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웃어야 사는 사람, 감정노동자

웃음 뒤 가려진 감정노동자들의 멍

2012-11-09     박미진 기자

“막무가내 고객들한테 심하게 시달린 날은 남편이나 애들한테 자주 짜증을 내게 돼요. 그리고 내가 손님 입장에서 식당에 가서 밥 먹을 때도 서비스가 조금만 거슬려도 소리부터 지르게 되더라고요. 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도, ……성격이 변하나 봐요.” 백화점에서 5년째 일하는 어느 여성의 고백이다. 식당, 백화점, 마트, 서점, 주차장, 114, 홈쇼핑, 비행기에서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아름다운 미소와 친절한 서비스를 만난다. 일상에서 매일 마주치는 아름다운 미소와 친절한 몸짓, 그 이면에는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까?

“저 사람들은 친절한게 직업이야”
무조건 웃어야 사는 사람, ‘감정노동자’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는 김 모(26)씨는 오늘도 허겁지겁 집을 나선다. 교대시간을 맞추기 위해서다. 병동 출입문 밖으로 들려오는 고함과 욕설 그리고 협박이 어김없이 이어진다. 별 다른 표정 없이 의무국으로 들어선 김 씨는“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남기고 업무 준비에 들어간다. 이 같은 일이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자명종과도 같은 현실이다. 한편, 업무 중 그녀가 꺼리는 일은 환자의 병동을 찾는 것이다. 김 씨는 치료차 들른 병실에서 환자가 수없이 욕설을 퍼부어도 웃어 넘겨야 하고 뚱뚱하다며 비웃어도 웃어 보여야 한다. 간혹“간호사 주제에, 네 주제에”와 같은 비하 발언에 모욕감을 느껴도 그저 꾹 눌러 참는다. ‘간호사로서 환자를 존중하고 친절히 대하며, 내 가족처럼 돌봐야 한다’라는 압박 때문이다. 그녀는“이렇게나 환자의‘인권’을 중시하는 병원에서 사회적 약자는 더이상‘환자’가 아닌‘의료진’이다.”라며 한숨짓는다. 김 씨와 같이 낯선 이에게 늘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무조건 웃어야 사는 사람들, 웃으며 죽어가는 사람들. 바로‘감정노동자’다. ‘감정노동(emotional labor)’은 배우가 연기를 하듯 원래 감정을 숨긴 채 직업상 다른 얼굴 표정과 몸짓을 하는 것을 말한다. 감정노동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려고 늘 긴장하며 자기감정을 관리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하루 종일 서서 일하지만 ‘진상’에게도 웃음으로 대해야 한다.

‘웃어서’병드는 사람들
감정노동 내면도 병들게 해
대형 할인마트에서 중간 관리자 격을 맡고 있는 박 모(36)씨는 매일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진상고객’때문이다. 이놈의 진상고객이란 작자는 말을 꼭 중간에 잘라야 직성이 풀리는 듯하다. 자신이 발언할 땐 마침표가 찍히기 전까진 한 마디도 못하게 하면서, 꼭 박 씨의 말은 중간에 자르고야 만다. 그뿐인가. 삿대질에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 같다. 여기 저기 온데 군데 찌르며 주위 시선을 끄는데 정말 일가견이 있다. 그도 모자라 말도 짧다. 마트에 출몰해 박 씨를 괴롭게 만드는 진상고객들은 하필 다 외국에서만 살았나 싶을 정도. 이 같은 진상고객들 때문에 박 씨는‘스마일 맨’이란 별명도 얻었다. 어떠한 고객에게도 늘 웃음으로 응대한다는 주위의 칭찬이었다. 그러나 박 씨에 대한 가족들의 반응은 달랐다. 박 씨의 아내인 김 모 씨는 박 씨를‘악마’라고 부른다. 늘 심기가 불편해 있으며, 신경질적인데다 집에 오면 언제나 말도 잘 하지 않는 박 씨 때문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앨리 러셀 혹실드는 세계 최대 항공사인 델타 항공의 임원과 승무원 및 노동조합 관계자, 성 문제 치료 전문가, 연수센터 강사 등 다양한 관련자들과 다양한 직업에서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만난 결과 박 씨와 같은 감정노동자가 스트레스를 해소하지 못한 채 감정의 억압을 장기간 지속한 경우, 우울증과 불면증 같은 정신 질환을 호소했고, 또한 이것이 갑작스러운 가슴 통증이나 만성피로, 소화불량, 두통, 무기력감 등과 같은 신체적 질환으로도 이어졌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것이‘화병’에서 유발되는‘합병증’증세에 주로 나타는 과정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사회적 보호 장치 전무한 감정노동
그런데 개인의 자질 또는 인간적인 특성으로만 여겨지던‘감정’이 어떻게 시장 속에서 상품화 된 것일까. 사회학자 앨러 러셀 혹실드는 제공함으로써 얻고자 하는 공급자의 처지가 ‘감정’을 소비하게 만든 원인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갑과 을의 모든 관계에는‘감정노동’이 수반된다는 얘기다. 이 같은 감정노동이 대표적인 업종은‘서비스업’으로, 서비스업에선 개인의 감정이 곧‘상품’이 되기도 한다. 한편, 영국의 한 심리학자가 이들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심리상태를 조사한 결과,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대부분은‘신경조직인 프로이트라는 기능에 손상을 입게 돼, 결국 인간성의 쇠진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이 같은“쇠진, 스트레스, 신체적 쇠약은 곧 감정노동사회에서 살아가는 감정노동자의 특성이며, 특히 지나치게 친절하게 행동하지만 가족이나 친구 등 주변 사람들에게는 신경질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감정노동’에 시달리고 있을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이러한 감정노동의 문제점은 직업적으로 겪게 되는 스트레스 및 쇠진 현상 등을 해소 할 곳이 없다는 점이다. 실제로 본지가 직접 마트, 백화점, 콜센터 등 서비스업 종사자들을 대상으로‘감정노동’에서 오는 스트레스 해소법, 개인적인 방안을 묻자, 미혼 여성의 70%가‘술과 이성친구와의 교제’가 전부라고 답했고, 20%에 해당하는 이들은‘소비자가 되어 소비하거나 컴플레인 등으로 푼다’고 말했으며 남성의 경우‘술과 흡연으로 푼다’는 답이 지배적이었다. 이는 직업 상 감정노동이 불가피한 노동자들이 조직과 사회의 방치 속에 무방비하게 병들어 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존중받는 감정은 따로 있다?
감정노동자 인권침해 심각
수년째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는 이 모(28)씨는 백화점의 여성복판매원으로 근무 중이다. 이 씨는 자신의 업무 중, 물건배송이 지연이 될 경우나 상품을 구매했지만 되돌아 올 때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다. 이 같은 순간에 고객들은 늘 언성을 높여 화를 내기 때문이다. 그도 모자라 아내의 불편을 대변한다는 명목으로 배우자인 남편까지 찾아와 온갖 무시와 짜증, 욕설을 퍼붓기도 한다. 그럴 때면 이 씨는 심한 모욕감을 느끼지만, 연신“죄송합니다”라고 말해야 했으며, 심지어 그런 고객에게 고개까지 숙여 보인다는 것이다. 더욱 불편한 점은 이 씨를 비롯한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진심이라기보다는 회사의‘요구’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서비스업 종사자들은 대부분“회사에서 실시되는 각종 서비스, 인사, 호칭에 관한 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말하며, 교육에서 회사는 늘“언제나 고객과의 문제가 생겼을 때에는 불쾌하거나 기분이 좋지 않더라도 무조건 참고 고객을 모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또 감정을 최대한 눌러도 고객의 마음에 들지 못해 회사로 항의라도 들어 갈 시에는 사실여부와는 상관없이 상사의 꾸중과 회사로부터 지적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곧 감정노동자에게는 이중 삼중의 고통과 스트레스가 된다. 또한 이러한 상황이 자주 발생할 경우 회사 내에 관계에도 불편함을 초래해, 일을 할 수 없을 지경에도 이른다. 또 회사는 고객이 직원에게 심한 인권 모욕과 폭언을 휘두른 상황에서도 고객에 대한 분노를 어떻게 억누를 것인가에 쏠려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씨의 경우도 회사는 고객이 항의하게 된‘원인’과‘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정신보건기관에 근무하는 김 씨의 경우에도 환자의 인권 보장의 목소리는 높아진 반면, 아이러니하게도 의료진의 처우는 땅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다시 말해, ‘고객’,‘환자’와 같은 피제공자의 인권에 대한 목소리는 높아졌지만, 그 어디에서도 김 씨와 이 씨 같은 제공자에 대한 인권을 살피는 목소리는 없다는 얘기다.

감정노동직에 대한
관심과 배려 마련 할 때
현재 우리나라의 서비스 산업 종사자는 약 1,200만 명 정도에 이른다. 그러나 스튜어디스, 비서, 웨이트리스, 웨이터, 여행 가이드, 호텔리어, 사회복지사, 영업사원, 보험 판매인, 장의사, 목사, 놀이동산 직원, 경찰, 미용사, 간호사, 변호사 등 직간접적으로 고객을 상대하는 사람들을 합치면 국민 전체가 감정노동자인 셈이다. 스스로가‘감정노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모두 감정노동자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달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서비스 산업 종사자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백화점 노동자 중 56.2퍼센트는 우울증과 스트레스 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한국여성연구소가 서울 시내 식당 아줌마 40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는 식당 아줌마들의 25.7퍼센트는‘반말·욕설 등 비인격적인 대우가 힘들다’고 말했다. 또 홀 근무자의 19.1퍼센트는‘불쾌한 성적 농담’을 겪었다. ‘술 좀 따라봐’(12.6%)라는 말을 듣거나, ‘불쾌한 신체 접촉’(11.7%)을 당한 경우까지 합치면, 감정노동이 얼마나 고된 노동과 고통을 수반하는지 알 수 있다. 웃어야 사는 사람들, 웃으며 죽어가는 사람 들‘감정노동자.’ 과연 우리가 이들에게 사온 것은 무엇일까? <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