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이끌어 갈 3人 3色

-한나라당 안상수 의원,민주당 손학규 의원,자유선진당 이회창 의원-

2011-01-04     박소담 기자
2011년 대한민국을 이끌어 갈 대표인물은 누구인가. 정치 色을 접어두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각 당의 수장인 민주당 손학규, 한나라당 안상수, 자유선진당 이회창 의원이 걸어온 길과 약력, 그리고 앞으로의 행보 등에 대해 가감 없이 알아본다.

“대한민국 선진화의 기틀마련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한나라당 안상수 대표
경상남도 창원에서 기와공장을 하던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6ㆍ25가 끝난 후 아버지가 전염병으로 사망하면서 회사는 사기꾼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고 어려운 유년생활을 보내게 된다. 마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뒤 1974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로 재직하던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규명 수사를 맡아 당시 치안감의 은폐음모를 언론에 공개했다. 그 후 사표를 제출하고 노동운동에 투신, 노동자 법률상담에 종사했다. 경찰 고문으로 숨진 박 군의 부검현장에 입회해, 경찰이 은폐하려던 고문치사를 밝혀내는 데‘한 몫’을 한 강직한 검사라는 명성을 얻었다. 무려 3,000여명을 무료 면담하여 한나라당 사이에서는‘인권의 파수꾼’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996년 신한국당의 공천으로 과천시ㆍ의왕시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며, 이 후 4선을 기록하고 있다. 2007년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지냈고 2010년 7월 당 대표 최고의원에 선출됐다.

약력
ㆍ마산고등학교 졸업
ㆍ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입학
ㆍ대학교 2학년 재학 중, 학생운동에 투신
ㆍ대학교 3학년 재학 중,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ㆍ1965년 6월: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6ㆍ3 항쟁 당시 단식농성에 참가
ㆍ1966년: 이병철의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 성토대회에 참가, 사카린 밀수사건 성토대회 사회를 보다가 주모자로 유기정학을 받았다.
ㆍ1967년: 여당의 6ㆍ8 국회의원 선거 당시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되자,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집시법'위반으로 재판에 회부, 시국사건에도 연루되어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ㆍ1975년: 제17회 사법시험 합격, 검사에 임용
ㆍ검사에 임용되었으나 학생운동, 노동운동 연루 경력으로 검사발령이 되지 않다가 전주지방검찰청에 발령되었다.
ㆍ전주, 대구, 마산,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ㆍ경향신문: 객원 논설위원
ㆍ1985년 3월: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ㆍ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맡아 수사한 후 검사직 사퇴
ㆍ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장
ㆍ1994년: 외국인 이주노동자 법률상담소 소장
ㆍ1996년: 신한국당의 총재였던 김영삼에 의해 발탁, 4ㆍ11총선에서 경기도 과천ㆍ의왕시에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정계 입문
ㆍ2010년: 한나라당 대표 선출

국회의원이 된 후 수사검사 시절의 노하우를 십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옷로비 인사청문회’,‘조폐공사 청문회’,‘한빛은행 청문회’, 헌정사상 최초의 국무총리, 헌법재판소장, 대법관의 인사청문회 등 청문회와 국정조사 위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청문회에서의 맹활약으로 ‘청문회 스타’라는 애칭을 얻을 만큼, 청문회는 정치인‘안상수’이름 석자를 국민들에게 심어주는데 결정적으로 도움이 됐다. 16대 국회에서 정치와 한나라당 개혁을 위해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모여‘쇄신모임’을 결성해 활동해 왔으며, 당시 지구당 폐지를 주장해 이를 관철시키고 한나라당 재창당을 주장하는 등의 당 개혁운동을 펼쳐왔다. 17대 국회에서는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원내외 위원장 모임인‘희망모임’을 결성해 공동대표로 활동하면서 대선후보 선출을 위한 공정한 경선을 유도하였다. 2007년 대선민의를 왜곡하는 거짓 폭로전과 같은 제2의 김대업 사건을 막아내기 위한 한나라당‘공작정치 저지 범국민투쟁위원회’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권력형 도박게이트 진상조사 특별위원장’,‘행담도 의혹사건 진상조사단장’등 당내 활동에서 많은 역할을 해왔다. 특히 약 2년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2대 사법개혁 핵심법안 중 2가지의 개혁법이 국회를 통과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나라당 법사위원장으로 코드인사를 강해하려는 전효숙 헌법재판관 인사청문회를 저지하였고, 당론에 반하는 다수의 법안을 막아내었다. 2007년 8월부터는 한나라당 국회의원 130명을 대표하고 국회운영을 책임지는‘원내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대선을 앞둔 시기의 원내대표로서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중앙선거대책위원회’공동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2007년 국정감사와 대정부 질문 등에서 여권의 무차별적인 네거티브 공세를 막아내는 등 대선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함께 잘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민주당 손학규 대표
경기도 시흥군 동명 시흥리(현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에서 교사였던 손병화, 양현자 부부 슬하의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4살이 되던 해인 1950년 아버지 손병화는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그와 그의 형제들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왔다. 70년대 김근태 민주당 대표와 더불어 학생운동을 주도했고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인하대와 서강대 정치학과에서의 4년간 교수생활을 하였다. 1993년 현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자당에 입당하면서 정치에 입문하였다. 보수도 시대흐름에 맞춰 변해야 한다며, 원희룡, 고진화 의원 등과 함께 당내 개혁을 주장하였다. 제14대 국회의원 보궐선거로 민주자유당 국회의원이 되었고, 제15대 총선에서 재선을 한 후 신한국당 정책조정위원장을 맡아서 능력을 인정받아 제33대 보건복지부 장관까지 역임하였다. 뒤이어 제16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3선 의원이 되었다. 2002년 6월 13일 제31대 경기도지사가 되었다. 2007년 3월 19일 한나라당을 나오고 범 민주세력을 규합하여 대통합민주신당을 창당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당시 언론에서는 야당 한나라당 후보인 손학규를 여권 후보로 분류하여 여론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줄곧 1위를 기록하였다. 하지만 대통합민주신당 경선에서는 정동영에게 패하며 낙선했다. 2008년 1월 대통합민주신당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민주당을 통합시켜 분파되었던 민주개혁 세력을 규합해 4월 17대 총선을 이끌었고 7월 6일 통합민주당 대표직에서 퇴임하였다. 2008년 1월 대통합민주신당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민주당을 통합시켜 분파되었던 민주개혁 세력을 규합했다. 4월 17대 총선을 이끌었고 7월 6일 통합민주당 대표직에서 퇴임하였다. 2009년 4월 29일 강원도 춘천에서 칩거 중, 정세균 민주당 대표의 지원요청을 받고 4ㆍ29 보궐선거에서 백의종군하여, 인천 부평을과 시흥(시장)선거를 승리로 이끌어 내어, 사실상 정계에 복귀하였다. 2010년 10월 3일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열린 정당대회에서 치열한 접전 끝에 당태표로 선출되었다.

약력
ㆍ1947년: 교육자 집안의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남.
ㆍ1950년: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었던 아버지가 차량전복사고로 사망. 홀로 된 어머니가 키움. 어머니로부터 사범학교 진학 권유 받음.
ㆍ1959년: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
ㆍ1965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정치학과
ㆍ1966년: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규탄시위로 이중 무기정학 처분. 이때 법대의 조영래(작고, 인권변호사), 상대의 김근태(전 열린우리당 의장)를 만나 같이 운동함.
ㆍ1969년: 민주화운동관련 1년투옥, 4학년때 군입대 병장제대.
ㆍ1973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후 종로 5가에서 어떤 목사님의 소개로 만난 황석영(소설가)과 노동운동 시작. 구로공단의 전자회사와 목공장에 위장취업. 이후 도시산업선교회의 박형규 목사와 함께 청계천 판자촌에서 빈민운동 전개. 수배자로 2년간 도피생활. 원주농장에서 막노동.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의 철공소에서는 용접 일을 함. 대학교 3학년 때 미팅에서 만난 이윤영과 7년 연애 끝에 결혼. 수배 중 모친 장례식에서 체포. 사건종결후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지금의 NCCK)의 교회와 사회위원회 간사 역임.
ㆍ1979년: 부마항쟁 진상조사시 마산시에서 계엄사령부에 체포돼 김해보안대에 수감. 이틀간 취조없이 구타로 사망직전에 박정희 사망으로 풀려남.
ㆍ1980년: 영국 교회장학생으로 유학중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유학 중 잠시 귀국하여 '우리의 딸, 권양'이란 책을 발간
ㆍ1988년: 옥스퍼드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박사.
ㆍ1989년: 인하대학교, 서강대학교 정치학 교수.
ㆍ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부름을 받아 민자당 입당. 경기도 광명시 국회의원 보궐선거(제14대) 공천받아 당선. 금융실명제 대체입법 주장.
ㆍ1994년: 국회건설위원회에서 "국토개발과 국가경쟁력"이라는 백서 발간.
ㆍ1995년: 당 국제기구위원장, 대변인.
ㆍ1996년: 제15대 총선에 재선성공, 신한국당 정책조정위원장. 5월 18일을 국가기념일로 건의 시행됨.
ㆍ11월~1997년 8월: 보건복지부 장관. 한약분쟁을 매듭지음

손학규는 국민이 선택한 압도적인 反한나라당 유일후보라고 평가받고 있다. 손학규는 범여권 주자 지지율 1위를 고수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한나라당 후보와 맞서 싸울 가장 경쟁력 있는 후보 1위, 한나라당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대 1위로 꼽히고 있다. 손학규는 한나라당과 맞서 싸워 이길 反한나라당 전선의 유일후보이다. 또한 손학규는 범여권에서 경제업적이 있는 유일한 후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손학규는 경기지사 시절 일자리 74만 개를 창출했고, 외자를 14조원이나 유치해 8만개의 새로운 일자리도 만들었다. 같은 기간 일자리창출만 서울시(12만개)에 비해 무려 6배에 달한다. 같은 기간 경기도의 경제성장률은 7.5%가 넘은 반면 서울시는 전국 평균 5%에도 못 미친 2.8%에 머물렀다.

“대한민국의 잃어버린 10년을 찾겠다”-자유선진당 이회창 대표
이회창은 1935년 6월 2일 황해도 서흥군 출생으로 대한민국의 법관이자 법조인이자 정치인이다. 경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한 후 1960년 서울 지방법원의 법관으로 임용되어 1993년 대한민국 대법원 대법관으로 퇴직하였다. 법관 초기 조용수 오판 사건의 판사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으나,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에서는 정권의 요청을 거절하는 등 기피인물로 선정되어 1986년 4월 대법관직에서 퇴임하였다. 군사정권의 청탁과 압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껏 판결을 내려‘대쪽’,‘대쪽판사’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 복귀하였으나 노태우 정부의 선거개입과 부정선거를 질타하고 법관직을 사퇴하였다. 1993년 2월 25일부터 1993년 12월 16일까지 제15대 감사원장, 1993년 12월 17일부터 1994년 4월21일까지 제26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한나라당 소속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2번 출마하여 2번 낙선하였고, 2007년 11월 7일에 한나라당을 탈당, 이후 무소속 후보로 제17대 대선에 출마 의사를 발표하며 정계에 복귀하였다. 2008년 보수정당인 자유선진당을 창당하여 당총재에 피선되었다. 본관은 전주이며 종교는 천주교, 호는 경사(經史)이다.
정당 대표 가운데 대중 지지가 가장 높은 사람은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다. 한나라당(168석)과 민주당(84석) 등 거대 정당 대표를 물리치고, 18석에 불과한 선진당 총재가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것이다. 지난달 25일 윈지코리아 컨설팅·월드리서치 조사 결과, 이 총재는 각 당 대표의 직무수행 평가에서‘잘하고 있다’는 긍정 평가가 38.4%로, 민주당 정세균 대표(38.1%)와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27.5%)보다 높았다. 정당 지지율에서 선진당은 한나라당(26.6%)·민주당(24%)·민주노동당(4.7%)·친박연대(3.2%)에이어 5위(2.5%)에 불과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이 총재의 이 같은‘고공 행진’을 전문가들은 특이한 현상으로 보고 있다. 월드리서치 박승열 사장은“역대 국회에서 선진당과 같은 미니 정당 대표의 직무수행 지지율이 선두였던 적이 거의 없는데다, 이 총재는 1997년과 2002년 대선 당시 140석 안팎의 원내 제1정당이었던 한나라당을 이끌면서도 지지율이 35%를 넘지 못했었다”고 말했다. 선진당측은 인기의 원천에 대해“정부에 대해서는 원칙과 철학이 있는 대북정책을 요구하고, 미디어법을 둘러싼 여당 내 혼란에 대해서는‘콩가루’라고 질타하는 등, 이 총재가‘보수의 버팀목’으로 자리 잡은 결과”라고 말했다. 이 총재의 측근인 이흥주 최고위원은“이 총재를 모신 지 17년째지만 요즘처럼 시의적절하게 정치 상황에 기민하게 대응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고 원인을 분석했다.

약력
ㆍ1950~1953년: 경기고등학교
ㆍ1953~1957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 학사
ㆍ1957년: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서울대학교 법학과 4학년)
ㆍ1957년: 공군 입대
ㆍ1957년: 6월~1960년 공군본부 법무감사관실 법무관(공군 대위)
ㆍ1969~1970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 수학
ㆍ1969~1970년: 하버드대학교 / 수학
ㆍ1985년: 청조근정훈장
ㆍ1981~1986년, 1988년~1993년: 대법관
ㆍ1988~1989년: 제8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ㆍ1993~1993년: 제15대 감사원장
ㆍ1993~1994년: 제26대 국무총리
ㆍ1995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ㆍ1995년: 가톨릭대학교 발전후원회 회장
ㆍ1996년: 서울대학교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 상 수상
ㆍ1997년: 신한국당 대표, 총재 역임
ㆍ1997년: 신한국당 상임고문
ㆍ1997년: 러시아 극동국립대학교 블라디미르대학 명예법학박사
ㆍ1997년: 9월 올해의 베스트드레서 상 수상
ㆍ1997년: 11월 21일 양당 합당합동회의를 통해 새로 출범한 한나라당의 명예총재 및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추대
ㆍ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출마,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2위(1위 김대중)
ㆍ1998년 2월 미국 버클리대학교 특별명예상
ㆍ1998~2002년: 한나라당 제2,3대 총재. 제15,16대 한나라당 국회의원
ㆍ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출마,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2위(1위 노무현)
ㆍ2002년: 정계 은퇴
ㆍ2003년 2월~2004년 3월: 미국 후버 연구소 명예교환교수
ㆍ2006년: 정계 복귀
ㆍ2007년: 한나라당 탈당
ㆍ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출마, 무소속, 3위(1위 이명박, 2위 정동영)
ㆍ2008년 정통보수정당을 표방하는 '자유선진당' 창당

3당 대표에게 바란다
국회의원은 당연히 일반인보다 더 높은 도덕적 기준을 요구받아야만 한다. 그것은 국회의원이라는 자리 자체가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체제하에서 수만 명의 일반국민들을 대표해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지적인 측면이나 인성적인 측면 도덕적인 측면 모두에서 수만 명을 대표하고 이끌어 갈 수 있는 인물들이 올라가야 하는 자리라는 거다. 국회의원은 물론이고 각 당의 대표들은 서로의 정치적 야망을 접어두고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해야한다는 것은 어린아이도 아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의 성장에 국회의원의 노고가 전혀 없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지난날들을 묻어두고 앞으로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각 당 대표들의 주요 경력사항 및 약력만을 언급하는 것은 앞으로 그들에게 긍정적인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