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무열 칼럼) "의대 정원수 확대에 따른 우리 사회의 단상을 보면서"
[시사뉴스피플=편집국]
행복에 이르는 길
사람들은 태어나서 많은 사람이 삶의 이유에 대해서 고민하며 산다. 여기에 정답은 없다. 다만 그래도 사람이 사는 이유에 대해 정답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목표이며, 의미가 부여된 자신만의 삶의 방식이 된다. 사람이 살면서 삶의 목표가 없다면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설정해 놓은 목표를 향해서 매일 동기부여와 열정을 갖고 살 수 있으니 그 또한 보람이며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내일을 위해서 내일을 기대하며, 오늘을 가장 소중하게 느끼며 인생의 멋과 맛을 그려내며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도 부단히 노력한다. 그렇게 저렇게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바로 인생이다.
살면서 희로애락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다. 또 생로병사의 과정은 누구도 거를 수 없는 인간이 가지는 최대의 가치이며 아픔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인가? 현대인에게 있어 행복이란 매우 중요한 화두이다. 돈이 많으면 행복할까? 돈보다는 건강해야 행복하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건강을 잃으면 전 재산을 잃음과 같다고도 말한다.
인간은 물질적 풍요로움 외에도 정신적인 만족과 대체할 수 없는 욕구가 있기 때문에 마음을 다스리며 행복을 좇는다. 그러면서 어떤 사람은 자원봉사를 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행복을 찾고, 어떤 이들은 자신이 가진 아주 작은 돈을 기부하면서 행복을 찾으며, 어떤 이들은 남들이 필요로 하는 일손으로 시간을 함께하면서 행복을 찾는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부처님에 따르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은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어떤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음을 성취하는 것이다.”라고 따라서 생로병사를 겪지 않고 세상을 살 수는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제아무리 돈이 많아도 영원불멸의 삶을 살 수는 없다. 아프면 병의원을 찾는 이유는 잠시 행복하기 위해서이며, 아픔으로부터의 해방이 바로 행복이기 때문이다. 행복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하게 되면 불행해질까? 불행과 행복의 차이는 또 얼마나 될까? 음식을 잘하는 맛집을 찾아가 같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차려놓은 음식만 보아도 행복해하는 사람도 있다. 불행은 어떤가.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도 먹을 수조차 없고 맛도 모르는 경우가 될 것이다. 그것은 고통이고 괴로움이다.
사람의 신체 중 일부가 고장이 나도 정상이 아니라고 진단한다. 어디서? 병원에서다. 병원엔 의사가 있다. 의사는 진단과 처방을 한다. 그러므로 의사의 행복은 자신으로부터 몸이 아픈 사람이 아프지 않게 되었을 때 느끼는 게 행복이며, 그로 인해 돌아오는 댓가는 부(재물)이며, 그가 속해있는 가정이 행복을 찾게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세상은 물질적 자원이 제한되어 있으므로 필연적으로 경쟁과 갈등을 초래한다. 집단 이기주의가 원인일까. 서로의 생각이 상충하지 않는 한 행동하는 양심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잊고 만다. 내려놓고 싶지 않은 기득권이라고 하면 과한 말일까. 이렇듯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외부 지향적인 행복은 불안정하다.
돈·권력·명예는 시간이 흐르면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잊지 않도록….
인간의 도리, 윤리를 잃으면 모든 걸 잃은 것
돈·권력·명예는 시간이 흐르면 안개처럼 사라진다. 외부 세상에 의지한 행복은 늙음·병듦·죽음이라는 실존적 고통 앞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금 더 아프지 않은 신체를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며 삶의 질이 향상된 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늘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론 변호사가 필요하고, 학교에선 선생님이 필요하고, 죄지은 자를 처벌하기 위해선 경찰도 검찰도 판사도 필요하지만, 약사나 의사도 간호사도 필요하듯이 세상은 혼자서는 홀로 설 수 없는 환경 안에 갇혀 있다. 따라서 필요한 건 사람이며 사람에 의해서 생성된 제한된 자원이다.
우리는 유능한 인재를 재원이라고 하고, 그렇게 품성을 갖춘 사람들 사이에서 훌륭한 사람은 성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게 중에는 의사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의사는 우리 사회 최고의 지식인이다. 그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어느 직업군에 몸담은 사람들보다 여유가 있다.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해야 하는 학비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의학 공부를 마치고 사회에 나오는 순간 의사가 되며, 사람의 목숨을 건진다는 자부심도 함께 갖춘다.
의사는 의업에 종사하는 일원으로서 인정받는 이 순간에, 나의 일생을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한다. 바로 히포크라테스 선서다.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에 의해 쓰인 이 선서는 의학 윤리를 담은 가장 대표적인 문서 중 하나이다. 기원전 5~4세기 당시의 모든 의사가 이 선서에 서약했던 것이 아니었으며 히포크라테스 가문, 즉 아스클레피오스 학파의 가문에 속하지 않는 다른 가문의 사람들이 의술을 배우러 오는 경우엔 이 선서에 서약하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태어난 의사이기에 그런 자부심과 자긍심은 사람의 목숨을 살리고 죽음으로부터 생을 연명할 수 있도록 하며, 부서지고 깨지고 부러지면 이물을 통해서 잇고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행복과 삶과 사랑을 잃지 않게 한다.
그들이 칭송받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최고의 지식인들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정부의 의과대학 증원 발표에 의사 단체와 학생들이 파업을 예고하면서다.
필자는 문득 이런 생각도 해 본다. 만일 히포크라테스의 선서가 유효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의사가 되어 파업하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미래 자신들의 가치가 하락할 것에 대비해 의대 증원을 반대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여기서 나이팅게일의 선서를 보자. 간호학도들이 간호사로서의 윤리와 간호 원칙을 담은 내용을 맹세하는 선서다. 의사와 간호사는 현격한 차이가 있지만, 사람을 위한 의업에 종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이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 또한 행복이다.
또 윤리란 무엇인가 생각해 보자. 우리는 옳고 그른 것을 어떻게 판단하는지, 도덕 이론은 일상에서 발생하는 도덕적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데 어떻게 도움을 주는 지 등 핵심적인 질문에 부딪히게 된다.
이럴 때 가장 쉬운 게 외면이다. 그래서 그들은 빈곤한 삶, 죽음의 문제, 생명의 의미와 윤리, 덕, 그리고 도덕성과 비판에 대한 얽매임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구를 앞세워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과 집단의 이기주의를 위한 충돌에서 독단적이기보다는 단체로서의 집합체임을 내세워 욕을 먹으면서도 양보하지 않으려는 사유에 더 많은 불편과 불합리와 부도덕한 행동을 추구하는 이유에 힘을 싣는 건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 의사들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다면 그들은 도덕성과 윤리를 팔아버리고 오직 재물에만 탐욕을 내는 개인에 불과할 뿐, 다른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전 세계 역사에 죄인으로 낙인찍히지 않는 정의로운 심장을 가질 수 있기를
전 세계가 대한민국의 의사협회를 주시하고 있다. 필자는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것도 윤리를 기준으로 보고 있을 것으로 본다. 도덕적 문제에 당면하여 옳고 그른 것을 가리는 방법이 따로 있을까? 세계의 눈이 대한민국 의사들의 집단행동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문을 가장 가까이서 이해하고 공감했을 대한민국 의사들의 행동은 과연 옳은 일일까. 전체 전공의 중 25%가 흔들고 있는 시위와 파업을 주동하고 있는 세력들은 과연 정의의 심장을 가진 의사들인지, 그들이 주장하는 의대생 충원에 대한 반대가 정의라면 대안은 무엇인지, 정답도 없는 파업을 공유하면 국민의 생명을 볼모로 하는 집단의 행동은 양심을 담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의심하다가 옳은 일을 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또 국민을 볼모로 그들이 얻으려는 게 자신을 향한 화살로 되돌아가 그동안 마음속 깊이 간직해 두었던 윤리와 양심과 도덕을 삶이란 제목으로 삶아 먹게 되는 것은 아닐지 하는 우려 아닌 우려를 표현하게 된다.
오래전의 일이다. 비행기 승무원과 기장들 사이에서 불협화음이 발생한 적이 있다. 승무원들의 얘기로는 비행기가 이륙하면 자동항법장치에 의해서 자동 조정이 가능하다고 하는 내용이 일부 표면화되었었다. 면허나 자격요건을 갖춘 다음엔 기계가 알아서 하는 세상이다.
요즘 사진작가들과 과거 사진작가들과의 차이점은 또 무엇인가? 과거엔 햇빛 밝기와 조리개 조절 어둠과 빛의 경계 사이에서 모든 걸 수동으로 조작해 가며 예술적 가치를 창조해 내는 사진 기술이 있었다면, 현재는 모든 게 스마트하게 자동조절 장치를 통해 예술작품으로 태어난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렇다면 의료계는 또 어떤가? 모든 기계가 진화하고 있다. 따라서 의사들이 하는 일이란 병명을 알아내기 위해 사용하는 의료기기에 의존하는 의존도가 높아지는데 과거 명의들과 차이가 있다. 수련의 전공의 그리고 의대생 모두는 이런 현대화된 의료기기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공부하며 원숭이와 쥐 그리고 개와 돼지를 해부해 가며 스스로 의사로서의 가치를 찾는 사람을 요즘은 볼 수 없다. 그렇게 죽어간 축생들의 소중한 생명의 가치는 인간의 장수에 많은 영향을 주면서 연구 결과와 성과를 얻어 의사로서의 사명감을 잃지 않았지만, 요즘의 의사들은 아니지 않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파업에 동참하는 의사들이 과연 정의의 심장을 가지고 있다 할 수 있겠는가.
선진국 의사보다 소득 수준이 높은 한국 의사들,
파업은 결국 돈 때문인가?
사람이기에 아무리 의사라고 할 지라도 사명감만으론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음을 전문직 종사자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은 이해하고 있다. 매일 교통사고를 담당하는 경찰관이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기에 의사들의 고충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임을 잊지 못한다.
그와 반대로 하루하루를 고통과 싸워야 하는 환자들의 관점에서 또 환자 가족의 처지에서 보면 기댈 곳은 의사 밖에 또 누가 있겠는가. 어느 순간 환자의 생사가 의사에게 맡겨진다면 하늘에 기도하면서 수술을 담당하는 집도의에도 환자의 가족은 기도한다. “제발 살려달라고” 그만큼 의사의 중요성은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하는, 보호받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의사는 어쩌면 하늘이 내린 직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많은 사람이 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바라는 그냥 단순한 사명감이 투철한 사람들이 아니란 말이다. 의사가 되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공부하는 시간으로 할애해야 하는지 알기에 환자가 아닌 사람도 의사라고 하면 존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의사는 선진국과 비교해도 가장 돈을 많이 번다고 한다. 외국의 의사와 수입을 비교할 때는 그 나라 의사 소득이 노동자 평균 임금과 비교해 어느 정도인가를 본다고 한다. 그 결과를 보더라도 한국 의사들의 수입은 OECD 국가 중 단연 1위라고 한다. 그런데도 파업한다? 전 세계에서 소득 수준이 가장 높다고 알려진 미국 의사보다 한국 의사가 돈을 더 많이 번다? 그런데 파업에 동참하는 전공의라고 하는 의사는 25% 수준이다? 25%는 수입이 적다는 말인가? 그렇게 정부의 정책을 흔들고 있는 25%의 힘을 보여주기 위함이란 말인가? 국민 80%는 의대 정원을 늘리는데 의사를 양성하는 데 찬성한다는 의견은 무시해도 되는 그들만의 특권이란 말인가.
고령화 사회가 되다 보니, 결혼하려는 청년이 부동산 가격의 급격한 상승으로 결혼을 포기하니 소아과 의사가 폐업을 하고 의대 소아·청소년과는 폐과하는 상황도 본다. 그렇다고 해도 의사가 남아돌아 간다는 소리는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의사가 폐원하는 이유, 폐업하는 이유는 결국 돈 아니겠는가? 세상에 돈 싫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실정이 그렇기 때문과 다른 이유가 있다면 해외 오지를 다니면서 아픈 이들을 치료하는 의사들은 모두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란 말인가?
의사들이 철저하게 자본주의 방식으로 능력에 따라 돈을 벌고,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실력을 행사한다면 우리 사회가 의사들에게 준 특권도 내려놓아야 공정하지 않은가 생각다. 환자는 자신의 병을 어떻게 진단하고 치료해야 할지 판단할 수 있는 전문성이 없으므로 전문가인 의사에게 결정을 위임하는 것 아닌가.
따라서 의사는 환자를 위해 최선의 결정을 내려야 하며 높은 수준의 직업윤리를 약속하고, 환자와 사회는 의사에 대한 높은 수준의 신뢰와 존경으로 보답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의료전문가인 의사와 환자가 맺은 사회적 계약이고 정의라고 할 것이다. 정의로움은 심장이 뛰고 있음을 증명하는 보이지 않는 가치이면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무게를 가늠하기 힘든 의사들만이 가지는 정신세계이기 때문이다.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라는 내용은 서약 내용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의 생명을 볼모로 의사가 가진 의술을 무기화한다는 내용도 존재하지 않는다. 건강을 앞세워 의사 수를 늘리는 데 반대해야 한다는 내용도 이에 해당하면 사직서를 제출할 수 있다는 내용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른 것은 모두 몰라도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집단으로 행동하는 그들의 양심은 옳은 일이기에 모두를 걸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통에도
환자를 지키는 의사들의 정신세계를 잊지 않기를
의사라면 적어도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마음에 새기며 의사로서의 생업을 시작할 때 자신이 심장에 품었던 소명감이 어떠했었는가를 잊지 않아야 한다. 파업은 피 끓는 젊음의 상징이 아니다.
대다수의 많은 의사가 이에 동참하지 않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을 손가락질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누구도 그 손가락 끝의 대상을 보지 않고 그에게 힘을 실어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공부하고 연구하고 자기 계발을 통해 치열하게 살아왔기에 환자를 치료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오로지 돈으로만 생각해 의대 증원이 자신의 미래 세계에 있어 초라한 생활과 빈곤한 삶을 가져다줄 것으로, 예측하듯 하는 행동은 국민을 정말 개, 돼지 정도로 밖에 취급하지 않는 몇몇 의사들의 수준과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일 뿐, 어떤 의미도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나이에 따라 삶의 속도를 이에 비유하곤 한다. 50대 세대는 시속 50km의 인생을 60대 세대에는 60km로 빨라는 진다는 것이다. 현재 의대 정원 2000명을 증원한다고 해도 대학과 수련 과정을 거쳐도 대략 10년 후가 된다고 한다. 지금 의사협회에서 의대 정원수 확대에 반대하는 이들도 모두 50대이거나 그보다 많거나 젊다고 해도 60km 속도로 세상을 살아갈 사람들이다. 인생은 60부터라고요? 언제나 준비해야 한다. 사람은 모른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의사들은 말한다. 잘 먹는 것보다 웰 다잉에 투자하라고, 그러면서 의사는 죽음 앞에 놓여 있는 환자를 살리는 의술을 펼치는 사람들이다. 또 잘 죽는 법을 가르치는 것도 의사가 하는 일이다. 그렇게 조언하는 명의들이 퇴역하는 날 그들의 손에도 환자의 손도 빈손이 된다.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전쟁 중에도 포탄이 병원에 처박혀 치료받으려던 환자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아야 하는 의사들이 세계 곳곳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활약하고 있다. 그들에게 돈이 소중했다면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그곳에 있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 누구나 늙는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가치는 자기 삶에 책임을 지는 것 아니겠나 생각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겐 자신의 죽음과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가 없다. 그러므로 결국 사람은 사랑으로 사는 것이란 사실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행형의 표기를 한다면 ing ‘○’의 위력이 걸려 있지 않는가? 그게 사랑이라면 부디 고통에 절규하며 삶을 포기하지 않는 환자들의 손길을 외면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