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한 학설 증명은 생체실험으로만 가능했다”

120세 수명연장 프로젝트 벌였던 김일성 장수연구소

2010-10-06     이민아 기자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나 이듬해 6.25 한국전쟁 발발로 인해 어머니 등에 업혀 월북하여 평양 외가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1964년 평양의학대학에 입학하여 봉한 학설을 비롯한 북한 동의학을 수학했다. 1980년에 <만수무강 장수연구소>에서 10년 이상을 기초의학연구원 연구사로 있었다. 북한 체제에 대한 끝없는 회의와 수많은 비밀을 감당하지 못해 목숨을 걸고 압록강을 건너 1992년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다. 최근 <만수무강 장수연구소>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양심고백과 더불어 인류의 건강증진을 위해 <통합의학은 건강장수혁명>을 펴낸 김소연 박사를 현재 그녀가 운영하고 있는 <보궁산알 면역증진센터>에서 만나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영특하고 다정하여 모든 이로부터 예쁨 받던 김소연 박사는 북한당국을 위해 일하기 시작하면서 마음을 닫고 그들이 시키는 임무는 무엇이든 수행했다

Q. 김일성 장수연구소에 들어가게 된 과정에 대해 한 말씀.
어머니가 북한당국에 의해 숙청당한 이후 혁명가집안에 입양되어 들어갔다. 무엇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어른들의 믿음과 기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에 매진했다. 4살 때부터 귀재라고 불렸다. 영특해서 한 번 보면 다 얼굴을 기억하고 한 번 간 길도 다 기억해서 어른들로부터 칭찬을 듣고 자라왔다. 우리 어머니께서 내게 남다른 교육을 해주신 덕분이다. 자장가로 시와 동요를 불러주셨고 이솝우화, 김소월 시인의 시를 읊어주셨다. 그것을 듣고 자라면서 풍부한 표현력과 상상력을 키울 수 있었다. 표현력의 한 예를 들자면, 외가가 이씨왕조의 16대 왕손이었다. 지금 평양의 김일성 동상이 세워져 있는 곳에 우리 어머니의 생가가 있었다. 그 집 밑에 방공호가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서 몸을 숨겼었다. 어떤 아주머니가 그곳에서 소리를 내며 방귀를 뀌었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얘는 조그만 애가 방귀소리가 왜 이렇게 크냐”며 그것을 떠넘겼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그러면 내가 방귀뀌면 아주머니한테 소리 나는 거예요?”라며 반문을 했고, 어른들은 그때부터 4살짜리 어린 여자아이가 참 영특하다며 예뻐해 주었다. 또한 우리 외할아버님이 왕족이면서도 1900년대 최초로 평양에 교회를 설립하신 초대 장로셨다. 당시 영향력이 매우 크셨던 우리 외할아버님이 저를 높이 평가하셨다. 그때는 전쟁으로 인해 북한에서 기독교를 간섭할 수 없을 환경이었다. 56년 종전 후 복구 건설이 시작되면서부터 사람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인, 상인, 기업인 등을 몽땅 잡아갔고 그 과정에서 우리 어머님도 숙청당하셨고 나 혼자 살아남게 되었다. 우리 어머님은 서울에서 이화여중을 나오셨고 다시 평양으로 가신 후 일제의 위안부 강제징집을 피해 다시 서울에 오신 후 숙명여중에 입학하셨을 당시 해방이 되었고, 그 숙명여중이 숙명여대가 되었다. 그 곳에서 국어국문학을 공부하셨고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지식이 많으셨다. 북한의 사상교육에 의심을 품고 계셨던 어머니에게 북한당국이 김일성 종합대학 어문학부로 가라고 명령했고 어머니는 그것을 거부했다. 그 후로 숙청대상이 된 것이다. 내가 의학대학에 진학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당시 의학대학은 모두의 선망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민학교, 중학교에 진학한 후 사회에 나가 일을 한다. 하지만 공부를 해야 하는 사람들은 전문학교를 가게 된다. 전문학교를 졸업 한 후 의학대학으로 자연히 연결되었다. 사실 1954년 방공호에서 공부했던 5살 때부터 외할아버님께 천자문은 배웠지만 학교에 대해서는 몰랐다. 종전 후 북한이 문맹을 탈출시키기 위해 사람들을 모두 학교에 다니게 했다. 한 반에 온 가족이 다 모여 있을 정도로 나이 대가 뒤죽박죽이었다. 6살 때 처음으로 학교에 들어간 나는 사람들이 반장이라고 부를 만큼 사람들을 잘 챙겼다. 어렸을 때부터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자라 사랑을 나눌 줄 알았다. 하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북한당국을 위해 연구를 하기 시작한 때부터 마음을 굳게 닫고 오로지 나만을 생각하고 자기방어하기에만 급급해졌다. 살기 위해서 그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모두 수행했다. 이제 60이 넘으니까 점점 살아있는 존재에 대해 귀중하게 생각하게 되고 모든 사람들과 공존하고 공유하며 살아가는 것이 내 삶의 목표가 되었다. 남들은 나더러‘답답하다’,‘아직도 꿈에 젖어 산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난날의 힘든 생각을 하면‘그 것을 어떻게 이겨냈는데 이렇게 쉽게 물러날 수는 없지’라는 끈기가 생긴다.

“북한당국은 나로 하여금 여성의 성(性)까지 잃어버리게 했다. 즉, 요즘 말하는 화학적 거세를 당한 것이다.”

Q. 장수연구소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남한으로 귀순 한 후 많은 유혹들이 있었다. 봉한 학설(세포이전의 형태로 산알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이 경락을 순환하면서 세포의 생성과 사멸을 주관하고 있다는 종래의 세포이론을 뒤엎고 고전 경락이론을 하나의 거대한 학문 체계로 완성한 독보적인 이론)을 주창한 김봉한 선생님의 제자이자, 김일성 장수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던 나를 이용하여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도 그들 속에 합류하여 돈을 벌 수 있었지만 그 유혹을 이겨냈고, 결국 남은 것은 없지만 나 자신이 자랑스럽고 대견하다. 인간이 먹고 살기 위해서 겪는 고난과 어려움은 고통이 아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저는 그렇지 못했다. 북한당국의 조종을 받아 움직이는 꼭두각시, 투명인간과 같았다. 나의 생각, 인간적인 감정은 모두 망각한 채 살아야만 했다. 지금에서야 북한에서 조종당하며 살았던 그 순간들을 어떻게 무엇으로 이겨냈을까 에 대해서 돌이켜보고 있다. 현재 탈북자들도 70년대 이후 출생자로서, 제가 살던 당시의 북한당국이 어떤 일들을 저질렀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저와 같은 시대를 살아온 황장엽 씨뿐이다. 때문에 북한당국이 우리 어머님과 같은 인텔리들을 먼저 숙청했던 것이다. 북한 사회는 피라미드 사회다. 그들의 행각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소수의 우리들에게 좋은 대우를 해주었다. 북한사회를 잘 나타내주는 말이 있다. 군중은 복숭아살, 복숭아씨는 핵심군중, 핵은 당으로 표현했다. 군중은 물러 터져서 썩어서 상해도 복숭아씨는 남아있다. 핵심군중이 있어야 핵인 당이 살아남고 핵심군중이 있어야 언젠가 싹이 터서 또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다. 나와 같은 핵심군중에게 당과 수령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도록 계속 반복해서 교육을 시키고 사상을 주입한다. 그렇게 하여 당과 수령을 위해 죽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김정일은 바깥사람들이 굶고 죽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몰랐다. 북한 사회체제는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더불어, 호위호식의 끝이 어디까지인 줄도 모른다. 예를 들면 사장이 회사 살림살이 모두에 자세히 아는 것이 아니라 직원들을 통해 보고받고, 직원들로 하여금 운영하게끔 하는 것과 같다. 그러다 외국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문화의 바람을 쐬게 된 기회가 왔다. 북한에 돌아와서는 사상검토를 받아야만 했다. 그들이 말하는 대국주의, 외래 문물을 퍼뜨릴까봐 소멸시킨다는 작업으로, 자신의 생각을 쓰고 발표를 해야 했다. 이것이 나의 깨달음의 시작이었다. 당시 나는“어떤 광장에 가서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고 무엇을 보고 왔다. 분수대 앞에서 무엇을 했다”는 식의 사실을 말했다. 하지만 북한 당국은 아니라고 다시 쓰라고 지시했고, 그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나는 무엇이 잘 못 되었는지 몰랐다. 하지만 같이 갔던 일행 중에서 한 사람이 통과했다.“그 분수대 앞에서 분수를 보니 평양의 분수보다 훨씬 못했다. 그 나라의 물맛보다 수령님 품의 물맛이 더 좋았다”는 식으로 다른 국가의 문화를 폄하하고 북한을 추켜세우니 통과가 된 것이다.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저렇게 따라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3일 동안 고민 끝에 할 수 없이 살아야했기에, 좌천되지 말아야 했기에 그렇게 따라했다. 하지만 그 끝에 남은 찜찜함은 지워지지 않았다. 심지어 북한당국은 나로 하여금 여성의 성까지 잃어버리게 했다. 즉, 요즘 말하는 화학적 거세를 당한 것이다. 연구소에 들어갔더니 예방주사를 맞아야 한다며 여러 주사를 놓았다. 주기적으로 세 번 정도 맞혔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여성 호르몬을 억제하는 주사였던 것이다. 그 주사를 맞고 나니 인간적인 교감이 없어지고, 생리도 없어졌다. 그야말로 신경질적으로 일에만 매달리게끔 되었다. 그때부터 자기방어의 본능과 정체성을 찾기 위해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황구(黃狗)를 비료로 한 단백질 사과, 사계절 산삼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향기요법, 분자원리와 분자교정원리를 이용한 녹용주사와 태반주사를 사용했다”

Q. 장수연구소에서 사용했던 이색적인 건강비법이 있었다면 말씀해 달라.
화학적인 방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서 살아가는 것을 가장 중점에 두었다. 동의학적인 방법을 기본으로 하였다. 북한은 1977년부터 조선의학과학 동의학 연구소라는 명칭을 붙이고 실제로는 김 부자의 건강과 장수를 위해 의료종합 건강증진 시스템의 프로그램 운영을 위한 만수무강 장수연구소를 만들었다. 그곳의 종사자는 4,000여 명의 인원으로 각 분야별로 나누어져 있고 의료진은 200여 명으로 기초의학과 임상의학으로 나뉘어져 충성심을 강요당했다. 1700여 종의 약재를 준비하여 우리 기초의학자들은 연구를 하고 이를 토대로 임상의학자들은 임상실험만을 했다. 기초가 튼튼해야 집이 튼튼한 것처럼 우리 기초의학 학자들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750가지의 약재를 이용하여 특허를 내듯이 자신만의 연구를 통해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 했다. 인체생물학적 실험을 통해 약물의 치료방법 및 양생비법과 침구 수기조작 치료법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래서 임상실험을 통과한 임상치료의 실천을 통해 현대 의학적으로 분석하는 모든 과정을 과학화하여 규정과 강령으로 하고 지침서를 만들었다. 그중에서 가장 우수한 것들만을 기준으로 선별하여 수십, 수백 차례 인체의 임상실험을 통과한 자료들만을 장수연구소에서 적용하였다. 그 과정에서 장수연구소 육종학자의 대표적인 작물로서‘충성 1호’로 칭해진 단백질 사과는 육종학자의 가장 높은 충성심을 입증하는 수확물이 되었다. 이는 황구(黃狗)를 비료로 사용하여 단백질을 충분히 머금고 사과나무가 자랄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원예학자들도 충성심을 발휘하기 위해 산삼 꽃을 피워 사계절 산삼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향기요법으로 건강 장수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높은 치하를 받았다. 또한 분자원리와 분자교정원리를 이용한 농축액 주사를 이용했다. 녹용 주사약과 황기 주사약 또는 태반을 이용한 생물원자극소 주사들을 만들어 특정 인물들에게 보약으로 공급했다. 또한 아스피린을 먹어야 하는 상황이면 그 대신으로 살모사의 독을 추출하여 거르고 분자원리로 만든 약재를 사용했다. 어혈을 풀어주는 침구 법을 활용하여 피를 맑게 해주는 치료도 시행했다. 나는 그 중에도 항상 경락의 물질적 실체를 실험 연구하였던 것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에 그것을 모티브로 삼아 동물과 인체의 실험연구를 잘 해낼 수 있어, 침술에 대해 과학적으로 밝혀내었다. 그 후에는 분원을 만들어 서열대로 지정하고 중앙당 8국에서 관리하는 본원과 분원으로 구분하였다. 1위부터 10위까지는 아비산 본원, 그 다음부터는 묘향산 분원, 석암 분원, 문수산 분원 등으로 이름 지으며 많은 분원이 늘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불로장수 약으로 호위호식을 누리면서도 김일성은 오래 살지 못했다. 결국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이 정도를 지나친 생활이 오히려 죽음으로 이르게 한 것이다. 심지어 70대의 김일성에게 20대 젊은이들의 피를 수혈 받게 함으로써 경동맥 뒷부분의 근종은 부피가 커지면서 수술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로인해 심혈관 질환의 순환장애가 초래되었고 그것이 죽음의 가장 큰 원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봉한 학설은 생체실험으로만 입증이 가능하다. 집단관리소에 잡혀있는 체제를 거부한 사상범들, 탈영한 군인, 학자들을 데려와 생체실험을 실시했다.”

Q. 현재 봉한 학설이 어느 정도 과학적으로 입증된 상태인가.
현재 서울대학교의 소광섭 교수님께서 연구하고 계신데, 어느 정도까지라고 말은 못하겠지만, 어디에 근거를 두고 연구를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본다. 이번에 펴낸<통합의학은 건강장수혁명>에서 봉한 학설은 생체실험을 통해서만 입증이 가능하다고 고백했다. 과거에 나와 함께 공동연구를 하자고 제안하고 봉한 학설에 대해 입증해 달라고 요구해왔지만 이제와 밝히는 것이 바로 생체실험으로만 가능했기에 입증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 말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귀순한지 얼마 안 되었고, 주위에서도 생체실험에 대한 고백은 네가 위험에 처할 수 있으니 말하지 말라고 권유했었다. 또한 봉한 학설에 대해 섣불리 밝힌다면 줄기세포연구를 발표했던 황우석 박사와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줄기세포처럼 봉한 학설의 주된 이론인 경락과 산알로 불치병도 치료할 수 있고 죽었던 사람도 살려낼 수 있을 것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환상과 기대, 희망을 갖게 할 수 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며 지금 내가 우려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학자는 솔직해 져야 한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밝히는 것이다. 소광섭 교수에게도“경락을 내가 과학적으로 밝혔으면 그 쪽으로 연구를 하면 될 텐데 해부학적인 방법으로 어떻게 봉한 학설을 밝혀내고 그 무거운 짐을 혼자 감당하려고 하는가”하고 말했다. 책에서 밝혔듯이, 생체실험은 집단관리소에 잡혀있는 사상범들, 즉 탈영을 시도한 군인들과 학자와 같은 인텔리들을 가둬두었는데 그들을 데려와 실시했다. 내가 참가한 실험에는 못 먹어서 빼빼 마른 사람이 대상이 되었다. 장기를 관찰할 때에는 산알이 세포로 형성되는 과정을 보아야 한다. 사람은 굶을수록 산알화되어 붕괴되는 세포 수는 대단히 증가하지만 반대로 세포로 성장하는 수는 증가하지 않는다. 실험관찰을 하기 위해 건강한 인체의 정상 간장을 2mm정도 직경의 유리관으로 찔러 손상시킨 다음 시간별 조직을 채취해 조직 표본을 작성하는 실험을 했다. 손상시킨 간장은 12시간 경과 후 부위에 출혈과 백혈구 등의 염증 현상이 일어났고 손상된 간장조직은 점차 염색성이 변화되면서 괴사조직으로 변한다. 이러한 실험을 7일간에 걸쳐 지켜본 결과, 첫째, 손상 부위 주위에 3~5마이크로의 핵양 구조물이 모여든다. 둘째, 핵양 구조물은 둥근 핵양 구조물로 변한다. 셋째, 둥근 핵양 구조물 주이에 세포형질이 이루어지며 형질은 농염 된다. 넷째, 세포는 성숙하여 정상 세포의 크기에 달한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나로서는, 봉한 학설 재현 문제는 인체의 생체실험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또한 정상 간장 조직의 손상과 재생을 위한 연구를 위해 최장 7일간을 개복 상태에서 지켜보는 생체실험을 위해 적지 않은 시간동안 참가했기에 과감하게 말할 수 있다. 일전에 토끼를 대상으로 한 해부실험에서 이것이 봉한 관인지 아닌지 확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맞다”고 말 할 수도 있었지만 학자의 양심과 나의 스승님이신 김봉한 선생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 싶었다. 그 분이 생체실험을 했다는 사실이 소련에 알려졌고 세계에 그 사실이 밝혀지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북한당국 스스로가 제거한 것이다. 김봉한 선생님과의 인연은 참 묘했다. 김봉한 선생님은 우리 어머니와의 인연이 있었고, 어머니가 숙청당하신 후 남의 집에 입양아로 간 나의 신세를 가엾게 여겨주셨다. 마치 암탉이 병아리를 보호하듯이 나를 돌보아 주신 분이시다. 2년 동안 장수연구소에서 연구했던 시간보다 그 사실을 숨겨야 했던 시간들이 더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귀순 후에도 그 사실을 꺼내야 말아야 하나 고민을 10년 동안 했다. 소 교수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나의 고백을 믿든, 믿지 않든 나는 진실만을 말했기 때문에 언젠가는 내 진심이 통하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감수하고 세상에 이렇게 밝히는 것이다.<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