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날까지 이 길에서 배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 74호, 대목장 신응수
2008-12-29 이나라 기자
오늘날 사찰이나 개인의 집을 목조로 짓는 것으로 그 기술의 명맥이 전수돼 오고 있는 대목장은, 그 기법이 엄격히 전승되기 때문에 기문(技門)이 형성돼 있다. 기문은 기술로서 한 가문이 완성되는 것으로, 기문에서의 대목장은 절대권위를 누린다. 대목장 기능보유자로는 경복궁을 중건할 때 활약했던 도편수 최원식-조원재-이광규로 이어지는 기문의 계승자 신응수씨가 있다.
이 길이 내가 가야할 길
궁궐 건축의 대부로 통하는 신응수 대목장은 지난 1975년 창덕궁 연경당 보수공사의 도편수로 참여하면서 30년 넘게 창경궁, 창덕궁, 경복궁 등의 궁궐 공사를 지휘해왔다. 수원 화성 장안문, 불국사, 부여 무량사 극락전 등 문화재와 사찰의 복원 및 보수 현장에도 늘 그가 있었다. 충북청원 출신인 신 대목장이 목수 일을 시작한 것은 열일곱 살 때,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에 올라와 사촌형 밑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이후 최초의 중요무용문화재로 지정됐던 이광수 대목장을 만나게 되면서 실질적인 목수 일을 접하게 됐다. “그때만 해도 기술을 배워야만 먹고 살 수 있었다. 처음에는 대패질조차 서툴렀지만 배워야 살 수 있다는 절실함에 열심히 일했다. 그러다 운이 좋게도 최고의 스승을 만나게 됐다.” 그러나 당시 목수 일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실제로 일반 한옥을 짓는 목수들은 대부분 가난을 면치 못했다. “그때만 해도‘목수는 항상 나무를 깎아버리기 때문에 못 산다’는 말이 있었다. 흙이 얼지 않으려면 봄은 돼야 하는데, 그렇게 시작한 공사는 가을은 돼야 마무리가 된다. 그러다보니 일이 많지 않았고, 항상 가난했다.” 그렇게 가난을 이겨내 오던 신 대목장에게 변화가 시작된 것은 지난 1960년 이후. 당시 숭례문 공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문화재 건립의 움직임이 시작되면서 일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신 대목장은‘이 길이 바로 내가 가야할 길’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우리 때야 손으로 직접 다 했지만, 지금은 기계가 많은 고생을 덜어주고 있다. 하지만 어쨌든 손에 익어야 한다. 망치질부터 시작해서 모든 일이 손에 기억돼야 한다. 손재주라는 것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 깎고 만들어봤는가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가짐은 그대로 살아있어야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그 날의 기억. 지난해 2월 국보 1호 숭례문 화재 당시, 신 대목장은 묵묵히 참상의 현장을 지켰다. “세월이 참 빠른 것 같다. 비보를 전해 듣자마자 바로 현장에 달려갔는데, 그야말로 참담함 그 자체였다. 경험 부족이지 누굴 탓하겠는가. 안타까운 심정은 누구나 똑같은 것이고, 다시는 있어서도 안 될 일이다.” 그로부터 1년여가 흐른 지금, 신 대목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안타까움은 마찬가지라고 토로한다. “당시만 해도 국민들의 마음은 정말 대단했다. 그런데 1년도 안돼서 벌써 그 마음이 사그라진 것 같다. 나무 하나만 해도 수백 년의 가치를 지닌 것인데, 숭례문 복원이 끝날 때까지 당시의 그 마음이 그대로 살아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정신으로 감시, 감독이 되어야 한다.” 한편, 지난해 12월, 강원도 삼척에서는 숭례문과 광화문 복원에 사용될 준경묘 금강소나무 벌채작업이 진행됐다. 신 대목장 역시 그 자리를 지켰다. “4일간 벌채작업이 진행됐다. 이번에 베어진 금강소나무들은 수령이 110년 이상으로 크기도 크기지만, 재질이 뛰어나 문화재의 중요한 부재로 쓰이게 될 것이다.” 문화재청은 이번 달부터 벌채작업이 끝난 금강소나무들을 서울로 옮길 계획이다. 이렇게 옮겨진 금강소나무들은 건조작업을 거쳐 광화문은 올 하반기 이후, 숭례문은 2010년쯤 복원 작업에 사용될 예정이다. “예전부터 지속적으로 숭례문 실측작업을 진행해왔기 때문에 자료는 충분하다. 대들보의 경우 반은 타고 반은 남아 있어 완전히 소실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복원하는데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이제 일제치하 당시 변형됐던 부분들을 어떤 식으로 복원하느냐가 관건이 될 것 같다.”
기왕 들어섰으면 끝장을 봐야지
현재 신 대목장은 지난 1991년 시작된 경복궁 복원의 마지막 단계인 광화문 복원공사를 지휘하고 있다. “원래 2009년 말까지가 완공 계획이었는데, 발굴이 늦어지다 보니 내 추측으로는 2010년 중반까지 가야하지 않을까 싶다. 쉰 살에 시작해서 이제 일흔이 다 되어가니 감회가 새롭다.” 한편, 지난해 10월 신 대목장은 한 달간‘오래된 궁궐, 새로운 궁실’이라는 주제로 생애 첫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에는 경복궁의 주요 건물과 그동안 그의 손을 거친 국보급 전통 건축물 12점의 모형, 각종 건축부재 20여 점이 전시됐다. 모형은 신 대목장이 고건축박물관에 세우고 싶다는 꿈을 안고 10여 년 전부터 하나씩 만든 것들이다. 이와 함께 전시회에서는 광화문의 복원과정도 엿볼 수 있었다. “경복궁 복원의 마지막 단계이기도 하고, 마침 광화문을 복원하고 있으니까 복원에 들어가는 목재들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완성된 모습을 보게 되는 시민들은 저게 소나무인지, 소나무라면 과연 우리나라 것이 맞는지 알 도리가 없으니까 직접 선보이는 기회를 가져보고 싶었다. 실제로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시간들이 상당히 좋은 효과를 불러일으킨 것 같다.” 지금도 산림에서는 엄청난 벌초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신 대목장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다림을 버티지 못한다고 토로한다. “베어지는 만큼 심어야 하는데, 아마 베어지는 나무의 1/10도 못 심고 있을 거다. 50년 정도만 기다려도 그 나무가 크나큰 재원이 될 텐데, 우리에겐 나무를 심고 키워내는 기다림이 부족하다.” 이처럼 그가 문화재 건립과 복원에 있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서두르지 않는 마음가짐이다. 정확한 역사적 자료에 근거해야 하는 작업이니만큼, 사전에 많은 것을 준비하고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신 대목장의 의견이다.
50년의 목수인생을 살아왔지만, 지금도 한국 건축물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는다는 신 대목장은‘죽는 날까지 이 길에서 배운다’는 마음가짐을 지켜가겠다고 했다. 기왕 들어섰으면 끝장을 봐야한다는 결심이 바로 장인정신이 아니겠냐는 그의 뼈 있는 말 속에서 한국 건축물의 아름다운 울림이 전해지는 듯하다. 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