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영혼을 깨우다- 홍기선 감독

“비뚤어진 세상을 필름에 담다”

2010-01-05     이민아 기자
1997년, 4월 3일 밤 10시경, 이태원 버거킹 화장실에서 무고한 한국청년이 살해당했다. 용의자는 미군속 아들 아더 패터슨과 재미교포2세 에드워드 리 두 명이다. 법정에서 그 둘은 “둘 중에 한 명은 범인이냐”는 질문에“그렇다”고 대답하면서 서로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등 사건을 지지부진하게 끌고 갔다. 결국 둘 다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피붙이를 어이없게 잃어버린 유가족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상처받은 이들의 그 찢어진 가슴속 검붉은 공동(空洞)에 홍기선 감독은 오늘도 묵묵히 필름연고를 바른다.

법과 사회정의의 사각지대를 조명하는 홍기선 감독
“나는 살고 싶다...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홍기선 감독作 영화‘선택’의 포스터 문구-

홍기선 감독은 1990년대부터 우리사회를 날카롭게 조명하는 작품을 만들어 왔다. 서울대 공대를 졸업한 그는 재학당시‘얄라셩’이라는 영화동아리를 통해 영화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또한‘서울영화집단’에 가입해 사회 만면에 자생하고 있는 부조리를 파헤치는 데 초점을 맞춰 다큐멘터리와 영화를 제작하며 폭넓은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1986년에는 농민들의 불우한 현실을 소재로 한 <파랑새>를 제작했고 이로 인해 공안당국에 끌려간 바 있다. 1989년에는 영화제작집단인‘장산곶매’를 창단하기에 이른다. 장산곶매에서 활동하면서 광주민중항쟁을 소재로 현대사의 비극을 그려낸, <오! 꿈의 나라>를 제작하였다. 광주에서는 <오! 꿈의나라>의 상영을 막기 위해 전남대학교 캠퍼스 상공에 경찰헬기가 뜨고 학생들이 영화가 상영되는 대강당을 지키고 서 있기도 했다. 이 때문에 영화법 전과2범이라는‘영광스런 훈장’을 달게 되었다. 그리고 1992년 데뷔작인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를 통해 처음으로 상업영화진영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홍기선 감독만의 감각으로 사회비판적인 메시지를 전했고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제29회 한국 백상예술대상 각본상을 타는 등 국내외 영화제에서 수상하게 된다. 그 후 오랫동안 활동을 하지 않다가 2003년에 <선택>으로 영화계에 돌아왔다. <선택>은 실존인물인‘김선명’씨를 모델로 하여 비전향 장기수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사상의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에서 자신의 신념을 45년 동안 지켜낸 김선명 씨를 통해 그들의 선택이‘옳다, 그르다’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누구나 사상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리고 2009년, 4년간의 조사와 시나리오 연구 끝에, <이태원 살인사건>을 제작한다. 1997년에 이태원의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서 벌어진 끔찍한 살인사건의 복잡 미묘한 정황들을 그려냈다. 그리고 용의자인 패터슨과 재미교포2세 에드워드 리를 인도하고 법정에 세우는 과정에서 미국과 한국의 미묘한 관계를 건드린다. 또한 <선택>에서 같이 작업했던 이맹유 작가와 다시 한 번 <이태원 살인사건>에서 호흡을 맞췄다. 시나리오를 개발하면서 홍기선 감독과 이맹유 작가는 함께 수많은 인터뷰와 취재를 통해 리얼리티를 살린 작품을 만들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 노력 끝에 2009년 9월 9일,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사라질 뻔 했던 미궁속의 사건을 세상에 다시 내놓는데 성공했다. 홍기선 감독이 운영하는 작은 술집‘선’,그곳에서 홍기선 감독을 만나 신년에는 어떠한 사회적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우리들의 상처를 치유할 것인지 들어 보았다.

Q. 서울대에 재학하시면서 ‘얄라셩’ 영화동아리를 조직하셨다. 그때 어떤 작품들을 주로 다루셨고 학생신분으로서 영화를 만들면서 겪었던 어려움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얄라셩이 만들어 진 것이 79년도였고 80년도 초반이었어요. 그때는 군부시절이어서 광주민주항쟁이 있었던 시절이어서 학생의 입장에서 학생들의 고민들을 주로 다루었죠. 얄라셩은 우리나라 영화써클의 효시입니다. 1960년대 김지하 씨를 중심으로 영화모임이 있었으나 영화학과가 아닌 일반대학의 영화써클로서는 최초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그 당시에 우리는 8mm필름을 이용해 직접 영화를 제작했어요. 8mm는 홈무비 형태의 영화를 제작하기에 적당한 것인데 그 필름을 이용해 영화를 찍고 녹음하고 편집하는 등 모든 것을 써클에서 했죠. 그런 기계들이 당시 대졸자 월급에 해당하는 20~30만원 대여서 학생들이 모두 돈을 모아서 기계를 마련했어요. 그렇게 해서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든 영화를 학교에서 상영하면서 그 매력을 알게 되었죠. 졸업하고 나서는‘서울영화집단’을 출범하게 되었는데 박광수, 김동빈, 김홍준, 송능한 감독들이 얄라셩 출신이면서 동시에‘서울영화집단’에서 같이 활동한 이들입니다.

Q. 1986년, 영화 파랑새를 제작하신 후, 영화법 위반으로 공안당국에 끌려갔던 경험이 있으시다 던데, 그때 겪으셨던 고초와 심경에 대해서 한 말씀.
-이 당시는 공안시국이라고 해서 모든 문화분야에 대해 정부가 사전검열하고, 반(反)정부적인 기미가 보이면 금지시키는 시기였어요. 민중문학과 민중미술 등도 검열대상이었죠.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서울영화집단’에서 영화운동의 움직임을 보였고 <파랑새>가 농민을 소재로 한 영화고 전국으로 순회상영을 했기 때문에 더욱 정부에서는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어요. 때문에 영화부문에서는 제 영화가 표본으로 심의대상이 된 거고 그로인해 잡혀 들어간 거죠. 사실 그 당시가 워낙 검열이 심했던 시기여서, 제 작품이 검열대상이 될 거라는 각오는 했던지라 특별히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Q. 이태원 살인사건 제작에 아내 되시는 이맹유 작가님과 함께 작업하셨다. 파트너로써 어떠신지.
-아무래도 같이 사는 사람이랑 작업을 하다 보니 편하죠. 반면 너무 편하니까 의견다툼도 있을 수 있겠죠 (웃음) 이번에 이맹유 작가가 감독으로 데뷔합니다.‘빛나는 졸업장’이라는 작품으로 데뷔하는데 배우 이미숙씨와 가수출신 닉쿤을 캐스팅했어요. 줄거리는 엄마역할인 이미숙씨가 어떤 사연 때문에 예전에 중퇴한 고등학교를 다시 다녀야 할 상황에 처해서 문제아인 둘째아들 닉쿤과 같이 학교를 다니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말하자면 휴먼코메디라고 보면 될 거예요. 이맹유 작가는 92년 작품인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에서부터 같이 호흡을 해왔어요. 이맹유 작가가 옛날에‘현장’이라는 극단에서 노동연극을 했었는데 그때 만나게 되었죠. 90년쯤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저도 영화 운동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Q. 이태원 살인사건을 제작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신지.
-보통 영화의 제작비는 적어도 20~30억입니다. <이태원살인사건>은 5억5천의 저예산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배우들이 많이 출연해 줬죠. 사실 메인 배우들의 개런티만 해도 보통 7~8억인데 5억5천의 저예산으로는 사실 이렇게 좋은 배우들과 함께 하기란 어려운 실정이죠. <이태원살인사건>이 억울하게 죽은 한국청년의 이야기를 세상밖에 꺼내기 위한 영화라서 그런지 일이 잘 풀려서 훌륭한 배우들과 함께 촬영을 마칠 수 있었고<이태원살인사건>이 스크린에 오를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래서 저는 예전에 시사회에서 인터뷰할 때도 항상 누군가 도와주는 것 같다는 표현을 하곤 했습니다.

Q. 독립영화집단 장산곶매를 창립하신 분으로서, 독립영화 지원현황에 대해 한 말씀.
-장산곶매는 영화 <파랑새> 제작이후 공안당국에 끌려갔다가 풀려나온 뒤인 1987년에 만든 독립영화단체입니다. 장산곶매에서 만든 영화가 <오! 꿈의 나라>와 관람객 100만이 넘었던 <파업전야>가 있어요. 모르세요? (웃음) 각설하고, 지금까지 독립영화의 발전을 위해 영화진흥회에서 지원을 제공해왔습니다. 그런데 올해 들어 독립영화가 감사(監査)를 많이 받고 있어요. 독립영화라는 것이 자생력이 없잖아요. 지원이 필요한데 이전에 비해 투자나 자본지원이 많이 끊기고 있어서 어려운 상황입니다.

Q. 만약, 다음 작품으로 사회문제를 다루는 영화를 만드신다면 어떤 주제를 다루고 싶으신지.
-아, 제가 어디 가서 차기작에 대한 얘기는 잘 안하는 편인데 (웃음) 내부 고발자에 대해서 다룰 계획입니다. 미국과 같은 사회에서는 내부 고발자에 대한 보호가 잘 되어 있는 반면, 한국사회에서는 그런 보호조치가 미흡합니다. 그래서 그런 양심적인 사람들이 겪는 어려운 점들에 대해 조명하려고 합니다.

올 한해는 다사다난했다. 많은 사회문제들이 요동을 쳤고 이를 억누르려는 힘도 대단했다. 그 여파로 국민들은 더 많은 짐을 대신 지게 되었다. 결국 입을 열려는 자와 그 입을 틀어막으려는 자의 대결로 한 해가 마무리 된 거 같다. 그리고 그 전선에 홍기선 감독이 서 있었다. 그는 지치지도 않고 한국사회의 어두운 단면과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고자 한다. 신년에도 영화가 끝난 후에도 무릎을 탁 치게 만들고, 멍해있던 머릿속에 경종을 울리는 영화를 만들고자 메가폰을 잡는 그의 모습을 기대해 본다. 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