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림에스제이테크 김석진 회장

77세, 현장에서 뛰고 있는 사나이

2010-01-05     이태향 기자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시작은 사실상 보잘 것 없다. 게다가 그들은 실패를 자주 반복한다. 대략 평균적으로 3.2번의 파산을 경험하고, 그들은 스스로 올바른 기획을 찾고 성공하기 전에 공통적으로 실패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통상적인 견해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에 대한 연구를 보면, 그들이 금전적으로 성공한 가장 큰 요소는 결코 돈이 아니라 그들이 돈을 벌고 지킬 수 있도록 만든 그들의 개인적 자질이라는 점이 주목할 만한 것이다.

장동미 보도국장

눈앞의 이익보다는 신뢰를 얻는 것, 그리고 그것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정신
군대 제대 후 김석진 회장(한림에스제이테크(주))은 부평에 있는 경찰전문대에 시험을 보았다. 그때 그의 나이는 26세였고, 그의 수험번호는 26번이었다. 그 절묘한 숫자 때문에 아직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지만 그 시험에 그는 낙방했고, 어쩌면 그 덕분에 기업가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무조건 직장을 구해야 산다는 생각으로 그는 청과조합에 취직하게 된다. 서울역 뒤편 서부역 쪽에 있었던 그 직장은 썩 좋은 환경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긴 담뱃대를 물고 “일을 할 수나 있겠나?”라고 물어보던 노인이 그 회사의 사장이었다. 예나지금이나 호리호리한 몸이었으므로 그리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벽돌을 져 나르는 일을 했고, 남들이 한 번 나를 때 그는 두 번 세 번을 날랐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일당이 더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은 그를 나무랐다. 하지만 열성적으로 일하는 그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고, 결국 사장으로부터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언제 어디에 있더라도 자기하기 나름”이라는 믿음을 얻게 되는 순간이었다.

골판지를 합쳐서 가방 안에 넣는 일을 하는 작은 회사를 다닐 때도 청년 김석진의 성실함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일을 즐겨 능동적으로 하는 편이었고, 새벽같이 일어나 운동 삼아 일을 하는 그를 당해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회사의 말단에서 영업을 할 때도 회사 돈에 관한한 정확하고 신실했다. 회사를 운영하는 책임자가 자신의 가족보다 그를 더 신뢰할 정도였다고 하니 상상할 만하다 할 것이다.

성실함과 정확함을 이력으로 살아가다
이러저러한 일을 가리지 않고 한 것이 그의 견문을 넓혀주는 계기가 되었다. 크라우드지(크라프트지, kraft paper)를 만드는 대흥제지의 상무가 스카웃 제의를 해왔다. 그때 그는 망설였다. 지금 몸담고 있는 회사를 버리고 경쟁회사로 가기에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기 때문에 차라리 독립해서 회사를 세우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없는 자금을 융통해서 무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6개월 정도를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 당시 경기도 광주에 직물공장이 너덧 군데 있었다. 그중 파격적으로 싼 가격에 나온 공장이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장을 인수해서 ‘삼공직물’을 설립했다. 비록 공동투자이긴 하지만 처음으로 그의 손으로 회사를 운영하게 된 것이다. 천호동에 있는 창고를 임대해서 직물기계 4대를 설치했다. 임대료를 내는 날이면 땅주인을 찾아가 직접 내곤 했었는데, 그의 성실함과 정확함에 감동한 땅주인 노인이 자신의 땅을 시세에 훨씬 밑도는 가격으로 사라고 권유했던 적이 있었다. 자금이 없어서 고사하자 심지어는 그 돈도 벌어서 차차 갚으라고까지 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의 성실한 태도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정도였다고 할 수 있겠다. 외국계 기업과 거래를 하면서 어음으로 결재하는 한국 기업의 관행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그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고 이런 방식을 교훈으로 삼았다.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하는 도전정신으로 친환경 포장의 리더 펄프몰드를 개발하다
김석진 회장은 일본에서 태어났다. 오사카[大阪]에서 사업을 하던 부친이 늑막염으로 한국에 들어오기까지 그도 거기에서 나고 자란 것이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면모는 그의 부친을 닮은 것이다. 대기업이 부도나고 한국경제가 휘청거릴 때도 그가 하는 사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머물러 정체되지 않고 변화를 시도하는 그의 도전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71년에 김석진 회장은 (주)한림엔터프라이즈(現 (주)한림에스제이테크)를 설립하고 전자제품 부자재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참고할 만한 모델이 없는 의뢰가 들어오더라도 그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필요한 자료를 찾아내고 개발해 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핀란드의 전자?전기기 회사인 노키아(Nokia)로부터 도면이 없는 개발의뢰를 받았을 때 그는 오히려 노키아가 보유하고 있는 일본 자료를 입수해서 그들이 원하는 제품을 개발할 수 있게 했다. 노키아와의 거래는 그의 사업에 하나의 전기를 마련했다. 재활용이 가능한 폐지를 활용하지 않으면 노키아와 거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친환경 펄프몰드를 개발 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사회에서 관심을 갖기 전부터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한 기술을 연구하는데 앞장서게 된 것이다. 국내기업 중 LG전자에 휴대폰 부자재를 납품하고 있으며 중국 시장진출에도 박차를 다하고 있다.

(주)한림에스제이테크는 현재 서울을 중심으로 파주와 함안을 잇는 제조라인을 가동하고 있다. 생산을 온라인화하고 건축자재 등 펄프몰드를 이용한 아이템을 지속적으로 연구 개발하여 환경오염의 원인을 줄이는 데 기여하는 선진적인 친환경기업이다. 오늘날 포장의 의미는 제품 보호기능과 판매촉진 기능을 가진 중요한 마케팅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출시된 제품을 소비자가 ‘뜯는’ 순간부터 발생하는 포장폐기물로 인한 환경오염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환경문제에 민감한 오늘날 (주)한림에스제이테크의 성과는 주목할 만한 것이고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CT&G(주)를 인수한 것은 김석진 회장의 야심찬 노력의 결과였다. 협력업체로서는 국내 최초로 실린더 헤드(Cylinder Head)를 개발했던 경험과 기술은 업계 최고의 경쟁력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CT&G(주) 부설 알미늄 주조기술 연구소’를 설립하여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응용한 최적의 금형설계 기술, 주조 공정기술, 알루미늄 용탕 처리 기술, 신 알루미늄 소재개발 등의 연구개발에 전념을 다하고 있다.

김석진 회장과 같이 자수성가한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첫째 그들은 빈손에서 시작했다. 가난했기 때문에 부에 대한 열망도 높고, 고생에도 익숙하기 때문에 웬만한 시련은 참고 견딜 수 있는 저력이 있다. 둘째, 그들은 절약정신이 몸에 배어 있다. 그래서 항상 기본적인 현금을 확보하고 있고 이러한 짠돌이 경영은 불확실한 오늘날 기업이 갖춰야 할 필수적인 경영방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그들은 필요한 곳에는 과감하게 쓴다. 자수성가형 부자들은 공익사업을 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혹독한 가난을 체험했기 때문에 돈의 가치보다 사람의 가치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넷째, 신용을 최고의 상도로 삼는다. 그들에게 있어 신용이란 약속의 개념을 넘어 신의와 봉사의 경지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거래처와 고객과의 관계에서는 서비스와 정직의 의미가 되고, 종업원들과의 관계에서는 가족주의의 의미로, 대사회적인 관계에서는 투명경영의 의미로 확장 될 수 있는 것이다.

평생을 지켜온 신용과 성실
김석진 회장은 직원들에게 항상 성실하고 정직하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거래하는 회사를 방문할 때 경비실에서부터 겸손한 자세로 인사하기를 당부한다. 그 자신도 자주 경비실에 앉아 회사를 오가는 사람들을 눈여겨본다. 세세한 일에까지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릴 정도이지만, 모든 일에는 중요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자재부에 가서 생산일자를 점검하는 것도 빠뜨리지 않는 일이다. 불용자재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지적하고 재고 제로운동을 회사의 기초로 삼게 하는 것도 성실과 정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김석진 회장의 기본 가치관이 반영된 것이다. 창업 이래 어떤 거래에서도 정해진 날짜를 어기지 않는 그의 신용은 은행가에서도 유명하다. 국민은행의 ‘명예지점장’이 된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고향은 경북 김천이다. 김천지역은 과일산지로 유명하다. 고향을 둘러보면서 김석진 회장은 친환경 소재로 과일포장용지를 개발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해 온 일에 대한 관심을 한시도 놓쳐본 적이 없는 그는 77세를 바라보는 지금도 현역이다. 아직도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불필요한 소비를 하지 않는 절제된 생활을 하면서도 고향의 노인정에서 봄가을로 야유회를 하면 보조를 하는 것도 잊지 않고, 어렵게 생활하는 부부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농장에서 기거할 수 있도록 선뜻 자리를 내놓기도 한다. 30여년 회사 터가 된 상수동에서는 자치회장을 맡기도 했다. 자주자주 노인정을 찾아가 이웃들의 삶에 허전한 부분이 없는지 챙기는 것도 김석진 회장의 일과 중 하나다. 하루를 인생 전부인 듯이 여기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나이. 김석진 회장의 사업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다. (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