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역사와 함께 자생한 건축역사
2011-07-05 이민선 기자
선조들의 지혜를 본받아 위기 극복의 기회마련
지난달 20일은 제 21회 건설의 날이었다. 건설산업은 지난 60년간 우리 경제의 고도성장을 견인해 온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최근 건설업계는 부동산경기 침체로 심각한 경영난에 봉착해 있다. 최대 시련기를 맞이한 올해 건설의 날. 이날 업계 관계자들은 신성장 동력을 발굴해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한번 국내 건설산업의 저력을 보여주자 다짐했다. 이에 본지에는 우리나라 건설의 역사를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건축의 발전은 수천년 우리의 전통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사람이 생활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 의식주 생활이며 그 중에 건축은 주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건축에는 그 시대의 삶과 문화, 정치, 종교, 역사관, 기술 등이 녹아들어 표현되고 있다. 잘 보존된 건축물은 그 시대의 문화를 상징하고 그 시대 사람들의 행동 양식과 생활의 단면을 보여주는 보물 덩어리이기도 하다.
삼국시대는 한국건축의 발화기
원시시대를 일컫는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에 건축문화는 거론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신석기 시대부터는 한국의 원시주거 형식이 발달하기 시작되었기 때문에 고고학적 연구분야로서 그 가치가 크다. 건축기술의 시초로 상징되는‘움집’은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원시주거 형태로, 암사동 선사주거지가 지금까지 남아있다. 이는 1979년 사적 제267호로 지정되었는데, 1925년의 대홍수 때 한강이 넘쳐 유적 일부가 파손된 채로 토기편과 석기들이 발견된 이후 1967년에 유적을 발굴조사하고, 1971∼1975년 재발굴조사를 거쳐 1980년대에 다시 발굴했다. 그 결과 수렵ㆍ채집으로 생활하며 취락을 형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집터와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를 비롯해 돌도끼ㆍ돌화살촉ㆍ긁개 등의 생활도구와 돌낫ㆍ보습과 같은 농기구 등의 석기가 대량 출토되었다. 고 대시대로 넘어가면, 연맹국가의 형성으로 인해 정치적 성격이 강해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낙랑시대를 거쳐 실질적으로 국가 활동을 시작한 삼국시대 말기까지를 포함하고 있으며, 원시문화 상태를 벗어난 이 시대의 건축은 한국건축문화의 발화기라 불린다. 삼국시대의 몇몇 대표적인 건축물을 예로 들겠다. 우선 고구려에서는 고분이 대표적인데, 이는 압록강에서 평양 중심 대동강 유역에 산재한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 고분인 토총묘의 천정은 벽상부를 2-3단 내어 쌓고, 모서리에 삼각형의 석재를 걸쳐 내쌓기를 2-4단 되풀이 하여 좁히고, 정상부에 청장석판을 놓는다. 이를 삼각형 내어 쌓이 천장이라고 한다. 백제의 경우에는 익산 미륵사지가 있는데 이 유물의 평면은 거의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출토된 유물 수만도 1만8천여 점이나 되며 이 중 평기와와 막새기와가 가장 대표적이다. 마지막으로 신라의 경우에는 불국사를 예로 들 수 있는데, 이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산세를 고려해서 지어졌으며 그 축조 방법에 변화가 많고, 기묘한 가운데 통일성을 갖고 있으며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중세
그 어느 때보다 건축문화가 발전
중세시대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해 하나가 되던 때이다. 중세의 전반기인 통일신라시대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로서, 그 이전에 한국이 가지고 있었던 시대적, 지역적 및 민족성을 통일하게 된 시기다. 이는 당과의 친분으로써 당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으며 불교가 융성하여 국가진호의 종교로 존숭을 받음으로써 국력을 기울인 장대한 규모의 불사들이 건축되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으로는 석굴암이 있는데 석굴암의 최대미는 통일된 구상 아래 짜임새 있게 조용된 내부건축공간 구성이다. 이후 고려시대가 열리며 고려 초에는 신라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고 또 송과 요의 문화까지 영향을 받았다. 때문에 예술문화에서는 그 어떤 때보다 많은 발전을 이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한국 최고의 목조건축에 속하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으로 이는 원주를 사용하고 배흘림이 뚜렷하며 주심포식 건물로 유명하다. 한국 주심포식 건물의 공통적 특징은 쌍s자형의 첨자 끝부분 밑면을 가지고 있는데, 봉정사 극락전 역시 이러한 특징이 돋보인다. 또 고려 중기에는 동양에서 가장 우수한 고려청자가 제작되었는데 이는 건축적 양식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독창성을 엿볼 수 있다. 이는 남송건축 방식의 영향을 받아 건물을 축조했지만 중국 보다 한 부분에선 앞선 모습이다. 고려 후기는 원나라의 세력권 안에 포함되어 몽골풍의 문물 등이 들어와서 순수성이 저하되고 불교도 타락 부패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원의 영향으로 다포식 목조건축이 보급되기 시작한다. 심원사 보광전 1374년에 축조되었으며 황해도 연탄에 위치하며 단층 팔작지붕으로 이뤄지며 공포는 3출목 다포식이다. 3출목 위의 한대는 삼두분형이며, 건축 측면은 기둥에 상관없이 공포를 배치했다. 네모서리 위에 공포상부에 인물상을 배치했다.
유학과 실학의 영향을 받아 더욱 융성했던 건축
근세에는 조선왕조시대로 조선왕조가 역성혁명으로 고려왕조를 계승하게 된다. 이 시대의 주된 특징은 유교를 정신적 기반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초기에는 중국 명나라의 영향을 받았으며, 대표적인 건축으로서 남대문, 무위사 극락전이 있다. 극락전의 경우 대표적인 주심포식 건물이며 공포의 형태적 아름다움이 크다. 중기에는 실학이 들어오면서 예술문화 활동에도 자유로운 분위기가 조성되는데, 창경궁 명장전이 축조되고 팔작지붕이며 쇠서를 가진 제공을 하나만 둔 것이 특징이다. 공포는 다포식이고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가구는 내고주가 1열로 배치되었다. 전체적 구성이 정재하며, 구조 및 의장이 건실하다. 이전과는 다르게 여러가지 건축양식의 배합이 특징적이다. 후기에는 실학이 더욱 융성하고 민족 사상이 고취되어 예술문화가 더욱 발전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경복궁 근정전이며 이는 다포식 공포에 풍성하고 아름다운 장식, 섬세한 수법이 특징이다. 창덕궁 인정전 팔작지붕 역시 다포식이고 궁궐 내부는 수많은 운경이 뒤덮여 매우 상징적이다. 그러나 이후 큰 발전을 보지 못하고 일본의 제국주의에 들어서게 된다. 근대건축은 일반적으로 대한제국에서 일제강점기까지의 시기를 일컫는다. 연도로는 1800년대 후반에서 1945년까지 약 50~60여년 간의 시기가 대상이다. 오늘까지 남아 있는 대표적인 근대건축물로는 한국은행본관, 명동성당, 독립문, 구서울역사, 대한의원본관, 서울시청사, 연세대언더우드관, 고려대 본관 등이 있다. 이들 대부분은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목조건축에서 벗어나 콘크리트 골조와 서양식 건축양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는 특징이 있고, 건물만으로는 유럽의 어느 관광지에서 볼 수 있는 그 시절의 건축양식이거나 현대건축으로 넘어오는 과도기적 현대식 건물인 경우가 많다. 이들 건축물들의 공통된 특징이 부분적인 양식이 수입되면서 한국건축과의 과도기를 거치지 않은 채 외국의 것을 그대로 본따 온 듯한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때문인지 이들 건물들은 처마나 기와 툇마루나 온돌, 황토벽이나 목조장식과 같은 한국전통건축의 요소들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고, 100% 당시 외국의 건축 그대로 들어왔으므로 주변환경과 상당히 이질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대표적인 근대 건축물 몇 개를 소개해보겠다. 서울시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된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은 1885년 아펜젤러 선교사가 두 칸까지 방의 벽을 헐어 만든 교실에서 학생 2명을 가르치면서 시작되었다. 학교 현판인 배재학당은 고종이 친히 써준 것으로 1916년 지어진 배재학당 동관은 배재학교가 고덕동으로 이전된 뒤 보존되어오다 배재정동빌딩이 완공되며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재탄생했다.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한국 최초의 서양식 학교건물이며 근대식 중등 교육기관으로 2001년 3월 15일 서울시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옛 배재학당의 교실로 사용된 건물로 한국 근대 교육적 의미가 크며 한국 근대 건축으로서 그 형식이 우수하다. 현재 박물관에는 상설전시관, 기획전시관, 체험교실, 세미나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설전시관에는 1930년대 배재학당의 교실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근현대를 대표하는 서울역
서울역사는 르네상스풍의 절충양식 속에 시민들의 다양한 삶의 흔적이 묻어나는 서울의 근현대 시공간을 압축한 상징적인 공간이다. 그곳에 대한 대중들의 기억은 서울역사의 존재가치에 절대성을 부여하고 있다. 서울역은 한국의 도시공간 중에서도 시대적 의미를 가장 많이 담고 있는 장소다. 비록 그것이 식민지 도시화 과정에서 조성된 것이기는 하지만, 근대화의 상징적 공간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근대의 상징인 철도역은 도시와 문명을 같이하는 공간이자 가장 많은 계층이 공존하는 장소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운동의 중심지로, 근대화 과정에서 이촌향도의 거점이 된 곳도 서울역이며, 군사정권시대에는 민주화 투쟁의 공간으로 기능과 역할이 변모되었다. 근래에는 서울역사가 신역사와 공간적, 심리적으로 단절되어 근대 도시화의 명암을 고스란히 남겨둔 채 방치돼 있다가, 문화공간 조성 프로젝트와 더불어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 경성역은 근대기술과 외래양식을 도입하여 건축한 대표적인 철도역사다. 건축물의 구조는 철근 콘크리트며, 벽제 및 주요 부분과 경사 지붕에는 경량철골을 사용했다. 양식적으로 서울역사는 르네상스 건축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밑면도를 보면 주 출입구의 중앙에서부터 돔의 첨탑 정점에 이르기까지 엄격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으니 평면도를 보면 건물의 기능에 따라 좌우대칭의 규칙에서 벗어나있다. 특히 역사의 중앙홀 상부 돔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펜던티브(사각형 평면 위에 원형 돔을 설치하는 구조기법) 지붕으로 구성되었다. 돔의 모서리에 있는 펜던티브 사면에는 반원으로 아치창을 내어 대합실 내부 빛을 끌어들였다. 일제강점기 경성역은 당내의 모던보이와 모던걸 그리고 지식인들의 안식처이기도 했으며, 식민지의 아픔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했다. 당시 조선호텔과 더불어 장안의 최고급 양식당으로 유명했던 서울역 2층‘그릴’과‘티룸’은 근대도시 경성을 대표하는 상징적 장소로 근대문학의 중요 배경이 되곤 했다. 모더니스트들은 근대의 상징이었던 경성역에서 서구문명을 만끽하곤 했던 것이다. 이상의 소설 <날개>에서 주인공이“경성역 일이등 대합실 한곁티룸”에서“문을 닫을 때까지 앉아 있는 경우도 많았다”고 독백하는 장면도 나온다. 경성역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서울역으로 이름을 바꿨다. 서울역은 그 스펙터클한 외형으로 인해 1950~60년대 한국 영화의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건축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궁궐 건축의 역사 또한 알아보면 좋을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궁궐 건축의 역사를 소개해본다.
■ 궁궐 건축의 역사
궁궐은 고대국가로부터 근세 군주국가에 이르기까지 국가통치의 최고 주권자인 임금이 집무 및 생활을 하던 곳과 이에 부속되는 건물을 총칭한다. 궁실(宮室), 궁전(宮殿), 대궐(大闕), 어궐(御闕)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 궁궐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뜻을 약간씩 달리했다. 궁(宮)이란 말은 처음에는 비천한 사람이 사는 곳을 말했으나 중국 진한시대 이후는 천자(天子)나 제왕(帝王), 왕족(王族)들이 사는 큰 규모의 건축군, 즉 궁전을 의미했으며, 궐(闕)이란 말은 궁성의 좌우에 우뚝 솟아 주위를 감시하는 망대를 가리켰던 말로 궁궐은 이 두 단어가 합성된 말이다. 궁궐 건축의 형성은 고대 국가의 성립과 깊은 관계가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국가가 형성, 발전되고 왕권이 강화됨과 동시에 왕의 거처는 대개 성을 둘러 외부 세계와는 구별하였고 건물도 매우 장엄하게 만들어져 그 권위를 나타내고자 하였다. 따라서 궁궐은 신전이나 종교 건축과 더불어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고 규범과 격식을 갖춘 그 시대 최상의 건축이라 할 수 있다.
■ 궁궐의 변천
? 고려시대의 궁궐
고려시대의 궁궐건축은 개성 만월대(滿月臺)에 남아 있는 궁궐 터의 초석과 석축 유구자료를 기초로 하여《고려도경(高麗圖經)》등의 문헌과 비교해 대략의 형식을 파악할 수 있다. 만월대 궁궐의 특징은 평지가 아닌 구릉지대에 건물을 배치한 점이며 궁궐의 중심이 되는 외전(外殿), 내전(內殿), 침전(寢殿) 등의 건물군이 남북의 동일 중심축에 배치되지 않은 점이다. 즉 회경전(會慶殿)을 중심으로 한 외전 일곽과 장화전(長和殿)을 중심으로 한 내전 일곽 및 장화전 뒤편의 침전 일곽이 지형에 맞추어 축을 달리하였고 , 후원의 조경도 괴석을 모아 선산을 만들고 물을 끌어들여 샘과 연못을 만들었으며 명화기수(名花奇樹)를 심어 매우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특히《고려사(高麗史)》에 보면 의종은 왕궁 동쪽에 이궁(離宮)을 만들고 태평정(太平亭), 양화정(養和亭) 등 누정을 지었으며 양이정에는 청자기와를 덮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그 당시 궁궐의 화려함을 짐작할 수 있다.
? 조선시대의 궁궐 건축
1392년 태조 이성계에 의해 건국된 조선은 1394년에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 경복궁을 지으면서 서울시대를 열게 된다. 조선의 궁궐은 일부 훼손되긴 하였지만 아직까지 많은 부분이 남아 있어 당시의 모습을 확실히 살펴볼 수 있다. 조선의 궁궐은 그 기능에 따라 크게 정궁(正宮), 별궁(別宮), 그리고 행궁(行宮)의 3개로 나뉜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궁궐은 정궁인 경복궁(景福宮)과 일종의 별궁이었으나 실제로는 조선의 정궁 역할을 한 창덕궁(昌德宮), 그리고 임진왜란 때 임시로 궁궐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광해군 때 정식 궁궐이 된 덕수궁(德壽宮), 광해군 때 지어진 별궁으로서 서궁(西宮)으로 불리운 경희궁(慶熙宮) 등 5개의 궁이 남아 있어 이를 조선의 5대궁으로 부른다. 이들 궁궐 이외에도 많은 궁궐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조선의 궁궐은 지세에 따라 약간씩 다른 모습을 보이지만 전체의 구성을 대부분 비슷한 배치방식을 따르고 있다. 궁궐의 밖은 담장을 둘렀으며 담장의 주위에는 문을 두어 출입하였고, 내부는 3문 3조(三門三朝)라는 중국 배치방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는 외문(外門)-외조(外朝)-중문(中門)-치조(治朝)-노문(路門)-연조(燕朝)로 이어지는 3개의 영역으로 구분하는 배치방식으로서 외조는 궁궐 안에 있던 관청이 자리하는 공간이고, 치조는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고 집무를 하던 공간으로 궁궐의 중심인 정전(正殿)이 이 곳에 자리한다. 정전은 주위를 회랑으로 둘러 권위성을 강조하였다. 연조는 임금의 침식과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개인 생활공간이 된다. 이 영역에는 임금의 거처와 왕비, 왕대비의 침전이 자리하고, 그 옆으로 궁궐 안에서 필요한 제반시설과 관계자들이 생활하는 시설이 들어선다. 왕세자의 거처는 주로 동쪽에 자리하여 동궁이라 부른다. 특히 연조의 뒤는 휴식과 교육을 위해 후원을 두는데 후원의 조경방법은 우리 나라의 독특한 배치기법이라 할 수 있다. 궁궐 내의 각 건물들의 주위는 담장으로 둘렀으며 배치는 직선을 주로 하였으나 정전을 중심으로 한 회랑 일곽과는 달리 지세에 따라 약간의 변화를 가하고 있다. 특히 후원은 전체배치와는 달리 자연의 지세를 그대로 따른 모습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