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통합 일깨우고 떠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각박한 세상에 용서와 사랑하는 법 일깨워

2009-03-02     장정미 기자
한국 가톨릭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온 김수환 추기경이 지난 2월 16일 오후 6시12분께 향년 87세로 강남성모병원에서 선종(善終ㆍ서거를 뜻하는 천주교 용어)했다. 1951년 사제품을 받은 고인은 1966년 초대 마산교구장을 거쳐 1968년 대주교로 승품한 뒤 서울대교구장에 올랐다.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인 최초 추기경으로 서임된 고인은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위원장 등을 역임한 뒤 1998년 정년(75세)을 넘기면서 서울대교구장에서 은퇴했다.


故 김수환 추기경의 ‘발자취’
김 추기경은 1922년 5월 8일 대구 남산동 독실한 구교우 집안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 김보현 요한은 1868년 무진박해 때 충남 연산에서 체포돼 서울에서 순교했다. 천주교로 인해 몰락한 집안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김 추기경의 부친 김영석 요셉은 옹기장수로 전전하면서 가난하게 살았다. 김 추기경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종하자 모친인 서중하 마르티나는 옹기와 포목행상을 하며 엄격하게 아이들을 키웠다.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온 김 추기경은 5년제 소신학교(小神學敎)인 동성상업학교(지금의 동성고등학교) 을조(乙組)에 입학했다가 ‘황국 신민으로서 그 소감을 쓰라’는 시험 문제에 “나는 황국 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썼다가 교장실에 불려가 크게 야단을 맞았다. 그 길로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오라는 대구대교구장을 명령을 받고 1941년 4월 도쿄 조치(上智)대학 유학길에 오른다. 2차 세계대전으로 잠시 휴학했던 김 추기경은 해방 이후인 1947년 9월 혜화동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복학해 마치고 1951년 9월 15일 대구 계산동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1966년 4월 부산교구에서 분리, 새 교구로 설립된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됐다. 1968년 5월29일 대주교 승품된 그는 제12대 서울대교구장에 올랐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69년 4월28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하여 추기경 서임됐다. 그의 나이 47세로, 전 세계 추기경 134명 가운데 최연소였다. 교황을 보필하고 교황 선거권과 피선출권을 갖는 고위 성직자라는, 자리의 높고 낮음을 떠나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크다는 반증이었기에 한국 천주교회 2세기만의 큰 경사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을 역임했고, 주교회의 산하 여러 분과 위원장과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맡았으며, 1975년 6월 1일부터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했다. 또 1970년에는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67년 이후에는 한국 대표로서 여섯 차례에 걸쳐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직언과 조언, 대통령과의 질긴 인연

현대사의 산 증인이기도 한 고(故) 김수환 추기경. 그의 대통령들과의 인연도 관심 깊게 살펴볼 만하다. 그는 직언을 불사했으며 필요할 땐 ‘단비’와 같은 조언을 마다하지 않았다. 청와대에서 만나자는 전갈이 오면 ‘제발 날 그만 불렀으면…’ 하는 마음부터 들게 하는 대통령도 있었다”고 김 추기경은 생전에 회고했다. 이 같은 인연들은 장면 전 총리부터 시작된다. 김 추기경은 제2공화국에서 총리를 지낸 장 전 총리와 고등학교 시절 사제지간으로 인연을 맺었다. 장 전 총리는 그가 졸업한 동성상업상교의 교장을 맡았고, 직접 수신(修身) 과목을 가르쳤다. 김 추기경은 장 전 총리에 대해 “내가 아는 장 박사님은 무능하고 실패한 정치인이 아니다. 그분은 평생 거짓을 모르고 사셨을 뿐만 아니라 공직을 십자가로 여기셨다”며 “민주주의 역사가 일천한 이 땅에 그 뿌리를 활착시키느라 애면글면했다”고 평했다. 서울대교구장를 맡고 난 뒤 김 추기경은 본격적으로 정치인들과 인연을 이어갔다. 민주화에 투신했던 그였기에 박정희 전 대통령과 대립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 추기경은 독재정권의 탄압에 맞서 1972년 장기 독재체제를 비판하는 ‘현 시국에 부치는 메시지’를 발표하는 등 여러 차례 박 전 대통령과 부딪쳤다. 그는 3선 개헌 후 TV 생방송 미사에서 박 전 대통령의 ‘비상대권’과 관련해 “국가안보에 위험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이라고 강력히 성토했다. 독재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목숨을 건 쓴소리였다. 하지만 무턱대고 박 전 대통령을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을 “우리 강산 구석구석 나무 한 그루에까지 애정을 쏟은 분”이라고 표현하며“제3기 집권에 대한 욕망을 꺾고 나머지 과제를 후임자에게 넘겼더라면 지금쯤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국부가 됐을 것”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는 1983년 3시간여 마주앉은 것이 인상 깊었다고 자주 회고했다. 첫 만남은 어색했다. 80년 정월 초하룻날 새해 인사를 하러 온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에게 추기경은 “서부 활극을 본 것 같다.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라고 했다. 누구도 할 수 없는, 12·12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이었다. 1987년 6월 13일 명동성당에서 농성중인 학생들을 연행하기 위해 경찰이 병력투입을 통보하러 왔을 때는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시한부 농성 중인 신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그 신부들 뒤에는 수녀들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연행하려는 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라는 말로 민주성지를 지켜냈다. 김 추기경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서로 민주화 운동을 의논하기도 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 김 추기경은 ‘아, 이젠 목소리 높여 민주화를 촉구하지 않아도 되고, 정권과 팽팽하게 대립할 필요도 없겠구나’며 안도의 숨을 쉬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에도 김 추기경은 최고 권력자에게 할 말은 하는 균형감각을 잃지 않았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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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어록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모르는 일입니다’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부끄럽게 살아온 그의 죽음 앞에 새롭게 태어나 그가 못다 이룬 일을 뒤에 남은 우리가 이룬다면 그의 죽음은 절대 헛되지 않으리라 확신합니다.”(1987년 1월 26일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 발생 뒤 명동성당에서 열린 ‘박종철군 추모 및 고문 추방을 위한 미사’강론 중)
▲“교회입장은 될 수 있는 대로 남북관계가 정말 호전되고, 이래서 정말 정부도…이산가족도 서로 만나게 되고 남북 교류도 있고, 이래서 점진적으로 우리가 남북이 좀 평화롭게 통일을 향해서 뭔가 노력하는 그런 것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 소망이죠.”(1989년 7월 1일 서경원 의원 방북사건과 관련한 기자회견 중)
▲“사형은 용서가 없는 것이죠. 용서는 바로 사랑이기도 합니다. 여의도 질주범으로 인해 사랑하는 손자를 잃은 할머니가 그 범인을 용서한다는데 왜 나라에서는 그런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까?”(평화방송. 평화신문 1993년 새해 특별대담 중 사형폐지를 주장하며)
▲“현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이 언제부터 시작됐느냐고 물으면 어머니 태중에 임신된 순간부터라고 말할 것입니다. 내 생명이 그렇다면 남의 생명도 그렇게 인정을 해야겠지요.”(평화방송. 평화신문 1993년 신년 특별대담 중 낙태를 비판하며)
▲“그럼 사는 길은 제가 볼 때는 자기를 여는 겁니다. 그것만이 북한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그들이 그렇게 되도록 도와야 되고요. 그래서 북한이 정말 필요한건 지금 미국이라든지 일본하고 수교를 하는 거라고 봅니다.”(북한의 NPT(핵무기비확산조약) 탈퇴 이듬해인 1994년 평화방송 신년대담에서 북한 핵문제 청산과 개방, 북한과 미국, 일본의 국교정상화를 이야기하며)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무슨 보복이나 원수를 갚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역사 바로 세우기를 위해섭니다. 책임자는 분명히 나타나야 하고, 법에 의해 공정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평화방송. 평화신문 1996년 신년 특별대담 중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또 평양교구의 교구장 서리로 있기 때문에 정말 목자로서 가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고 또 의무입니다. 사실은... 가봐야 하는게 의무인데, 그걸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대단히 안타깝습니다.”(1998년 평화방송 신년대담 중 방북에 대한 열망을 나타내며)
▲“삶이 뭔가, 삶이 뭔가 생각하다가 너무 골똘히 생각한 나머지 기차를 탔다 이겁니다. 기차를 타고 한참 가는데 누가 지나가면서 ‘삶은 계란, 삶은 계란’(웃음)”(2003년 11월18일 서울대 초청강연 중)
▲“누가 나한테 미사예물을 바칠 때 자연히 내 마음이 어디로 더 가냐면 두툼한 쪽으로 더 가요.‘아니’라고 하는 게 자신 있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안 그래요. 나는 두툼한 데 손이 더 가요. (웃음) 그리고 어떤 때는 무의식중에 이렇게 만져보기도 해요.”(2005년 부제들과의 만남에서)
▲“세계 앞에 한국이, 한국 사람들이 고개를 들 수 없는... 아주 부끄러운 일이에요. (한참을 우심) 하느님이, 평소에 느꼈지만 하느님이 우리 한국 사람에게 너무 좋은 머리를 주셨어요. 그런데 그 좋은 머리를 좋게 쓰지 않고 그렇게 했으니... (눈물)”(2005. 12. 황우석 박사의 논문조작 사실이 드러난 뒤 평화방송 평화신문 성탄 특별대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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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1922년=5월8일 대구에서 5남3녀 중 막내로 출생
▲1933년=대구 성 유스띠노 신학교 예비과 입학
▲1941년=서울 동성상업학교 졸업, 일본 도쿄 상지대학교(Sophia University) 입학. 철학 전공
▲1942년=일본 도쿄 상지대학 문학부 철학과 진학
▲1944년=제2차 세계 대전으로 학업 중단
▲1947년=성신대학(1951년까지 현 가톨릭대학 신학부)에서 신학 전공
▲1951년=서울가톨릭대 신학부 졸업. 사제서품·대구대교구 안동본당 주임
▲1953년=대구대주교 비서신부
▲1955년=대구 대교구, 김천시 황금동 천주교회 주임신부 겸 성의 중·고 교장 (~1956년)
▲1956년=독일 유학, 뮌스터대학교 대학원 사회학 전공 (~1963년)
▲1964년=주간 가톨릭시보(현 가톨릭신문) 사장 (~1966)
▲1966년=주교 서품. 마산 교구장 착좌
▲1967년=6차에 걸쳐 교황청 시노두스 한국대표로 참석
▲1968년=서울 대주교 승품. 제12대 서울대교구장 착좌
▲1969년= 4월28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 서임
▲1970년=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1차 역임. ~1975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
▲1972년=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준비위원장 (~1973년)
▲1974년=서강대학교 명예 문학박사. 세계주교회의(SYNODE) 위원
▲1975년=평양교구장 서리 겸임 (~1998년)
▲1977년=미국 노트르담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1981년=한국 천주교주교회의 의장 (~1987년)
▲1985년=서강대 재단이사장
▲1988년=평화신문 발행인. 일본 상지대학교 명예 신학박사
▲1990년=고려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미국 시턴홀대 명예 법학박사
▲1994년=연세대학교 명예 신학박사
▲1995년=타이완 후젠가톨릭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1997년=필리핀 아테네오대학교 명예 인문학박사
▲1998년= 5월29일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 퇴임. 아시아주교회의 공동의장. 통일고문
▲1999년=10월‘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출간. 서울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자녀 안심하고 학교 보내기 운동’ 초대이사장
▲2000년=7월‘참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출간. 제13회 십산상(성균관대학교). 제2회 인제인성대상(인제대학교)
▲2001년=대십자공로훈장(독일). 사이언스북스타트운동 상임대표. 과학사랑나라사랑 상임대표
▲2002년=칠레정부 베르나르도 오히긴스십자훈장
▲2003년=생명21운동 홍보대사
▲2009년=2월 16일 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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