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닮아가며
선교에 집중하는 충성교회
2011-08-04 김태훈 기자
성남시 분당구에 위치한 충성교회는 계파간의 갈등과 반목이 첨예해진 현재 한국교회 속에서 교회의 본질인 ‘선교와 사랑’을 실천하며 오롯이 예수님의 꿈을 실현시키는 교회로 발돋움하고 있다. 19년 만에 총 재적 성도 10,000여명의 교회로 성장한 모습은 충성교회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제 충성교회는 지역을 섬기고, 다음 세대를 향한 교회 그리고 세계를 향해 땅 끝까지 나아가는 교회로의 성장을 꿈꾸고 있다. 본지는 분당에 있는 충성교회의 윤 여풍 담임목사를 찾아가 예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충성교회’에 대해 들어봤다.
교통사정으로 예정 인터뷰 시간보다 한 시간 늦은 시간에 분당 충성교회(충성교회 판교성전)에 도착한 기자는 미안함에 연신 땀을 훔치며 안절부절 못했다. 그런데 인자한 모습으로 웃으며 기자를 맞이하는 윤 여풍 목사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 시간여를 기다린 윤 목사는 기자를 보고는 온화한 모습으로“아침식사는 하였냐?”며“간단하게 식사대용으로 뭐가 좋을까. 아! 율무차가 좋겠네요”라며 과일과 차를 내왔다. 교인들이 이구동성 윤 목사를 향해 외치는 ‘편안함’은 그를 만나자마자 단박에 기자에게 전해졌다. 이렇게 윤 목사와의 특별한 만남이 시작되었다.
충성교회, 하나님께 충성하자!
성남시 분당구에 자리한 충성교회는 사실 서울강남노회의 지하 상가교회로 시작해, 지금의 중대형교회로 성장했다. 충성교회는 본당 규모만 3천석이며 1천2백64평의 대지 위에 지하5층 지상7층 연건평 8천 평 규모로 건축되었다. 어림짐작만으로도 알겠지만, 교회는 대형수준이다. 또 교회 현관에는 초대형 세계지도가 있어, 충성교회의 지향점을 짐작케 한다. 전 세계로 뻗어가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품고 윤 여풍 목사는 교회의 본질인 ‘전도와 선교’를 특히 강조한다. 그는 교회가 존립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영혼구원이라고 역설했다. 예수그리스도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시기 위해 높은 자리를 버리시고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셔서 모진 수난과 아픔을 겪으시고 십자가 죽음을 통해 영혼구원을 이루셨다. 충성교회는 예수님의 희생을 본받아 하나님께 충성하자는 의미로 이름 지어졌다. 윤여풍 목사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주인이고 통치자기 때문에 그분에게 열과 성을 다해 충성해야 한다”며 “우리 충성교회는 본질에 충실한 교회”라고 말을 이어갔다. 유독 추웠던 지난겨울, 한낮 기온이 영하 16도까지 내려간 추운 날에도 예수님의 사명을 받들어 길거리 복음을 외쳤다. 그는 “우리 교회는 묵묵히 본질에 충실하고자 애를 많이 쓰고 있다”고 강조했다. 길거리 복음 전도, 이는 어찌 보면 가장 고전적인 방법일 수 있으나 윤 목사를 비롯한 충성교회 신도들은 누구에게든 전도의 문을 열고 매일 기도하고 또 길거리로 나가 복음을 외쳤다. 진실은 통한다고 했던가! 이 같은 노력이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으로 전해졌다. 윤 목사를 향한 교인들의 신뢰는 오늘의 충성교회를 지탱해주고 있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목사가 되기까지.
경북 예천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가난에서 벗어나 더 나은 삶을 살고자 서른다섯 즈음까지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당시 그는 한국사회 구조 하에서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상위층으로 올라갈 길은 요원하기만 했다. 농사꾼의 자식은 결국 농사를 짓는 일 밖에 달리 방법이 없던 때, 그는 더 나은 삶을 위해 사법고시를 택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공부에 매진, 1차는 합격했으나 2차 시험은 하나님이 막으시는 간섭이 있었다. 윤 목사는 “그때는 사법시험에서 매년 200-300명을 뽑을 때여서, 1차 합격하는 것도 아주 어려웠다. 그 1차 합격을 내던지고 신학결정을 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하나님 뜻을 따라 신학으로 전향했다”고 했다. 그는 사실 어릴 때부터 아름다운 공동체를 향한 꿈이 있었다. 배움의 열망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공부할 수 있게 해주는 학교와 가난한 사람도 치료혜택을 받을 수 있는 병원을 갖춘 복지타운을 세우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 꿈을 안고 서른여섯의 나이로 목회현장에 뛰어들었다. 당시 그의 부인이 영어교사로 있어, 생활에 대한 압박은 적었기에 그는 신학을 오롯이 공부할 수 있었다. 윤 목사는 당시를 회상하며 “하나님께서는 내가 신학을 공부하고, 전도자가 되기를 원하셨다. 창조자의 뜻이어서 내가 신학으로 전향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래도 오랜 시간 매진했던 공부, 놓기가 쉽지 않았겠다고 기자가 묻자 그는 “신학을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다. 세상일은 손도 까딱하지 말라. 원수를 갚지 말라’는 음성을 들려주셨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사법고시를 접고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장신대신대원 3년 때 일원동에서 교회를 개척했다. 윤 목사는 “한 가정으로 출발한 교회 개척으로 고생은 많이 했지만 하나님이 전적으로 인도해주셨다”고 했다. 그렇게 7년, IMF로 부동산 경기가 매우 안 좋았을 때 현재 개포성전에 터를 잡았다. 그곳에서 교회가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터전을 잡았음은 하나님의 전적인 도우심이라고 강조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했을 때 가장 보람되었다.
“다른 목사님들도 마찬가지로 개척하면 다 어렵다”고들 한다. 윤여풍 목사도 늘 고난과 시련에 맞닥뜨렸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곳이지만, 교회 역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다. 그 중에도 특히 교회는 상처받는 사람들, 위로가 더 많이 필요한 사람들이 오기가 쉽다. 윤 목사는 “상처가 있는 사람들,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은 자기의 어떤 상처 때문에 남에게 또 다른 아픔을 주기도 한다. 목사는 모든 것을 다 감싸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대하는 부분에 있어 어려움이 많았다”고 했다. 목사로서 개척을 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어 그는 “상처가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상처를 하나님 앞에 토로하도록 만들고, 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만들어가는 과정이 보통일은 아니었다”고 어려움을 내 비쳤다. 그것이 목회자의 길임을 그도 차차 알아갔을 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준을 정해놓고 살아간다. 어떠한 현상들을 두고‘하나님의 뜻’으로 설명하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감하지 못하고 반발하는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윤 목사는 “사람들의 가치관을 바꿔놓는 일이 참 어려웠다”며 “하지만 은혜 받은 이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아울러 그는 “설교를 한다는 것은 내입으로 표현하고 전달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이다.” 윤 목사가 전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많은 이들이 새 삶을 찾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은혜 받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말을 들을 때마다, 윤 목사는 목회자로서의 자신의 길에 더욱 큰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목사들이 예수님을 닮아가야 한다.
“목사님의 모습은 한마디로 경건의 모습이 살아있는 목자입니다. 사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지시고 희생하시는 분이십니다. 교회에 구걸하러 온 사람은 누구라도 당신의 주머니에서 있는 대로 다 털어서 주시면서 진심으로 기도해주고 보냅니다. 또 교회를 개척하고 여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매일 교회 강단 아니면 장의자에서 교회와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시다가 그 자리에서 잠간 샛 잠을 주무시고 새벽에 깨어 새벽기도회를 인도하시고 또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까지 기도 하시고 하루 업무에 들어가십니다. 그 생활을 지금까지 하고 계십니다. 목사님 당신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목회자의 모습은 더 많이 검소하고 더 많이 기도하고 솔선수범해야 영적 리더십이 발휘된다고 하십니다.” 이는 충성교회의 수석 부목사가 오랜 시간 동안 윤 목사를 지켜보고 한 말이다. 이를 반영하듯, 윤 목사는 “참 목자는 예수님을 닮는 것이다”고 강조한다. 충성 교회가 1998년 IMF때 지금의 개포성전인 석탑 프라자 건물을 경매로 낙찰 받아 옮기게 되었을 때 일화가 있다. 그때 당시 교회의 재정 상태로는 도저히 들어갈 형편이 안 되었는데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입했고 윤 목사의 교회 밖 지인들이 대부분 조달해준 돈으로 매입한 것이기에 윤 목사 개인이 그 건물 중 몇 개 호실을 가지라고 주위에서 권유를 했지만 다 뿌리쳤다. 지금 현재도 전세방 하나 없이 교회 사무실과 게스트 하우스에서 불편을 무릅쓰고 지내고 있다. 윤 목사는 사례비를 많이 받지도 않지만 그 대부분을 교회에 헌금하기 때문에 사모님은 개척당시나 지금이나 늘 생활비 문제로 고민 할 때가 많다. 그는 검소함 그 자체였다. 이 같은 일들에 대해 기자가 연신 감탄을 하자 윤 목사는 “목사는 모든 이들의 본이 되어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사실 요즈음 경제가 발전하고 볼거리가 많아지면서 유혹거리도 덩달아 늘었다.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는 목사들도 많아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윤 목사는 이러한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요즈음 목사님들은 무장을 덜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말하는 무장이라 함은 기도와 경건 훈련을 통한 무장을 뜻한다”며 “70년대 80년대에는 어려울 때 기도를 많이 했었다. 하지만 요즈음엔 목사님들이 기도와 경건이 약해지면서 한국교회의 추락이 보이고 있다. 물론 한국교회의 추락에는 여러 요인들이 있겠지만, 이 중에 결정적인 부분은 지도자들이라고 생각한다”고 개탄했다. 그러한 점에서 윤 목사는 여느 목사들에 비해 예수를 닮은 삶을 살고 있다.
자녀교육과 건강한 청소년 양육에 집중
“청년은 곧 미래의 한국이기 때문에 청년에 대한 관심은 남다르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담임 목사가 주일날 몇 번의 예배를 인도하기 때문에 청년예배는 담당 사역자에게 맡기는 것이 보통이다. 헌데 윤 목사는 주일 2시 30분 청년예배 때 어김없이 청년들을 위해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한다. 그런 남다른 관심으로 지난 10여 년 동안 청년들에게 장학금과 해외봉사활동을 지원하며 꿈을 키우도록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 결과 어려운 환경에 있는 청년들이 공부의 기회를 얻게 되었고 해외 경험을 통해 보다 큰 비전과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게 되었다. 충성교회에서는 청소년 육성프로그램으로 매년 국토대장정을 실행하기도 한다. 공부에 치우친 요즈음 청소년들의 나약해진 체력과 정신력을 강하게 하고, 사회성이 결여된 청소년들에게 많게는 300여명 적게는 150여명이 모여 일주일간 함께 생활함으로써 공동체성을 기른다. 올해로 12회를 맞는 국토대장정은 청소년들에게 국가관, 통일관, 리더십, 인내심, 화합심을 기르는 충성교회만의 독보적인 프로그램으로 다른 많은 교회들 역시 이 프로그램 공유를 요청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 충성교회에는 단일 비보이 팀이 있다. 이것은 윤 목사의 제안이었다. 그 당시 교회에서 비보이 팀을 만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일반인들 인식에도 찢어진 청바지와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옷을 입고 춤추는 아이들을 곱게 볼 리 없었는데 그런 팀을 교회에서 만든다는 것에 모두들 의아해 했지만, 윤 목사가 비보이 팀을 만들자고 한 것은 춤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숨어서 세상의 나쁜 쪽으로 빠지지 않고 건전한 모습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해 주기 위한 것과 비보이 중에도 크리스천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교회에서 마음껏 자신들의 끼를 발산할 수 있도록 해주자는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BOJ 라는 충성교회 비보이가 결성되기도 했다. 청년들을 향한 윤 목사의 남다른 애정이 돋보인다. 뿐만 아니라 윤 목사는 청년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자가용을 쉽게 내주기도 한다. 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판교성전에서 청년부 모임이 있어서 늦게 끝이나 개포로 나가는 교회 셔틀과 대중교통이 끊어진 상황에서 이를 알게 된 윤 목사는“타고 갔다가 내일 가지고 와라”하시며 자가용 열쇠를 내어줬다. 군에 가거나 유학가거나 어디 멀리 가면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다 털어 서슴없이 용돈을 주며 아버지처럼 사랑표현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충성교회의 청년들은 군에서 휴가를 나오거나, 해외에서 돌아오거나 하면 제일 먼저 윤 목사를 찾아와 인사드리고 기도 받는다. 윤 목사의 청년 사랑이 남다른 만큼 청년들 역시 자신들을 사랑해주고 믿어주는 윤 목사의 사랑에 보답하려고 애쓴다.
구제사역과 해외의 장학사역에도 열심히!
-18년째 현 서울의료원인 강남병원에서 행려병자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이는 처음에는 윤 목사 혼자 시작한 일이다. 당시 병원에서는 ‘몇 주 하다가 말겠지.’라는 반응이 었다. 하지만 18년간 그 일을 변함없이 해오고 있다. 이것이 이제는 교회차원으로 확대되었다. 그곳에는 사정이 딱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을 찾아가서 겸손하게 친구가 되어주고 기도해주고, 피고름을 닦아주고, 대소변을 씻어주고, 목욕과 이 미용을 통해 사랑을 전달하고 있다. 어느 때부턴가는 그들도 우리충성교회 병원선교 팀을 기다리게 되었다. 윤 목사는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병원선교 팀은 매주 토요일10시30분에 모여 사랑의 기도를 나눈 후 목욕가방을 메고 봉사활동을 나간다. 뿐만 아니라 또 충성교회에서는 해외선교에도 앞장서고 있다. 윤 목사는 “한국교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예전에 우리나라가 선교사들을 통하여 교육, 의료, 문화에 선한 영향을 받아 지금 한국이 직 간접적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이제 그 은혜를 나누어야 할 때이다. 성장을 나누지 못하면 고인물이 되어 썩는다”는 것이 윤 목사의 말이다. 그는 “우리 충성교회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많은 성장을 했다. 그것은 바로 선교하라는 하나님의 무언의 명령이기도 하다. 그래서 충성교회는 비전을 정하고 선교를 보다 많이 하려고 힘쓰고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 주변의 국가 중에는 열악한 환경에서 방치되어 있는 어린이들이 많이 있다. 충성교회는 이 같은 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어 미래 그 나라의 건실한 리더로 자라도록 여러 방향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필리핀과 미얀마, 몽골 등에 집중하여 약 1000명 정도의 어린이와 자매결연 하여 교육의 기회를 줄 목표로 나아가고 있다. 특히 필리핀에는 학교 부지를 매입하고 유치원과 초등학교 설립인가를 받은 상태다. 그 부지에 점차적으로 대학교까지 설립할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아울러 국수공장을 만들어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주민들과 함께 나누려고 하고 있다.
일천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관리하는 것이 목표!
요즈음 한국교회를 들여다보면, 안타까움을 자아내곤 한다. 계파간의 갈등과 반목 속에 진정한 기독교 정신인 ‘사랑과 화합’이 결여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이 같은 상황은 이제 막 믿음을 갖기 시작한 이들에게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에 윤 목사는 “일반 사회에서도 탑 리더를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듯, 교회도 인도자(목회자)를 잘 만나야 한다”며 “예수를 믿어 구원받는다는 것은 내 노력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다”고 말했다. 윤 목사의 말대로라면 목회자를 잘 만나는 것이 곧 은혜라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충성교회는 좋은 인도자, 즉 목회자들이 있어 초신자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교회로 평가되고 있다. 향후 충성교회는 일천 명(500가정)선교사 파송, 일만 명의 평신도사역자 세우기, 이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일백만 명의 영혼을 구원하는 계획을 세워 지난 2007년에 1,000, 10,000, 1,000,000의 비전을 선포하고 조금씩 실천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충성 선교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파송된 선교사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여 현지에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역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세계 각처의 영혼 구원을 위해 현지인들에게 사랑으로 다가서려는 충성교회의 노력은 복음의 효과뿐만 아니라 한국의 좋은 이미지를 주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해내고 있다. 윤 목사는 “우리 교회가 하는 일들은 결국 이 땅 가운데 교회가 세워진 궁극적 이유다”라며 “충성교회는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지만 특히 본질에 충실하려고 힘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자리를 뜨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황금침대에서는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