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러시아는 히틀러의 전술을 모방하나?
- 2008년 남오세티아 전쟁
9월 8일(현지시간) 러시아전투기들이 그루지아의 츠한발리에서 25km 떨어진 <고리>시와 분쟁지역 외곽 카렐스키지역, 그리고 수도 트빌리시에서 15km 벗어난 바지아니 공군기지를 폭격하면서 러시아와 그루지아가 남오세티아 독립 문제를 두고 전쟁이 발발하였다. 남오세티아는 러시아계 주민이 70%이상이지만 1991년 구-소비에트공화국이 붕괴된 후 그루지아에 합병되면서 갈등이 증폭된 지역이다.
2008년 남오세티아 전쟁은 2008년 8월 7일 이후 남오세티아 분리주의자들의 지방과 그루지아 간의 분쟁으로 일어났다. 이 분쟁은 그루지아의 또 다른 분리주의자들의 지방인 압하지야로 번져갔다. 오세티아 분리주의자들과 그루지아 정규군간의 국경지역에서의 몇 일간의 교전이 있은 후 8월 6일 중재는 실패로 돌아갔다. 8월 7일과 8일 밤사이 그루지아군들의 습격으로 인하여 러시아평화유지군 12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적대감은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8월11일 러시아 외무부장관의 말에 의하면 대략 1,600명의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이 통계 숫치는 그루지아 정부기관들에 의해 즉각적으로 부인되고 객관적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 분리주의자들의 지역을 무력으로 통제하려는 그루지아 정부의 시도는 1992년‘독립국연합’에서 위임한 평화유지의 명령서에 의거하여 그루지아 지방에 배치된 러시아군대의 즉각적인 반격을 몰고 왔다. 남오세티아인들 대부분이 러시아연합 여권을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 드미트리 메디베데프 러시아대통령은 남오세티아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러시아군대가 개입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루지아 군대와 4일간의 전투를 치른 후 메디베데프 러시아대통령은 그루지아 군대는 큰 타격을 입었고 러시아병력은 지역평화를 보장하기위해 1992년 합의에 따라 정해진 지역에 머물게 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현재 러시아군대가 분쟁 뒤에 점령한 그루지아 영토에서의 철수가 지연되고 있는 상황이다.
8월 15일, 오세티아와 압하지야의 문제들이 명확하게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적어도 당분간은 분쟁의 종지부를 끊는 휴전협정에 서명하였다. 8월 26일, 러시아연합은 남오세티아와 압하지야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고 이 두 국가에 대한 안전을 보장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발표하였다.
분쟁상황
2004년 트빌리시에 친-서방정권이 들어 선 이후, 남오세티아는 그루지아 영토 내 독립주의자들의 지역들을 다시 통합하길 바라고 있었던 Mikhail Saakachvili 그루지아 대통령과 독립을 간곡히 바라고 있던 남오세티아의 대다수의 오세티아 독립주의자들(독립의 선택은 1992년과 2006년 두 국민투표를 통해 효력을 발생하였다) 사이에 정치적 각축장이 되었다. 한편 국제적 협약에 있어서 중재자역할을 하고 남오세티아에 군대를 집결시키는 러시아연방은 갈등상황을 해소하기 위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2008년 4월, 브라디미르 푸텐은 러시아와 그루지아 분리주의 주동자들과 공식적인 관계설정을 허락하는 시행령에 비준을 하였고 그루지아 대통령의 결정을 받아달라는 설득에는 응하지 않았다. 남오세티아 독립주의자들 역시 북-오세티아와의 통일을 고대하였지만 러시아연방이나 유럽안전과 협력기구 그리고 그루지아에 편입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분쟁일지
‣ 8월 7일 이전
1989년 이후로 민족주의자들의 정치적 긴장감이 현존하고 있었고 첫 전쟁이 1991년 1월에 발발하여 1992년 중순에 끝이 나면서 휴전 시에 대략 3,000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1992년 이후로는 오세티아 분리주의자들과 그루지아 군대 사이에 끊임없이 무력충돌의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었다. 최근의 사건들은 6월에 일어났으며 특히 8월1일 오세티아 분리주의자들과 그루지아 정규군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두 진영은 충돌에 대한 책임을 서로 거부하였다. 다음날 이어서 전투가 국경을 지역에서 일어났다: 군인들은 사상자가 늘고 마을들은 중화기로 계속적으로 폭격을 당했다. 휴전은 8월 7일 낮에 결정이 났지만 밤이 되자 그루지아 정부는 휴전협정을 위반했다고 오세티아 분리주의자들을 비난하였다. 그루지아 정부는 러시아 기갑 병력들이 로키터널을 통과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아마도 이 정보는 미국의 군사위성이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모스크바는 이 군사적 이동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였다.
첫째 주
‣ 8월7 일 밤과 8월 8일 금요일
그루지아 군대가 오전 1시30분(모스크바 시간)에 대규모의 공격을 감행하였고 남오세티아의 자체 선포한 공화국의 수도인 <츠인발리>의 일부를 점령하였다. 그루지아 군대는 포사격으로 러시아평화유지군의 병영을 폭격하여 십여 명을 사망케 했다. 또한 그루지아 군대는 <츠인발리>시를 향해 포사격을 하여 러시아측 집계에 의하면 1,600명의 시민과 군인들을 희생시켰다고 하였지만 그루지아측은 이 숫자에 대해 강력하게 부인하였다.
2008년 8월 19일 포착된 <츠인발리>시의 위성사진들의 덕택으로, 유엔관할기구는 346개 파괴되고 92개는 심각한 타격을 입은 건물들이 발생한 전투지역의 피해상황(폭격, 도시점령과 러시군의 반격)을 집계할 수 있었다; 오세티아 분리주의자들의 지방의 수도 북부의 도시인 <Tamarasheni>가 가장 피해를 많이 보았다. 프랑스외교소식통에 의하면 올림픽게임과는 별도로 베이징에서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 니콜라 사라코지 프랑스대통령이 브라디미르 푸텐에게 공격용 군대의 파견을 단념하도록 제안하였다. 러시아의 파병은 24시간 혹은 48시간 내에 그루지아군의 후퇴를 불러올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러시아의 수상인 브라디미르 푸텐은 이 제안을 거절하였다. 드미트리 메디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시민의 죽음(남오세티아 2/3의 주민이 러시아 시민권을 소지하고 있음)은 가혹한 보복을 불러올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북-코카스의 군지역에 배치된 58부대 소속의 수백 명의 군인과 150대의 기갑전차들을 파견하였다. 게다가 같은 날 분쟁지역의 그루지아 군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러시아 보병에 여러 대의 전투기와 98공군사단과 76공수사단을 보강시켰다. 동시에 러시아 컴퓨터 해커들이 그루지아 중요 컴퓨터 서브들을 공격하는 정보전자전을 감행하였다. 다른 공격목표물 중에 해군기지와 무역항인 <포티>는 비행공습으로 타격을 입었다.
‣ 8월 9일 토요일
8월 9일 러시아군의 통계에 따르면, Tu-22M 폭격기 한대와 Su-25 추격기 한대가 파괴되고 조종사들 중 한명이 포로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루지아는 10대의 비행기가 격추되고 30대의 전차가 전투능력을 상실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분리주의자들의 수도인 <츠인발리>는 이날 아침에 러시아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러시아정부기관들에 따르면, 대략 30,000명의 피난객들이 36시간동안 러시아국경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이번에는 분리주의자들의 다른 지방인 <압하지아>도 그루지아와 대치하며 전쟁에 도립하였다. 이 지역 분리주의자들은 트비리시의 통제 하에 있는 압하지아의 유일한 영토인‘콘도리 협곡’을 다시 지배하고자 하였으며 그루지아의 수도와 지방을 잇는 유일한 도로를 파괴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루지아는 전쟁상태를 선포하고 15일간의 교전법을 제정하는 동시에 미리 휴전조약도 찾고자 하였다. 그루지아에서의 유엔감시임무인‘코도리 계곡’의 감시병들을 철군시켜달라는 압하지아의 요청이 있었다. 러시아폭격기가 <고리>의 그루지아 도시 외곽지대에 있는 군 목표물을 향해 폭격을 가하였다. 이 공격 역시 많은 민간인들의 희생을 낳았지만 러시아는 이를 부인하였다.
‣ 8월 10일 일요일
러시아는 휴전과 그루지아 군대의 철수를 인정하지 않은 채 군사작전을 계속해서 펼쳐나갔다. 게다가 러시아는 압하지아에서 군사행동을 강화시켜나갔고 이 지역에 350대의 기갑전차와 9,000명이상의 병력을 동원시켰다. 러시아의 또 다른 추격기 2대가 추락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미국대통령 죠지 부시는 남오세티아를 제외한 폭격들을 단호하게 비난하였고 미국 부대통령인 딕 체니는 미국은“그루지아와 동맹관계에 있었으며 군인들뿐만 아니라 민간인들까지의 러시아의 공격은 응진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루지아의 해군사령부가 있는 <포티>항은 러시아군에 의해 무혈(無血)점령 당했다. 이날 밤 그루지아는 그의 영토를 침략한 러시아를 비난하였다. 러시아 외교부대변인인 보리스 마라코브에 의하면,“남오세티아에서의 러시아의 군사행동은 남오세티아 영토에서 그루지아 군대의 철수이전에는 축소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유엔에서 미국과 유럽 국가들에 의해 준비된 평화안은 러시아에 의해 거절되었다.“우리들은 요구사항들을 가지고 있다: 남오세티아에서 그루지아인들의 철수와 남오세티아의 트비리시 일부 혹은 압하지아에서의 무력개입 중단”이라고 러시아 측은 설명하였다.
‣ 8월 12일 화요일
모스크바의 러시아중앙정부는 남오세티아에서 1,600명의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고 발표하였다. 남오세티아인 34,000명 이상이 고향을 떠났으며 러시아평화유지군 74명이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이날 오전 늦게, 러시아대통령은 모든 목표를 달성했으므로 군사작전을 종료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하였다.‘평화유지군들’은 휴전을 보장하기위해 남오세티아의 영토에 계속 주둔할 것이다. 반면에 이날 오후, 그루지아 정부는 그루지아에 포격이 계속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말했고 독립국연합에서 그루지아의 탈퇴를 선언하였다. 러시아연합은 모든 목표들을 달성했다고 선언하고 러시아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그루지아에서의 진군을 중단하였다. 그러나 남오세티아와 압하지아를 보호하기 위해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군부대는 계속 주둔할 것이다. 반면에 유럽연합국의 평화안을 위임받은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대통령의 중재는 이 두 진영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사르코지와 메디베데프는 여섯 가지 내용이 담긴 평화안을 도출하게 되었다.
1. 군사력에 의존하지 않기;
2. 군사작전의 중단;
3. 인도주의 원조의 자유로운 왕래;
4. 그루지아군인들의 생활터전으로 복귀;
5. 분쟁 전(前)의 감정수준에서 러시아군대의 철수;
6. 남오세티와 압하지아의 상황과 그들의 안전에 관련하여 국제적 토론장 마련.
8월 12일 밤에서부터 13일까지, 이 여섯 가지 평화안은 그루지아 대통령에 의해 거절되었고 수정안은 러시아대통령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다소 모호한 형식의 이 평화안의 문장들은 두 진영에서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었다.
‣ 8월 13일 수요일
이날 늦은 아침에 동유럽 5개국(폴란드, 우크라이나, 발트 3개국)의 대통령들이 그루지아를 지지하기 위해 트비리시로 갔다. 이날 오후, 니콜라 사르코지와 고리에 주둔해 있는 러시아군들의 보호아래 결정 난 휴전에도 불구하고 그루지아의 수도인 트비리시를 향해 러시아군 기갑부대의 종대행렬이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하지만 이 소문은 그루지아의 내무부차관에 의해 부인되었다. 러시아군이 <포티>항(港)에 출현한 그루지아의 10여척의 군함 특히 초계정들을 침몰시킬 목적으로 배 밑에 고의로 구멍을 낸 사건이 발생하였다. 4척은 완전히 침몰되었고 나머지는 반쯤 침몰되었다. 수많은 군사 장비들이 러시아인들에 의해 빼앗겼다. 최후의 분쟁들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중앙정부는 국제적 수준에서 그루지아 분리주의자들의 영토에 대한 접근방식을 다시 논의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그루지아정부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모든 논의를 거부하였다. 압하지하와 남오세티아 지도자들은 니콜라 사르코지와 드미트리 메디베데프에 의해 진일보된 여섯 가지 평화안에 서명하였다.
‣ 8월 14일 화요일
남오세티아와 압하지하의 분리주의 공화국은 유럽연합의 평화안에 동의하였다. 러시아군들은 여러 군사기지들과 지역들에 있는 군장비들을 무력화시켰다.
둘째 주
‣ 8월 15일 금요일
일시적으로 적대행위를 끝내면서 러시아와 그루지아는 휴전협정에 서명을 하였다. 반면에 오세티아와 압하지하의 문제는 열린 채 남아있었다. 사카츄비리 그루지아 대통령은 그루지아의 일부지역이 러시아에 의해 점령되어있다는 사실에 저항하고 있었다.
‣ 8월 16일 토요일
그루지아와 남오세티아 분쟁지역 안에서 대공미사일이 장착된 5대의 군용차와 65대의 전차 그리고 100명 이상의 그루지아 기갑부대원을 손에 넣었다고 러시아군대가 발표하였다. 러시아군대는 <고리>와 <트비리시>사이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트비리시 서쪽 약45Km 떨어진 <가스피>에 있는 전략적인 철교가 12시 20분에 파괴되었다. 그루지아 정부는 그루지아 영토의 동에서 서로 잇는 철로선을 잘라버린 러시아를 비난하고 나섰지만 러시아는 이를 부인하였다. 그 결과 아제르바이쟌은 그루지아의 항구들을 경유하는 석유수출을 중단하였다.
‣ 8월 17일 일요일
미국 일간지 <The New York Times>에 따르면, 러시아 군대가 남오세티아에 SS-21 미사일을 배치시켰고 미국행정부는 이것을 침략의도의 표징이라기보다는 군 양동작전으로 해석하는 것 같다고 보도하였다. 미국과 유럽의 외교부는 그루지아 영토에서 러시아군대의 신속한 철수를 얻어내기 위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러시아대통령은 니콜라 사르코지에게 8월 18일“남오세티아에 대한 그루지아의 공격에 따라 러시아평화유지군의 지원군으로 파견된 할당병력의 철수가 시작됨”을 알렸다.
‣ 8월 18일 월요일
러시아정부에 따르면 할당병력이 철수하였다고 하였지만 그루지아 증인들과 미국정부는 사실과 다름을 확인하였다. 그루지아정부에 의하면 러시아군대는 더욱 견고해지고 있다고 발표하였다.
‣ 8월 19일 화요일
나토회원국들의 26명의 외무부장관들이 미국중앙정부의 요청에 따라 소집을 위해 브뤼셀로 집결하였다. 미국의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나토국가들이 러시아정부가 그의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도록 그루지아와 우크라이나의 동맹가입을 재확인해 줄 것을 강력하게 희망하였다. 러시아정부와 나토는 그 결과들을 놓고 서로 대치상태로 들어갔다. 러시아는 트비리시와 모스크바에 의해 수락된 6가지의 평화안들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엔의 해결책들을 거절하였다. 러시아대통령은 러시아군 철수가 8월 21일 목요일이나 22일 금요일 완료될 것임을 발표하였다. 포로가 된 15명의 그루지아군인과 5명의 러시아군인 간의 첫 포로교환이 프랑스대사의 중재 하에 트비리시에서 40Km 떨어진 곳에서 이행되었다.
‣ 8월 20일 수요일
모스크바 러시아중앙정부는 그들의 군대는 철수를 하였다고 발표하였지만 그루지아 정부 내무부장관에 의하면“어떤 전투차도 어떤 러시아병력도 그루지아를 떠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AFP(프랑스통신사)에 따르면 러시아군대는 <고리> 도시 외곽의 통제지역들에 콘크리트 블록을 쳐서 그들의 진지를 견고하게 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러시아인들은 남오세티아 외곽지대에 군 병력의 강화를 도모하고 있는 그루지아를 비난하였다.
‣ 8월 21일 목요일
남오세티아의 현 대통령인 <에듀아르드 코코이티>의 주관 하에 <츠인발리>에서 어떤 모임이 열렸다. 여기에서 그는 남오세티아(그루지아인 7,000명 거주)와 북오세티아(러시아인 삼십만 명 거주)를 포함해서 하나로 독립된 오세티아를 바라는 의지를 재천명하고 모스크바 러시아중앙정부의 동의를 요청하였다. 게다가 러시아군대는 나토와의 군사적 협력관계를 중단하였다.
세 번째 주
‣ 8월 22일 금요일
모스크바 러시아중앙정부는 그들의 군대를 철수하였다고 발표하였고 아울러 평화안도 명시하였다. 하지만 워싱톤과 파리는 그와 반대로 발표하였다. 그루지아 내무부장관의 대변인은“<고리>의 분할에 관련하여 러시아군대가 철수의 속도를 가속화하였다고 나는 분명히 말할 수가 있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들이 어떠한 철수도 보지 못하는 서방 그루지아에 관련해서는 똑같은 말을 할 수가 없다”고 발표하였다. 러시아군대는 유럽 국가들의 정부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은‘통제의 항구성’ 즉 남오세티와 그루지아 사이에 완충지대의 항구적인 통제를 유지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루지아 국방부의 차관인 Batu Kutelia는 런던의 일간지<Financial Times>에 의해 보도된 인터뷰에서 그루지아는 러시아의 군사적 반격은 받지 않았다고 인정하였다.
‣ 8월 23일 토요일
한 쪽의 모스크바와 다른 쪽 워싱톤, 파리와 런던은 평화안과 더불어 러시아의 철수에 대한 인식은 서로 계속해서 상반되기만 하였다. 나토는 러시아에 대해 공식적으로 항의하였다.
‣ 8월 24일 일요일
똑같은 대치상황이 러시아군대 특히 <포티>항 주변에 주둔한 러시아군대의 철수에 관련하여 서방국가들과 러시아 사이에 지속되고 있었다. 모스크바 러시아중앙정부는 남오세티아 국경에 그루지아 병력들이 집결하고 있다고 비난하였고 그루지아는 자신들의 군대가 집결하기 이전에 그루지아 군 시설물과 민간 시설물을 파괴한 러시아를 비난하였다. 그루지아 <바투미>(남서쪽) 항에‘인도주의 물품’들을 실은 미국 구축함이 도착했고 더불어‘인도주의 원조품’을 수송한 10대의 군용기도 도착했다.
‣ 8월 25일 월요일
남오세티와 압하지아 국회는 러시아중앙정부에 그들의 독립을 인정해달라고 공식적으로 요청하였다. 임시회기로 월요일 소집된 연방위원회와 제국의회는 드미트리 메디베네프 대통령에게 의뢰한 인정요구를 승인하였다. 제국의회는 유엔 가입국들과 국제기구들에게 압하지아그리고 그루지아와 인접한 남오세티아의 독립을 인정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미국은 러시아의회의 승인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고 부시 대통령은“나는 러시아 지도자들이 분리주의자들의 이 지역들을 인정하지 않는 참여에 충실하도록 요청한다”고 선언하였다.
‣ 8월 26일 화요일
러시아대통령은 남오세티와 압하지아의 독립을 인정하는 시행령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그루지아는 병합된 영토임을 다시 한번 재천명하였다. 메디베네프는 연설 중에“그루지아 중앙정부는 8월 7일에서 8일 밤사이에 선택을 하였다. 사카츄비리 그루지아 대통령은 그의 정치적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해 민족말살을 선택하였다”, 그러고 나서“그루지아 대통령은 같은 영토 내에 살고 있는 그루지안인과 오세티아인, 압하지아인 사이에 평화공존의 모든 희망들을 포기하였다”, 더불어“츠한발리에서 일어난 일과 압하지아에서 계획되었던 일에 비추어보면 남오세티인들과 압하지아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언급하였다. 그 후에, 미국, 유럽연합, 나토와 유럽안보협력기구는 이 결정을 비난한 후, 러시아 대통령은“우리는 냉전을 포함해서 두려워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만약에 서방국가들이 러시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우리들의 결정이유들을 이해할 것이다”라고 공언하였다.
‣ 8월 27일 수요일
메디베네프는 이 독립의 인정은 국제법에 근거한 것이라고 평가하는 논단을 <Financial Times> 일간지에 소개하였다.
‣ 8월 28일 목요일
남오세티아의 독립을 인정하는 러시아대통령령의 공포와 메디베네프 대통령의 일간지에 기고한 논단이 발표된 후에 그루지아 대통령도 <Financial Times> 일간지에“무력으로 유럽의 지도를 다시 그리려고”하는 러시아의 시도를 알리는 논단을 발표하였다. <상하이협력기구> 회원국들(중국, 러시아, 중앙아시아의 구-소비에트공화국 5개국 중 4개국: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은 그루지아와의 분쟁해결과정에서 러시아의‘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하면서 러시아에 대한 그들의 지지를 보냈다.
넷째 주
‣ 8월 29일 금요일
서방국가들의 항의와 염려를 넘어서 러시아의 결정은 많은 나라들을 혼란케 하였다. 어떠한 유엔회원국도 남오세티아와 압하지아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어떤 국가들은 이곳에서 분열의 위험한 전례를 보게 될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루지아는 러시아와 외교관계를 중단할 것을 결정하였다.
인명피해
2008년 8월 27일에 분쟁피해에 대해서 명확하게 집계되지는 못했다. 아무튼 인명피해는 제각기 다른 양진영의 통계에 따르면, 그루지아 군대의 침략 결과 오세티아 민간인들이 몇 백 명에서부터 1,600명이 사망하였다. 피난민들은 158,600명으로 집계되었다: 30,000명은 남오세티아에서 러시아의 북오세티아로 향해 탈출하였다. 다른 12,000명 이상은 오세티아 자치지역 내에서 이동한 숫자이다. 대략 15,000명은 남쪽을 향해 그루지아에서 전쟁을 피해 도망갔다. 반면에 대략 68,000명은 그루지아 내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였고 그중 남오세티아에 근접한 그루지아에서 가장 큰 도시인 <고리>의 주민 56,000명이 도시를 떠났다. 그루지아는 국제재판소에“인종차별의 모든 형태들의 제거에 관한 협정서 위반”에 대한 러시아를 고발하는 소송을 내었다. 자세한 소송내용은 남오세티아에 살고 있는 그루지아인들에게 범한 약탈과 폭탄테러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러시아중앙정부는 그루지아군에 의해 행해진 오세티아인에 대한 민족말살을 증명하기 위한 법적 조사를 요청하였다.
미국의 반응
8월9일, 미국대통령 죠오지 부시는 그루지아 대통령 샤카쉬빌리를 지지하였고 전투의 즉각적인 중지와 군병력의 철수를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미국의 부대통령은“러시아의 균형 잡히지 못한 반응들은 응분의 대가를 받을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는 미국이 이라크에서 2,000명의 그루지아 할당병력을 항공기로 파견하면서 남오세티아의 평화유지작전을 방해한다고 월요일 모스크바에서 발표하였다. 러시아의 제국의회 회장인 보리스 그리즈로브는 남오세티아 상황은 미국대통령입장과 밀접한
유럽의 반응
유럽연합의장은“그루지아 영토전체와 통치권의 존중을 통해 위기 속에서 정치적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모든 국가들에게 적대감의 즉각적인 중지와 중재의 재개를 호소”하였다. 스웨덴 외무부장관 칼 빌트는“러시아는 국제법에 양립되지 않은 공격을 저질렀다. 불과 반세기전에‘히틀러’가 중아아시아의 상당한 지역들을 공격하여 잠식하기 위해 이러한 ‘독트린’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우리들은 기억할 이유들을 가지고 있다”고 8월 9일 발표하였다. 같은 날 유럽안보협력기구는 러시아는 더 이상 분쟁 속의 중재자가 아니라고 발표하였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대통령도 2008년 8월14일 발표한 공식성명에서“적대감의 즉각적인 중지”를 요청하였다. 프랑스는 국제적으로 인정된 그루지아 영토의 전체와 통치를 지지한다고 되풀이 하였다. 전통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친밀감의 경향이 거의 없는 발트 3개국과 폴란드는 유럽연합과 나토에 러시아의‘제국주의적 정책’을 반대하도록 요청하였다. 미국에 의해 지지받고 러시아와는 적대적인 우크라이나는 만약 분쟁이 계속되면 러시아인들은 <세바스토폴> 해군기지로 다시 돌아갈 수 없고 군사적 반응으로 위협할 것임을 8월 10일 발표하였다. 8월 13일,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배치된 흑해의 러시아함대의 움직임에 관련한‘제한사항 시행령’을 명령하였다. 8월 14일, 독립국가연합의 발족동의를 알리는 법안이 제출되었다. 남오세티아에서 분쟁해결에 관여했던 러시아는 조용하고 지혜롭게 대처했다고 8월 19일 러시아 대통령 메디베네프와의 회담 때 백러시아 대통령 알렉산드르 루카츈코가 말하였다. 8월 11일 <La Stampa>에 보도된 회견에서 이탈리아외무부장관 프랑코 프라티니는‘반-러시아유럽동맹’의 결성을 경계하였다. 유럽연합회원국들 속에 분산된 민족 집단의 <러시아우호조정위원회> 회장단은 유럽연합과 유럽의회의 책임자들에게 공개서한을 보냈다. 그 내용은 그루지아에 대한 러시아의 공격상황을 잘못 소개한 유럽언론매체들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러사아와 나토는 그루지아의 위기가 해결될 때까지 그들의 군사적 협조를 동결하기로 결정했다.
나머지 국가들의 반응
이란 외무부장관은 8월 10일 이 긴장상태에 대한 우려를 표방하였고 무고한 희생자를 막기 위해 즉각적인 휴전을 두 국가에 요청하였다. 더불어서 그는 대화를 재개할 수 있는 모든 협조를 다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하였다. 8월 21일 바샤르 엘-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 중 그루지아에서의 러시아군사작전을 강력하게 지지하였다: 그는“러시아의 군사반응은 그루지아의 도발에 대한 응징 이었다”고 특히 평가했고 이어서“국제적 조치들을 받아들이고 분쟁지역에서 그들 군대의 철수를 결정한 러시아의 용기”를 존중한다고 덧붙였다.
언론매체들의 분석
러시아텔레비전 국가노동조합장인 에두아르 사가라이에브는 8월 11일 월요일 <Ria Novosti> 러시아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오세티아-그루지아 분쟁지에서의 사건들을 보도하는 서방국가들의 보도방식에 충격을 받았다면서 그들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프랑스의 일간지 <Le Figaro> 기자인 로르 망드빌은 이 분쟁은 옛 러시아의 위성국들에게 러시아를 추종케 하고 코카스에서 러시아의 권위를 강요하려는 러시아중앙정부의 의지로 평가하였다. 그녀는 이것과 서방국가와 가까이하려는 구-공화국들을 보복하려는 러시아를 비난하면서 우크라이나 혹은 몰도바의 구-소비에트공화국들에서 최근의 긴장상태와 특히 비교하였다.
일간지 <Le Monde>의 모스크바특파원인 마리 제고는 세 가지 점(에너지, 정치, 지정학)에서 중요한 지역을 다시 확보하려는 러시아중앙정부와 관련이 있다는 진보적인 분석을 내놓았다. 그녀는 여러 송유관과 가스관이 관통하는 그루지아는 카스피해에서 유럽으로 탄화수소 수송로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녀에 의하면 더 넓게는 이 지역은 모스크바-에레반-테헤란과 워싱톤-앙카라-트비리시-바쿠의 두 대립점을 형성하는 선 사이에 분열지역이 되었다고 한다. <Les Echos> 언론사 논설위원인 쟈크 위베르트-로디에는 러시아는 그루지아의 나토가입 가능성에 따라 그루지아 대통령 사카츄비리를 미국의 꼭두각시로 간주하여 일종의 경계망을 형성하여 그루지아의 목을 조이려는 시도를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가 전개할 수 있는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외교정책은 무엇보다도 먼저 나토의 공격과 서방국가들 대부분에 의한 코스보의 통치에 대한 인정으로 한계가 있다.
러시아의 주간지 <Itogui>의 엘르나 페트로바는 미국에 있어 코카스지역은“카스피해의 석유통로를 위한 어떤 회랑”이고“시리아와 이란에 대한 미래의 군사작전을 위한 완벽한 후방기지”임을 강조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냉전’상황이 러시아중앙정부에 입장에서는 안성맞춤이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그는 러시아중앙정부는 러시아평화유지군인들의 학살에 반응할 수 없었고 크고 강력한 국가에 속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그들 국가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평가하면서“진짜 문제는 러시아의 한계가 코가스인들 안에서 잠재하고 있었던 수많은 분쟁들을 선동할 수 있다”는 논평을 썼다. 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