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기업을 움직인다”

이병철 회장 탄생 100년‘호암을 기리다’

2010-03-29     이민선 기자

흐르는 물처럼 시련을 딛고 일어선 거목 호암

국내 기업 최초로 삼성전자는 매출 100조, 영업이익 10조를 넘어서는“100조-10조 클럽”에 가입하게 되었다. 삼성의 이 같은 성공가도의 뒤에는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 선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호암 이병철 선생은 1983년 일제치하의 암흑기에 사업에 투신, 한국 최고의 기업 삼성을 창업하여 성장시킨 한국 기업인의 대명사로 정평이 나있다. 또한 당시 불모의 한국경제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앞서가는 경영인으로서 국가경제발전을 선도해 온 재계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1938년 대구의 250평 남짓한 점포에‘삼성상회’를 연 이후 70여 년이 흐른 지금 삼성그룹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은‘호암의 열정적인 도전 정신과 합리적인 경영체계’였다. 그런 그가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 졸업장이 인생을 좌우하지는 않는다.

1910년 2월 12일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이찬우 공과 안동 권씨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호암은 6살 때 초등학교에 가지 않고, 서당‘문산정’에서 한문을 배웠다. 하지만 거대 삼성을 거느린 이병철 선생은 이때부터 학문에 있어 어려움을 겪었다. 무엇보다 천자문을 배우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 것. 보통 친구들은 두 세 달 만에 천자문을 통독했지만 그는 일 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5년간의 서당 생활에서 그는‘논어’와‘자치통감’을 뗐지만 이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 빠른 편은 아니었다. 그런 그를 바라본 스승은“문산 선생님의 손자가 이래가지고서야”라며 종종 매를 들기도 했다. 그의 조부인 문산 이홍석은 당대 영남의 최고 유학자 중 한 명인 허성재의 문하생으로 시문과 성리학에 두각을 나타냈고,‘문산문집’을 펴낼 정도로 학문이 높았다. 조부의 학문 경지와 비교해 호암은 공부에 있어서만큼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때문에 서당 스승의 호통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11살이 되던 해인 1921년, 처음으로 집을 떠나 시집간 둘째누나가 있는 진주시 지수보통학교에서 짧은 첫 유학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호암은 중교리보다 더 넓은 세상을 접하고 배우게 된다. 몇 개월 후 그는 서울에 사는 사촌형을 따라 외갓집이 있는 서울 가회동에서 수송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게 된다. 하지만 넓은 세상인 서울에서의 성적도 서당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 그의 석차는 전체 50명 중에 35~40등에 머물렀다. 이는 삼성이라는 대기업을 호령하던 이병철 선생의 성적이라고 믿기지 않는 부분이다. 보통학교 4학년을 마친 호암은 5, 6학년 과정을 거치지 않고 중학부로 진학한다. 중학부를 다니던 어느 날 부친으로부터“네 혼담이 이뤄져 12월 5일 혼례를 올리게 됐으니 내려오라”는 말을 듣고 고향으로 간다. 이로써 방년 16세인 1926년, 두 살 위인 박두을 여사와 가정을 꾸리게 된다. 호암은 결혼 후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중학부를 마치지 않고 1929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듬해 와세다대 전문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지만 1년여 간의 일본 유학 생활은 각기병(티아민 결핍에 따른 근육, 관절 이상)으로 접게 된다. 결국 호암은 유학을 중도 포기하게 된 1930년까지 졸업장을 손에 넣지 못했다. 그가 인생에서 받은 졸업장이나 학위는 72세 때인 1982년 미국 보스턴대학에서 명예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은 게 유일하다. 유명 대학 졸업장이 곧 성공의 열쇠 중 하나로 여겨지는 지금과 같은 시대에 이병철 회장의 이 같은 행보는 놀라움과 함께 젊은이들에게는 희망을 안겨주는 대목이다.


“어느 사업이나 실패의 위험은 다 있는 법이지만 가장 위험한 것은 처음부터 실패할 여지가 있다는 생각을 안고 일에 착수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말보다 행동으로 모범을 보였다.”


# 본격적인 기업인수를 통한 사업 확장


#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

꺼질 줄 모르던 그의 신화 창조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호암 탄생 100주년을 맞아 재계에서는“기업가로 큰 족적을 남긴 호암식 경영 스타일을 배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브레이크 뉴스 박주영기자는“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에서 태어난 호암 이병철 전 삼성그룹회장의 가장 큰 능력은 천부적인 투시력과 재능을 꼽고 있다. 오늘의 삼성을 일궈내기까지 정보수집과 분석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용병술의 달인으로도 평가받고 있다.”고 호암의 경영철학을 설파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호암은 삼성의 3대 경영철학으로‘사업보국(事業報國)’과‘인재제일(人材第一)’,‘합리추구(合理追求)’를 경영의 최 일선에 두었다고 언급하고 있다.‘사업보국(事業報國)’.호암이 지난 1976년 전경련 회보에 기고한‘나의경영론’에 기재된 내용에 따르면“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행히 나는 기업을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왔고, 나의 갈 길이 사업보국에 있다는 신념에 흔들림이 없다”고 말한다. 호암의 사업보국 이념은 호암의 발자취 곳곳에서 묻어난다. 한 예로 1982년 11월, 당초 호암은 주위에 수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국가의 미래가 담긴 산업’이라는 강한 의지 하나로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다. 또한 호암이 삼성을 경영하면서 무엇보다 중시했던 신념은 바로‘인재제일(人材第一)’이었다.“의심이 가거든 채용하지 말고, 채용했으면 믿고 맡겨라”라고 언급한 그의 어록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삼성은 1957년에 국내기업 가운데 최초로 공채제도를 도입했다. 인재채용 이후 개인별 능력별에 맞는 인사배치를 하고 권한을 주고 맘껏 일하도록 했다. 지도력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하면 책임을 맡겨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했다. 즉 한 번 믿은 이들에게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무한한 기회를 제공하는 타입이었던 것. 신뢰를 최고항목으로 여겼던 호암의 이 같은 정신은 지금의 삼성이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호암이 남긴 경영철학으로‘합리추구(合理追求)’도 빼놓을 수 없다. 삼성의 지속성장의 원천인‘미래 산업’의 출발도 호암의 합리추구경영에서 비롯됐다. 1970년 초 호암은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경영의 합리화는 뒤떨어진 우리나라 기업풍토가 당면한 가장 시급하고 중대한 문제”라고 얘기했다. 호암의 합리추구는 사리에 맞게 회사를 이끌어 가면 모든 일이 잘 풀린다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었다. 그 시대에서, 또 미래를 바라보며 선진국의 새로운 경영기술을 즉각 받아들이고 경영체질을 합리화 하는 것이야말로 기업경쟁에서 살아남는 길이고 이는 곧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진리인 셈이다.

# 시련과 좌절을 통해 단단해진 인생행로
호암이 쉰이 되던 1960년 그에게는 연이은 시련이 닥친다. 4ㆍ19혁명 뒤 탈세 등의 혐의로 난생 처음 검찰에 출두해 조사를 받은 것이다. 더불어 5·16쿠데타가 터지면서 다시 한 번 부정축재자로 몰렸다. 도쿄에서 귀국한 호암은 구속은 면했지만 1961년 8월 12일 군사혁명정부는 부정축재에 대한 추징 벌과금을 기업주들에게 통보했다. 27개 기업주에게 모두 378억 800만환이 부과됐다. 삼성에 부과된 돈은 103억400만환으로 기업 중 전체 1위, 총 금액의 27%를 차지했다. 사실 호암이 5ㆍ16 이후 부정축재자로 몰려 벌과금을 물었지만 그 당시 호암의 담판 능력은 빛을 발한다. 박정희 의장을 만나 희망과 비전을 제시한 것. 당시 호암은 첫째, 부정축재 기업인들을 일벌백계하는 대신 경제개발 사업에 참여케 하자 둘째,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본은 외국차관으로 충당하자는 안을 제시, 박대통령이 수용하였다. 이런 인연 덕분에 정부의 요청으로 부정축재자로 구속됐던 12명의 기업인과 함께 한국경제인협회(현 전국경제인연합회)를 만들고 초대 회장으로 취임, 일생의 단 한번인 대외직을 맡게 된다. 하지만‘한비 사건’으로 그는 또 다시 좌절의 쓴 맛을 보게 된다. 자유당 정부 말기부터 비료사업을 눈여겨보던 호암은 박정희 정부가 들어선 뒤 당시 정부의 지원과 일본의 차관을 얻어 세계 최대 규모인 연산 33만t 규모의 비료공장 건설에 나섰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요소비료 공정에 쓰이면서 사카린의 원료가 되는 OTSA를 밀수입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호암은 한국비료 공장을 완공해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전격적으로 선언했다. 삼성이 호암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내놓은 평전인‘담담여수’(淡淡如水)는 이 한비사건을‘파란 많았던 호암의 생애에서 더할 나위 없는 쓰디쓴 체험’이라고 적고 있다. 한비 사건으로 입은 호암의 충격이 그만큼 컸다는 것이다.

# 호암 경영철학은 3대째 이어오고 있다
호암은 50대에 불어 닥친 폭풍우를 잘 이겨내고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1960년대에는 동방생명, 신세계백화점을 인수했고 1969년에는 오늘의 삼성을 있게 한 전자사업에 뛰어 들었다. 그리고 탁월한 그의 경영 능력은 호암이 세상을 뜬 1987년에 이르러 37개 계열사에 연매출 14조원 규모의 거대 기업‘삼성그룹’으로 성장했다. 호암이 뿌려 놓은 자산은 오늘날 국내 최대 기업이자 30만 명 가까운 직원을 거느린 글로벌 기업이 되었고 삼성에서 분가한 CJ와 신세계는 각각 재계 20위권에, 한솔은 중견그룹 자리에 포진하고 있다. 현재 삼성그룹은 64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고 2008년 기준으로 계열사 매출 총액은 191조1천억 원에 달하고, 임직원 수만 해도 27만7천명을 넘는다. 지난해 영국 인터브랜드와 비즈니스위크가 공동으로 발표한‘글로벌 100대 브랜드’조사에 따르면 삼성의 브랜드 가치는 175억2000만 달러로 세계 19위의 입지를 보였다고 발표했다. 아는 한화로 약 20조3200억에 이른다. 호암이 남긴 유산은 그의 자녀들인 삼성가 2세대들에게도 전해진다. 그 중 호암과 각별한 부녀 사이로 알려졌던 이명희 회장이 이끄는 신세계그룹도 있다. 신세계는 자산총액 11조9천564억 원(공정위 기준)에 14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이병철의 맏손자인 이재현(50) 회장이 경영하는 CJ그룹 역시 호암의 유산 중 하나다. 61개 계열사에 12조3천241억 원의 자산총액을 자랑하는 CJ그룹은 식품사업을 기반으로 생활용품, 유통, 영화관 등 다양한 영역에서 공격적으로 사업을 개척하고 있다. 이 밖에 장녀인 이인희(82)가 현재 고문으로 활동하는 한솔그룹을 비롯해 성균관대학교 등도 호암이 남긴 유산들이다. 이 같이 호암이 남긴 유산은 비단 돈으로 환산한 것으로만 판단할 것은 아니다. 그가 세운 삼성은 대외적으로 대한민국을 전 세계에 알리고 대내적으로는 국내 경제의 큰 획을 긋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그의 철학을 이은 삼성가의 2, 3세대들은 호암의 유산 이상으로 삼성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호암 이병철 선생은 남들이 불가능을 언급할 때 희망을 보여준 신화적인 존재였다. 1951년 삼성물산을 설립하고 이를 기반으로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잇달아 설립한 후 상업은행과 한일은행, 조흥은행 등까지 인수하면서 삼성그룹의 틀을 갖추는 도전을 계속했다. 이어 1969년 삼성전자 설립과 1977년 반도체 산업 진출에 나서면서 세계 최대 전자 기업이자 메모리 반도체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향한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그가 세운 삼성은 그의 후계자 이건희 회장으로 이어져 꽃이 만개해졌다. 호암은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의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경영자로서 범접하기 어려운 표본이 되었다. 그는 후세대들에게는 성공 기업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면에서도 누구보다 큰 교훈을 남겼다고 평가되고 있다.NP


삼성상회를 설립 후 해방을 맞았다. 대구에서 일하던 호암은 가족과 함께 1947년 서울을 향했다.‘삼성상회’가 날로 번창하고 있었지만, 성장에 한계를 느낀 호암은 본격적인 무역업을 위해 이듬해인 1948년 11월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한다. 삼성물산공사는 홍콩, 마카오,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 지역으로부터 생필품을 수입하고 해산물과 면실박을 수출했다. 하지만 당시 상황으로서 무역업으로 큰 이윤을 보지는 못했다. 그마저도 삼성물산공사 설립 2년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거의 전 재산을 잃게 된다. 하지만 그는 대구에 두고 온‘조선양조’의 김재소 사장과 이창업 지배인의 도움으로 부산대교로 2가에‘삼성물산주식회사’를 설립, 1년 만에 자본금의 20배인 60억 원으로 회사 규모를 키운다. 아울러 그는 전후 한국경제를 위해서는 제조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제당업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제일 강한 의지로 일하자는 뜻에서‘제일제당’으로 이름을 지었다. 1953년의 일이다. 이듬해에는 의식주 중 가장 앞 에 나오는‘옷’감을 만들기로 했다. 이것이‘제일모직’이다. 2개의 제조업체 설립 이후 호암은 전후 한국사회에서 본격적인 기업 인수를 통해 규모를 키웠다. 1957년 한일은행, 천일증권을 인수했고, 58년에는 삼척시멘트, 안국화재, 상업은행, 동일방직, 권영물산, 한국타이어를 인수했다. 이듬해에는 조흥은행까지 인수하면서 몸집을 불렸다.


“인재제일, 인간본위는 내가 오랫동안 신조로 실천해온 삼성의 경영이념이자 경영의 지주이다.”

호암은 각기병으로 일본에서의 유학을 중도 포기하고 귀향한 후 술과 노름으로 시간을 보냈다. 일본으로 유학 가던 길에 일본인에게서 받은 치욕과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야겠다는 의지도 그에게 더 이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시절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세 자녀였다. 나이 스물다섯에 세 아이의 아버지로서 부끄러운 나날을 보내던 그는 골패 노름에 빠졌다가 귀가하는 어느 날 저녁 문득 잠든 세 아이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세 아이의 아버지로서 지금껏 허송세월을 보냈구나. 이제라도 뜻을 세우고 인생과 직면해야 돼”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호암의 각별한 가족 사랑이다. 그는 주변인들에게 냉철하다는 평가를 받곤 했다. 그의 냉철한 눈은 지금의 세계적 기업 삼성을 만든 신화로 인식되고 있지만, 실제로 그의 막내딸 이명희 신세계 회장이 기억하는 모습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모습과는 차이를 보였다. 이 회장은 평소 아버지와의 사이가 각별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호암이 폐암 진단을 받아 도쿄에서 수술했을 때 도쿄까지 동행할 만큼 이 회장을 각별히 아꼈다. 호암의 막내딸인 신세계그룹 이명희 회장은 지난해 그룹 사보를 통해 아버지에 대한 속내를 밝힌 바 있다. 당시 이명희 회장의 글을 통해서 호암의 인성 또한 엿볼 수 있다. 이 회장은 아버지가 차갑고 냉정한 경영자였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유독 이 회장에게만은 따뜻하고 인자한 면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 회장은 호암과 15년을 늘 함께 했으며 아침저녁으로 전화 통화를 했다. 무뚝뚝한 호암이 딸에게 전화해서 하는 말은 늘“뭐하노?”였다. 하지만 그 말조차 이 회장에게는 다정한 인사로 들렸다. 대삼성의 창업주인 호암은 기업인으로서의 냉철함 뒤에 섬세하면서도 여성적인 면도 다분했다. 이러한 호암의 취향을 반영해 이 회장은 화려한 넥타이와 핑크색 와이셔츠를 만들어 드리는 등 아버지에게 각별한 사랑을 보였다. 이 회장이 호암에게 각별했던 것은 어쩌면 두 사람 사이의 유사점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 회장은“아버지와 나는 많이 닮았다. 체질, 성격에서부터 취향, 좋아하는 음식까지 모두 닮았다. 특히 관심 분야에 끝까지 파고드는 성격은 더욱 그랬다.”고 언급하고 있다. 더불어 호암은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성품을 가졌다고 한다.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형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대신 행동을 통해 모범을 보였다. 그러한 호암의 면모는 이건희 회장의 시대에 이어 삼성의 3세대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의 대(代)까지 이어진다. 호암의 인간적인 무게는 2세대를 거쳐 3세대에까지 삼성 전체에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 오늘날 삼성의 주춧돌인 삼성상회의 설립
1936년, 이때부터 호암의 기업가로서 역량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첫 사업의 씨앗은 협동정미소 설립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중일전쟁의 여파로 자본금의 3분의2를 날리며 사업을 청산하게 된다. 그렇지만 실패에 좌절할 호암이 아니었다. 그는 인천곡물시장에서 쌀 가격이 오르면 사고 내리면 파는 패턴으로 순식간에 손실을 보자 오를 때 팔고, 내릴 때 사는‘역발상’으로 큰돈을 벌게 된다. 이어 곡물을 운송하는 운수업까지 성공을 이어간다. 이것으로 김해평야에 200만평의 토지를 소유할 정도로 많은 돈을 벌게 된다. 여기에서 만족하지 못했던 호암은 식산은행에 대출을 받아 토지를 넓혀갔다. 하지만 브레이크 없이 계속되던 성공에 그는 겸손하지 못했다. 당시 호암은 기방을 다니며 풍류에 빠져 있었다. 자만이 극에 달해 있던 당시 위기는 또 다시 그의 목을 조여 왔다. 1937년 중일 전쟁의 군비조달을 위해 식산은행이 모든 대출을 회수키로 한 것. 그는 대출을 갚기 위해 보유한 토지를 싼 값에 처분했고 2년 사이 거부에서 다시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오게 된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여겼던 그는 사업을 접고 여행을 떠난다. 이듬해 1938년 3월 빈손으로 다시 대구시 수동(현 인교동)에서 꿈의 터전을 세웠다. 이것이 삼성의 모태가 되는‘삼성상회’였다.‘삼성상회’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이자‘강력하고 큰 것’이라는 의미를 담은‘삼’(三)과,‘높고 밝고 영원히 빛난다’는 뜻의‘성’(星)을 합쳐지어진 상호였다.


“결심하기 전에는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지만 계획이 확정되면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과단성 있게 실행해야 하는 것이 사업가의 기본적인 태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