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들어보는 그 이름 '간첩'
위장 탈북 여간첩의 10년에 걸친 대담한 간첩 활동! 그간 군 당국은 무얼 했나?
2008-10-02 김희준 기자
처음 공작원을 시작하면서 붙잡히기까지…
이번 간첩사건의 주범인 원정화가 걸어온 간첩행각은 한편의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15세였던 1989년 특수부대의 남파 공작 훈련을 시작했으나 1992년 훈련 도중 부상을 입고 불명예 제대를 당한 그녀는 절도 혐의로 총살 위기까지 처했지만 출신 성분이 좋았던 탓에 겨우 총살 위기를 모면하고 1998년부터 다시 남파공작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공작원'이라는 이름으로 철저한 교육을 받은 후 그녀는 중국에서 남한사업가 7명을 비롯, 탈북자 100여 명을 북한으로 압송하는 데 관여했고 2001년 남한 사업가의 아이를 임신함과 동시에, 임신 상태로 남한 사람과 혼인하는 조선족으로 위장하면 간첩으로 의심받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틈새를 이용, 그 해 10월 남한에 입국하는 데 성공했다. 그녀가 처음 수행한 일은 주한 미군기지의 모습을 촬영한 후 북한으로 보내는 것이었지만, 빼어난 외모와 활달한 성격을 무기 삼아 서울의 한 결혼정보업체로부터 여러 명의 군 장교를 소개받은 후 군 장교들을 이용, 그들에게서 군 정보를 조금씩 빼내 북측에 전달해왔다. 또한 원정화는 2006년 9월부터 2007년 5월까지 원정화는 군부대를 돌며 안보강사로 활동해왔다. 그 활동은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의 지령에 따른 것이었는데 탈북자 후원단체를 찾아가 북한에서 교도관을 한 경험을 통해 북한 체제에 관한 안보 교육을 할 수 있다고 자신의 경력을 속여 강사로 추천 받았다. 그녀의 군 안보강연은 50여 차례 이어졌고 그녀는 안보강연 도중 대담하게도 북한에서 자체 제작한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영상물을 장병들에게 틀어주었다. 그 영상물 안에는 북한군의 행진, 김일성을 찬양하는 카드 섹션과 노래, 북한에서 진행된 아리랑 축전과 그 밖에 북한 주민들이 평소 주체사상 교육을 받을 때나 볼 수 있을법한 내용들이 모두 들어 있었으며 심지어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은근히 정당화시키는 내용도 들어가 있었다. 영상물 내용에 관해 약간 의구심을 가지는 부대도 있었지만 정식으로 대한민국의 신분을 얻은 탈북자가 이러한 영상물을 틀어준다는 것과 간첩이라면 오히려 더 조심스러웠을 부분을 대담하게 진행하는 모습을 통해 그녀는 약간 수상한 정도의 탈북자였을 뿐, ‘간첩’의 ‘간’자를 의심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편 안보교육 군 장교들의 이메일을 해킹해 그들의 정보를 빼냈으며 결혼정보업체를 통해 만난 김 모 소령에게 접근, 그에게서 군사 기밀을 빼내려 했고 그를 북한으로 압송하기 위해 중국으로 함께 떠날 것을 제의했지만 거절당하기도 했다. 특히 원정화와 동거까지 하면서 그녀의 신분을 알고도 당국에 신고하지 않은 혐의로 구속된 육군 모 부대 황 대위는 국군 장병들의 정신교육을 담당하는 정훈장교라는 점에서 더욱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정훈장교까지 포섭을 당할 만큼, 그녀의 주도 면밀한 간첩 행각에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군 당국마저 보안에 구멍이 뚫린 사실이 밝혀지면서 군 당국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뒤늦게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고 안보체계를 다시 재정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라는 비난은 피하기 어렵게 됐으며 그간 북한으로 흘러간 정보는 어떻게 사후 처리를 할 것인지 아직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히지 않은 상태다.
그녀의 간첩 생활이 쉬웠던 이유는? 군당국, “우리도 할 말 있다”
그녀는 어떻게 이렇게 쉽게 남한에서 오랫동안 간첩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우선 지난 2001년 조선적으로 위장해 남한 남성과 결혼한 원정화의 입국이 더 쉬웠던 이유는 그녀가 임신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국정원에 탈북자로 위장 신고한 탈북자들은 정부 합동 심문기관의 조사를 받은 후 하나원에 입소, 8주 가량의 사회 적응 교육을 받게 되며, 그 후 국내 정착 후 관할 경찰의 동향 파악과 지원 절차를 거치도록 되어 있다. 원정화는 임신 상태에서 위장신고 직후 합동 심문 과정을 무사 통과했으며 하나원에서의 사회 적응 교육도 무리 없이 받았다. 하나원 퇴소와 동시에 합법적 대한민국 신분을 얻게 된 원정화는 정부로부터 9000만원이 넘는 정착금과 생계비를 지원받았으며 이러한 각종 지원금은 결과적으로 그녀의 간첩 활동비로 쓰인 꼴이 됐다. 그녀의 실체가 드러난 8월 27일, 그녀의 신분 세탁 및 정부 지원금을 통한 간첩 활동도 놀라웠지만, 당국의 대공 역량 수준이 과연 어디까지 추락했는지에 대한 의구심도 함께 제기되었으며 원정화가 정보 당국의 조사를 빠져나간 뒤 뒤늦게 7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서야 적발된 배경은 정부가 대북 관계만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대공 분야에 있어서는 거의 방치만 해왔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함께 제기되었다. ‘햇볕정책’이라는 미명 아래, 대공작전은 지난 10년간 유명무실화 되어버렸고 심지어 간첩을 잡았을 경우, 최대 3천만 원이라는 포상금은 고사하고 간첩을 잡았다는 이유로 따가운 질책과 시선을 받아야 했기에, 간첩은 지난 10년 동안 대중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갔다. 10년 전만 해도 초등학생들에게 교육하던 간첩의 모습, 바지에 흙을 묻히고, 밤에 돌아다니고 등의 수상한 모습들은 간데 없고, 이제는 백주대낮에도 버젓이 일반 사람들과 함께 다니고 행동한다는 사실에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간첩이 방치된 데는 무엇보다 대공수사를 담당하는 경찰과 국정원 직원 인력의 감축을 들 수 있다. 김대중 정권인 2000년 807년이던 전국 보안수사 담당 경찰은 현재 374명으로 50% 이상 감축된 상황이며 그 밖에 구조조정 명목으로 일선 경찰서 보안과 폐지, 광역 보안수사대 감축 등으로 인해 대공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관련 경찰은 인원이 줄어든 만큼 야근을 밥 먹듯이 해야 하고 간첩용의자 미행, 내근업무 등을 줄어든 인원으로 감당해야 하는 고통 속에 근무를 계속하고 있다. 특히 2005년 경찰서 산하 공안문제연구소의 해체는 대공업무의 질을 저하시킨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간 북한의 방송이나 인쇄물 등을 취합해 분석해 국가보안사범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여부를 판단해 온 공안문제연구소는 북한의 강력한 요구로 폐지됐으며, 그 후 국가보안법의 위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기관 자체가 없어졌기에 간첩 및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이 마음 놓고 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것. 원정화가 각 부대를 돌며 북한에서 제작한 영상물을 대담하게 틀었던 것도 이에 무관하지 않다. 한편 국정원 및 검찰 역시 안보수사국 및 대검 공안부의 인력이 줄어들면서 국내 대공수사능력은 ‘햇볕정책’을 계기로 현저히 떨어지고 말았다.
탈북자 관리, 이대로 좋은가?
또한 이번 원정화 간첩 사건은 정부가 탈북자에 대해 어떻게 관리를 해왔는지에 대한 문제점을 드러냄과 동시에 탈북자의 사회 적응교육이 과연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보완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전철우, 김혜영 등 그간 탈북자들의 성공 사례로 우리는 많이 보아 왔지만, 그만큼 실패한 후 범죄의 나락에 떨어지는 탈북자의 수 또한 만만치 않다. 정부는 탈북자들에게 정착금과 임대주택을 마련해주고 사회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 여러 가지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지만 출입국과 취업, 거주 확인 등 제대로 실시해야 할 탈북자에 대한 관리는 소홀해 탈북자의 범죄는 날로 증가하고 있다. 특히 지적이 이어지고 있는 부분은 탈북자들의 대공 용의점에 대한 심사 및 사후관리 부분. 원정화의 경우처럼 쉽게 간첩 활동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어떤 탈북자들은 몇 개월이 지난 후 다른 나라로 출국해 그 나라에 망명 신청을 하거나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는 탈북자는 그냥 맨몸으로 가진 않을 것이다. 남한의 주요 정보가 이 시간에도 고스란히 북한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원정화 사건을 계기로 대공작전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려놔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지만, 국가보안법 폐지를 진지하게 논의하던 때가 엊그제인데 이명박 정부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무리하게 공안정국을 다시 조성하고 있다는 반대 의견 또한 만만치 않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햇별정책’을 통해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지만 정작 우리의 대공 시스템은 그 햇별정책으로 인해 10년 동안 거의 중단된 상태였다. 탈북자 출신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는 성명을 통해 “이번 원정화 사건이 탈북자 사회에 좋지 않은 이미지를 심어주지 않을까 크게 우려된다”면서 “탈북자 속에 간첩이 있는 것이 아닌 간첩이 탈북자로 위장한 것이 정확하다”고 말해 탈북자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2007년까지 집계된 탈북자 수는 모두 1만 2248명. 이중 여성 탈북자가 65%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해를 거듭할수록 탈북자의 수가 크게 증가하고 있는데 이 중 직파간첩이 적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직파간첩이라는 사건 외에도 탈북자 가운데는 살인, 강도, 강간 등의 범죄를 저지른 탈북자들이 899명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돼 정부의 탈북자 관리 및 정착지원제도에 대한 개선이 요구되고 있다. 탈북 후 수도권 거주를 희망하는 이들에게 서울과 경기, 인천 임대주택을 중심으로 임대주택을 분양 받아 생활하고 있지만, 현재 탈북자들에 대한 지원과 관리는 거기까지다. 탈북자의 신변보호를 위한 경찰인력, 탈북자 지원을 위한 지자체 프로그램, 취업 지원을 위한 시스템 등의 부족으로 자유 민주주의를 꿈꾸며 남한으로 내려온 탈북자들을 오히려 북으로 내모는 꼴이 되고 있다. 이번 원정화 간첩사건을 계기로 탈북자들에 대한 인식이 곱지 않게 된 것은 기정 사실이지만 탈북자들 중 극히 일부일 뿐, 탈북자들은 엄연히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동시에 철저한 사후 관리 프로그램 마련이 그 어느 때 보다 절실하다. 또한 ‘간첩’이라는 단어를 오랜만에 떠올려 준 이번 원정화 사건을 통해 군 당국은 소홀한 대공 체계를 다시 한번 재정비하고 더 이상의 정보가 북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철저히 대비해야 할 것이다. 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