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100년 숙원‘전국민건강보험시대’열다
美보수단체, 민주당 의원 ‘낙선운동’ 전국순회 돌입
2010-05-06 이지영 기자
미국의 건강보험개혁은 지난 1912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대통령의 선거공약에서 시작돼 100년 가까이 추진됐다 번번이 실패한 숙원 중 하나다. 1934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회보장제도와 함께 전국민건강보험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이어 1965년 린든 존슨 대통령이 현재의 건강보험체계의 기틀이 된 65세 이상 고령자에 대한‘메디케어’와 저소득층에 대한‘메디케이드’를 실시하면서도 이 부분은 빠졌다. 1994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강력하게 추진했던 건강보험개혁법안은 의회에서 폐기되며 좌절됐다. 건보개혁안은 저소득층에게는 정부가 주는 건보혜택인‘메디케이드’ 대상을 확대, 중산층에게는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을 통해 의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국민 가운데 3200만 명을 추가로 수혜 대상에 포함시키고 있다. 때문에 건보개혁안이 시행되면 현재 540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 무보험자는 절반 이하인 2200만∼2300만 명가량으로 줄어들 전망이다.
건강보험 개혁을 완수한 오바마 대통령의 리더십
‘전 국민 의료보험 가입’이라는 100년 숙원을 푼 지도자라는 점에서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미국 언론의 반응은 긍정적이다. 1965년‘메디케어’를 도입해 사회보장제도의 한 획을 그었던 린든 존슨 대통령의 업적에 비유하기도 한다. 막강한 로비력을 갖춘 이해집단의 집요한 반대와 이에 편승한 정치권의 당파적 대립 앞에서 역대 대통령들은 번번이 무너졌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이들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그 이유로 그의 승부사적 기질이 우선 꼽힌다. 오바마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줄곧 건보개혁이 국정의 최우선 과제임을 강조했다. 정권의 정통성과 건보개혁의 완성을 동일선상에 놓고 스스로 족쇄를 채우는 승부를 자청했다.“정치를 볼모로 한 도박”이라는 비판이 나왔지만 정치생명을 건‘절박함’이 기념비적인 업적을 가능케 한 에너지의 원천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오바마의 승부수는 현장에서 빛을 발했다. 건보개혁을 지휘하기 위해 해외순방을 두 차례나 연기하는 외교적 파격을 마다하지 않았다. 반신반의하는 민주당 의원들을 규합하기 위해 일주일 새 90명이 넘는 의원들을 독대하거나 전화 통화했다. 표결 전날 밤 늦게까지 바트 스투팩 의원 등 반 낙태의원을 설득해 과반수 확보의 돌파구를 마련한 것도 그의 작품이었다. 지난달에는 백악관에서 여야 공개 끝장토론을 벌여 건보개혁에 대한 유권자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효과도 거뒀다. 100여 차례가 넘는 타운홀 미팅이나 토론회, 대중연설 등을 통해 미 국민 호흡을 맞췄다. 미국 역사상 100년 숙원사업이던 건강보험 개혁 법안은 그렇게 힘든 허들을 넘었다.
美 건보 개혁이 100년이나 걸린 사연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 생명까지 걸었다는 미국의 건강보험 개혁 논란을 지켜본 사람들이라면 거의 백이면 백 한번쯤“나라에서 국민들의 의료비 부담을 덜어준다는데 왜 반대를 하는 거지?”라는 의문점이 들었을 것이다. 모든 국민이 국가가 제공하는 건보 혜택을 받고 있는 한국에선 민간보험을 주축으로 한 미국의 건보제도 자체가 너무나 낯설고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 의료보장 체계의 질은‘세계 제일의 선진국’이란 명예에 걸맞지 않게 매우 뒤떨어져 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평가한 미국의 의료 경쟁력은 세계 37위로, 코스타리카나 쿠바 등 중남미 빈국들과 동급 수준이다. 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인 한 사람당 지출한 의료비는 평균 7290달러(약 830만원)로 다른 회원국의 2배 수준에 달했다. 미국이 왜‘세계 최악’이란 오명을 뒤집어쓰면서까지 지금의 의료보험 시스템을 고집하고 있며 미국의 국내 사정일 뿐으로 여겨질 수 있는 건보개혁이 이토록 세계적인 이슈로 떠오른 이유는 건보 시스템에 미국의 역사와 가치관이 모두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건보개혁 논쟁은 곧 미국의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 질문과 연결돼 있다. 우선 미국의 건강보험은 크게 사적보험(Health Plan)과 공적보험으로 구분된다. 사적보험은 개인 또는 기업이 가입하는 민간보험을 뜻하며, 보험 종류 및 가입 조건에 따라 의료기관의 서비스 질과 가격을 관리하는 시스템으로 구성돼 있다. 공적보험으로는 메디케어(Medicare)와 메디케이드(Medicaid), 공무원 및 군인 의료보험 등이 있다. 메디케어는 65세 이상 노인과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며, 소득 및 재산수준에 따라 A~D의 4개 등급으로 구분해 총 보험비용의 50%까지 정부에서 보조해 주는 방식이다. 또 메디케이드는 저소득층이 대상이며 정부가 100% 보험금을 지원해 준다. 현재 미국에서 건보 수혜를 받는 국민들의 비율은 약 83%며 이 가운데 3분의 2가 사적보험에 가입돼 있다. 또 미 국민 가운데 건강보험에 가입하지 않았거나 못한 무보험자는 총 5400만 명에 달한다. 오바마 행정부의 건보개혁법은 10년간 9400억 달러를 투입,3200만 명에게 추가로 혜택을 줘 가입률을 83%에서 2019년 95%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구상이다. 저소득층 및 장애인을 배려하는 건강보험인 메디케이드 대상을 확대하고 중산층에는 보험가입 보조금을 지원하는 데 집중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부모의 보험에 함께 가입할 수 있는 자녀 연령도 26세로 연장했다. 청년층에 건보 가입의 부담을 줄여주겠다는 의도다. 개혁법에는 자동차 운전면허증처럼 건강보험증 소지를 의무화하는 안도 들어 있다. 일반 개인 대상자들이 건보 가입을 거부할 경우 연간 최소 695달러의 벌금을 물리고,50인 이상을 고용하는 기업주가 종업원에게 건보 가입 지원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종업원 1인당 2000달러의 벌금도 회사에 부과키로 했다. 직장에서 건보 가입을 최대한 유도해 내기 위한 방안이다. 또 질병이 있다는 이유로 보험회사가 일방적으로 건보 가입을 거부할 수 없도록 하고 급격한 보험료 인상을 할 수 없도록 제재도 가할 수 있다. 그렇지만 건보개혁법의 반대론자들의 주장은 크게‘자유’와‘세금’, 그리고‘재정부족’등 세 가지 키워드로 정리된다. 자유와 세금은 독립전쟁 이후 미국의 건국 과정에서 깊이 새겨진 DNA와 다름없는 것이고, 재원마련 논쟁은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적으로 불거진 재정적자 문제와 연관돼 있다. 미국은 유럽에서 구교의 탄압을 피해 신대륙으로 건너온 신교도(청교도인)들이 세운 나라다. 기본적으로 개인의‘자유’를 중시하고 정부 간섭을 싫어한다. 특히 청교도는 노동을 미덕으로 나태를 죄악으로 생각한다. 가난한 것은 기본적으로 개인 책임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건보 개혁에 반대하는 미국인들은 자기 스스로 열심히 돈을 벌어 의료보험비도 내고 건강도 알아서 챙기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재정 부담의 논란 뒤엔 이런 인식차가 깔려 있다. 또 이 같은 청교도들의 철학이 오늘날 미국 보수진영의 철학적 근간이 됐다. 이 때문에 보수파의 시각에선 오바마의 건보 개혁이‘미국의 건국이념을 무시하고 국민을 타락시키는 행위’로 간주된다. 또“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낸 혈세를 왜 낭비해야 하느냐”는 미국 사회 특유의 정서적 거부감도 건보개혁을 늦춘 커다란 요인이다. 이 때문에 국민들 간에 찬반 의견도 여전히 팽팽히 맞서고 있다. 건보개혁법 통과 다음날인 지난 22일 USA투데이와 갤럽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9%가 법안을 지지한 반면, 40%는 법안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美 건보개혁안 공방 2라운드 돌입
모든 국민의 건강보험 가입 의무화를 규정한 건강보험개혁안은‘자유의 나라’미국에서 뜨거운 위헌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현재 위헌 논쟁의 포인트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연방 수정헌법 제10조에 규정된 연방정부의 권한범위에 관한 것이다. 미 헌법이 연방정부로 하여금 개인들에게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사라고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을 줬느냐는 것이다. 공화당의 케이 베일리 허치슨 상원 의원(텍사스)은“민주당과 오마바 행정부는 헌법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은 권한의 행사를 통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짓밟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민주당 측은 건강보험은 헌법정신에 걸맞은 인간의 기본권이라고 맞서고 있다. 두 번째는 헌법 8조의‘커머스 조항’(commerce clauseㆍ상업조항)에 관한 것이다. 이 조항에 따르면 미 의회가 입법 활동을 통해 외국과 주(洲)들 간 자유로운 상거래를 규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공화당 측은 지난 100년간 건강보험을 포함한 의료서비스 전반은 물론, 소위 커머스로 분류되는 모든 활동은 민간영역에 포함된 것으로 해석돼 왔으며, 이에 따라 관련 규제와 조정 등의 권한은 주정부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건보개혁안은 연방정부가 주정부의 권한을 침해한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 오바마 현 정부와 민주당은“미국 헌법에 연방정부가 이런 일을 하면 안 된다는 문구가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미 의회에서 대수당의 의결로 채택된 입법사안에 대해 연방법원이 위헌판결을 내릴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게 일반적 견해다. 하지만 이번 위헌논쟁은 중간선거라는 당리당략 차원을 떠나, 연방정부의 역할과 개인의 자유범위에 대해 구체적으로 선을 긋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시각도 나오고 있다.
중간선거 노리며 정치공세, 공화당 반격준비
1년 넘게 끈 싸움은 의사당에서 다시 장외로 자리를 옮겼다. 목표는 11월 중간선거로 건보개혁 공방 2라운드다. 여야 모두 치열한 대국민 캠페인을 예고하면서 이번 선거는 건보개혁에 대한 국민투표 성격을 띨 전망이다. 공화당의 정치 공세는 이미 시작됐다. 공화당 상원은 하원에서 통과된 수정법안을 좌초시킬 각오다. 민주당으로선 만에 하나 차질이 생기면 수정을 전제로 찬성한 의원들은 물론 지지 세력들로부터 역풍에 직면한다. 버지니아주 등 12개 주 검찰총장들은 연방의 건보개혁법 시행을 막기 위한 법 절차를 밟겠다고 밝혔다. 각 주의 보수의원 모임인 미국입법교류위원회도 39개 주 의원들이 건보개혁법 시행 차단 절차에 착수했거나 계획을 갖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는 전했다. 공화당은 선거 때까지 개혁입법을‘큰 정부와 재정방만’의 상징으로 부각시킨다는 계산이다. 민주당은 의회에서 신승했지만 중간 선거를 생각하면 수세다. 가브리엘 기포즈(Giffords·애리조나) 의원은 건보개혁법안에 찬성한 후 지역구 사무실이 괴한의 공격으로 파손됐다. 표결 당일 일부 의원들은 시위대로부터 욕설을 듣거나 침까지 맞았다. 여론조사에서도 건보개혁법에 부정적인 의견이 많다. 대선 때 오바마를 밀었던 독립적 유권자들 상당수는 그 뒤 주지사 선거와 상원 보궐선거에서 등을 돌렸다. 민주당은 개혁법의 혜택을 널리 알려 민심을 되돌린다는 계획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직접 아이오와주 아이오와시티를 시작으로 건보개혁법 홍보 투어에 나선다. 아이오와시티는 대선후보 시절 건보개혁 구상을 처음 밝힌 곳이다. 로버트 기브스(Gibbs) 백악관 대변인은“11월 중간선거 때까지 이 행보가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민주당 전략가인 크리스 코피니스(Kofinis)는“건보개혁에 대한 진짜 정치 싸움은 법안 통과 후부터”라고 했다. 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