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유랑자

“난민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2013-01-02     박소담 기자

제임스 마틴이 선교사로서 동아프리카 난민들과 함께 생활한 이야기를 담았다. 전쟁의 세기가 양산한 무수한 아프리카 난민들, 그들을 돕고자 파견된 선교사. 너무 진지하고 근본적인 주제들이어서 자칫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회 난민 봉사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동아프리카 난민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진솔하고 수채화처럼 생생한지 책장을 넘기다 보면 저자와 난민들과 내가 어느새 하나가 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화에 등장하는 난민 하나하나가 마치 내 이웃들처럼 느껴지면서, 그들의 걱정거리가 내 걱정이 되고 그들의 웃음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게 된다. 그들이 울면서 지나온 내력을 풀어 놓을 때는 가슴 뭉클한 깊은 공감에 휩싸이게 된다.

지은이/제임스 마틴ㆍ옮긴이/송은경ㆍ펴낸이/정진석ㆍ펴낸곳/가톨릭출판사

그곳은 패드를 덧댄 긴 의자들이 벽면을 따라 놓여 있는 자그만 방이다. 줄지어 난 창으로 쏟아져 들어온 동아프리카의 맑고 강렬하고 유서 깊은 햇살이, 더러워진 잡지들이 수북이 쌓인 탁자 너머로 비쳐져, 잔돌로 포장된 회색 바닥에 사각형 무늬들을 만들어 낸다. 바닥 한가운데에는 하수도 구멍이 있다. 실내에서는 장작 연기 냄새와 땀내가 살짝 풍기고, 흐릿한 눈의 사람들, 어깨를 포개고 앉아 있는 아프리카인과 유럽인들로 붐빈다.

우리가 앉은 긴 의자에는 콜록대며 콧물을 닦아내는 케냐인 몇 사람과,‘마사이 마라 사냥 보호구역’에서 비행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오게 되었다는 한 사내가 함께 앉아 있었다. 이마에 난 깊은 상처에서 피가 마구 흘러나왔는데 그는 아내의 손수건으로 지혈해 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재수 없어!” 그는 마치 주문을 외우듯 계속 그 말을 내뱉었다. 몇 분 후, 케냐인 의사가 번잡한 응급실에 마련된 좁다란 칸막이 구역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나는 금방 무너질 듯한 목재 탁자로 올라가 약간 오래 기다렸다. 이윽고 의사가 새로운 간호사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가 간호사를 영국식으로‘시스터’라고 불렀으므로 나는 잠시 그녀가 수녀인 줄 알았다. 내가 몸 상태를 설명하는 사이 의사가 때 묻은 면 커튼을 끌어당겼다.“아- 해 보세요.” 그가 이렇게 말하고 살폈다.“주사를 한 대 놓겠습니다.”이윽고 그가 결론을 내렸다.“상태가 더 나빠지면 다시 나를 찾아오세요.”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떤 종류든 간에 동아프리카에서 주사를 맞는다는 것은 가장 낙관적인 소식통에 따르더라도, 무분별한 짓이었다. 지극히 온당한 우려이지만 에이즈의 공포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어쨌거나 그 주사는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목 증세가 더 악화되고 열도 올랐다. 이튿날 다시 병원을 찾았더니 이번에는 인도인 의사였다.“흠, 아- 해 보세요.”그가 내 목을 살폈다.“알약을 좀 드릴게요.” 그는 이렇게 말하고 벽면에 튀어나온 캐비닛으로 손을 뻗었다. 에리트로마이신 병이었다.“이 약을 복용하고 경과를 지켜보세요.”그가 말했다.“만약 상태가 더 나빠지면 다시 찾아오세요”(내가 볼 때 이 마지막 말은, 나이로비 의사들에게 배포되는 대본 같은 것의 한 구절이 아닌가 싶었다). 아프리카에서 병이 나는 것은 내가 가장 우려했던 상황이었다. 케냐에서 일하면서 겪게 될 문화적 측면들, 즉 언어, 음식, 낯선 풍습 따위는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소박한 생활, 집에서 멀리 나와 있다는 사실, 의사소통의 부재 따위도 문제되지 않았다. 그러나 몸이 아픈 상황만큼은 분명히 걱정할 만했다. 미국에서 떠나오기 몇 달 전, 내가 한 예수회 친구에게 그런 얘기를 했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병을 앓는 것도, 머나 먼 외지에서 하는 봉사 체험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명심하게.”선교사들 가운데는 현지 의사들에게 매달리는 것도 소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삶을 보다 충실히 공유할 수 있는 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내가 아는 미국 대사관의 미국인들은 현지 의사들을 역병이라도 되는 양 피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선교회 친구들과 의견이 같았다. 한편에서는 소박한 생활을 하는 척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몸이 약간만 아파도 비용이 많이 드는 서구 의사들을 찾아다닌다는 것이 별로 바람직하게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나는 숨쉬기도 힘들어졌다. 다시 병원을 찾았더니 이번에도 다른 의사가 나를 맞았다.“에리트로마이신?”그가 경멸조로 말했다.“이건 효과가 없어요. 이 약을 복용하세요.”암피실린이었다. 그날 밤 나는 복부와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끼고 잠에서 깼고 구토까지 했다. 짐이 겁에 질려 쳐다보았다.“자네가 심장마비를 일으킨 줄 알았어.”이튿날 함께 병원으로 가면서 그가 말했다. 네 번째 의사가 내게 검진대로 올라가라고 했다.“어허!”그가 탄성을 질렀다.“목구멍이 아주 새빨갛군. 계속 더 부어오르면 잘라 내야겠습니다.”“잘라 내요?”내가 반문했다.“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숨도 쉬기 어려울 겁니다.”그가 무심하게 말했다. 나는 그의 진단에 크게 당혹스러웠지만 어쨌거나 목구멍을 잘라 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토착화[어떤 문화에 순응하고 그 가치관을 흡수, 동화하는 것-역주]니 뭐니 다 팽개치고, 미국인 의사를 알아봐 달라고 예수회 선배에게 부탁했다. 그는 나를 나이로비에 있는 평화 봉사단Peace Corps[미국의 청년 자원 봉사자 교육, 파견기관. 미국 정부가 주관하며 주로 저개발국가로 파견되는 청년 봉사자를 양성한다-역주] 주치의와 연결시켜주었다. 시내에 위치한 평화 봉사단 사무소는 제법 근사한 유스호스텔 근처의 제반지 가든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의 대기실에는 앳된 얼굴의 미국인 청년들이 기다리고 앉아 있었다. 평화 봉사단 지원자들인 것 같았다. 비서의 책상에는 콘돔이 가득 담긴 큼직한 유리그릇이 놓여 있었다. 의사는 내가 그해 초반에 만난 적이 있는 젊은 사람이었다.“아- 해 보세요.”그가 말했다.“패혈성 인후염이네요.”그가 혀 누르는 기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모노[전염성단핵구증-역주] 증세도 있는 것 같고. 일단 검사를 받아 보셔야겠습니다. 제가 환자들을 보내는 곳이 있으니 가르쳐드리죠.”그는 이렇게 말하고 페니실린을 처방해주었다.‘결국 일주일 만에 또 주사를 맞게 되는구나.’나는 의사가 가르쳐준 주소로 찾아가면서 생각했다. 주사 바늘을 살균이나 하는지 궁금했다. 내가 불안해하는 것을 케냐인 간호사가 눈치 챘다.“미국인들이 주사 바늘을 대단히 걱정한다는 것, 저도 잘 알아요.”그녀가 말했다.“그래서 제가 이걸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개봉하겠어요. 잘 보세요.”그녀가 비닐봉지를 요란하게 벗겨 내고 새 주사 바늘을 꺼냈다. 마음이 놓이기는커녕 오히려 더 겁이 났다. 병원에서 포장을 뜯고 청결한 주사 바늘을 꺼내는 것을 본 적이 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기억은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목 염증은 가라앉았지만 5월 15일에 검사 결과가 날아왔다. 전염성 단핵구傳染性 單核球 증가 증세, 동아프리카 의사들이 쓰는 용어로는,‘선열’腺熱 증세였다. 침대에 누워 쉬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평화 봉사단 의사가 말했다. 나는 두 달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당시 우리의 작은 공동체에는 텔레비전도 없었으므로 나는 묵은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지내야 했다. 그러나 나보다 훨씬 심각하게 앓고 있는 난민들과 케냐인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고, 결국에는 회복되리라 확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괴로운 시간들이었다. 내가 회복기에 읽은 책 중에 프랑스 가르멜회 수녀인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가 쓴 자서전, <어느 영혼의 이야기The Story of a Soul>가 있었는데 거기에 보면 역경의 소중함에 대해 그녀의 예리한 견해가 피력되어 있다. 그녀는 우리가 역경에 처했을 때 하느님을 온전히 믿음으로써 보다 더 강해지고 현명해지게 된다고 보았다.

의사가 아이에게 고통스러운 수술을 하려 하면 아이는 당연히 요란하게 울부짖으며, 치료가 병보다 더 나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며칠 후 병이 치료되어 마음대로 뛰어놀 수 있게 되면 아이는 행복해합니다. 영혼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약간 쓴 것이 단것보다 낫다는 것을 이내 깨닫게 됩니다.

훌륭한 통찰이기는 하지만 그 당시 내게는 내면화시키기 힘든 통찰이었다. 나이로비에서 보낸 시간 중 그때가 제일 의기소침한 시기였음은 물론이다. 내가 하는 일이 즐겁기는 했지만 내가 그 많은 것을 모두 바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었다. 또 하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6개월이나 흘렀는데도 고국의 친구들과 가족이 더 한층 그리웠다는 점이다. 내가 멀리 떠나와 있는 상황을 부모님이 특히 더 힘들어 하신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2년이나 떨어져 지낸다는 건 너무 큰 거야” 고 부모님은 서글프게 말씀하셨다. 나이로비로 출발하기 전, 해외에서 오랫동안 봉사해 온 예수회 사제 한 분에게 부모님이 나를 지나치게 그리워하실 것 같아 걱정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걱정하지 말게.”그분이 밝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하느님께서는 선교사들의 부모를 특별히 더 보살펴 주시니까!” 럴듯한 얘기처럼 들렸다. 나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정리했다. 내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 하고, 나 자신이 생각할 때 결코 작지 않은 희생을 치르려 하고 있으니, 이것은 하느님께서 내게 해줄 수 있는‘최소한’의 상황이다. 바로 그 주에, 아버지가 작은 발작’ 비슷한 것을 일으켜 고생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의사들의 표현에 따르면‘국소 빈혈증에 의한 일시적 발작’이었는데 그 때문에 잠시 몸이 마비되었다고 했다. 나는 처절한 무력감을 느꼈다. 집에 전화를 해도 양쪽 다 괴롭기는 마찬가지여서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울었다. 발음이 분명치 않은 아버지의 음성과 나의 걱정을 덜어주려고 애쓰시는 어머니의 말씀이 대서양을 이어주는 잡음 섞인 전화선을 통해 들려왔다. 나는 점차 하느님이 원망스러워졌고 기도할 때도 이 점을 자주 토로했다.“하느님께서 제 가족을 보살펴 주시리라 믿었고 또 그렇게 부탁을 드렸건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그 당시 내가 기도할 때 자주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우물 속에 비친 요셉의 모습이었다. 당시 내 심정이 바로 그러했다. 장차 내 앞길에 놓인 것을 확신하지 못하고 의심하면서, 말라 버린 깊은 우물의 맨 밑바닥에 갇혀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늘 환자인 사람들 속에서 계속 일하게 될 텐데 내 병이 어떻게 완전히 회복되겠는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를 더 필요로 하는 사람은 어쩌면 난민들보다도 내 부모님일지 모른다. 나의 일차적 의무는 바로 부모님에 대한 의무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수회 장상들은 미국으로 돌아가는 문제를 나의 선택에 맡겼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 몇 달 정도라도 머물다 올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 케냐를 떠나면 되돌아오지 못할 게 분명했다. 당시 내 마음 상태가 그 정도였다. 결국, 떠나고픈 유혹이 너무나 컸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머무는 것이 난민들에 대한 나의 의무라고 결론을 내렸다. 아직은 내가 그들에게 그다지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내게 의지하고 나를 믿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나는, 요양 기간 동안에 발견한 사실이지만, 난민들이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매일 그들이 보고 싶었다. 그 어려운 시기에 분명하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비록 작은 일이긴 하지만 이러한 경험들이 내가 난민들의 경험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나의 하찮은 병과 난민들이 앓고 있는 심각한 질병들을 동급에 놓는다는 자체가 말도 되지 않았다. 에이즈나 콜레라, 장티푸스에 비하면 모노 따위가 무슨 대단한 것이랴? 어찌됐든 내 부모님은 안전하게 집에 계시는데 그런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것과, 난민 캠프에서 죽은 아이를 그리워하거나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혈육을 애도하는 것을 어찌 같은 차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 2년 동안 집을 떠나 있어야 하는 처지와 영원히 고향을 떠나온 처지를 어찌 같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겪는 작은 투쟁이, 난민들을 돕겠다는 의지를 더욱 키워 놓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희한하게도, 어떻게 보면 별로 희한할 것도 없지만, 나는 그들에 대한 연민이 급격히 커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떠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계속 남게 되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나의 건강에 큰 행운이 된 것은 길 맞은편에 나이 지긋하고 상냥한 메리놀회 수녀님 두 분이 계신다는 사실이었다. 대담한 여성들의 집단인 메리놀 수녀회는 20세기 초반에 스미스 칼리지를 졸업하고 중국에서 봉사 활동을 했던, 열혈 여성 메리 로저스Mary Rogers에 의해 창설되었다. 메리놀 수녀회를 다룬 페니 레르누Penny Lernoux의 <불타오르는 마음들Hearts on Fire>을 보면 창립자인 메리 로저스의 매혹적인 사진이 속표지와 마주하고 있다. 사진 속의 그녀는 굽이치는 검정 수녀복과 긴 베일 차림인데 덩치가 아주 큰 여성이다. 그녀의 입은 벌어져 있다. 카메라가 한바탕 웃고 있는 메리 로저스를 찍은 모양이다. 약간 더러워져 있는 그녀의 한 손은, 아마도 사진에 잡히지 않은 친구가 있는 듯 그쪽을 향해 요란한 제스처를 취하고 있고, 다른 한 손에는 성서가 들려 있다. 참으로 보기 좋은 사진일 뿐 아니라, 메리놀회의 관대한 정신이 깔끔하게 포착된 사진이기도 하다.
클레어 머피와 에일린 켈리는 케냐와 수단 남부, 탄자니아 북부에서 활동하는 메리놀 수녀들을 위해‘빌라 로저스’라는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고 있었다(동아프리카에서 활동하는 메리놀회 사제들도 많았다). 탄자니아에서 수십 년간 일했던 두 사람은 짐 코리건과 나를 보살피는 일을 자진해서 떠맡았다. 미사가 있거나, 손수 요리를 준비했거나, 애정 어린 충고가 필요할 때 우리를 종종 초대하곤 했다. 내가 모노에 걸려 꼼짝도 못하자, 아프리카에서 살면서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경우도 많이 보았던 노련한 간호사 에일린이 찾아와 격려해주곤 했다.“오, 반드시 좋아질 거예요.”
그 밖에도, 우리 공동체에서 100미터 거리에 있는 유쾌한 공동체,‘예수의 작은 자매회’수녀들이 자주 찾아주었다. 그 수녀회는 20세기 초에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은자의 삶을 살았던 프랑스인, 샤를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에 의해 창설되었다.‘작은 자매회’(‘작은 형제회’도 있었다)의 정신은 예수의‘숨겨진 삶’이라는 가톨릭 전통을 구심점으로 하고 있었다. 이것은 예수가 성전에서 발견된 때인 대략 12세 무렵부터 대중을 가르치기 시작한 30세 전까지의 시기, 즉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기간의 예수의 삶을 가리킨다. 그 시기의 예수는 단란한 가정에서 아버지의 목수 일을 배우고 발전시키며 본질적으로 동시대인 서기 1세기의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살았다. 결국 예수의 숨겨진 삶은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삶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하여 예수의 작은 형제들과 자매회 수도자들은 보통의 직업을 가진 보통 사람들 속에서 일하는, 숨겨진 삶을 살고 있다. 가정부나 공장 노동자, 재봉사, 수위 등등의 신분으로 말이다. 내가‘작은 자매들’을 처음 대면한 것은, 로욜라 하우스를 방문 중이던 에티오피아 출신의 예수회 회원이 동족인 에티오피아 수녀 두 사람에게 암하라어 성서를 전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였다. 벨을 울리자 아프리카인 수녀가 높다란 철 대문을 열어주었다. 다른 자매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허리에 두르는 감청 색 치마와 담청색 블라우스, 수수한 머릿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초면의 낯선 사람인 나를 열렬하게 맞아주었다.“오, 이렇게 와주시니 정말 기뻐요!”오솔길로 뒤따라가면서 보니 녹색과 흰색으로 칠해진 그들의 자그만 목조 단층집이 꽃이 만발한 정원에 둘러싸여 있었다. 연푸른 아이리스, 자홍색, 흰색의 부겐빌레아 덤불, 립스틱처럼 빨간 꽃들이 달린 밝은 녹색의 히비스커스 덤불, 야생 사이잘, 키 큰 노퍽 소나무, 달콤한 향내를 풍기는 프랜저패니와 치자꽃 덤불, 뜨거운 태양 아래 고개 숙인 오렌지색 옥잠화, 모두‘작은 자매들’의 자상한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그날 숙소에는 아홉 명의 공동체 가족이 모두 모여 있었다. 늘 미소를 머금고 있는 프랑스인 수녀인 모니크 수녀원장을 비롯해, 몰타 섬과 나이지리아 출신이 각각 한 명, 탄자니아 출신 두 명, 케냐 출신 두 명, 에티오피아 출신 두 명. 이렇게 아홉 명의 수녀가 문간으로 달려 나와 나를 맞았다. 부탁받은 성서를 에티오피아 출신 수녀들에게 건네주자 그녀들은 정말 엄청난 자비를 베풀어주었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책 한 권 들고 겨우 두 블록 걸어간 것밖에 없는데 말이다. 에티오피아 수녀 중 한 사람인 아스칼레마리암 수녀­그녀는 자신의 이름이‘마리아의 은혜’라는 뜻이라고 했다­가 자신들의 숙소를 구경시켜주었다. 집 뒤편에 위치한 성당­양철 지붕의 작은 오두막이었다­부터 구경했는데 그 위로 키 큰 나무가 휘어져 있어, 꽤 높이 매달린 열매들이 양철 지붕으로 툭툭 떨어지는 소리가 총소리와 흡사했다. 성당 안에는 수놓인 보가 덮인 수수한 제단이 하나 있고 그 주위로 나지막한 소나무 벤치들이 놓여 있었다. 제단 정면에는 자기로 된 무색의 자그만 아기 예수 상이 있었다. 아스칼레마리암 수녀가 제단 앞에서 몸을 숙였다. 그들은 조금 더 있다 가라고 붙들더니 부산하게 차와 비스킷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할 일을 제쳐 둔 채 수녀원 가족 모두가 내 옆에 둘러앉아 재잘거렸다. -8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