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리포트 - 이라크전 사실상 종료
마침내 끝난 이라크전, 전쟁은 무얼 남겼나
2010-09-27 이지영 기자
이라크전 발발 7년...전쟁은 성공했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8월 31일(현지시간) 미군의 이라크전 전투 임무 종료를 공식 선언했다. 이로써 사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진 대량살상무기의 잠재적 위협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미국이 지난 2003년 3월20일 개시했던 이라크전은 7년5개월여 만에 사실상 종료됐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저녁 TV로 중계된 18분간의 백악관 오벌오피스 연설에서“미국과 이라크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를 거치면서 우리는 책임을 다했으며, 오늘 미군의 전투 임무는 끝났다고 선언한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이라크의 자유 작전’(Operation Iraqi Freedom)은 종료됐고, 이제 이라크 국민이 자기 나라의 안보에 대한 책임을 주도해야 한다”며 미군 임무의 이라크 이양 입장을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은“이라크의 미래를 이라크 국민의 손에 넘겨주기까지 우리는 막대한 비용을 지불했으며, 이제는 페이지를 넘겨야 할 때이며 국내에서 우리나라를 재건해야 한다”며 향후 국내 역량의 경제 회복 집중 필요성을 강조했다.
오바마“이라크전 전투임무 종료”
이라크전은 독재자 사담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키고 50년만의 자유선거 실시 등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싹 틔우기도 했지만, 이라크 내 종파 분쟁을 격화시켜 내전을 유발해 엄청난 인명 손실을 낳았다. 또한‘침략전쟁’이라는 국제 여론이 일어 미국의 이미지를 손상시킨 전쟁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오바마 대통령도 이날 연설에서 종전을 선언하면서도“승리했다”거나 “패배했다”는 승패를 규정하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다. 미군은 전투병력 철수 후 앞으로 이라크에 지원 병력 5만 명을 유지하며 작전명을‘이라크의 자유’에서‘이라크의 새 여명’으로 바꾸고 내년 말 완전 철군 때까지 이라크 군.경에 대한 교육과 훈련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오바마 대통령은“이라크전 종료는 이라크뿐 아니라 미국의 이해에도 부합하는 것”이라며 향후 미국의 자원을 아프간전쟁 진전과 경제회복 등 국내 사안에 집중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은“현재 우리의 가장 급박한 임무는 경제를 되살리는 것이며, 일자리를 갖지 못한 수백만 명의 미국 사람에게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며“앞으로 이 문제가 대통령으로서 핵심적인 책무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라크 정치지도자들에게 조속한 정부 수립을 촉구하면서“미국은 앞으로 계속 이라크의 강력한 파트너가 될 것이며, 우리의 전투임무는 종료되지만 이라크 미래를 위한 미국의 헌신은 끝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이라크 주둔 미군의 감축을 통해 전투역량을 아프가니스탄전에 집중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며“내년 8월 아프간 책임 이양을 개시할 것이고 아프간 미군 감축 속도는 현지 상황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아프간전 철군 일정도 덧붙였다. 이라크전 교훈과 관련, 오바마 대통령은“미국의 세계적 영향력은 군사력 만에 있는 것이 아니며, 국익과 동맹을 지키기 위해서는 외교력, 경제력 등을 포함한 다양한 요소의 힘들을 사용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라크전 종전 선언 연설에 앞서 이라크전을 개시했던 조지 부시 전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가졌다. 백악관은 통화 사실만 발표하고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이라크전 7년간의 기록들
이라크전은 잠재적 군사위협을 이유로 선제 억지 개념을 적용한 최초의 전쟁으로 개전 이전부터 많은 논란을 낳았다. 1991년 걸프전, 1999년 코소보전, 2002년 아프가니스탄전 등 미국이 개입한 대규모 전쟁 선례는 도발을 단행한 세력에 대한 사후응징의 형식이었지만 이라크전은 대량파괴무기와 테러의 확산 방지를 목적으로 한 사전응징의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주도의 연합군은 국제적인 반전 여론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엔의 승인도 없이 2003년 3월 20일 이라크에 대규모 공습을 퍼부으며 전쟁을 시작해‘침략전쟁’이라는 비난을 들었다. 개전 후‘충격과 공포’작전을 통해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 정밀유도폭탄 등 첨단 무기를 동원한 연합군의‘족집게 폭격’앞에 이라크군은 적수가 되지 못했다. 바그다드를 함락한 미군은 4월 9일 바그다드 알 피르다우스 광장에 있던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 동상의 얼굴에 성조기를 덮어씌운 뒤 밧줄로 동상을 끌어내렸다. 이는 중동의 맹주를 꿈꾸던 후세인의 24년 철권통치에 종말을 고하는 상징적인 장면이 됐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전쟁 개시 한 달 여 만인 5월 1일, 걸프해역에서 미국으로 귀환 중인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호에 전투기를 타고 내린 뒤 주요 전투의 종료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같은 해 12월 13일에는 후세인이 자신의 고향인 북부 티크리트 인근 지역의 참호 속에서 숨어 지내다 미군에 체포됐고 결국 2006년 12월 30일 교수형에 처해져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후세인 정권의 몰락은 이라크 시아파와 수니파 간 종파 분쟁의 판도라 상자를 연 셈이 됐다. 1932년 이라크 건국 이후 늘 집권세력이었던 수니파는 후세인 정권 붕괴로 시아파에 권력을 내준 뒤 권력 요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이는 수니파와 시아파 간 갈등이 격화되는 단초를 제공했다. 급기야 2006년 2월 23일, 시아파 성지인 아스카리야 사원의 황금돔이 폭탄공격에 파괴되면서 시아-수니파 간 종파 분쟁은 내전 상황으로 치달았다. 공격 배후에 수니파가 있다고 의심한 시아파의 비밀 무장요원들은 보복에 나섰고 이로 인한 동족 간 피의 살육은 이듬해까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이라크인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막대한 군사, 재정 투입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의 상황이 내전국면으로 치닫자 반전 여론이 다시 거세게 불어 닥쳤지만 부시 행정부는 2007년 2월 병력을 증파하며 이라크 안정화 작전에 돌입했다. 미군의 병력 증파는 결과적으로 내전 상태의 바그다드를 안정화하고 안바르 등 수니파 거점 지역에서 무장 투쟁을 무력화하는 데에도 일정 부분성과를 거뒀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이라크의 민주주의도 힘겹게 싹을 틔워 갔다. 2005년 1월 30일, 50년 만에 자유선거 방식으로 제헌의회 총선이 치러졌고 이듬해 5월에는 이라크 건국 이후 최초로 시아파 정권인 누리 알-말리키 정부가 출범했다. 이라크 주둔 미군의 철수 일정이 구체적으로 윤곽이 잡힌 것은 2008년 12월 미-이라크 안보협정이 승인되면서부터다. 2011년 12월까지 당시 15만 명에 이르렀던 병력 전체를 완전 철수한다는 내용의 이 협정은 이라크전 종전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더욱 탄력을 받았다. 결국 지난 19일 이라크 주둔 마지막 전투여단이 철수를 마쳤고 오바마 대통령은 31일 대국민 연설을 통해 전투 활동 종료를 선언했다.
마침내 끝난 이라크전, 미군은 무엇을 남겼나
이라크 침공은 9·11 직후 사담 후세인 정권이 테러리스트와 연루돼 있고, 핵무기·생화학무기 같은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미국 쪽의 일방적인 주장과 더불어 준비돼왔다. 미국의 싱크탱크인 공공청렴센터(Center for Public Integrity)는 부시 행정부가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이라크가 미국에 위협이 된다는 잘못된 입장을 발표한 횟수가 935건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부시 행정부의 주장에 따르면 이러한 위협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한 예방 전쟁(Preemptive war)은 일종의 정당방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라크에 대한 유엔 사찰단장인 한스 브릭스는 이라크 전쟁 개전 직전인 2003년 2월14일 유엔 안보리에 사찰 결과를 보고하면서“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 혹은 그와 연관된 아이템이나 프로그램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유엔 사찰단은 그러한 무기를 전혀 찾아내지 못했다”고 밝혔다. 완곡하지만 아주 강하게 미국의 주장을 부인한 것이다. 결국 미국은 유엔 안보리로부터 침공을 뒷받침할 만한 아무런 결의를 얻지 못한 채 3월20일 이라크를 침공했다. 코피 아난 당시 유엔 사무총장은 2004년“이라크 전쟁은 유엔헌장에 저촉되는 불법행위”라고 규정했다.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점령 직후 미군 정보부와 무기 전문가 1천여 명으로 이라크 서베이 그룹(ISG)을 구성해, 이라크 전역을 돌며 후세인 정권의 대량살상무기 보유 의혹을 샅샅이 조사했지만 증거를 발견하는 데 실패했다. 2004년 7월 발표된‘미국에 대한 테러 공격에 관한 국가위원회’최종 보고서 역시“9·11의 주모자로 알려진 알카에다와 사담 후세인의 협조관계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이라크 전쟁 이후 밝혀진 여러 다른 증거자료들은 이라크 침공이 당시 정황에서 위협의 해석을 잘못한 까닭에 발생한 단순한 혹은 이해할 만한 실수(reasonable mistake)가 아닐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은 이라크와 세계를 무장 갈등의 악순환에 깊숙이 연루시켰다. 부시 행정부는 ‘우리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패권적 태도로 동맹국의 침략행위 동참을 압박했다. 그가 주창한 ‘의지의 동맹’은 사실상 맹목적 추종의 동맹이었고, 미국 자신은 물론 전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는 자기 파괴적 담합이었다. 전쟁 초반 미군과 다국적군은 승승장구하는 듯했다. 부시 대통령은 전쟁 개시 40여 일이 지난 5월1일 임무 종료를 선언했다. 그러나 승리를 선언한 그날 이후부터 미군은 이라크에서 완강한 저항에 직면했고 베트남전보다 더한 좌절을 맛봐야 했다. 2003년 3월부터 2010년 9월까지 미국은 약 9천억 달러의 전비를 지불했지만 군사적으로 완전히 실패했다. 이는 한화로 약 1천조 원이 넘는 천문학적 액수다. 전 세계 54개국이 점령에 가담했고 최대 18만 명 이상의 점령군이 주둔했다. 이 밖에도 거의 같은 수에 해당하는 군 지원 인력과 민간 전쟁 기업체 직원들이 점령과 전투를 돕고 있다. 미군은 최대 17만여 명의 군대를 주둔시키기도 했다. 한국은 3400명을 보내 영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군대를 파견한 나라라는 오명을 얻었다. 부도덕한 점령과 군사적 실패는 군대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정신적 손상을 가져다주었다. 이라크 파병 미군 장병의 30%가 귀환 3~4개월 안에 심각한 심리질환을 경험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7년여의 점령과 저항, 그리고 강요된 내부 갈등 과정에서 이라크는 수세대에 미칠 극단적 파괴와 분열의 상흔을 입었다.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실에 따르면, 2007년 최정점에 달한 이라크 난민 혹은 거주지 이탈자의 수는 총인구 2600만 명의 17.5%에 이르는 약 450만 명으로 집계됐다. 이 수는 현재까지 크게 줄어들지 않고 있다. 2007년 현재 이라크 어린이들의 28%가 만성적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 전쟁과 무장 갈등으로 인한 민간인 사망은 언론에 보도된 수를 집계한 최소치 10만여 명에서 최대 100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이라크에 민주주의와 재건을 선사하겠다는 공약은 군사적 목적을 위한 사탕발림임이 점령 과정에서 여실히 확인됐다. 유엔 이라크지원단(UNAMI)은 2006년 7월 보고서를 통해 “이라크 전역에서 민간인에 대한 잔혹한 고문이 일상화되는 등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장기화되면서 인권유린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고 이라크 정부가 법과 질서의 총체적 붕괴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2006년 9월 <뉴욕타임스>에 폭로된 미국 ‘국가정보평가(NIE) 보고서’는 이라크전으로 테러 위험이 되레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이 평가 보고서는 이라크 전쟁에 참여한 외국의 이슬람 전사들이 본국으로 돌아가 국내 분쟁을 악화시키거나 급진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고 있으며 이에 따라 자원해 활동하는 테러조직이나 급진 단체가 급증했다고 평가하면서 “테러리즘 확산에 대한 더 많은 직접적 책임이 이라크 전쟁에서 비롯”됐다고 인정했다. 국가정보평가 보고서는 미국 내 전체 16개 정보기관이 정보 분석을 종합한 것으로 미 정보기관들이 특정 국가의 안보 상황과 관련해 만드는 문서 중 가장 권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 국가정보위원회 의장을 지낸 로버트 허친슨 등 전문가들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이라크가 차세대 테러분자들을 끌어들이는 자석과 훈련장이 돼버렸다”고 혹평했다. 미군의 비인도적 행위들은 이라크에서 저항과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고 전 세계에서 미국의 리더십을 결정적으로 훼손했다. 2004년 4월28일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요커>와 은 미군이 장악하고 있는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벌어진 포로 학대에 관한 보고서와 사진을 공개했다. 이들은 점령 이후 2004년 사건이 폭로되기까지 그 같은 고문과 상습이 ‘일상적’으로 자행됐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폭로했다. 당시 이라크 전역에서는 1만3천여 명의 수감자들이 명확한 증거 없이 장기간 구금돼 가혹행위를 당하고 있었다. 미군은 헌병대원인 이반 프레더릭 상사를 비롯한 부사관과 사병 6명을 군법재판에 회부했으나 미국 대통령과 부통령, 국방부 장관과 법무부 장관 등이 사실상 합법화한 고문에 대한 책임을 교도소 관련 실무자들에게 전가한다는 비난에 직면했다. 국제인권단체들은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행해진 가학적 행위들이 미 국방부와 법무부, 중앙정보국(CIA) 등이 아프간 전쟁 등 대테러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공식화한 ‘법률적 기준’과 이를 위해 고안된 ‘강압적 심문 규정’에 근거한 것이라고 폭로했고, 이는 미국을 전 세계 인권 상황 악화의 주범으로 지목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들은 고문을 합법화한 미 행정부 주요 인사들을 전범으로 고발하는 활동에 착수했다. 미국 헌법권리센터(Center for Constitutional Rights)가 주도한 이 고발건은 지금까지 미국과 몇몇 우방국 재판부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미 10만 명에 가까운 이라크인의 목숨을 앗아간 7년간의 전쟁은 이런 이유로 여전히‘현재 진행형’이다.
이라크인들에게 조국은 아직도 돌아갈 수 없는 나라
미국은 이라크의 치안이 상당 부분 안정화됐다며 전투임무를 종료하고 떠나고 있지만 이라크인들에게 조국은 아직도 돌아갈 수 없는 나라인 경우가 많다. 사담 후세인 정권이 몰락한 것은 7년 전이지만 여전히 조국 이라크는 테러와 종파 간 폭력, 납치와 협박이 횡행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라크를 제외한 전 세계 모든 나라를 떠도는 이라크인에 대한 정확한 집계는 없다. 8월 19일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150만 명 이상이라고 추산했고 각국 정부 통계를 보면 180만 명 선이다. 이라크 이웃국가인 시리아에 105만 명, 요르단에 45만 명, 레바논에 5만 명이 떠돌고 있다. 독일 4만9천명, 스웨덴 3만2천명, 영국 2만1천명 등 유럽 지역은 물론이고 미국에도 약 5천400명이 있다. 이라크 국내에는 150만 명에 달하는 유랑민이 또 있다. 이들 중 ⅓은 지저분한 캠프에서 생계를 영위하고 있다. 미국은 이라크 치안이 안정화됐다고 주장하지만 이들은 고향으로 복귀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올해 3월에 어렵사리 총선을 치렀지만 아직 정부도 구성하지 못한 상황이며 테러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고향으로 돌아가 봐야 수도와 전기, 교육 등 기본적인 생활 여건이 제공되지 않으며 실업률은 엄청나게 높다. 고향 집은 이미 다른 사람이 차지하고 있다. 이국에서 방랑 생활도 여의치 않다. 실업 상태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저축해놓은 돈도 바닥난 지 오래다. 이라크 정부는 복귀자에 대해 소정의 정착금을 지불하지만 예산이 태부족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이라크에 대한 관리 책임을 군에서 민간으로 이양할 것이라고 뉴욕타임스(NYT)가 보도했다. 미 국무부는 2011년 10월에 이라크 경찰 훈련 책임 등을 떠맡을 예정이다. 국무부는 사설 보안업체 등의 도움을 받아 치안 유지 역할을 수행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사설 보안업체 직원 수를 7천여 명으로 배 이상 늘리게 된다. 이들 보안업체 직원은 레이더를 이용해 적의 로켓포 공격 탐지, 노변 매설 폭탄 탐지, 무인정찰기 운영, 민간인 구호 활동 등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다.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문제
이번 철군은 1990~1991년 조지 H.W. 부시 대통령(아버지 부시)의 제1차 걸프전 때와는 달리 유엔 등 국제사회의 공감을 얻지 못한 채 미국이 벌인 제2차 걸프전이 사실상 종료됨을 의미한다. 2차 걸프전은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으로 우리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이라크 파병 문제는,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 생각해봐도 역사의 기록에는 잘못된 선택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을 맡은 사람으로서는 회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노무현 전 대통령이 회고록 <성공과 좌절>에서 밝힌‘이라크 파병’과 관련한 소회다. 참여정부는 조지 부시 미국 정부의 대북 강경정책 완화와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이라크 파병을 지렛대로 삼으려 했다. 2003년 봄 참여정부 출범 직후 미국 쪽에서 북핵 제거를 위한 폭격 주장까지 나오는 등 대북 강경론이 널리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이라크 침공’한 달 뒤인 2003년 4월말 정부는 이라크에 건설 공병과 의무대 등 비전투병력 300여명을 보내 미국을 도왔다. 이후 이라크 파병 논란이 2003년 내내 이어졌다. 이라크 파병 동의안은 논란 끝에 결국 2004년 2월 국회를 통과했다. 2004년 6월 이라크 무장단체가 현지에서 일하는 김선일씨를 납치해 한국이 파병을 철회하지 않으면 김씨를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라크 파병 방침을 굽히지 않았다. 김씨는 결국 살해됐고, 그 책임 소재를 놓고 외교통상부에 대한 감사원 감사와 국회 국정조사로 이어졌고 이라크 파병의 정당성에 대한 논란이 거세졌다. 1년이 넘는 논란 끝에 자이툰 부대가 2004년 9월 이라크 북부 아르빌에 파견됐다. 자이툰부대는 병력이 한때 3800여명이었으나 2005년 2월부터 줄어들어 2008년 12월 임무를 마치고 철군할 때는 520여명 규모였다. 베트남전 파병 이후 최대 규모의 해외파병부대인 자이툰부대는 4년 3개월 동안 연인원 1만9100여명이 파병됐으며 4차례 국회 파병연장동의안 의결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