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바라크 이어 무너질 독재자 5명은?

세계 독재자들의 몰락

2011-02-28     이민선 기자
세계 최장 독재자 카다피의 운명에,
전 세계의 눈이 집중되고 있다!

중동 및 북아프리카 지역에 민주화 바람이 거세다. 지난 1월 튀니지에서 불기 시작한 반정부 시위의 바람은 벤 알리 튀니지 대통령을 축출시킨‘재스민 혁명’으로 이어졌으며 알제리 요르단 등 중동 전역으로 빠르게 번지고 있는 상황이다. 장기 독재가 부패를 낳고, 그로 인해 국민들의 고통이 커져 독재자의 몰락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장기 독재 체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나라들을 진단해보고 독재자들의 면면을 들여다보자.

독재자를 향한 국민들의 불만 폭발
장기 독재는 사회 계층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소수만을 갈수록 부자로 만들고, 대다수 국민들은 생활고에 시달리게 하는 불평등을 키웠다. 이렇게 불공정 사회에 대한 불만이 커진 상태에서 생활고가 심해지면서 독재자를 향한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지난달에 이집트를 30년간 지배한 독재자가 결국 18일 동안의 민주화 운동에 밀려났다.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하야하고 권력을 군에 이양한다는 성명의 방송 발표는 30초가 걸렸다. 이집트 부통령이 육성으로 읽어 내려간 대통령 하야 성명이 방송되자 카이로 중심부에 모여 있던 백여 만 명의 시위군중은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는가 하면 무릎 꿇고 기도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무라바크 대통령은 권좌에서 물러난 전날 계속 집권의사를 밝힌 뒤 하루 만에 홍해의 휴양지로 피신했다. 그는 3백여 명의 시민이 사망하고 5천 여 명이 부상하는 사상 초유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민중의 거대한 민주화 요구 앞에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사퇴가 기정사실화됐던 무바라크 대통령은 이에 앞서 이날 오전 돌연 9월 대선 때까지 퇴진하지 않겠다며 술레이만 부통령에게 일부 권력 이양 의지만 밝혀 유혈 시위까지 우려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군부의 압력으로 마침내 극적으로 사퇴 수순을 밟은 것으로 추측된다. 1981년 당선된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은 국민적 지지를 통해 헌법까지 바꾸며 장기독재자의 길을 유지해왔다. 그의 30년 통치는 왜 한순간에 무너진 것인가. 많은 중동 전문가들은 폭로전문사이트 위키리크스가 무바라크 일가의 부패와 미국의 반(反) 무바라크 운동가 지원 내용 등이 담긴 미국의 외교전문을 공개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전문가들은 3년 전부터 계속된 물가폭등과 높은 실업률을 원인으로 꼽는다. 하지만 미국의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지(2월13일 자)는“사태가 이렇게까지 된 것은 열두살 손자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 잡지에 따르면 이집트의 케네디가(家), 현대판 이집트 왕조를 세우려던 무바라크의 계획이 흐트러지기 시작한 건 손자인 무함마드(Mohamed·당시 12세)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2009년 봄부터였다. 무바라크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즐거움은 무함마드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고 한다. 2009년 5월, 할아버지 무바라크와 함께 주말을 보내고 부모의 집에 돌아간 무함마드는 극심한 두통을 호소한 후 혼수상태에 빠졌다. 큰 충격을 받은 무바라크는 워싱턴에서 예정됐던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까지 취소했다. 이집트 국민은 처음에는 손자를 잃은 대통령을 동정했다. 무바라크에 대한 동정은 지지로 바뀌기까지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니 이러한 동정은 그가 정권 장악력을 잃어간다는 추측을 남기기 시작했다. 손자의 죽음으로 무바라크는 국정에도, 대통령직에도, 자신의 미래에도 흥미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돌파구(명예로운 퇴진)를 찾을 방향 감각까지 잃었다고 뉴스위크는 진단했다. 그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심지어 대통령 자리를 물려주려 했던 둘째 아들 가말(Gamal) 조차도 믿지 않았다. 무바라크가 정치 후계자로 내세운 가말은 사업가로서의 능력은 탁월했지만 카리스마와 소통능력이 없었다. 그때부터 무바라크 정권의 실질적 보루였던 군부와 비밀경찰도 가말에게 등을 돌렸다. 무바라크의 보좌관들은 대통령의 눈과 귀를 막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오랫동안 정보책임자였던 사프왓 샤리프(Safwat Sharif)였다. 한 이집트 소식통은“무바라크 정권이 부패했었다”는 말에“동의할 수 없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400억~700억 달러(한화 45조~78조원)의 무바라크가(家) 부정축재 자금이 조성됐다는 말도 있지만 한 소식통은“근거가 빈약한 이야기이며 무바라크는 다른 독재자들에 비교한다면 깨끗한 편”이라 일축했다고 한다. 무바라크의 철옹성은 부정부패도, 경제난도 아닌 한 소년의 죽음에서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원인이 어떻든간 이제 무바라크 전 대통령은 권좌에서 물러났다. 이는 다른 북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 국가에서의 민주화 운동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추정된다.

대통령궁에 금, 다이아몬드, 돈뭉치 발견
아랍, 아프리카의 민주화 물결이 현존하는 세게 최장기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의 철옹성 리비아에 미칠 것으로 보인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시민혁명으로 23년 장기 독재자 지네 알-알비디네 벤 알리가 물러나더니 리비아와 동쪽 국경을 맞댄 이집트의 30년 철권통치자 호스니 무바라크도 퇴진했다. 독재자들 몰락의 시발점이 된 튀니지 장기 독재자 지네 알-알비디네 벤 알리는 최근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가 집권 23년 동안 튀니지 국영 및 민간 은행에서 그와 부인, 그리고 그들 친인척에게 모두 17억6000만 달러(약 1조9700억 원)를 대출해 줬는데 이 중 담보를 잡지 않은 대출액이 약 6억 달러에 육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은행들은 전 대통령 친인척 및 그들과 관련 있는 182개 업체에 대출을 해줬다. 특히 전체 대출금의 절반가량이 전 대통령의 두 사위가 주요 주주로 있던 이동통신회사 등 4개사에 집중된 것으로 알려졌다. 튀니지 당국은 벤 알리 전 대통령 일족이 부정 축재한 자산을 추적해 몰수하고 있다. 또 지난달 말에는 알리 전 대통령의 대통령궁에서 수십억원 이상의 현금과 보석이 발견되어 충격을 주었다. 튀니지 제1국영TV는 최근 대통령궁 서재에 있는 비밀공간과 커튼 뒤에서 벤 알리 전 대통령이 숨겨 놓은 귀금속과 돈뭉치가 발견됐다고 2월 1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날 방송에서 공개된 은닉 재산은 수백만달러어치의 달러화와 유로화, 금, 다이아몬드 목걸이 등 고가 액세서리 등이다. 방송은 이날 압수한 벤 알리 전 대통령의 재산은 국민에게 재분배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한편 캐나다 일간 글로브 앤드 메일도 이날 벤 알리 전 대통령 일가가 캐나다에도 최대 2,000만 달러 가량의 재산을 숨겨놨다고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 보도했다. 반면 캐나다 연방 경찰의 밥 폴슨 부청장은 이와 관련된 증거를 아직 제출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벤 알리 일가의 재산은 50억파운드(9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며, 튀니지 검찰은 이들이 해외로 빼돌린 재산을 몰수하기 위한 조치를 진행 중이다.

다음 차례는 카다피다!
이집트 전 대통령의 퇴진은 알제리와 예멘, 이란, 바레인, 요르단 등으로 들불처럼 번져갔고 그 불길은 리비아에 이어졌다. 그간 별다른 움직임이 관측되지 않았던 리비아에서 지난 2월 15일 밤 최초로 반정부 구호가 터져 나왔다. 2월 22일을 기준으로 리비아 반정부 소요사태가 종국으로 치달았다. 리비아 보안군의 유혈 강경진압으로 사상자가 속출하면서 군과 정부 인사들의 정권 이탈도 가속화 됐다. 42년간 철권 통치해 온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의 마지막 날을 목전에 두는 듯한 상황이었다. 리비아 보안군의 유혈 강경진압으로 사상자가 속출하면서 군과 정부 인사들의 정권 이탈도 가속화 되었다. 카다피 퇴진을 요구하는 시민들은 20일 밤 수도 트리폴리 도심에 있는 녹색광장 일대에 진출해 이튿날 새벽까지 무장한 친정부 세력의 강경진압 속에서도 시위를 벌였다. CNN은 리비아 정부가 시위대에 발포를 거부한 군인 6명을 살해했고, 그들의 처참한 모습이 유투브를 통해 동영상으로 유포됐다. 카다피는 42년간 권좌를 지켜온 독재자다. 리비아에서 왕중의 왕으로 불리는 그는 1969년 친서방파 국왕 이드리스 1세가 외국여행을 떠난 틈을 타 쿠데타를 감행해 권력을 잡은 뒤 의회와 헌법을 폐기하고 전제적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47년간 통치하다 동생 라울에게 정권을 이양한 것처럼 카다피 역시 아들 사이프 알 이슬람에게 권력승계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져 리비아의 독재권력은 대를 이어 세습될 것이란 암울한 전망이 우세하다. 아내 2명 사이에 모두 8명(아들 7,딸 1)의 자녀를 두고 있는 카다피 일가는 각종 말썽을 일으키는 일종의‘문제 가정’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유혈사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카다피의 셋째 아들 사아디는 그 중에도 가장 큰 문제로 지적돼 왔었다. 특수부대에서 장교를 지낸 사아디는 휘하 부대를 벵가지에 투입하기도 했다. 그는 마약과 알코올에 빠져 있고 과도하게 파티를 즐기는 인물이라고 위키리크스는 전했다. 여섯째인 카미스는 카다피 정권의 가장 든든한 지지 세력인 카미스 여단 등 특수부대의 사령관이다. 그는 러시아에서 훈련받았으며 최근 벵가지 시위 진압에 개입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달 20일 국영TV에 출연해 끝까지 저항하겠다고 선언한 사이프 알 이슬람은 둘째 아들로, 가장 유력한 후계자로 꼽힌다. 런던 이코노믹스스쿨에서 학위를 받아 서방 국가엔 리비아 정권을 대표하는 인물로 알려졌다. 그러나 많은 리비아인이 그가 너무 잘난 체하고 외국인에게 아부한다고 보고 있다고 위키리크스는 폭로했다. 어쨌든, 이러한 복잡한 가정사로 정권 안팎에서 불만이 불거지면서 카다피의 절대권력에도 균열이 생기게 된 것이다. 리비아는 아프리카 최대의 석유 매장량을 자랑하지만 빈부격차가 심하고 실업률도 북아프리카 최고 수준이다. 이를 반영하듯 유투브에 유포된 카다피 퇴근 동영상에는‘이제 그만 리비아’라는 제목으로“국민들이 고통, 배고픔, 가난으로 고통 받을 때 카다피는 편히 살고 아들들은 벌거벗은 여자들과 술파티를 벌였다”는 비판이 담겨있다. 키다피는 젠 알리 전 튀니지 대통령이 축출된 직후“튀니지를 통치할 사람으로 그 만한 사람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아랍권 민주화 열망에 철저히 귀를 닫아 왔다. 그러나 이제 바로 자신의 철옹성 밖으로 들려오는 민중의 외침에 의해 그가 축출될 것이란 게 전 세계의 이목이다.

독재자 아마디네자드, 당신도 물러나!
이집트에‘시민혁명의 불길’이 휩싸인 지난달 14일(현지시각)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이란 국민도 이집트 국민과 똑같은 권리가 있고, 이란은 이집트처럼 고집하는 시아파가 지배하는 체제여서, 시위가 확산될 경우 온건한 수니파가 지배층인 이집트보다 과격한 양상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상대적으로 짧은 6년 집권에도 거센 반발을 사는 이유는 무엇보다 야당을 탄압하고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등 독재를 해온 탓이 크다. 게다가 핵 무기 개발 의혹으로 유엔, 미국의 경제제재를 받아 식료품 등 생풀품의 가격이 3~5배나 폭등함으로써 국민들의 원성을 하고 있다. 또 바레인 수도 마나마에서도 지난달 14일 시아파 무슬림이 주축인 수천 명의 시위대가 하마드 빈 알칼리파 국왕을 향해 정치개혁과 차별 철폐, 민생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다 경찰의 진압으로 청년 2명이 숨지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 예멘의 수도 사나에서도 나흘 때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학생, 인권단체의 시위가 계속돼 부상자가 속출했다. 알제리에선 1월부터 계속된 시위로 6명이 숨진 데 이어 지난달 12일엔 수도 알제에서 인권단체가 중심이 된 시위대 수천 명이 압델 아지즈 부테플리카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다 400여명이 연행된 바 있다. 이들 국가는 치솟는 물가, 최고 30%대에 달하는 실업률, 국경분쟁과 종파 간 대립 등 여러 문제를 안고 있다. 수단은 정부가 생필품에 대한 보조금을 폐지해 일주일 새 빵과 휘발유 가격이 20~30% 올랐고, 알제리에선 실업, 주택난에 항의하는 시위에서 자살 기도자가 한 달 새 네 명이 나왔다. 바레인은 인구의 70%인 시아파 무슬림이 집권세력인 소수 수니파로부터 정치, 경제적 차별을 받고 있다. 외신들은 지난달 15일“중동의 베를린 장벽이 무저졌다”며 혁명의 전염효과에 주목했다. 또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최근“요르단과 알제리, 리비아 정부의 경우 수입 생필품에 대한 세금을 낮추고 물가 상승을 억제하거나 국민에게 현금 지급을 약속함으로써 간신히 혁명의 뚜껑을 덮고 있다”며“무바라크 다음 축출 차례가 누가 될지 관심사”라고 보도했다.

5명의 독재자 선정, 1위..김정일
미국의 외교잡지인 포린폴리시(FP)는 매년 지구촌의 독재자를 선정해 발표한다. 지난해 6월엔 독재의 길을 걷는 40여명을 뽑았으며 이 가운데‘세계 최악의 독재자’1위에 김정일을 선정했다.“최고급 프랑스 코냑을 즐기는 개인숭배화된 고립주의자”라는 게 FP의 평가다. 16년의 집권 기간 중 얼마 안 되는 국가 자원을 핵개발에 쏟아 부어 국민을 도탄에 빠트리고, 최대 20만 명을 강제수용소에 보냈다는 것이다. 앞서 2009년 워싱턴포스트의 자매지인 퍼레이드는 30년 장기 집권한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과‘다르푸르 대학살’의 주범으로 지목된 수단의 오마르 알 바시르 대통령에 이어 김정일을 세계의 독재자 3위에 올렸었다. 독재자 연구가인 데이비드 왈킨스키는 저서‘폭정(Tyranny)’에서 김정일에 대해“공산권에서 부자세습을 한 유일한 케이스로, 정권 유지를 위해선 어떤 일이든 서슴지 않는 독재자의 전형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지적했다. 앞서 언급한 독재자들의 몰락과 그들에 대한 평가는 평가자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상반되기도 한다. 상당수 독재자가 내부에서는‘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경우도 적지 않은 이유다. 하지만“정치철학을 떠나 인간의 기본권에서 바라본 문제점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게 FP의 분석이다. 독재자들은 우선 언론의 자유를 말살한다. 군(軍)이나 친인척 출신 각료, 친위부대 격인 특수정보조직 등 인(人)의 장막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생각이 다른 주장’을 접하지도, 쉽게 인정하지도 않는다. 소통의 부재는 결국 자유로운 의사표현을‘체제 전복 도발’이란 이유로 탄압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이 왈킨스키의 분석이다. 김정일이 대표적이다. 미 시사전문지 타임은“김정일 독재정권은 고문,공개처형,강제노동,강제낙태,영아살해 등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FP 평가에서 3위에 오른 미얀마의 군정지도자 탄 슈웨 장군과 7위에 오른 이슬람 카리모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도 학정과 소통 부재의 대표적 인물이다. 탄 슈웨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정치세력 대다수를 감옥에 보낸 것은 물론 2008년 태풍 피해를 돕겠다는 국제사회의 지원 제안까지 거절할 정도로 소통을 두려워했다. FP는 그를“민족적 자존심은 센지 모르겠지만 선거투표함은 무서워하는 겁쟁이”라고 묘사했다. 6500명에 이르는 재야 인사를 투옥시킨 카리모프는 한때 2명의 정치범을 산채로 물속에 집어넣어 끓이는 고문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세계를 경악하게 하기도 했다. 종교의 이름을 내세운 독재는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4위에 오른 바시르 수단 대통령은 30만명이 죽은‘다르푸르 대학살’을 배후조종한 인물로 지목돼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체포 영장이 발부된 상태다. 바시르는 1989년 쿠데타로 집권한 뒤 수단을 이슬람 국가로 바꾸면서 기독교 등 이교도들에 대한 가혹한 탄압정책을 펼쳤다. 막강한 권력을 누리다 보니 재물에 대한 탐욕도 두드러진다. 9위에 오른 멜레스 제나위 에티오피아 대통령은 권좌에 올라 있는 20년 동안 아내 이름으로 외국의 고급 저택을 수십채씩 사들였다. 특히 그는 매년 서방 선진국으로부터 10억달러의 기아지원금을 받아 이 가운데 상당액을 챙긴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김정일 일가처럼 권력 세습에 대한 욕심을 보인 독재자도 상당하다. 미국의 정치학자인 제이슨 브라운리는 1945년부터 2006년까지 3년 이상 집권한 258개 독재정권을 분석한 결과“23명이 권력 세습을 시도해 9명이 성공했다”고 밝혔다. 이미 사망한 독재자들의 경우 대개 말로가 좋지 않은 게 비슷하다. 루마니아의 철권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특히‘극단적 최후’의 전형으로 꼽힌다. 그는 루마니아 반정부 시위가 민중봉기로 돌변한 1989년 크리스마스에 부인과 함께 헬기로 탈출하다 쿠데타군에 의해 즉결 총살형을 당했다. 재임 25년간 6만명의 시민을 처형하는 등‘악랄한’철권통치로 원성을 산 차우셰스쿠 부부는 무덤에서조차 편치 못했다. 루마니아 당국이 지난해 신원 확인을 이유로 무덤을 파헤쳐 시신에서 DNA 시료를 채취한 것이다. 2003년 12월 고향인 티크리트의 토굴에서 미군에 생포된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은 3년 만인 2006년 12월 교수형에 처해졌고,20년간의 독재 끝에 1986년 부인 이멜다와 함께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하와이로 피신한 필리핀의 마르코스는 3년 뒤 갑작스런 질병으로 사망했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세르비아 대통령 역시 코소보 내전 직후인 2000년 권좌에서 쫓겨난 뒤 2006년 헤이그 감방에서 전범 재판을 받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979년 이란혁명으로 축출된 무하마드 레자 팔레비 국왕 가족의 일생은 비극의 정점에 있다. 40여년간 군림했던 팔레비 국왕은 왕좌에서 내려온 지 1년 만에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막내 아들 알리레자 팔레비는 올초 미국에서 권총자살했다. 여동생인 레일라 역시 거식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다 2001년 약물 과다로 숨졌다.<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