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투쟁, 법의학이 돕겠습니다

법의학자 문국진

2011-11-01     김엘진 기자
집중 인터뷰-국내최초 법의관 문국진

지금 우리나라의 검시제도는 대륙법을 따르고 있다. 이는 사망자를 발견한 경찰관이 검사에게 알리면, 검사는 판사에게 알리고, 판사가 영장을 발부한 후, 법의관이 부검을 하는 절차를 따르는 검시제도다. 반면 영미에서는 전담검시제를 실시하고 있다. 이는 사망자를 발견하면 즉시 전문 법의관이 검시를 하여 그 결과를 검찰에 보고하는 방식이다. 전담검시제를 실시할 경우 시신은 조금 더 빠르고 공정하게 검시를 받게 되고 사인 추정은 훨씬 수월해지며 전문성을 띠게 된다. 그러나 국가에서는 전담검시제가‘형사소송법’에 위반되는 일이기 때문에 시행할 수 없다고 한다. 법률은 국민들에게 조금 더 유익한 방법, 공정한 방법을 찾아주기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공정함을 얻기 위해 요구해도 좋지 않을까?


국내 최초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관 문국진
문국진은 국과수 최초의 법의관이자 국내 대학원 법의학교실의 창립자다. 그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과 과장 및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 교수, 뉴욕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 객원교수 등을 역임했다. 2008년에는 대한민국 과학문화상을 수상하였다. 현재는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대한법의학회 명예회장, 일본 배상과학회 및 한국 배상의학회 고문, 한국의료법학회 고문,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국내 법의학 전문가들의 필수교과서를 저술하였으며, 법의학 전문서적, 법의학 교양서적, 예술과 의학의 만남을 다룬 서적 등 총 49권의 저서를 펴내었으며, 지금도 책을 집필 중이다.

Q. 법의관이 된 계기와 과정을 알려달라
의과대 3학년 때 외출을 했다가 소나기를 만났습니다.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간 고서점에서 일본의 법의학서적을 발견했습니다. 그 책에 있던 문구가 제 삶을 바꿔놓았어요.“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이 임상의학이라면 사람의 권리를 다루는 의학은 법의학이다”라는 것이었어요. 의학이 인권을 지킬 수 있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 문장을 읽자마자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오래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법의학을 하겠노라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그때까지는 우리나라에서 법의학을 공부할 방법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가장 비슷한 병리학을 다시 배울 생각으로 교수님께 의논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교수님께서도 많이 말리시더라고요. 왜 어려운 길을 선택 하냐며 그냥 의사생활을 하라는 말씀이셨습니다만, 제 결심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사흘 후 교수님께서 연락을 주신 겁니다. 그 해가 1955년으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창립된 해였는데, 법의학을 할 사람을 추천해달라는 공문이 왔다며, 절 추천해주셨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야말로 굉장한 타이밍이죠.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딱 맞아떨어지는 상황이었다는 게 지금도 놀랍고, 역시 제 길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국과수의 창립멤버가 되었습니다. 당시 국과수는 30명 정도의 인원으로 치안국 감시과로부터 독립한 기관이었는데, 법의학과와 이화학과(동물 검시)두 부서뿐이었고요. 당시 저와 같이 법의관이 된 사람은 두 명이 더 있었습니다. 지금은 모두 세상을 뜨셔서, 이제 저만 남았네요.

Q. 우리나라 법의학의 발달이 이렇게 늦은 이유는 무엇일까
법의학이라는 학문은 이조시대에는‘무원록’이라고 불렸으며 지금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아주 발달된 검시체계를 지녔던 학문입니다. 당시에는‘복검제’로 운영이 되어, 사망사건이 일어나면 그 고을의 검시관과 근접한 다른 고을의 검시관이 각각 시신을 검시합니다. 두 검시관이 각각의 검시결과를 제출하면, 둘의 결과가 일치하는 지 살피는 거죠. 혹 둘의 결과가 불일치 할 경우에는 제3의 검시관을 불러 다시 검시를 실시하였습니다. 굉장히 민주적이면서도 발달된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시절에 일본인들이 이 복검제를 없애고 의과대에 법의학교실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법의학교실에서는 오직 일본인들만 공부할 수 있었어요. 해방 이후 우리는 미국식 제도를 도입하겠다며 법의학교실을 없애버립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법의학교실 대신 사회제도로 법의관제도(ME)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사망사건이 있을 경우에는 무조건 전문 법의관에게 검시할 권리를 주는 것이 바로 그 제도인데요. 이러한 법의관제도가 이미 잘 발달되어 있기에 법의학교실이 따로 없었을 뿐인데, 우리는 어떠한 제도도 없이 일본인이 만들었다는 이유로 법의학교실까지 없애버린거죠.

Q. 한국 최초의 법의관으로서 힘들었던 것이 있다면?
우선 현실적으로 답변하자면 국과수에서는 법의관에게 공무원 봉급을 준다는 거였어요(웃음). 사실 우리는 의대를 나왔고, 동기들은 모두 의사의 봉급을 받으며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우리의 봉급은 당시 돈으로 3000원이었어요. 시립병원 의사는 한 달에 12000원을 받을 때였습니다. 또한 학교에서도 의과대를 나왔지만 법의학을 따로 배우지도 못했고, 국과수에서는 선배들이 닦아놓은 길도 스승도 따로 없으니 항상 책을 보며 독학을 해야 했다는 점도 초반 어려웠던 점입니다. 이 부분은 저 뿐이 아니라 새로 들어오는 법의관들도 너무나 힘들어했던 점이었고요, 신입 법의관들마다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나가는 일이 계속되었습니다. 일은 힘들고 책임은 무거운데, 급여는 적었으니까요. 국과수 내에서는 제대로 된 법의관을 양성하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후 1976년에 고려대학교에 법의학교실과 법의학회도 창설하게 되었는데, 이때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검찰 측과의 유대관계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부검소견서를 제출하면, 검찰에서 불러 법의관을 범죄자 취조하듯 취조하는 겁니다. 그래서 초반엔 정말 검사들과 많이 싸웠죠(웃음). 후에 오탁근이라는 검찰청장님이 부임하셨는데, 이 분이 일본 유학시절에 법의학 공부를 했다는 거예요. 두 달간 하루에 두 시간씩 검사들에게 법의학을 강의해달라고 요청하셔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대우가 확 달라지더라고요. 이후에 사법연수원, 법무연수원에도 법의학 과목이 신설되고, 경찰전문학교에서도 법의학을 가르치게 된 것은 다 이 오탁근 검찰청장님 덕이었습니다. 그렇게 법의학의 중요성이 알려지기 전에는 부검소견서를 아무리 명확히 써서 제출하더라도 법관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무효였거든요. 과학수사가 도입되기 전에는 증거위주의 재판이 이루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증거보다는 법관의 심증이 더 중요했던 시절이었어요.

Q, 법의관 일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거나, 포기할 생각을 한 적이 있다면?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죽음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죽음을 경원시하는데다가, 조선시대에 범인이 이미 죽었을 경우 시신을 무덤에서 파내 다시 한 번 몸을 자르는‘부관참시(剖棺斬屍)’라는 형벌이 있었던 것처럼, 시신 훼손을‘두 번 죽음’으로 생각하는 국민들이 많았어요. 사실 부검을 하는 것은 죽은 자의 인권을 지키기 위함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부검을 나갔을 때는 정말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부검을 몰래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부검을 위해 나왔다고 하면 사람들이 돌을 던지기도 하고, 몽둥이를 들고 나오는 적도 많았습니다. 이번에 나온 책 제목이‘법의관이 도끼에 맞아 죽을 뻔 했디’인데, 이것 역시 실제로 있었던 사건입니다. 손자의 부검을 참을 수 없었던 할아버지가 도끼를 들고 와 저를 노리고 던졌어요. 다행히도 경찰관 중 하나가 재빨리 막아 도끼는 해부대에 꽂히고 말았지만요. 법의관이 된 지 5년쯤 지났을 때, 도저히 이 일을 계속할 수가 없다고 결론내렸습니다. 처음에 법의관이 되겠다고 했을 때 말리셨던 교수님을 찾아가 말씀드렸어요. 전 분명 잘 생각했다고 반겨주실 줄 알았는데, 웬걸요. 5년이란 세월을 헛되게 만들지 말고, 계속 한 우물을 파라고 잔뜩 혼만 나고 돌아왔습니다. 마침 그 해가 4.19혁명이 일어났던 1960년이었습니다. 국과수에서는 지금 경복궁 뒤편에 창고를 개조해 만든 연구소를 사용하고 있었는데요, 4.19의 시위대가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몰려오는 겁니다. 외과대학생들도 많았는지 앞에는 흰 가운을 입은 학생들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경무대에서 실총를 발사하는 겁니다. 흰 가운을 입은 한 학생이 그 총에 맞고 쓰러졌어요. 하얀 가운 위로 붉은 피가 번져가는 것을 본 시민들의 격노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 김주열 사건 아시죠? 그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도 수많은 시민들이 불의에 분노하여 당당히 맞섰잖아요. 그때 깨닫게 되었어요. 우리민족은 환경과 문화적인 문제로 지금은 죽음을 지나치게 경원시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옳은 것을 옳다고 아는 민족이라고요. 4.19혁명은 우리 민족이 얼마나 정의롭고 용기 있는 민족인지 다시금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모르는 부분은 차차 알려주고, 계몽만 조금 더 잘 하면 되겠다는 희망이 생겨 법의관 일을 포기하려는 순간 돌아설 수 있었습니다. 이 역시 굉장한 타이밍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겠죠.

Q. 국과수 시절 해결한 사건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일이 있다면?
70년대였습니다. 한강에 나룻배가 다니던 시절이었어요. 한 중년여성이 매일같이 시내 야간학교에 다니는 딸을 마중하기 위해 한강 백사장을 지났다고해요. 그 무렵 백사장에서는 인부들이 벽돌을 찍는 작업에 한창이었어요. 어느 날 딸은 통행금지 시간을 넘겨 집에 돌아오지 못했고, 중년여성은 다음날 아침 백사장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겁니다. 당시 수사관들은 벽돌을 찍는 인부 중 하나의 소행일거라고 단정 짓고 50여명 되는 인부들을 하나하나 취조를 했습니다. 수사는 한 달을 계속되었지만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년여성의 시신에는 잇자국이 있었습니다. 턱, 유방, 성기에 선명하게 잇자국이 남아있었죠. 수사관은 당연히 이상성욕자의 짓이라고 했으나, 제가 치열을 확인한 결과는 달랐습니다. 치열의 모양은 범인이 여성의 남편이라고 말해주고 있었어요. 그러나 수사관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부인의 몸을 물고 살해하는 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이유였는데요, 그러나 증거는 명백했어요. 결국 전 치의학 교수를 찾아갔습니다. 마침 그 교수는 이 사건과 증거를 이미 받아서 검시를 했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는 시신에 남은 치열의 모양과 남편의 것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같이 재검을 해봤어요. 남편이었습니다. 교수는 바로 수사과에 연락해 자신이 틀렸으니 다시 수사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전 지금까지 감정결과가 틀렸다는 게 밝혀졌을 때 바로 수긍하는 검시관을 당시의 그 교수 외에는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검시결과가 틀린 것으로 밝혀지는 경우에도 모두들 핑계를 대거나 우기기 시작하는데, 이 교수님은 정말 용기 있는 분이셨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재검을 요구할 만큼 확신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 더 있는데요, 살아있는 상태에서 물리게 되면 피해자는 당연히 반항을 하게 되고, 잇자국이 선명하지 않을 수 있었는데, 이 경우에 여성의 몸에 남은 잇자국은 생활반응이 없는 선명한 자국이었습니다. 그 얘기는 여성의 사망 후에 잇자국이 남았다는 소리지요. 왜 사망 후에 잇자국을 남겼을까요. 위장하기 위해섭니다. 부인을 죽이고 나서 이를 성범죄로 위장하기 위해 남편은 일부러 잇자국을 남긴 거예요. 바로 그 때문에 잡혔지만요. 이 사건은 당시 신문에도 대서특필되었고, 결국 이 사건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직접 만날 기회가 생겼습니다. 박 전 태통령은 원하는 것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하였고, 전 제대로 된 법치학자가 필요하니 치의학 전공자를 국과수에 들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들어온 법치학자가 김종열 의사였어요. 이 사람은 후에 법치학 연구소를 세우며 우리나라의 법치의학의 기틀을 다지게 됩니다. 그 이후에도 정신분석을 전공한 의사를 불러 법정신학을 시작하게 되고, 또 제 아들놈은 법의곤충학자가 되어 일명‘개구리 소년’사건 때 수사의 방향을 잡는 데 한 몫을 하기도 했습니다.

Q. 드라마‘싸인’은 어떻게 보았을지 궁금하다
사실은 드라마 초반부분은 굉장히 맘에 안 들었습니다. 국과수가 돈과 권력을 위해 결탁하는 등의 모습이 그려졌잖아요. 물론 드라마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전혀 정보가 없는 일반인들이 봤을 때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속상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마지막 회에서 주인공인 법의학자가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범인을 잡으려는 모습에 좀 감동을 받았다고나 할까요? 아, 물론 그렇게까지 하면서 범인을 잡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웃음). 다른 방법들이 분명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것 보다는 이후에도‘싸인’에게 고마움을 느꼈는데요, 이 드라마를 통해 법의관이 일반인에게 알려졌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우리나라에는 13개 대학에 의과대가 있습니다. 그런데, 법의관을 지원하는 사람은 일 년에 고작 서너 명입니다. 여성 지원자는 전혀 없었고요. 그런데 작년에 15명이 법의관에 지원을 했고, 자그마치 10명이 여성이었어요. 딱 일 년 동안. 정말 있을 수도 없는 일이죠. 저는 평생 법의학을 대중에게 알리겠노라는 일념으로 쉴 새 없이 책을 써왔는데, 매스컴의 힘이란 정말(웃음). 앞으로는 법의학에 대해 다루는 드라마나 소설 등의 작가에게 법의학회에서 따로 상이라도 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진심으로. 사실 지금은 외국드라마에서도 법의학에 대해 많이 다루고 있고, 대중들에게도 점차 알려지고 있지만 그래도 드라마와 현실은 다르다는 것은, 말씀 따로 안 드려도 알고 계시겠죠.

Q. 책도 자주 출간하는 것으로 안다. 최근에 나온 책을 간단하게 소개해 달라
이번 책은 제가 직접 쓴 건 아니고 인터뷰로 이루어진 책입니다. 법의학자가 되면서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을 쭉 풀어놓았어요. 법의학자로서의 삶과 법의학교수로서의 삶,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연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연구는 저는‘북 오톱시’라고 부르는데요. 사람이 아닌 책을 해부하는 겁니다. 예술가의 생애를 찾아 분석해 그들의 사인을 제대로 규명하고자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시작한 것은 차이코프스키였습니다. 차이코프스키는 콜레라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그런데 실은 콜레라가 아닙니다. 그는 동성애자였고, 법과대학 출신의 음악가였습니다. 당시의 법으로 동성애자는 사형에 처하거나 시베리아로 유배를 보내게 되어있었습니다. 러시아의 국왕은 차이코프스키를 법대로 처벌하라고 명을 내립니다. 명을 받은 검찰청장은 차이코프스키와 동문이었는데요. 그는 차이코프스키의 명예를 망가뜨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대학 동기 8명을 더 모아 고심을 한 끝에 차이코프스키에게 명예로운 죽음을 선사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차이코프스키에게 독약을 먹이고, 그 사실을 위장하기 위해 콜레라에 의한 사망이라고 발표했어요. 실제 사인은 콜레라가 아니라 약물중독에 의한 사망이었지만요. 그 외에도 빈센트 반 고흐 등 많은 예술가들의 생애와 죽음을 분석하는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또 이러한 연구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많은 책과 그림과 음악을 공부하게 되었고요. 의학 관련 미술과 심리분석에 대해서도 연구 중입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책에 더 있으니 이 정도만 하도록 할게요(웃음).

Q. 법의관이 되기 위해선 어떤 자질이 필요하며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가장 필요한 자질은 사명감입니다. 명예나 물질적인 풍요를 바란다면 법의관이 되어서는 안 될 겁니다. 법의학자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을거거든요(웃음). 그리고 법의관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든 그렇겠지만 지식보다는 지혜가 더욱 중요합니다. 단지 의과적인 지식만 많기보다는 사건의 전후를 추론할 줄 알아야 하며, 피해자와 가해자의 입장에서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Q.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국가는 국민의 의식주뿐 아니라 죽음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국민은 누구든 억울한 죽음, 명확히 밝힐 수 없는 죽음을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국민이 사망했을 때 국가는 그가 어째서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는지를 알아내줘야 합니다. 그에 대한 신뢰가 있을 때 국민은 억울하지 않게 죽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국가의 손에 그저 맡겨놓는 것은 안 됩니다. 인권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요구하고 투쟁하여 쟁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가 옳은 제도를 만들도록 하려면 국민 개개인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