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그때 그 사람들
2012 대한민국 제6공화국의 어제와 오늘
2012-09-05 박미진 기자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그리고 이명박. 이들은 불운한 시대의 역사 혹은 찬란한 민주화의 상징 그리고 주류사회와 권력의 희생양으로 회자되고 있는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들이다. 대한민국을 이끌어온 이 주역들의 공통점은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현재 재임 중인 이명박 대통령 역시 대선 당시, 큰 표 차이로 당선돼 국민적 기대를 모았지만 현재 여론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안타깝게도 역사 또한, 그를 좋은 대통령으로 기억해주진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왜 이처럼 열렬한 지지와 기대로 시작한 임기가, 도중은 물론이고 퇴임 후엔 혹독한 가시밭길이 되는 것일까.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어제와 오늘엔 그 답이 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국민은 일제 침략으로 잃었던 국권을 회복하고 새로이 독립 국가를 세웠다. 대한민국의 탄생은 40여 년간 잃었던 국가주권을 되찾고, 국민주권에 바탕을 둔 한국 최초의 민주공화정 체제를 출범시켰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그렇다면 공화국 구분의 기준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공화국은 헌법의 본질적인 내용에서의 변화가 있어야 공화국이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본질적인 면에서 변화가 없다고 판단되면 공화국은 바뀌지 않는다. 이 변화의 기준은 대개 통치상의 변화이다. 덧붙여서 현재는 9차 재정헌법이고 6차 공화국이다. 공화국의 주요 특징과 공화국들의 변화를 전체적으로 보면 1공화국은 건국 최초의 공화국이며 미국헌법을 거의 답습했다고 볼 수 있다. 제1공화국의 대통령은 이승만대통령 이었고, 4.19혁명 이후 의원내각제로 변화된 체제의 제2공화국이 설립되었다. 이 때 대통령은 윤보선대통령 이었다. 제3공화국은 박정희에 의한 5.16쿠데타로 세워진 공화국이며, 그 후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헌법 발효로 인한 헌법수정으로 4공화국으로 넘어왔고 박정희 사후 대통령은 최규하 대통령이었다. 전두환이 정권을 장악한 후 제5공화국이 되었으며 대통령 7년 단임제가 되었다. 그 후 5년 단임제의 국민 직접선거로 대통령 선출방식이 변경되며 제6공화국이 되었고, 제6공화국 대통령으로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현)이명박이 있다.
혼란스러웠던 제1공화국
이승만은 1948년 좌익과 중간세력, 그리고 김구의 도전을 물리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이승만 정부는 국제적으로는 미국의 지원에 힘입은 바가 컸으며, 국내적으로는 한민당을 비롯한 반탁우익세력과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정부수립에 성공한 이승만 정부에게 주어진 일차적인 과제는 일제 식민지 통치의 잔재를 청산하고 새로운 국가의 기틀을 세우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기 위하여 이승만 정부는 민주공화제를 정치체제의 기본원리로 채택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초기부터 정치적 어려움에 직면했다. 건국 과정에서 배제된 좌익의 도전과 정부수립에 함께 참여했던 한민당과의 결별 때문이었다. 여기에 이승만의 권위주의적 정치행태가 덧붙여지면서 불안정한 정치 상황이 계속되었다. 1950년 6월25일에 시작된 한국전쟁은 이승만 정부의 단순한 위기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자체의 위기를 불러왔다. 미국과 유엔의 신속한 개입으로 국가의 위기는 모면했으나 전쟁은 한국사회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다. 한국전쟁으로 남북분단은 고착화되었으며, 한국사회는 반공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다. 전후 한국사회는 전쟁복구를 통해 사회 안녕과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가 되었고, 그것은 국토방위를 강화하고, 반공 이념을 국민들 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가 정치와 경제의 기본 골격이었지만, 현실에서는 많은 문제를 드러내었다. 이승만 정부는 전쟁이라는 국가의 위기 중에도 정권의 연장을 위한 독선적인 정국운영을 일삼음으로써, 그 후에 나타날 장기집권 체제의 씨앗을 뿌렸으며 정치를 파행으로 몰고 갔다. 1952년의 부산 정치파동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확보함으로써 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한 이승만은 그 후 자유당을 창당하고, 1954년에는 사사오입 개헌으로 종신제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자유당의 비민주적 정치행태는 민심의 이반을 재촉하였고, 야당의 도전과 투쟁을 격화시켰다. 결국 1960년 3월 15일의 부정선거는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조종을 알리는 전국민적인 저항을 불러왔다. 이승만은 1960년의 4.19혁명으로 12년의 권좌(대통령 3대 연임)에서 물러나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제1공화국도 종말을 고한다.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 체제, 제2공화국
혼란의 뒤를 이은 제2공화국은 1960년 허정 과도정부(1960년 4월-6월)를 거쳐 6.15 개헌에 의해 설립된,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의 내각제 기반 공화 헌정 체제였다. 무엇보다 제2공화국은 4.19혁명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4.19혁명의 이념과 기본정신을 충실히 반영하는 헌정체재를 지향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4.19혁명의 이념은 자유와 민의와 민권이 존중되는 민주정치의 구현이다.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였던 제1공화국의 1인 독재의 경험 때문에 4.19혁명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 분위기에 당연시 되었다. 1960년 5월의 제5대 민의원, 참의원 선거에서 선출된 민, 참의원은 내각책임제 개헌을 결의하여 자유당 일부의 동의를 얻고 6월 15일 내각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것이 6.15개헌이었다. 이 개헌이 통과되자 연이어 국무총리를 선출하였고 이때 선출된 총리가 4월 24일 이후 내각수반을 맡았던 허정이었다. 국무총리에 선출된 허정은 8월 12일 선출 때까지 궐위중인 대통령직을 겸임했고, 이후 1960년 8월 12일 국회에서의 대통령 선거로 윤보선이 제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제2공화국에서 눈여겨 볼 점은 제1공화국에서의 1인 독재 체제에 대한 경험으로 대통령중심제가 아닌 의원내각제의 채택과 그로인한 정치적 실권의 이양이다. 당시의 실권은 대통령이 아닌 국무총리에게 있었으며 대통령은 의례적인 국가원수로서의 기능을 할 뿐이었다. 또한 국민 기본권 보장의 강화, 지방자치제도의 시행, 양원제의 국회 등이 이시기의 특징이다. 이 같은 제2공화국의 정치형태는 윤보선이 아닌, 어떤 누구였더라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때문인지 정권교체 이후 윤보선은 각계에서 분출되는 자유화 요구를 적절히 제어하지 못하는 듯 했고, 이후로도 그의 정치 참여는 정치적 실권을 잃은 대통령의 공공연한 간섭으로 비춰질 뿐이었다. 결국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이끄는 군대는 군사쿠데타를 감행하였고, 윤보선은 1962년 5·16쿠데타로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이로써 1960년 4월 혁명이 만들어낸 성과는 제 2공화국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정권을 위한 정권에 의한 정권교체 제 3,4공화국
1962년 12월 17일 국민 투표로 확정된 개정 헌법에 의해 설립된 공화 헌정체제였던 제3공화국의 대통령은 박정희(제 5대-9대)였다. 이 정권이 종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독재에 대항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교체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표 차이 역시, 한국 대통령 선거 사상 가장 근소한 차이였다. 이런 표 차이는 당시 쿠데타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은 생각보다 훨씬 거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박정희 정부는 제2공화국이 세운 경제개발계획을 그대로 베껴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졸속으로 일본의 독도소유권 주장과 독도 근방 어업권을 인정하는 독도밀약으로 한일협정의 돌파구를 찾아 받은 자금으로 경제 성장 정책을 도모했다. 경부고속국도를 비롯한 도로와 항만, 공항 등의 사회 간접 시설도 확충, 간척 사업, 식량 생산 증대 등으로 어느 정도의 자본은 개선되었으나, 자본 집중이 심화되어 소수의 재벌들이 생산과 소득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계기가 된 시기이기도 했다. 국내 산업 역시 수출 의존도가 심화되는 등 폐단이 나타났고, 교육의 중앙 집권화와 관료적 통제가 급증하는 등 총체적 난국이었다. 현세에 박정희 정부가 이룬 경제적 성장은 부정할 수 없다는 논리는 잃은 것에 대한 고찰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증거는 1970년대 이후, 제4공화국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국내 노동자 수가 크게 늘어나고 민들의 사회의식이 높아지면서 노동 운동이 활발해졌고 이로 인해 임금 인상, 노동 조건 개선, 기업가의 경영 합리화와 노동자에 대한 인격적 대우 등을 주장하는 노동자들의 시위가 전국에서 거세게 일었다. 독재정권 역시 위기감을 견디지 못해 1972년 10월 17일 헌법을 개정하여 유신체제로 전환하는 무리수를 뒀다. 이로써 제3공화국은 지고, 제 4공화국이 수면위로 올랐다. 제6대 대통령으로 연임한 박정희는 제4공화국과 함께 유신시대의 막을 열었다. 주된 목표는 민주적 헌정 체제를 부정하는 독재 체제를 구축이었다. 실제로 긴급 조치 1호에서 9호를 발동하여 개헌 논의 일체를 금지하고, 반정부 세력에 대한 정치 활동, 언론 및 표현의 자유에 심대한 제한을 가했다.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1973년 독재에 저항하던 김대중(15대 대통령)이 일본에서 납치되는 사건과 1975년 고려대학교 군대 투입사건 등이 있다. 이때가 헌정 체제 하에서 가장 많은 민주화 운동과 그에 대한 탄압이 벌어졌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시기의 가장 큰 악행과 파국의 원인은 비판 여론을 차단코자 사형을 집행하는 등 정권 반대자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간접선거를 통한 연임으로써 끝없는 야욕을 꾀했지만, 대규모의 민주화 시위인 부마항쟁과 같은 굵직한 시민항쟁만 야기할 뿐이었다. 결국 10월 26일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이었던 김재규에 의해 살해되며 총 5선에 걸친 독재정권은 종지부를 찍었다.
독재, 새로운 국면을 맞다‘군정시대’ 제 5공화국
계획적인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민주화 여론을 탄압함으로써 탄생된 제5공화국은 비상기구를 통해 헌법을 졸속 제정했다. 제10대 대통령직에 오른 사람은 최규하였지만 실권은 신군부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종전의 정국과 마찬가지로 1980년 4월 사북탄광 노동자 파업, 5월 전국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 등 시위는 거세지고, 군부세력의 비상계엄령은 점차 확대 돼갔다. 당시 계엄군의 광주투입은 진압과정에서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발족으로, 취임 1년이 채 안돼, 제11대 대통령이 취임하는 상황이 연출됐다. 11대 대통령의 주인공은 전두환이었다. 이어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 공포로, 12월 초 민주정의당·민주한국당·한국국민당 등의 정당이 창당됐고, 전두환은 제12대 대통령으로 연임함으로써 제5공화국이 정식 출범하였다. 이 시기에서 눈여겨 볼 점은 1인 장기집권을 배격하기 위한 대통령 임기7년ㆍ중임 금지, 국회의원의 1/3 대통령추천제도 폐지, 국회 권한강화, 대통령의 일반법관 임명권 폐지로 대법원장에게 권한 위임, 사법부의 독립성 강화 등 국정운영에 대대적인 변화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여전히 대통령 간선제를 고수하고, 군 출신 인사들을 중용하는 등 유신잔재 청산에 미흡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과거 성장제일주의 정책에서 벗어나 저물가ㆍ저금리ㆍ저환율의 3저(三低)정책과 부동산 투기억제 등 안정우선정책을 추진하는 등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제5공화국 역시 박정희 정부와 마찬가지로 쿠데타로 성립된 군사독재정권의 한계를 보였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탄생한 이 정권은 물가안정, 서울올림픽대회 유치 등의 업적을 남겼으나, 부정부패와 민주화운동탄압, 고문 등의 인권유린행위로 국민들의 비판을 샀다. 마침내 1987년 6월에 일어난 6월 항쟁으로 6·29선언이 발표되면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약속하고, 12월 16일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되어 1988년 2월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뤄짐으로써 제5공화국 종식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민주주의의 과도기, 제 6공화국
1987년 10월 29일 공포된 대통령직선제의 제9차 개정헌법에 따라 성립된 제6공화국은 다음해 2월 25일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시작됐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야합의에 의하여 대통령 직선제, 대통령 5년 단임제, 국정감사권 부활 등을 주요 골자로 하는 제9차 헌법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10월 27일 개헌안이 국민투표로써 확정됨으로써 제6공화국의 법통이 마련된 시기였다. 경제적 측면에선 연평균 8.5%의 실질성장률을 이루었으나, 물가상승·부동산투기 등으로 서민층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재벌소유 집중완화, 토지공개념 및 금융실명제 실시 등 각종 개혁정책은 일관성을 잃고 표류했다. 이로써 제6공화국은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로 평가된다. 특히 1987년 6월 항쟁에서 분출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6·29선언과 그 후 정부의 민주화 조치를 강제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제 6공화국의 첫 민주주의를 실현한 정부
노태우 정권 후반에 발생한 경제침체로 경제민주화의 한계를 인식한 제14대 대통령 김영삼은 1993년 출범과 동시에‘신경제’를 국가의 경제이념으로 내세웠다. 이는 제6공화국에 들어선 두 번째 정권부터 현 정권까지 이어지는 경제적, 국정철학이다. 김영삼 정부가 주장하는‘신경제’는‘정부와 민간이 함께 만들어 가는 경제’로서‘사회가 민주화되고 성숙됨에 따라 모든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능동적인 창의력의 발휘만이 가장 효율적인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인식에 따라 나왔다. 신경제정책은 국민의 참여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경제민주화의 요소가 있지만 규제완화와 금융자유화, 시장개방과 시장에서의 공정성 등의 내용을 볼 때 경제의 효율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경제자유화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김영삼은 재임기간 동안 많은 수의 규제정책을 없앴고, 규제의 수준 또한 낮아졌다는 점에선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펼쳤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규제완화의 대부분은 행정절차의 간소화 수준에서 그쳤다는 한계를 보인다. 복지정책의 경우 복지지출을 줄이려는 의지가 없었지만 가족이나 전통사회에서의 복지의 역할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발전국가에 가까웠다. 민영화의 경우 정권 초에 적극적으로 추진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게 가까워 보였으나, 정권 후반에 들어서 기업들의 반발 등으로 적극적인 민영화에서 경영혁신의 수준으로 물러났다는 점은 당시 정부와 기업의 관계를 보여준다. 시장개방에선 이전 정권과 다르게 국정과제로서만 인식하는데 그치지 않고 농민을 포함해 여러 사회적인 반발에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금융시장의 개방 또한 마찬가지였으나 결국, 이것이 IMF 경제위기의 원인이 됐다는 점에서 무비판적인 신자유주의의 도입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영삼 정부의 이러한 경제자유화는 신자유주의 경제이념을 처음으로 적극 도입한 정권이라고 할 수 있으나, 재정정책 부분에서는 발전국가의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제 6공화국의 민주주의 근간, 참여정부
때문에 IMF 경제위기의 상황에서 출범하게 된 차기정권인 김대중 제15대 대통령은 경제적인 면에서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위기 인식’속에 있었다. 여야 간 최초의 정권교체가 이뤄진 정권이라는 점이 이전 정부와는 다른 특수성을 지니는 김대중 정부의 국정 철학은‘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라 할 수 있다. 김대중 정부는 ▲경제적 자유를 보장하되 책임을 엄격히 지게 하는 원칙 ▲시장경쟁을 통해 보상이 이뤄지도록 하는 원칙 ▲모든 이에게 균등한 기회를 보장하는 원칙 ▲내외국인 차별이 없는 시장개방의 원칙 등을 통해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신자유주의 경제이념을 추구했다. 김대중 정부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중에서 시장경제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적 측면을 가진다. 한편, 진보정권이라는 점에서 좌파정치에 친화력이 있다고 기대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경제위기 극복을 필요한 상황에서 민주주의의 심화는 부수적인 과제였다. 김대중 정부는 경제위기의 원인을 부정부패와 정경유착 등에서 보았는데 이 역시 시장경제를 우선시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구조개혁 역시 시장경제에 친화적인 구조를 개혁하는 부분과 시장의 공정성과 건전성 증진으로 분류된다. 시장경제 친화적인 개혁으로는 부실기업을 시장성에 따라 퇴출하거나 경쟁력이 있도록 통합 또는 희생, 노동시장 유연화, 기업과 금융에 대한 규제 철폐 등을 들 수 있으며, 시장의 공정성과 건전성을 증진시키는 개혁으로는 대기업에 경제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는 규제 등이 있다. 그러나 정부조직의 경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커져 복지지출도 이전 정권과 비교해 늘어났다는 점은 신자유주의 경제이념의 실천의 한계였다. 김영삼 정권과 같이 재정에 있어서 순수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구하기 힘들었지만 복지지출의 경우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뒷받침됐다는 점에선 좀 더 신자유주의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제6공화국의 문민정부
김대중 정부의 차기 정권이자, 현 이명박 정부의 종전에 위치한 제16대 노무현 대통령은 반대로 진보 정권이 정권을 재창출했다는 점과 탈IMF 경제위기 상황에서 시작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김대중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서 국민들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점에서 노무현 정부도 그것을 계승하는 정권이라는 점과, 위기를 극복했기에 새로운 정치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었다. 때문에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를 계승하면서 신자유주의 정제개혁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문제의식도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노무현 정부는 노동자 기본권 보장, 사회복지의 확충, 경제적 불평등 문제 해소 등을 통해 보다 진보적인 정치를 추구했다. 그러나 정권 초기에 발생한 경기 침체로 노무현 정부는 새로운 경제 계획을 내놓았고, 이 계획을 둘러싼 사회 분열이 가중되기도 했다. 노동시장 유연화를 강조한 것에 대해 기존 노무현 정부를 지지했던 노동자들과 진보진영에서 상당한 반발을 하고 나섰으며, 반대로 국토균형성장 전략에 따라 신행정수도 건설 등의 계획에 대해서는 보수진영에서 개발주의 행정, 지역주의 조장, 부동산 투기 유발 등을 이유로 비판했다. 이런 여론의 분열은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사태를 초래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사실상 노무현 정부는 신자유주의와 참여민주주의의 사이에서 절충을 찾으려고 다분히 노력해왔다. 노무현 정부는 친경쟁적인 규제와 시장개방, 노동유연화의 측면에서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 경제이념을 계승했으며 동시에 재정과 복지정책에 있어서 참여민주주의적 요소들을 도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이념과 참여민주주의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점이 문제였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참여 민주주의적 요소를 통해 시장경제를 감독할 수 있는 정당성을 얻었다. 정부가 자신 의지대로 시장을 감독하기 위해서는 시민사회가 정부에 협조하는 관계여야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와 마찬가지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추구했지만 시민단체 등과 같은 여론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면서 경제를 성장시킨다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급한 상황에 노무현 정부가 선택한 것은 경제 성장부터였다. 이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정부가 민주주의를 심화시키는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려는 것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제6공화국의 네 번째이자 오늘의 정부, 실용정부
때문에 미처 이루지 못한 경제성장의 바통을 이어받은 제17대 이명박 대통령 정부의 최대 과제는 미국발 세계 금융대란으로 시작된 위기와 그에 대한 극복이 최대 과제였다. 우리경제의 높은 해외의존성으로 인해 글로벌 금융위기는 유가, 물가 및 실업률 상승을 초래하며 국내경제에 위기를 가져왔고, 이명박 정부는 이러한 위기에 대응하여 미국 일본 중국과 통화스와프 *통화를 교환(swap)한다는 뜻으로, 두 거래 당사자가 약정된 환율에 따라 일정한 시점에서 통화를 서로 교환하는 외환거래를 가리킨다. 를 통한 외환시장의 조기 안정시키는데 주력하며, 예산의 조기집행과 녹색성장, 청년 인턴제와 희망근로 프로젝트 등을 통해 OECD국가 중 가장 빠른 회복세를 보여 왔다. G20 정상회의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로 인한 국격 제고의 노력과 무역 1조 달러 달성과 FTA 체결 등의 노력은 국격을 한층 높였다. 그러나 2009년 국민소득은 5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인 1만7175달러로 곤두박질쳤다. 한편, 외교적 측면에선 2009년 11월 프랑스 파리 OECD본부에서 개초된 DAC에서 회원국 전원합의로 24번째 DAC 회원국에 이름을 올려 *DAC는 전 세계 원조의 90% 이상을 제공하고 있는 선진 공여국들의 모임이다. ‘원조를 받던 나라’중에서는 처음으로‘원조하는 나라’로 전환되는 쾌거를 이뤘다. 그러나 동북아시아(북한, 일본)의 긴장감을 고조시켰다는 면에선 다소 미흡한 부분이 있어 보인다. 이렇듯 이명박 정부는 지난 정권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주장해온 것과 달리, 지난 4년간의 업적은 오히려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 비해 경제적 업적이 한참 못 미친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앞서 보았던 21세기 정부의 정책 역시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이 필연적으로 불가피했듯, 지금은 분열보단 국민의 하나 된 지지와 성원이 필요 한 때이다. 동시에, 차기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현명한 선택이 요구된다. <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