 따르면, 카스트로가 9월 26일 국경의 문을 닫았을 때 12만4천7백7십6명의 쿠바인들이 떠났다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조국을 떠난 대부분의 쿠바인들은 실제 망명 요구자들 이었음에 불구하고, 카스트로는 2만 명의 범죄인들을 총살시키기 위해 이 상황을 이용하였다.

미국에 대한 비판
피델 카스트로는 금수조치의 미국정책과 여러 차례 쿠바정부의 전복시도들에 대하여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그는 역시 개발도상국가에 미국기업들의 점유와 미국의 공중위생정책 마저 비난하였다. 최근에는 쿠바로 자신의 가족들을 방문하려는 쿠바이민자들을 막으려는 미국의 이주정책을 단호하게 비난하였다. 그는 또한 가중된 외채의 부담에 유감스러워하며 개발도상국가들을 착취하는 선진국들의 태도에 반기를 들었다. 게다가 9.11 테러사건은 미국의 자작극이라고 비난했고 팬터곤(미국방성)은 우회비행기가 아닌 미사일로 공격을 받았다고 단정하였다. 미국이 대상이 된 비난들은 무수하였다. 냉전시대에는 미국이 쿠바를 약화시키기 위해 게다가 카스트로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쿠바에 대한 수많은 은밀하고 살인적인 공격을 유발하였다. 1971년, 아프리카 돼지페스트전염병이 CIA에 의해 지원 받은 반-카스트로주의자 단체들에 의해 퍼졌다, 이 사실은 1977년 미국언론에 의해 밝혀졌다. 쿠바인들은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그들의 돼지들의 반수를 지속해서 안락사 시켰다. 1981년에는 뎅그열 전염병이 188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국제조사단에 의하면 이 전염병의 확산도 역시 미국이 개입된 것이었다. 1988년 쿠바 외교관 펠릭스 가르시아의 암살 혐의의 에뒤아르도 아로세나의 재판에서 새로운 증거들이 나왔다. 그 이후로, 쿠바 지도자들에 대한 반복된 암살시도들은 638건에 달했다.

냉전이 끝난 후
1989년, 카스트로는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향한‘사회주의’국가들의 혁신에 광범이 하게 반대하였다. 이 때에, 마약 암거래로 구속된 앙고라전투의 영웅이었던 오쵸아 장군에 대한 소송이 진행되고 있었다. 명백하게 이 소송은 조작된 것이었다: 한편 미국마약수사대는 내부부장관 아브란떼스를 제거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 왜야 하면 그 역시 마약 암거래 혐의로 고소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카스트로는 재판 끝에 오쵸아를 총살시키고자 하였다, 반면에 아부란떼스는 불투명한 상황 속에서 형을 치르기 시작한 후에 감옥에서 죽었다. 문제의 진실은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 까닭은 오쵸아 장군은 고르바쵸브 개혁에 우호적이었고 군사쿠데타를 시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998년 교황 바오로 2세가 쿠바를 공식적으로 방문하였다. 카스트로의 중상 비방자들이 그를 반-성직자라 불렀지만, 그는 반-성직자가 아님을 증명하였다.

건강 문제와 권력승계의 문제
격심한 신체이상으로 인한 2006년 7월 31일, 카스트로는 그의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임시적으로 권력을 양보하였다. 그는 외과수술의 회복이 호전적임을 과시하며 연약한 모습으로 쿠바 텔레비전에 나타났었다. 미국정보국의 보고들에 따르면, 카스트로는 말기 암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2007년 1월 30일, 베네수웰라 텔레비전에서 미국 발표와는 정 반대의 카스트로의 모습을 비디오로 방영하였다. 사람들은 카스트로가 선 자세에서 위고 챠베즈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이 비디오에서, 그는 2006년 10월 마지막 비디오 장면에 비해 주먹을 쥔 자세로 건강이 회복된 것처럼 보였다. 공직에서 몇 달 공백기간을 가진 후, 카스트로는 중국 고관 공식대표단을 하바나에서 맞이 하였다. 한 시간 동안의 지속된 만남이었다, 지역 언론에 나타난 사진들은 쿠바 지도자의 건강상태가 호전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쿠바국영텔레비전에서 52분 동안 인터뷰를 하고 일년 이상 모습을 나타내지 않던 카스트로가 2007년 6월 6일에 완연한 모습을 드러내었다.“내가 국민들에게 말할 수 있는 모든 것, 그것은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을 지금 하는 것이고 더 이상 아무런 비밀도 없다는 것이다.” 그의 첫 번째 수술발표 다음날 공식성명 속에 카스트로가 말했다. 또한“어떠한 국가비밀도 없다”라고 되풀이 해서 말했다, “미국의 첩보위성으로 미국정보원들은 내 집문에 출입하는 어떤 누구라도 확인한다”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쿠바정부책임자들은 카스트로는 가까운 시일 내에 업무복귀를 할 것이라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2007년 3월 29일 이후로, 카스트로는 쿠바공식언론에 보도된 정치칼럼들에 검열서명을 하였다. 그의 동맹자 베네수엘라 대통령 위고 차베즈는 카스트로의 건강상태는 양호하고 그의 죽음을 준비할 때는 아니라고 정기적으로 언급하였다. 마침내 2007년 9월 21일 카스트로는 그에 대한 소문들을 반박하기 위해 텔레비전 화면에 다시 나타났다.“자, 나는 여기 있잖소. 그는 위독하다, 그는 죽었다, 그는 내일 모레 죽을 것이다. 자, 그가 몇 일 날 죽을지 아무도 모른다.”한 시간 대담하는 동안 그는 이처럼 농담을 하기도 하였다. 2007년 12월 2일, 카스트로는 2008년 1월 20일 선거를 목적으로 국회에 후보로 선택되었다. 그리고 나서 2007년 12월 18일, 그가 권력을 완전히 포기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기본적인 나의 의무는 내 직무에 집착하지 않고 더 젊은 지도자의 출현에 방해가 돼지 않는데 있다.”라고 국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카스트로가 밝혔다. 쿠바일간지 첫 페이지에 2008년 1월 24일자 신문에, 옛 혁명가 카스트로는 자신의 삶의 고통스러운 일면을 처음으로 자세하게 밝혔다.“내가 7월 26일 밤부터 27일 새벽까지 심각한 병으로 누워있을 때, 이제 끝났구나 라고 생각하였다.”라고 썼다. 마침내 2008년 1월 19일, 카스트로는 쿠바정부의 주석에서 은퇴할 것을 알렸다. 정치평론가들은 카스트로는 사려 깊은 은퇴노익장 역할을 할거라는 생각에 일치하였다. 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가 1월 24일 피델 카스트로의 권력을 승계하게 되었다.

경제정책
카스트로는 산업들을 국유화하면서 쿠바인이던 비-쿠바인인들 상관없이 토지를 강제 매입하면서 그리고 사회정책을 정립하면서 국가통제를 견고히 하였다. 공용징수 때문에 수많은 쿠비인들은 쿠바섬을 떠나 프로리다의 마이애미로 향하였다. 마이애미에서 쿠바난민들은 반-카스트로 공동체를 구성하였다. 냉전시대 동안 영역정치(bloc) 때문에 그리고 미국에 의한 금수조치 때문에 쿠바는 점점 더 소련과 동구권과의 무역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 지역 경제의존도는 국민총생산의 대략 50%를 차지하였다. 1991년 소련의 붕괴는 쿠바국가경제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다. 쿠바에 갈려는 미국여행자들을 특히 금지하면서, 쿠바의 경제는 낙후되고 쿠바경제의 불안의 중대한 요인으로 카스트로 주의가 되었다. 쿠바에 대한 미국의 금수조치 옹호론자들은 미국에만 한하는 것일 뿐이며 다른 나라와는 자유로운 무역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미국은 쿠바와 함께 무역하는 미국회사의 자회사들을 방해하고자 하였다. 게다가 미국은 쿠바와 더불어 작은 나라들과의 무역은 제한하기로 하였다. 쿠바는 카레이브 해안국가들 중에 외화를 벌어들이는 2번째 국가이다. 게다가 쿠바는 쿠바 탈출 이민자들이 그들의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보내는 상당한 원조금을 받는다. 쿠바는 의료종사자들을 베네수엘라로 보내고 대신에 동부유럽의 식량보급로의 차단에 따라 베네수엘라 산 석유를 공급 받는다. 최근에, 카스트로는 쿠바경제를 지탱하기 위해 그리고 의료품분야에 쿠바의 외부의존의 대용물을 찾기 위해 생명공학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이 정책은 쿠바에 의한 생화학무기의 발전을 걱정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2002년 미국 전대통령 카터의 방문대상지의 하나가 유전자공학지역들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이후로 쿠바는 의료공학과 보건목적의 여행의 증가로 이익을 보게 되었다.

교육과 의료체계
경제적 시회적 실현을 위한 카스트로 정부 대변인은 2가지 분야를 강조하였다: 교육과 의료. 쿠바에서는, 국민각자가 교육과 의료에 대한 권리를 보장 받고 있다. 카스트로 집권시기에 이 두 분야는 라틴아메리카 최고의 국가들 사이에서 그리고 개발도상국 후미그룹 안에서 매우 훌륭한 공식통계수치를 보였다. 카스트로 주의의 반세기가 지난 2000년도에는 쿠바의 공식 통계는 문해자(97%)와 유아치사율(0,9%)이 호전되었다. 인구대비 국민총생산은 빈약하게 되었고 가난한 나라 중에 하나로 쿠바를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유네스코 통계에 따르면 쿠바에 기본교육 시설비율은 라틴아메리카의 가장 높은 나라 중의 하나이다. 쿠바의 문해자 비율은 1961년 76%에서 96%로 발전하였다. 카스트로가 주도한 문해자(文解者)캠페인은 시골에 집중되었다, 1960년 가을, 유엔에서 연설 때 카스트로는“쿠바는 몇 개월 후에 더 이상 문맹자가 없는 유일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학기를 마친 사람들은 시험으로 카스트로에게 편지를 보낼 것을 장려 받았다. 쿠바교육박물관은 70만장의 이 편지들을 보관하고 있다. 쿠바 텔레비전은 성인들을 위해 오락 프로그램들 이상으로 평생교육수업들을 방영하였다. 쿠바 야당인사인 쟈고브 마코베르는 쿠바교육체계의 성공들에 관여하였다.“대중적, 무상의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가능한 교육은 지식의 습득보다는 더 많이 교화에 힘써야 한다.” 카스트르 체계는 학생들에게 당의 지도자로 실천하게 하면서 다양한 속도로 교육의 근본이 된다. 대학교는 모든 시험에서 혁명증명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다. 일탈행위자 혹은 사상적으로 무기력한 자는 퇴학대상자가 된다. 모두에게 있어서 변증법적 그리고 역사적 유물주의 학습은 규칙이다.
의료체계는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카스트로는 쿠바인들의 노력을 인정한 세계보건기구에 의해 수여된 건강메달을 받은 첫 번째 국가원수가 되었다. 쿠바언론들은 쿠바아이들과
보고타, 로스엘젤레스, 브에노스아이레스의 아이들과의 다름을 자주 내세우며 보도하였다. 쿠바의 모든 아이들은 7살까지 누구나 구입할 수 있는 가격에 하루에 1리터의 우유를 살 권리를 가지고 있다. 쿠바의 기대수명은 2002년 미국보다는 낮지만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국가에서 제일 높다. 대략 2만 명의 쿠바의 의사들이 제3세계 국가 60개국에 파견되어 있다.

대중적 이미지
수많은 국가원수들에 비해, 카스트로는 기념우표에 단 2번 소개되었다. 처음은 1974년, Leonid Brejnev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1999년 혁명 40주년을 기념하면서 우표에 소개되었다. 쿠바정부는 오히려 국가독립의 영웅인 조제 마르티 혹은 혁명의 순교자들 까밀로 씨앙퓨고스와 특히 체 게바라에 대한 찬양을 장려하였다. 군복을 입지 않고 가끔 대중들 앞에 나타나는 카스트로는 자주 긴 시간 동안 그리고 수많은 역사적 예시를 들면서 긴 연설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연설을 마치면서 “조국 혹은 죽음,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라는 슬로건을 외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쿠바민중들은 카스트로를 지칭할 때“사령관”의 별명으로 부르는 것을 더 선호한다. 프랑스에서는 사회주의 정치인들 특히 쟈크 랑과 다니엘 미테랑과 우정과 친분을 맺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바감옥에서 옥사한 3천명의 반-카스트로 정치범으로 인해 외국에서는 카스트로의 이미지는 상당히 나쁘다. 옥사한 정치범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카톨릭 시인 페드로 브와텔이다. 많은 작가들 역시 쿠바를 자유롭게 떠날 수 없는 동안에 그들의 삶을 학대 받았다.그 중에 레이날도 아르나스는 동성애자로써 도망을 하게 되고 결국에는 미국에서 자살을 하였다.

논쟁거리
100만 이상의 쿠바인들이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은 이후로 나라를 떠났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1960년대에 실패로 돌아간 폭력행위들, 카스트로를 전복하거나 적어도 그의 정부를 논쟁거리로 만들기 위해, 미국 정부에 의해 다소 원조를 받고 조직된 민병대에 참여하였다. 반-카스트로주의자들은 ‘인간 살육’,‘휴머니즘에 반한 범죄’,‘고문과 테러리즘’혐의로 피델 카스트로를 2005년 10월 14일 금요일 스페인 최고대법원에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정치범
1959년 이후로, 혁명진행 반대 쿠바인들은 지하로 들어갔고 거의 4천명의 목숨을 잃게 했거나 감옥으로 가게 했던 테러와 파괴와 더불어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그 중에 가장 유명했던 반체제 인사는 아르만도 발라다래스였는데 그는“모든 희망 저편에”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했다. 테러리스트의 혐의를 받고 마비된 시인으로 세월을 보냈던 발라다래스는 이제 건강상태가 좋아졌다. 나중에 그는 미국국적을 얻었고 로날드 레이건 정부의 유엔대사를 지냈다. 쿠바혁명세력의 완전한 장악에 따라, 정치범들의 수는 줄어들어 갔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소련의 붕괴 이후, 카스트로 정부는 경제문제들에 집중하기 위해 그리고 미국을 포함한 서양국가들의 경제적, 휴머니즘적 원조들을 얻기 위해 정치억압행위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인간의 권리들과 국가적 화해를 위한 쿠바위원회에 의해 2005년 1월 10일 발표된 보고서에 따르면, 2004년 초 317명이었던 것에 반해 294명의 정치범이 여전히 갇혀 있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2004년 적어도 21명이 정치적 동기로 감옥에 수감되었다. 쿠바정부는 적십자 국제위원회와 유엔 인권위원회의 죄수들에 대한 접근을 계속해서 거절하고 있다.

쿠바는 50년의 1인 독재시대가 끝나고 변화와 모색의 기간을 갖게 될 것이다. 서방은 카스트로의 사퇴가 쿠바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관계 개선에 소극적이다. 존 네그로폰테 국무부 부장관은 19일 쿠바의 개혁, 개방 등을 촉구하면서 “수십 년 된 쿠바에 대한 금수조치가 조만간 해제될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