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가와 민족의 재건을 위한 초대교회로의 복귀를 선언한다”

“새로운 사회 시대정신의 패러다임은‘목회적 대형교회’에서 구(求)한다”

2010-08-05     김태훈 기자
경기도 용인시 죽전동에 위치한 새에덴교회의 소강석 목사는‘맨발의 소명자’로 불린다. 황야에서 홀로 시작한 목회자의 길에서 그는 가난과 외로움으로 끊임없이 좌절해야 했지만, 그의 비전을 보신 예수님과 함께한 길은 고통보다는 행복으로 그를 설명해 주고 있다. 실제로 소강석 목사는 새에덴교회를 1988년 작은 상가에서 교회를 개척한 이래로 현재는 등록교인 3만 명에 달하는 대형교회로 키워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이제는 새에덴교회의 비전으로 애국하는 교회, 민간외교 하는 교회를 제시하며 세상 가득 주님의 향기를 전파하고 있다.


남다른 소명, 남다른 도전
가진 것이라곤 3M(맨손, 맨몸, 맨땅)밖에 없어 울부짖는 기도와 불타는 열정만으로 교회개척을 시작한 소강석 목사는 야수적 소명의식으로 몸부림친 끝에 마침내 꿈같은 교회부흥을 이뤘다. 이렇게 그가 목회자로서의 삶을 살게 된 것에는 부모님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그의 부모님은 예수를 믿는 분들이 전혀 아니었다. 때문에 소 목사는 혈통적 축복을 받는 것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부모님의 성향이 그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실제로 그의 아버지는 한학에 깊은 조예를 갖고 계셨고,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이러한 연유로 소강석 목사는 어린 시절부터 삶과 죽음에 관한 깊은 사고를 가질 수 있었다. 이는 그를 목회자로 이끄는 데에 충분한 밑거름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생명보다 귀하다 여기는 예수님을 만난 계기는 의외의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후배가 예쁜 여학생을 소개해 주겠다며 소 목사를 교회로 이끌었다. 그 일로 그는 예수님과의 뜨거운 만남을 체험하게 되었다. 소 목사는 이를 두고“이 만남이야말로 야곱이 벧엘에서 주님을 만난 체험이었다”며“주님을 생전 모르다가 갑작스럽게 알게 되고 처음 은혜를 너무 뜨겁게 받아서인지, 뜨거운 은혜에 못 이겨 얼마나 찬송을 많이 불렀는지 한 달 만에 찬송가를 100곡이나 익혀버렸고 모든 공예배는 물론 새벽기도까지 다녔다”고 회자했다. 실제로 그가 나간 교회에는 눈에 띄는 여학생이 있었다. 그는 그 여학생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그것이 지금 목회자의 길을 걷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인간적인 사랑에 대한 관념으로 교회 목회자의 길을 가게 된 유머러스한 에피소드다. 그렇게 시작된 그의 목회자의 삶은 초반부터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강추위가 몰아치던 어느 겨울 그는 신앙 때문에 어머니에게 회초리를 맞고 쫓겨났다. 슬픔과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그에겐 성경책만이 손에 쥐어졌다. 당시의 상황을 소 목사는“‘아!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막상 집에서 나오고 보니 왜 그리 눈물이 비 오듯 쏟아지는지 나도 모르게 두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고 기억을 되짚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은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다
“하나님의 소명은 아름다웠고 집시 생활 중에서도 소명자의 삶은 자유로웠고 행복했다”빈 손으로 집에서 쫓겨난 소 목사는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외로운 밑바닥 생활에서도 마음만은 주 안에서 행복했다고 말한다. 때문인지 소 목사가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에 닥쳤을 때에는 꼭 하나님이 함께 해주셨다. 한 일화가 있다. 신학교를 다닐 때의 일이다. 금요일이면 학생들이 모두 집에 돌아가기 때문에 그날도 어김없이 그는 혼자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냥 잠자리에 들기에 자못 아까운 생각에 라면을 끓여 먹고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라면을 끓인 채로 잠이 든 소 목사는 연탄뚜껑을 열어놓았다는 것을 까맣게 잊은 상태였다. 무의식적으로 라면 생각이 난 그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꼼짝 할 수 없었다. 정신이 가물가물한 상태로 그는“주여, 주여”하고 외쳤다. 그때 누군가가 갑자기 소 목사의 어깨와 손을 잡고 확 일으켜주었다. 주님은 그렇게 그에게 기적을 보여줬다. 후로 그는 금요일은 평생 철야기도를 하는 날로 삼기로 했다. 물론 이 일화는 가난과 싸워야했던 외로운 목회자로의 길 중에 일부였다. 가난은 그를 끊임없이 처절한 상황에 놓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시간들을 소 목사는 이렇게 회고한다.“끼니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고 양복 한 벌 못 입어 쩔쩔매던 저였지만 꿈은 천리만리까지 뻗어갔습니다. 그것은 제가 만든 꿈이 아니라 애당초 하나님께서 저를 부를 때 주셨던 찬란한 약속이요 비전이었습니다.”며“인생 밑바닥에 살면서도 마음은 하늘에 있었고 눈은 저 높은 정상에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배가 고파서 가슴은 언제나 뜨거웠고 비전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청운의 이상, 찬란한 약속의 비전이 가슴 속에 요동하니 하루하루의 삶이 설렘의 연속이었고 행복 그 자체였습니다.”물론 소 목사의 꿈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예수님과의 찬란한 약속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설렌다는 그는 꿈 없이 잠든 적이 한 번도 없으며 꿈 없이 일어난 적이 한 번도 없을 만큼 꿈을 먹고 살아간다고 했다. 그의 꿈은 그를 현재 한국교회의 차세대 대표목사의 자리에 이르게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혼을 사랑으로 섬기는 교회’
현재 국내교회는 계파 간 갈등과 반목 속에서 진정한 기독교정신인‘사랑과 화합’의 정신이 결여돼 있다. 즉 교회 내의 기득권 분쟁은 교회 간의 반목과 갈등을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소 목사는 이 같은 현실에서는 교회 신도들의 분쟁을 조정할 수 있는 신뢰와 화합의 길을 목회자 및 교회 대표 지도자가 그 길을 열어 주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했다. 사회의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는 데‘목회적 대형교회’의 사회적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 같은 이념 하에서 새에덴교회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는‘목회적 대형교회’의 의미는 그 가치가 빛을 발하고 있다. 20년 전 개척교회로 시작한 새에덴교회는‘영혼을 사랑으로 섬기는 교회’라는 표어를 갖고 지금까지 목회를 진행해 왔다. 미국 최고의 컨설턴트인‘피터드러커(Peter Drucker)’의 저서 속에서“미래는 비영리 단체가 세상을 지배하게 되며, 앞으로 세계의 지배는 비영리 법인의 한 종류인‘대형교회’가 세계의 영혼을 지배하게 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즉, 이는 교회의 본질적인 존재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앞잡이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맥락으로 새에덴교회는 교회의 본질사역인‘영혼구원’과‘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에 근간을 두면서도, 역사와 그에 따르는 사회적 책임에 대한 공헌을 하는 것이‘목회적 대형교회’라는 판단 아래 이를 본 교회의 천명이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일반적으로 작은 교회는 이런 소명을 완수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사회적 책임과 소명을 갖추는 것은‘목회적 대형교회’만이 가능하며 이 사역을 위해서 새에덴교회는 장로교나 감리교의 계파를 떠나‘목회적 대형교회’를 근간으로 존재하고 있다. 사실 교회가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장 큰 요소는‘목회자의 소명의식과 그의 비전’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 목사는“목회자의 분명한 소명감과 비전을 통해 그 교회만이 갖는 특수성과 전문성이 정립된다”고 강조했다. 그런 부분에 있어 소강석 목사는 개척교회에 대한‘하나님나라’건설과 소명을 이루어야만 한다는 간절한 의지가 있었고 민족과 역사를 위해 전진하여야만 하는 사회적 소명감과 책임의식으로서 새에덴교회를 특수하게 만들었다고 자부했다.

60년 만에 다시 찾은‘전쟁의 기억’
새에덴교회는 2007년부터 매년 6월 참전용사 30여명을 초청해 민간 외교활동을 벌여왔다. 소 목사는 2006년 7월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을 시험 발사하면서 남북관계가 경색되었을 때 백악관 평화봉사단 특별정책기획실장 진교륜박사의 초청으로 백악관 직원 신우회 모임에서 설교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방미 일정 중에 미국 사람들이 TV에서 한국의 시위대가 성조기를 찢고 불태우는 장면을 보고 한국의 반미 감정에 대해 매우 섭섭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에게 성조기를 불태우는 모습이 한국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그리고 한미우호를 위해서는 정부차원의 외교뿐만 아니라 민간외교 차원의 교류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후 한국으로 돌아와 마침내 2007년 제 1차 6ㆍ25 참전용사 초청 행사를 실행하게 된다. 참전용사 초청 행사는 정부기관 차원에서나 할 수 있는 대규모 행사이지만 새에덴교회가 기획하고 모든 경비까지 지원하며 제3차에 걸쳐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대한민국의 안보와 선진화를 위해서 한미 동맹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민간 차원에서의 한미외교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소강석 목사의 참전용사 초청행사는 한ㆍ미 우호와 공동 번영을 위한 민간외교의 새로운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이 행사가 올해로 4회를 맞이했다. 올해 행사는 6ㆍ25 60주년을 맞이해 역대 가장 큰 규모의 행사를 계획했다. 미국 참전용사 120명, 용인에 거주하는 한국전 참전용사 150명, 미군 89명 등을 초청해 5박 6일 동안 행사를 진행했다. 이미 참전용사 초청행사는 한ㆍ미간의 민간외교 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연 행사로서 자리매김하였으며 4차 행사를 기점으로 더 영향력 있는 행사로 발전할 것임은 당연한 일이다. 이 같은 소강석 목사의 민족을 향한 애국심과 미래를 바라보는 역사의식에서 기획된 6ㆍ25 참전용사 초청행사는 한ㆍ미 관계에 새로운 파워 루트가 되었으며, 지속적으로 미국 내에 친한파 정치 지도자와 한ㆍ미 우호 민간 인프라를 확대해가고 있다.

한ㆍ일관계 우호협력을 위한 외교활동
소강석 목사는 통일한국시대를 대비하고 동북아의 중심이 되어서 세계를 주도하는 강대국이 되려면 한ㆍ일 외교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인식했다. 그래서 한ㆍ일 간의 진정한 화해와 용서 그리고 미래 지향적인 발전적 외교를 위해서 민간 외교 사역을 펼쳐왔다. 그의 지속적이고 진심어린 한ㆍ일 외교의 노력은 현해탄의 푸른 바다를 잠잠하게 했고 점점 눈물의 결실을 맺고 있다. 그 일환으로 한일기독의원연맹 지도목사로서의 열정을 실천해 왔다. 그는 민족을 향한 남다른 애국심을 가지고 3ㆍ1절, 8ㆍ15 광복절이 되면 기념예배를 꾸준히 해왔다. 또한 PPP십자가 대행진, 광복절 평화음악회 등 애국적 행사를 개최했다. 아울러 소 목사는 현재 일본 민주당의 대변인이기도 하는데, 대표적 양심으로 존경받는 도이류이치 의원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일본 내의 양심적 지성들을 깨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 도이류이치 의원과 동행한 일본 민간사절단들이 새에덴교회를 방문하여 성도들 앞에서 큰 절을 하며 과거 일본이 한국에서 저지른 만행을 진심으로 참회하며 용서를 구하는 뜻 깊은 시간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2008년 7월 29일부터 8월 1일까지 김영진의원과 함께 사할린을 방문하여 민간외교 활동을 펼쳤다. 사할린 주정부를 방문해 로코도프 국제위원장과 와실린코프 보건국장을 만나 한인들의 위상과 권익을 보호해 줄 것을 역설했다. 또한 소강석 목사는 한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이지만 민족을 사랑하는 역사의식을 가진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한국과 일본의 진정한 협력과 발전을 위해 끊임없는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 왔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7년 1월 15일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윌셔플라자 호텔에서 열린 마틴 루터 킹 기념식에서 한일기독의원연맹의 지도목사로서‘한일양국의 오랜 역사적 갈등과 미해결과제를 해결하고 진정한 화해와 평화공존의 길을 열어간 공로’를 인정받아‘마틴 루터 킹 퍼레이드 집행위원회’본부가 수여하는 국제평화상을 수상한 바 있다. 소강석 목사의 민간외교 활동은 단회적이고 이벤트 중심이 아닌, 진정한 민족애와 역사의식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더욱 빛이 났다. 그는 한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회자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뜨거운 애국심과 다음 세대를 향한 비전을 가지고 전 세계를 다니며 민간 외교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다. 그의 민간외교 활동은 앞으로도 계속되며 대한민국의 브랜드를 높이고 선진화 하는데 큰 역할을 감당할 것이다.

일치와 단합을 이루기 위한 선교활동에 주력
새에덴교회는 해외 선교활동으로 교회의 복음을 전파하는 해외 선교사를 양성하여 파병하는 해외선교 사역을 진행하고 있지만, 해외선교의 어려움으로 인해서 문화를 가미한‘해외선교 복음화’를 병행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새에덴교회와 같은 규모의 대형교회는 지교회를 통한 선교에 앞장서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소 목사는 지교회 설립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소신을 밝혔다. “나라고 해서 왜 지교회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 그러나 자칫 오해를 받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지금 이상하게 지성전 운동을 하면 문어발식 확장을 하는 것처럼 오해를 한다. 그래서 대형교회에서 지교회를 하면 주변 지역의 개척교회들이 들고 일어나서 반대를 하기도 한다. 우리 교회는 지교회를 설립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 오해를 받으면서까지 지교회를 하고 싶지 않다. 사실 미국에서는 지금 지성전 운동이 성형하고 있다. 클레식한 예배에서부터 현대적인 예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예배를 드리는 벤유(Venue)예배를 드리고 대형교회가 두 세 개의 지성전을 세우면서 멀티사이트화 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직 이러한 형태의 선교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도 언젠가는 이런 현대적 선교 트렌드를 수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사회적 인식이 확산되지 못한 상황에서 젊은 목사로서 작은 교회를 죽이면서까지 지교회를 설립하고 싶지 않다.”
국내선교 활동으로는‘미자립교회’와‘기관, 단체’등을 섬기는 국내 선교사역을 진행하고 주력하고 있다. 특히 한국교회의‘연합’과‘일치’를 중시한 선교활동에 주력을 하고 있다. 현재 교회들의 연합과 일치단결을 위한 새에덴교회의 역할은 갈수록 비중이 커져가고 있는 추세다. 이 외에도 일치와 단합을 위해서 섬기는 국내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다. 국내 선교활동 활성화에 대한 비근한 예로써, 시청 앞에서 부활절 예배를 할 때에 교회에서 수천 명의 성가대를 담당한 바 있다. 수천 명에 해당되는‘세계 성령화 운동, 천만인 성령운동’등 수천 명의 인원 동원을 통해 볼 때 국내 선교활동과 지역 대형목회 교회로서의 사역을 충실하고 왕성하게 담당하고 있다. 또 지역적 기독교 연합회의 통합으로서‘성남지역 기독교 연합회’,‘용인지역 기독교 연합회’등의 지역 사역적인 교회의 사역을 성령으로 감동되어서 진행하는‘지역기독교 집회’의 선본장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비전에 있다.
한국교회의 초기 기독교가 우리 민족의 희망과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했던 것은 한국교회의 특수성이자 기독교인들에게 제시되는 종교에의 비전이자 삶에 대한 희망이었다. 경제성장을 하면서 일치된 한국교회는 경제성장에 도움을 주었고 우리 국민들에게 교회에 대한‘일치’의 등식은 교회의 권위와 신실성의 이미지를 불어넣어 주었으며, 결국 우리는 하나라는 경제 성장 동력에의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를 움직이는 큰 힘의 원동력은 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에서도 이런 비전을 이루어 가기 위한 실천력을 배양해야 함은 물론이다. 새에덴교회의 궁극적인 사역의 목적은 예전의 국내 초대교회로 다시 전환하는 사고의 계기를 만드는 것과 더불어 작금의 분열된 국민정서를 극복하기 위해 교회의 일치를 통해서 경제적 문화적 해결점을 찾는 것이다. 이러한 궁극적인 목표와 비전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는 새에덴교회의 한국교회에 대한 영향력은 갈수록 커질 것으로 보이며, 이는 교회의 재정적 시간적인 투자 영역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사회적인 평가부분의 척도가 되는 기업의 평가는 그 기업의 건전성에 있는 것과 같이 교회의 신설성과 그 권위는 결국 소강석 목사가 언급한‘목회적 대형교회’의 책임과 실천으로만 가능하며, 교회 외부적으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실천적 대안으로써 지역과 국가 간의 문화교류와 세계 기독교 전파에 새에덴교회는 온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상살기’
소강석 목사는“저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과 역사를 통해 보여주시는 성령의 말씀을 전달하는 전달자로서 목회활동에 어려움을 느껴본 적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목회활동을 통해서 힘겹고 보람된 일들은 무수히 많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교회건물을 지을 때 건축비용을 마련하는 일을 언급하며 몹시 어려웠던 경험을 털어놨다. 뿐만 아니다. 그의 평소생활과 하나님의 말씀이 완벽하게 일치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점에 있어서도 죄책감을 느껴왔다. 하지만 그는 교회 성도들과 솔직하고 담백한 육신의 죄인임을 서로 인정하고 이해함으로써 목회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 했다. 반면, 목회활동 중에 보람되었던 경험도 무수히 많았다. 무엇보다 소강석 목사의 집안에는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친척 중에도 믿음을 가진 이가 전무했다. 때문에 그가 목사의 길을 선택했을 때 그는 허허벌판에 홀로 남겨진 존재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집안이 전부 기독교로 개종을 했다고 한다. 그 어떤 일보다 그에겐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새에덴교회는 중ㆍ소 교회와 타 교회의 개척교회로 출발해 대형목회 교회로 성장시킬 수 있었던 것은 가족 모두를 개종시킨 일 이상으로 목회자로서 자신의 삶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되었다. 그는“교회의 근본적인 존립이유는‘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상살기’와‘하나님의 축복’이다”며“이러한 이유에서 저와 새에덴교회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고 타 교회와 성도들에게 믿음의 도전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평소“내 영혼의 영토에 사랑의 꽃씨로써 세상 가득 주님의 말씀의 향기를 나누자”는 말을 자주 되뇐다. 이는 목회자 소강석의 소명이며 은밀한 고백인 것이다. 그의 소명이 만 천하에 전해지길 기도해 본다.<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