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짓밟은 청춘, 일본군위안부
20세기 최대의 인신매매...강제 연행, 동원, 징용, 공출, 납치에 멍든 조선의 여성들
2012-10-09 박미진 기자
‘군위안부’, 장기화 된 전쟁에 강간으로 인한 성병확산을 막고 사기 진작 등 효과적인 군사 활동을 꾀한 일본이 군대의 감독과 통제 하에 운영한‘군위안부 정책’의 피해자들이다. 그 수는 적게는 5만에서 많게는 30만에 이르렀으며, 주로 10대 초반의 미성년부터 20대 후반의 여성들이었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배 하에 있던 조선(우리나라)의 여성은 전체의 80%에 달했고, 이들 모두는 감언과 강제에 의해 동원된 피해자들이었다. 강제로 군위안부가 된 수많은 여성들은 일본 뿐 아니라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라바울 등의 일본 군대 내‘군 위안소’로 연행돼, 1930년대부터 1945년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그 곳에서 조직적으로 강제 ㆍ반복적인 성폭행과 인권 유린을 당했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가...그만”
“일본군 때문에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됐다. 옛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온다”는 정 모 할머니는 일본군에 의한‘군위안부 강제 징용’피해자다. 일본군의 철저한 감시 속에 바다 건너 배를 타고 도착한 일본. 그곳에서 할머니는 하룻밤 사이에 10~15명의 군인을 상대하게 됐다. 그러다 임신이라도 하게 되면 일본군은“아직 쓸 만하다”며 자궁 째 태아를 들어내기도 했다. 한 날은 칼을 찬 군인이 여성들을 모아놓고 물었다고 한다. “군인 백 명을 상대할 수 있는 자가 누군가”라고. 물음에 답하지 않은 15명의 여성은 다른 여성에 대한 본보기로 죽임을 당했다. “일본군이 발가벗은 여성의 머리와 발을 잡은 뒤, 못을 박은 판자 위에 올렸고 이내 분수처럼 피가 솟구쳐 죽었다”고 회고하는 할머니는 이어“일본군은 죽은 여성의 머리를 솥에 넣어 삶았다. 그리곤 칼을 휘두르며 억지로 마시도록 했다”고도 했다. 그런가하면, 1933년 12월 1일에는 한 여성의 자궁에 장교가 철봉을 꽂았다. 벌겋게 달군 철 막대기를 뽑아내자 검게 탄 살점이 달려 있었고, 여성은 즉사했다. 이유는 성병에 걸린 사실을 알리지 않아 병을 옮길 뻔 했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그들은 여성들의 온 몸에 문신을 새기기도 했다. “애초에 죽일 생각으로 문신을 새겼다”는 정 할머니는“문신이 새겨진 채 죽어 버려지는 여성들은 마차에 실려 산으로 들로 팽개쳐졌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 중에서 숨이 붙은 채로 버려진 유일한 생존자였다. 정 할머니는 여전히 그때의 기억이 생생히 떠올라 괴롭다고 한다. 영문도 모르고 당해 모진 세월을 보내온 정 할머니는 아직까지도 궁금하다고 했다. 자신이 왜 끌려가게 되었는지, 한편, “집 밖에는 군복을 입은 사람과 서민 옷을 입은 사람 여럿이 서있었고, 이동 중에도 마을의 이 집, 저 집에서 2~3명의 여성들을 계속해서 데리고 왔다. 모여진 많은 여성들은 대부분 나와 비슷한 또래였다”는 할머니의 증언대로라면, 일본군은 자국민을 앞세워 마을 당 가구의 여성 인구를 파악한 뒤, 무차별적인 징용을 강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6살, 나는 그저 성 노리개였다”
김 모 할머니는“나는 그들에게‘인간’이 아니었다. 난 그들의 성 노리개였다”고 회고했다. 선비 집안에 장녀로 태어 난 할머니는 아버지의 지병으로 급격히 나빠진 집안 사정에 돈을 벌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3년 정도면 아버지 치료비 정도는 충분히 벌 수 있을 거란 생각했다”는 할머니는 그렇게 일본군의 군복을 만드는 공장에 취직했다. 당시 할머니의 나이는 14살이었다. 그러던 중 일본군이 젊은 처녀들을 잡아 간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문은 현실로 다가왔고, 공장으로 들이닥친 일본군은“더 큰 돈을 벌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겠다”며 닥치는 대로 할머니와 여성들을 잡아갔다. 민가라곤 전혀 없는 군부대에 도착한 할머니는“그 곳에서 군인들의 식사나 빨래 등을 해주는 일을 하리라고만 생각했다”고 했다. 그러나 일본군에 이끌려 들어선 창고의 방 안에는 군인으로 보이는 남성이 있었고, 그는 곧 할머니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이어 그는 할머니에게“분수도 모르는 조센징”이라며 할머니를 마구 짓밟았고 이내, 겁탈했다고 한다. 1941년 당시 할머니의 나이는 16살 이었다. 울며불며 저항하는 할머니를 향해 일본군은“영광으로 알라고 했다”고 한다. 영예로운 황국 군인에게 몸을 바치게 된 것을. 그 후로 할머니는 길게 땋은 머리도 잘린 채, 나무로 지은 임시 건물 안의 좁은 공간으로 옮겨졌다. 겨우 1~2명 정도 누울 수 있는 공간 안에는 바닥에 깔린 신문지 몇 장과 담요 두 장, 그리고 휴지와 쓰레기통이 전부였다. 그 앞으론 일본군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그들은 그곳을‘위안소’라 불렀다고 한다. 일본 군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욕정을 해소할 목적으로 망연자실하게 앉아있는 할머니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은 반항하면 할수록 할머니를 더욱 거칠게 몰았다. 폭력을 휘두르는가 하면, 칼로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할머니가 증언한 일본군의 만행은 실로 비인간적이었다. “하루에 적게는 30명에서 많게는 70명씩, 밥도 먹지 못하고 쉬지도 못해가며 군인들을 받아냈다. 심지어 내가 생리 중에도 자신들의 욕정을 해소했다.” 그나마 존재했다는‘위안소 이용규정’에도 인권유린은 심각했다. “1시간을 넘기면 밖에서 난리가 났던 걸로 봐선 시간에 제한이 있던 것 같다. 들어오는 군인들 마다 표 같은 것을 돈을 주고 샀다고 하는데 받은 적은 없다. 또 성병에 걸리면 큰일이라며 한 달마다‘위생병’이라 불리는 군의관에게 성병검사를 받기도 했고 붉은 소독약을 물에 타 씻기도 했다.” 한국정신대연구소에 의하면 위생에 관한 규칙이 특히 많았고, “‘삿쿠’(콘돔)는 군인들만이 소지하고 있었다”라는 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으로 미루어보아, 이러한 규정은 기본적으로 군인들을 위해 제정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위안소가 없는 지역의 파견되면 임시 막사에서 그 부대의 전 인원을 상대해야 하는 등 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처우는 처참했다. 결국 몸 상태가 한계에 이르는 여성들은 쓰러져나갔다. “당시에 내가 쓰러지자 일본 군인들은 한참이나 줄 서서 기다린 데에 대한 보람이 없다며 욕을 퍼부었던 것으로 기억 된다. 그리곤 위생병에게 보내져 주사를 맞으면 정신을 차렸다.” 할머니는 이 생활을 수 십 수백 번이나 반복했다고 한다.
“취직해서 효도할 수 있다더니..”
“그 엉망이 된 밑을 보고도 덤벼드는 놈들이 인간 같지 않았다”는 최 모 할머니는 불행히도 위안부 생활로‘매독’이라는 성병까지 얻었다. 2남 2녀 중 막내였던 할머니는 당시 이웃집에 살던 남자의“취직해서 고생하는 어머니께 돈 벌어다 드려 효도해야 된다”는 말에 넘어가 위안부가 됐다. 공장으로 향할 줄 알았던 기차를 타고 도착한 일본 어딘가에는 창고로 보이는 건물이 있었고, 그곳에서 할머니는 셀 수 없이 많은 일본 군인들에게 수모를 당했다. “하도 많은 이들을 상대하다 보니 얼마 안 돼, 몹쓸 병이 들었는지 밑이 시뻘겋게 퉁퉁 붓고 고약한 냄새가 났다. 들어오는 군인들은 제각기 삿쿠(콘돔)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끼는 사람도 안 끼는 사람도 있었다. 한번은 어떤 일본군이 바지를 내리고 덤벼들려고 하다가 시뻘겋게 된 내 밑을 보곤, 욕지거리를 하며 못 같이 뾰족한 것을 가지고 밑을 찔러 버렸다”이어“거기에 병균이 옮아 번져서 고름과 피가 범벅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군인을 받아야 했다”고 했다. 위생병이 와, “매독(성병의 일종)에 걸렸다”며 주사를 놨지만 잘 나을 리 없었다. “무슨 주사인지 한번 맞고 나면 속이 울렁울렁하고 입과 코에 냄새가 올라와 역겨웠다”는 할머니는“그 와중에도 내게 욕정을 해소하는 일본군이 인간 같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니 좀 나을까 싶으면 재발하고 또 재발하기를 반복했다. 낮에는 졸개(병사)가 괴롭히고 밤에는 위에 놈(하사관)이 괴롭히고, 눈 좀 붙일까하면 장교(장교는 숙박할 수 있다)놈이 그렇게 못살게 굴었다”는 할머니는“아예 계급별로 드나들 수 있는 시간을 정해져 있었다”고도 했다. 좀처럼 차도가 없자“죽는구나 싶었다”는 할머니는 어느 날 갑자기 조선으로 돌려 보내준다는 통보를 받았다. 운이 좋았던 경우였다. 군위안부 생활로 성병을 얻은 여성들은 대부분 죽임 당하고 버려지거나 제대로 된 치료 없이 쫓겨나 결국 죽는 것이 다반사였기 때문. 그러나 할머니는“막상 조선에 나간다는 소리를 들으니 내가 죽어야 하는데 이렇게 살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기절을 했을 때 죽게 그냥 내버려두지 하는 야속함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성병 얻어 환향한 년이..행복할 리가”
예상대로 최 모 할머니는 고국에서도 평탄치 못한 삶을 살아야 했다. 성병이라는 잔재가 할머니의 일생을 옥조여 왔기 때문. 성병이 아니더라도 일본군에 의해 혹사당한 군위안부의 삶이 행복하면 또 얼마나 행복 할 수 있었을까. 할머니는 조선 땅에 도착하면서부터도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었다고 했다. “걸치던 옷에 조리 하나 신고 집 까지 무작정 걸었다. 걸을 때마다 밑이 아파 몇 번을 주저앉으면서 집으로 갔다. 집으로 가면서도 혹여나‘성병까지 얻고 환향한 년’이라며 내치진 않을까 불안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나를 보더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 하면서 부둥켜안고 우셨다. 밑에 병이 있는 상태에서 돌아왔으니 동네 사람들이 알까 봐 쉬쉬하며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병원에 다녔다.” 할머니의 어머니는 굳이 할머니가 어디에 다녀왔는지 물어보지 않으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다 알고 계신 것 같았다. 그리곤 간혹“딸 둘 있는 것을 이렇게 버렸다”라고 하시면서 울곤 하셨다“는 할머니는“위로 8살 터울의 언니가 있었는데, 역시 일본군에 이끌려 변을 당하고 돌아와 그 해 겨울 죽었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에게도 불행이 닥쳤다. “배가 하도 아파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으니 아이가 이미 뱃속에서 죽었다고 했다. 꺼내 보니 사내아이인데 얼굴부터 몸 반쪽이 이미 썩어 있었다. 의사는 병균 때문에 아이가 그렇게 됐다고 했다.” 그 후 동네에서는 일본군이 또 다시 여성들을 군위안부로 공출(供出)한다는 소리에 놀라 미혼 여성들을 죄다 결혼시켰고, 할머니 역시 어머니의 강요로 잘 알지도 못하는 이웃집 남자와 혼인을 해야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방이 찾아왔지만, 치료가 제대로 끝나기도 전에 혼인했던 탓에 할머니의 남편은 매독 균에 옮았다고 한다. “남편은 나를 때리며 내 쫓았고, 임신한 몸으로 또다시 친정으로 갔다. 웬 임신은 그렇게 쉽게 되는지 얼마 살지도 않았는데 덜컥 아이가 들어섰다”며 한탄하는 할머니는 사실 뱃속의 아이가 또다시 유산될까 누구보다 노심초사 했다고 한다. 이후 지금의 두 번째 남편과 혼인한 할머니는 애 딸린 여자라는 이유로 시부모, 시누이한테 갖은 구박과 서러움을 당했다.
자식에게 되 물림 된 상처
그러나 가장 큰 설움은 훗날 큰아들에게로 이어진 성병의 여파였다. 최 모 할머니는 연신“자식 신세까지 그렇게 만들어 놨으니. 뱃속에서 멀쩡히 나와 성한 줄 알았지 그게 40년 만에 정신병이 될 줄은 몰랐다”며 멍든 가슴만 두드린다. 그런 최 모 할머니의 슬하에 자식은 네 명이다. 딸 셋에 아들 하나. “모두 자기 밥 먹고 잘 살고 있다”는 할머니는 지금은 막내딸과 함께 살고 있다. 그 전엔 큰아들과 함께 살았다는 할머니는“그 중에서도 큰 아들은 의붓아버지 밑에서 구박을 많이 받았고 공부도 제대로 못 시켰다. 국민 학교만 겨우 졸업하고는 나가서 빌어먹다시피 하면서 돌아다녔지만 그래도 남의 밑에서 이것저것 배운 것을 가지고 자기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런데 멀쩡히 잘 살던 큰 아들이 40살이 넘어서야 갑자기 신경발작증을 일으켰다”며 오열했다. 이어“병원으로 어머니를 부르라던 의사가 가족들은 다 나가라 말했다. 그리곤 내게 혹시 전에‘매독(성병의 일종)’을 앓다 큰 아들을 낳은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 날 한참을 고개 숙인 채 눈물만 흘리다 나와야 했다는 할머니는“그저 내가 죄인이다”라며 통탄했다. 큰아들의 부인은 곧 집을 나갔고, 큰아들은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은 발작을 한다. 그럴 때 마다 큰아들은 할머니를 위협해 왔다. “제가 더러운 개구멍에서 나와 이렇다고 의사가 이야기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 말을 하면서 작년엔 어미를 죽이겠다고 집안 살림을 다 집어던지면서 달려들었다”는 할머니는 그 길로 쫓겨나다 시피 큰아들 집을 나와야 했다.
피해자들의 짓밟힌 청춘, 원통한 삶.. 억울한 호소
안타깝게도 최 모 할머니 역시 서른 이후로 찾아온 불안증에 정신이 혼동되는 증세를 호소하고 있었다. “갑자기 사람이 싫어지고 소름이 끼쳐 나가라고 소리도 지르고 발광을 했다. 사람소리 텔레비전 소리만 나면 불안하고 무서워서 문 걸어 잠그고 아무도 못 들어오게 했다. 텔레비전에서 총소리를 듣고 몇 번을 졸도도 했다”는 할머니는 사람이 무서워 작은 소리에도 방에 들어앉아 무릎으로만 기어 다니는 생활을 근 30년간이나 했다. “제대로 걸어 다닌 게 이제 4년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할머니는 아직도 신경안정제가 없으면 불안하다고 한다. “그 동안 그 누구한테도 털어놓지 못한 말을 가슴에 담고서 어서 죽기만을 기다리며 살아왔다. 지금 신고(군위안부 피해 신고)를 하고 이런저런 행사(수요 집회 등)에 참석하곤 하지만 행여 얼굴이 알려질까 봐 마음을 졸인다. 자식이 있고 남편이 있어 내 원통한 세월을 마음껏 통곡도 못한다. 만약 내가 위안부로 갔다 온 사실을 사돈댁에서라도 알게 된다면 자식들 인생이 어떻게 되겠는가. 지금 내가 겉으로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지만 신경병에 당뇨에 약 없이는 살지를 못한다. 남들에게 꺼내 놓지 못하는 이런 엄청난 이야기를 가슴에 묻고서 속병 앓으며 사는 것을 누가 알겠나. 죽어 가슴에나 묻어둘 이 원통한 이야기를 누가.”
20세기 최대의 성매매VS인신매매
최 모 할머니와 같이 대부분의 군위안부 피해자들은“억울하다 소리 내 울고 싶지만, 주위의 시선과 가족들의 꺼림에 짓눌려온 가슴을 또 다시 짓누른다”고 한다. 믿을 수 없지만 군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곱지 않다. 우여곡절 끝에 살아 돌아온 군위안부 피해자를 보듬어주긴 커녕, ‘환향년’이라며 속되게 표현하기도 했으며, 일각에선“대가를 받고 그들 스스로 성을 판 것. 요금을 지불하고 성을 매매 한 것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신고를 망설이는 이유다. 그러나 이들의 피해를 윤락 행위 등으로 간주하기엔 무리가 있다. 먼저 군위안부 피해자들이“군인들이 순번표 또는 군표로 보이는 표를 쥐고 있었다고 했다”고 증언 한 것으로 보아 돈을 지불하고 위안소의 이용권을 구매한 것은 사실인 것으로 추정되지만 군인들이 지불한 요금은 업자의 배만 불렸을 뿐, 군위안부의 수중에까지 들어가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으며, 심지어 무료로 운영된 위안소도 있었다. 대부분의 군위안부 피해자들 또한 돈의 행방을 알지 못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자발적’인‘동의’로 이루어졌냐는 것인데, 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대부분‘근로 정신대 자원, 취직 권유 등의 감언, 납치, 연행, 공출(供出)’등 과정에 상당한 강제성을 띄고 있었다. 그것이 자원이든 공출이든 어떠한 형식으로 끌려갔던 것이라 해도, 사실을 알고 동의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이들은‘강제연행’에 의해‘동원’된 것이 된다. 실제로 군 위안부는 외출도 제한당한 채 정기적인 성병검사를 받으며 매일 군인을 상대하는‘성노예’로서 생활했다. 그런데다 철저하게 버림받기도 했다. 패전으로 퇴각하던 일본 군인들은 군위안부를 한데 모아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살아남은 이들은 잠시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집단으로 귀국선을 타거나, 혼자 숱한 어려움을 헤치면서 고향을 찾아와야 했다. 이밖에도 타국에서 그대로 머물러야 했던 경우도 많다. 돌아오는 방법을 몰랐거나 알았어도 더럽혀진 몸으로 돈도 한 푼 없이 돌아갈 수 없다고 포기한 경우다. 또한 어떤 이들은 귀국 도중 연합군의 폭격으로 배가 파산되어 집단적으로 수장되었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도 있었다.
짓밟힌 청춘, 원통한 삶 보상받을 길 없어
일본정부가 처음으로 이 문제에 대한 공식적 입장을 표명한 것은 1990년 6월 한 내각의원의 위안부 조사 요청에 대한 답변이었다. 일본정부는“민간업자들의 소행이다”라며 군대의 관여를 전면 부정했다. 이에1991년 여름, 김 모 할머니가 군위안부 정책의 피해자임을 밝히고 그 해 12월에 일본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또 그 직후인 1992년 1월에는 일본의 한 교수가 일본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발견한 위안소 관련 자료가 공개됨으로써 일본정부는 더 이상 군의 관여를 부정할 수 없게 되자,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형식적 사과하며, 이후 1992년을 시작으로 2차례의 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군위안부의 이송, 모집, 군의 관여, 동원 등에 대한 강제성을 인정했지만, 보상 문제에는“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및 1965년의 한일협정으로 이미 해결되었다”며 피해자 측이 요구하고 있는 개인배상에 대해서도 거부해왔다. 그리곤“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을 깊이 상처 준 것에 진심으로 사과와 반성의 뜻을 밝힌다”며 서둘러 진상규명의 책임을 마무리 지었다. 한편, 1998년 4월 시모노세키 재판부는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현행 헌법상 군 위안부처럼 극단적 인권침해일 경우 보상 입법의 의무가 일본정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회가 그동안 입법 의무에 게을러왔다”는 견해를 밝히며, 군위안부 피해자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일본정부는“국회에는 헌법상 입법의무가 없다”고 주장하며 즉각 항소했고, 이 재판은 대법원까지 가서 기각됨으로써 1심의 유죄 판결조차 백지화되고 말았다. 국제평화기구인‘유엔 인권위원회’에서도 1992년부터 군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해 나섰으나 일본정부는“이 문제는 유엔 창설전의 문제이며 유엔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아무 권한도 없다”고 주장하며 유엔에서 나온 어떠한 조치에도 불응하는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종군위안부’란 단어 사용은 모욕과 수치다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일본군은 군위안부 피해자들을‘작부(酌婦)’또는‘창기’, ‘추업부’라 매도했다”고 한다. 이는 본질적인 면을 드러내는 용어는 아니다. 이런 용어들은 이 제도를 만든 일본군의 일방적인 인식을 보여줄 뿐 피해자 측의 시각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현재 미국과 영국과 같은 국제사회에서는‘일본군에 의한‘성노예(sexualslavery)’라는 용어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것이 군위안부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는 용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나라에선‘군 위안부’라는 당시 쓰이던 역사적 용어로서 흔히 사용 돠고 있다. 정신대(挺身隊)란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친 부대란 의미다. 식민지 조선에선 1940년대 남녀 각 조직에 정신대라는 이름이 붙여지기 시작했다. 정신대라는 용어가 법으로 제정, 일반화된 것은 1944년‘여자정신근로령’이 제정되면서부터였다. ‘여자정신근로령’에 의해 조직된 여자근로정신대는 원래 남성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여성까지 군수공장에 나가 일하게 한 노동대이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정신대를 곧‘군위안부’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대부분. 이는 당시 여성이 일제에게 끌려간다는 것은 곧 순결을 잃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진 이가 많았던 탓이기도 하다. 실제로도 정신대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노동인력까지 포함하므로 잘못된 표현이라고 볼 순 없다. 더욱이‘처녀 공출’이나‘정신대’라는 명목아래 강제로 일본군에 동원, 공장에서 일하다 군위안부로 끌려간 경우가 빈번했던 상황에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군위안부’가 된 여성들을 가리켜 정신대라 부르기도 하지만, 절대 혼동해선 안 될 단어의 사용도 있다. ‘종군위안부’가 대표적인 경우다. ‘종군위안부’의‘종군(從軍)’이라는 한자 표현은‘군사를 좇는다, 즉 자발적으로 따라갔다’는 의미로, 강제로 끌려가 일본군의 성욕 해결의 대상이 된 군위안부 피해자에게는 옳지 않은 표현이다.
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과 요구
일본의 우익세력은 군위안부 정책에 대한 일본군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일본군은 식민지 여성에 대한 차별의식과 함께 국제법을 피해갈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염두해‘부인 및 아동의 매매를 금지하는 국제조약’에 가입하면서, 식민지에서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유보조항을 두는 치밀함을 보였다. 이는 조선(우리나라)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강제 군위안부 동원이 사전에 계획 된 일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밖에도“관리, 경찰, 군에 의해 강제 납치당했다”는 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민간업자가 여성들을 모은 경우에도 이들 민간업자들은 관동군, 조선군사령부 등의 관리, 감독 통제 아래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업자들이 인솔하여 위안소까지 이동할 때도 군대트럭, 군용열차가 많이 이용 됐다는 점도 반박 근거다. 한 위안부 피해자는“배로 이동할 경우에는 대개 연락선으로 일본으로 간 후 다시 군화물선이나 군함을 탔다”며 이같은“이동에 따른 수송 수단의 이용에는 군관의 허가와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라고 설명했다. 여러 가지 자료로 미루어 볼 때, 경찰과 군이 직접 개입한 것은 물론이고 민간인이 동원에 관여한 경우에도 그 배후에는 일본 정부와 군이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다 한편, 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의지가 무르익으면서 운동에 견인차가 되는 단체들이 생겨났다. 그 대표적인 단체가‘한국정신대연구소’,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나눔의 집’이다. 이밖에도 지방에 있는 여성단체 및 시민모임들의 노력으로, ‘일본군위안부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민족운동부산본부’, ‘경남 정신대문제대책을 위한 시민연대모임’, ‘대구여성회 정신대문제 대책위원회’,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대구경북)’, ‘훈할머니돕기 불교후원회(대구)’ 등이 결성되어 활발한 운동을 펼치고 있으며, 일본정부를 향한 이들의 요구는 다음과 같다. 1. 일본정부는 진상을 구명하고 정당하게 배상하라 2. 일본정부는 전범사실을 인정하고 전범자를 처벌하라 3. 일본정부는 위령탑 등을 건립하고 진심으로 사죄하라 4. 일본정부는 역사교재에 진실을 알리고 바르게 교육하라 등이다. 이에 대해 일본정부는 계속 무시하는 자세를 취해왔다. 그 사이 지난달인 2012년 9월, 또 한명의 군 위안부 피해자가 별세했다. 이로써 현재 한국 정부에 공식 등록된 군 위안부 강제 동원 피해자 234명 중 생존자는 단 60명뿐이다. <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