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유랑자

“난민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2013-02-07     박소담 기자
제임스 마틴이 선교사로서 동아프리카 난민들과 함께 생활한 이야기를 담았다. 전쟁의 세기가 양산한 무수한 아프리카 난민들, 그들을 돕고자 파견된 선교사. 너무 진지하고 근본적인 주제들이어서 자칫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회 난민 봉사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동아프리카 난민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진솔하고 수채화처럼 생생한지 책장을 넘기다 보면 저자와 난민들과 내가 어느새 하나가 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화에 등장하는 난민 하나하나가 마치 내 이웃들처럼 느껴지면서, 그들의 걱정거리가 내 걱정이 되고 그들의 웃음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게 된다. 그들이 울면서 지나온 내력을 풀어 놓을 때는 가슴 뭉클한 깊은 공감에 휩싸이게 된다.

지은이/제임스 마틴ㆍ옮긴이/송은경ㆍ펴낸이/정진석ㆍ펴낸곳/가톨릭출판사

나는 루가복음의 한 구절이 문득 떠올랐다. 예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라는 친구들의 집을 방문해 보니 마르타는 음식 준비하느라 바쁘게 일하고, 그녀의 동생인 마리아는 편안하게 예수와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마르타가 예수에게 불평을 늘어놓은 것은 당연했다.“마르타, 마르타.” 예수께서는 이렇게 응답하셨다.“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더 나은 쪽을 택한 것이니라.”‘작은 자매들’은 마르타처럼 열심히 일하는 법과 마리아처럼 쉬는 법, 두 가지 모두를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기쁨에는 전염성이 있었다.‘작은 자매들’은 쉴새없이 깔깔거렸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그들을 웃게 만드는 것 같았다. 서로에 대해, 자신들의 공동체와 공부에 대해, 자신들의 선배에 대해, 시시한 농담들을 계속 늘어놓았다. 모니크 수녀는 수녀들이 자신의 프랑스 요리를 두고 놀리는데도(동아프리카 출신 수녀들에게는 프랑스 요리가 아주 신기한 모양이었다) 좌중에서 제일 요란하게 웃어 댔다. 내가 난민들과 함께하고 있는 사업에 대해 이야기하자 모두들 유심히 귀를 기울였다. 잠시 후 모니크 수녀가 큰 소리로 외쳤다.“수사님, 앞으로 우리 집에‘자주’오셔야겠어요.”물론 나는 그렇게 했다. 솔직히 그들이 손수 만든 음식은 뿌리치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유는 그들의 공동체에서 맛볼 수 있는 크나 큰 즐거움에 있었다. 그들은 전화나 전기도 없이, 게다가 대다수 나이로비 사람들처럼 맑은 물도 거의 공급받지 못한 채 소박하게 살면서도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 아니, 그런 삶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았다. 몇 달 후 미국에서 친구 두 명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들을 지프에 태우고 가다‘작은 자매들’의 집을 지나치게 되었다. 주일 미사에서 막 돌아온 자매들이 집 대문 앞에 모여 있었다. 그들이 내게 정지신호를 보냈다. 내가 차를 세우자 그들이 마치 꽃을 본 벌 떼처럼 차 주위로 몰려들었다.“수사님, 수사님! 잠보 사나!”그들이 소리쳤다.“누가 당신 친구예요?”동아프리카에서는 사람을 만나면 항상 악수를 한다. 내 작은 지프의 열려진 창으로 자그만 손 열 몇 개가 쑥쑥 들어와 악수를 기다렸다.“헬로! 헬로! 잠보 사나!” 그들이 떠들썩하니 웃으며 소리쳤다.“우린‘예수의 작은 자매들’이에요!”키득거리는 푸른 제복의 여자 아홉 명과 한 떼의 손들 앞에서 내 친구들은 깜짝 놀랐다. 나는‘작은 자매들’과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으므로, 아스칼레마리암 수녀와 마리암 수녀가 병문안을 왔을 때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동아프리카 신자들은 병문안을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라‘몸으로 하는 자선 행위’의 하나로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미국에서는 친구가 아프면 (몸이 낫도록) 혼자 내버려 두거나 전화 통화를 하는 정도이지만, 이곳에서는 직접 찾아보지 않으면 결례를 범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환자의 집안일을 도와주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전화가 아예 없는 사람들이니 어떻게 전화를 할 수 있겠는가? 마리암 수녀와 아스칼레마리암 수녀는 오렌지 환타를 홀짝홀짝 마시며, 모니크 수녀와 ‘작은 자매들’의 근황을 들려주었다.“우리 집 저녁 식사에 언제 또 오실 거예요?”난민들도 끊임없이 나를 찾아왔다. 어떤 때는 너무 피곤해져서 혼자 쉬고 싶어질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방문을 감사하게 생각했는데, 한편으로는 난민들이 내가 사는 곳을 찾아냈다는 것이 적잖이 놀라웠다. JRS 사무실에서 내 주소를 알려주었을 리는 만무했다(예전에, 어느 JRS 봉사자의 주소를 알아낸 일부 난민들이 밤낮없이, 심지어 주말에도 그의 집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아무튼 내 난민 친구들도 용케 주소를 알아내 찾아와서는 한참 떠들며 얘기하다가 동아프리카 풍습대로 집 안을 청소해주곤 했다. 어느 날 오후 내가 품지카, 다시 말해 낮잠을 한창 즐기고 있을 때 우간다 난민 두 명이 찾아왔다.“브라더 짐! 브라더 짐!”그들이 내 침실의 창을 두드리는 바람에 벌떡 일어난 나는 잠이 덜 깨 멍한 상태였다.“일어나세요! 우리가 왔어요!”그때부터 한 시간 동안, 그들이 주방에서 다른 난민들 얘기로 떠들어 대고 주방 바닥을 청소하고 내가 아침에 먹고 남겨 둔 식기를 설거지하고 하는 사이 나는 졸음을 떨치려 애를 쓰면서 걸상에 앉아 있어야 했다. 손님들이 찾아오지 않을 때는 주로 침대에 누워 책을 읽었다. 그러다 나중에는 몸이 좀 좋아진 것 같아서, 집 주위를 산책하기도 하고, 한 구획 밑에 있는 예수회 공동체 본부에 가 보기도 하고, 이따금 시내로 차를 몰고 나가 약을 사오기도 했다. 병이 나고 처음으로 지프를 다시 타게 된 날, 나는 바닥난 비타민을 채우려고 지역 약국으로 향했다. 도로변에서 두 여인이 차를 세웠다.“브라더! 브라더!”누군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그 무렵에는 이 도시 어딜 가든 난민들이 나를 알아본다는 사실에 익숙해져 있었다.“나이로비에는 10만 명에 달하는 난민들이 있어요.”내가 처음 왔을 때 루이제 수녀가 그렇게 말했었다.“그 모든 사람이 이제 곧 당신을 알아보게 될 겁니다.”나는 차를 세우고 건너편으로 팔을 뻗어 차 유리를 내렸다. 르완다 출신의 두 여인이 차로 고개를 들이밀고 깔깔거렸다.“오, 브라더!” 한 사람이 탄성을 질렀다. “이제 다 나으셨군요! 죽지 않아서 정말 기뻐요!”

미코노
메마른 땅과 사막아, 기뻐하여라. 황무지야, 내 기쁨을 꽃피워라. 아네모네처럼 활짝 피워라. 기뻐 뛰며 환성을 올려라. - 이사 35,1-2
몸이 나은 후 나는 우타와 함께 적당한 건물을 찾아 다시 열심히 돌아다녔다. 그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안전하다 싶은 동네에서 집을 하나 찾아내면‘매장’으로 사용해선 안 된다는 단서가 따라붙었다. 몇 달 전 래빙턴에서 찾아낸 마음에 쏙 드는 집의 경우도 그랬다. 매장으로 사용해도 좋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가 보면, 도로와 연결되어 있지 않아 관광객들이 도저히 찾아올 수 없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정력적인 우타가 맥이 풀린 나를 몰아붙여‘랜드로버’를 몰고 온 시내를 돌아다니기를 몇 달이나 계속했다. 우리가 임대 계약에 서명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 때마다 복잡한 문제가 생겨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사이 운 좋게도 우리의 제품을 팔 수 있는 장소가 하나 등장했다. 바로 나이로비에 있는 미국 대사관이었다. 만찬회에서 만난 한 여성이 내게‘지역 연락관’과 접촉해 보라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대사관 직원들과 그들이 거주하는 도시를 연결시켜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만나 보니 린이라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몇 주에 한 번씩 대사관 구내에서 작은 바자회를 열어 지역의 수공예품을 전시한다고 알려주었다.“당신도 한 코너를 운영해 보시겠어요?”“물론 하고말고요.”우타와 나는 난민들을 만나, 우리가 원하는 게 어떤 제품들인지 설명해주었다. 우리는 사무실로 찾아오는 방문객들이 가장 흥미를 보이는 품목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사이잘 나무로 대담한 기하학적 무늬를 넣어 세공한 르완다 전통 바구니, 천으로 만든 동물 인형, 흑단 나무를 깎아 만든 동물들, 에티오피아 그림, 수놓은 티셔츠, 유리로 된 르완다의 전등갓, 목재 보석함, 말린 바나나 잎으로 만든 메모지가 주된 품목이었다. 르완다 난민 중에 벨기에에서 간호학 박사 학위를 받은 고학력의 여성이 있었다. 케세르 무캄위자 칸주이라는 이름의 여성이었는데 지금은 목걸이 구슬을 꿰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대사관 방문에 대비해 그녀의 제품을 50점 구입했다. 제인 투시이메라는 우간다 출신의 젊은 여성은 나무껍질 천으로 베갯잇과 핸드백을 만들었다. 무화과나무의 껍질을 벗겨 내어 계속 두드리면 야물어지면서 마호가니 색상의 질긴 천이 나오는데 이것을 나무껍질 천이라고 한다. 또 다른 우간다 여성 마리 카비이토는 나이로비의 시장에서 값싼 가죽 가방들을 구입해, 파스텔 색상의 환상적인 도안­빙빙 돌아가는 가는 곡선 무늬, 동물이나 꽃, 사람 얼굴 등­으로 채색해 팔았다. 바자회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자 우리 사무실은 작은 창고처럼 변해 버렸다. 책장 위에는 티셔츠와 원피스가 수북하게 쌓였고, 내 책상 뒤 바닥에는 동물 조각들이 행군하듯 줄지어 섰고, 녹슨 서류 보관함 위에는 바구니들로 이루어진 탑이 아슬아슬하게 솟아 있었다. 바자회 날 아침, 우타와 나는 물건들을 그녀의 랜드로버에 옮겨 싣고 시내로 향했다. 우리는 가우디도 데리고 갔다. 그녀가 자기 사업을 확장하려 할 때 미국인들에게 물건을 파는 이런 일이 귀한 경험이 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사관을 둘러싼 높은 철 대문들을 통과해 들어가자 키 큰 해병대원 두 명이 우리의 차를 수색했다. 그들은 먼저 랜드로버의 후드 밑을 들여다보더니 이어 차 밑으로 기다란 거울을 밀어 넣었다.“폭탄이 장착되었는지 확인하려고 점검하는 거예요.”우타가 속삭였다. 소말리아에 미군이 주둔하는 상황이었으므로 나이로비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을 위협하는 사례가 빈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사관 보안을 위한 용무는 우리의 제품들에도 적용되었다. 그들은 윙윙대며 불길하게 딸깍거리는 자그만 금속 탐지기로 인형과 동물 조각, 목걸이, 전등갓을 하나하나 검사했다.
위층에 있는 대회의실로 가 보니 린이 기다란 탁자 두 개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한 시간쯤 작업하자 회의실이 거의 매장 모양을 갖추었다. 정오가 되자 미국인 수십 명이 들어왔다. 그렇게 많은 백인의 얼굴을 본 것도 꽤 오랜만이었다. 그들을 보자마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나도 정말 저렇게 창백한가? 우타와 나는 저 미국인들이 우리 물건 중에 적어도 몇 점은 사주려니 했다. 부활절이 몇 주 남지 않은 때였는데, 린의 얘기에 따르면 물건 팔기에 좋은 시기였다. 물건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우간다 출신 여성 3인조가 만든 패치워크[헝겊 조각을 이어 붙여 만든 제품-역주] 침대보도 그중에 하나였다. 할리마 무테베라는 쾌활하고 근면한 여성이 주도하는 이 3인조 그룹은 자칭‘아갈리 아와무’란 이름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나이로비의 직물점들을 찾아다니며 쓰고 남은‘키텐게이’조각들을 수집했다. 그리고 이 싸구려 천 조각들을 이어 붙여 아주 훌륭한 침대보들을 만들어냈는데, 미국에서 팔면 수백 달러는 받을 수 있는 물건들이었다. 회의실에 맨 처음 들어온 미국인 여성이 이 침대보 쪽으로 곧장 와서는 내게 값을 물었다. 우타가 나를 힐끔 보았다. 난민들의 수공예품에 값을 매기는 문제에서 그녀와 나는 의견이 달랐다. 나는 아주 낮은 가격을 매기고 싶어했다. 그러나 우타는 인도에서의 경험을 근거로 보다 높은 가격을 주장했다. 값이 너무 싸면 사람들이 싸구려로 만들어진 제품이라고 생각한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었다. 나는 숨을 한번 들이쉬고 우타의 충고를 따랐다.“1인용 사이즈는 50달러, 2인용 사이즈는 100달러입니다.”“이걸 모두 사겠어요.”그녀가 물건을 산더미처럼 싸안으며 말했다. 우타가 즐겁게 미소 지었다. 가우디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바구니와 동물 조각을 모두 팔았다. 미국인들은 수놓인 티셔츠와 보석함, 조각된 전등갓과 밀짚 전등갓도 한 점 남기지 않고 사 갔다. 우간다 난민인 사라 나카테가 녹색 코끼리, 붉은 사자, 보라색 새, 흑백의 얼룩말을 수놓아 만든 하얀 면 냅킨을 열두 장씩 여섯 세트 가져왔는데 판매를 시작한 지 15분 만에 몽땅 사라져 버렸으므로 여섯 세트를 더 주문해야만 했다. 제인 투시이메의 나무껍질 제품과 마리 카비이토의 가죽 가방들도 앞 다투어 팔려 나갔다. 남은 것은 메모장 몇 개와 목걸이 한 개 뿐이었다. 제작비 외에는 다른 비용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물건들의 값이 시중보다 훨씬 저렴했는데, 빈틈없는 미국 대사관 직원들이 그것을 놓칠 리 없었다. 게다가 우리의 제품들은 케냐 제품 일색인 나이로비의 시장보다 선택의 폭이 넓었다. 시장 물건들과 달리 우리의 물건들에는 에티오피아, 르완다, 모잠비크, 우간다, 수단, 소말리아 등 동아프리카 각지의 취향이 담겨 있었다. 우리뿐 아니라 우리의 새로운 고객이 된 미국인들도 대단히 흥분했다. 난민들이 기뻐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이제 매일같이 미국 대사관을 방문해야겠어!”난민 중 한 사람이 희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우리는 자체 매장을 열면 성공하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인근 빈민 지역인 칸게미의 한 본당을 맡고 있던 예수회 회원 존 귀니가 하루는 지나가는 말로 자기네 본당에서 몇 미터 거리에 빈집이 하나 있다고 했다. 나도 한번 본 기억이 났는데 아주 훌륭한 집이었다. 그러나 집의 위치가 좀 망설여졌다. 칸게미는 강도와 살인으로 악명 높은 나이로비에서도 험악한 동네에 속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타와 나는 일단 집을 구경해 보기로 했다. 칸게미는 나이로비 서쪽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고, 계속 길을 따라가면 나쿠루가 나온다. 그곳은 도시와 시골의 가난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양철 지붕의 목재 오두막들, 진흙이 더덕더덕 붙은 노후한 콘크리트 건물들, 옥수수와 길쭉길쭉한 사료용 토끼풀을 키우는‘샴바’(작은 밭)들. 예수회가 10년 전에 그곳의‘선교’본당을 인수했다. 이웃에 있는 보다 큰 교회와 연계된 작은 부락 본당이었고 조금씩 조금씩 성장하는 중이었다. 칸게미의 예수회는 본당의 발전을 해방신학 덕분이라고 보았다. 해방신학에서는 하느님께서 교회에서 성직자들을 통해 섭리하실 뿐만 아니라 평신도들을 통해서도 섭리하신다고 보았다. 그들은 본당을 주민들로 이루어진 가족 집단인‘소규모 그리스도교 공동체들’로 편성했다. 과거에는 선교회 사제가 독재적 방식으로 본당을 운영했지만 칸게미의 가톨릭 신자들은 본당의 거의 모든 계획에 직접 참여했다. 그렇게 한 지 불과 3년 만에 그들은 널따란 칸게미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대지에 붉은 벽돌로 된 A자 형의 커다란 성당을 건립해 냈다. 교회 이름은 예수의 양부養父,‘노동자의 주보 성 요셉’을 지칭하는 전통 명칭의 하나인‘므타카티푸 요세푸 므판야카지’로 붙여졌다. 이것은 노동하는 모든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이름이기도 했다. 멋없이 붉은 산화철 페인트가 칠해진 성당의 널따란 콘크리트 바닥은 이 나라의 수많은 공공건물들을 흉내 낸 것이었다. 회색 화강암은 지역 채석장에서 잘라 왔다. 성당 신자석 끝에는 새까만 얼굴의 예수가 매달린 거대한 십자가가 있고 아프리카인으로 묘사된 마리아와 요셉의 성상이 십자가를 지키고 있었다. 목재 널빤지로 된 검소한 의자들이 열 지어 있고 그 주위 벽들에‘십자가의 길’이 죽 이어져 있었는데 여기서도 예수는 아프리카인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성당 건물을 설계한 사람은 벨기에 출신의 예수회 회원이었지만, 존 귀니가 성당을 구경시켜주면서 강조한 바에 따르면 벽돌, 타일, 들보 하나하나가 다 본당 신자들 손으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칸게미 본당 신자들의 성당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다. 주일 미사는 오전 시간을 다 바쳐야 하는 행사였고, 성당 뒷문들은 활짝 열려 있었다. 성당 뒤쪽에 마련된 계단식 야외 강당에 자리 잡고 앉은 수백 명의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노동자 성 요셉’ 성당 자체가 칸게미의 작은 부락이나 다름없었다. 조그맣게 시작한 성당의 사업들이 확장되어 지금은 목공소, 컴퓨터 학습 센터, 타일 제작소, 인쇄소까지 갖추었고, 물론 학교도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지역 케냐인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가톨릭 수녀회인‘성모의 자매 아프리카 선교회’가 본당의 의료 센터, 즉 ‘의무실’을 운영했다. 또한 이 자매들은 수입 창출을 위한 작은 가게를 개설하여­지금은 동네 여성들이 꾸리고 있다­‘케냐 전통 의상 차림의 귀여운 인형들인 키쿠유족 인형, 마사이족 인형, 캄바족 인형들을 생산했다. 그들의 가게는‘돌리크래프트’[인형 공예-역주]라 불렸다. 예수회가 이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타는 칸게미를 나보다 훨씬 잘 알고 있었다. 그곳에 거주하는 난민들을 많이 방문해 본 덕분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 우리는 그 빈집을 구경하기 위해 칸게미로 향했다. 존은 우리에게 수녀원 원장과 얘기해 보라고 일러주었다. 수녀들의 의무실에서 일하는 평신도 간호사가 앞서 그 집에서 살았다고 했다. 나는 그보다 몇 달 전 칸게미를 방문했을 때 수녀들 중 한 사람을 만난 일이 있었다. 존과 함께 흙 길을 걸어가다가 짧은 갈색 머리에 안경을 쓴 젊은 여성과 마주쳤다. 미소를 짓고 있는 그 여성은 유럽인 아니면 미국인임에 분명했다.“안녕하세요! 저는 베르니체 수녀예요!”그녀가 쾌활하게 말했다.“화이트 시스터죠!”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화이트 시스터’를 백인 수녀’란 뜻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황당해하는 내 표정을 본 베르니체 수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속한 수녀회는 아주 최근까지도‘화이트 수녀회’로 불렸다. 화이트 수녀회란 명칭 역시 그들의 피부색이 아니라 수녀복 때문에 생긴 별명이었다. 그러나 아프리카 출신 지원자들이 점점 더 많아지자 그 이름 대신 본래의 이름인‘성모의 자매 아프리카 선교 수녀회’Missionary Sisters of Our Lady of Africa­너무 길어서 보통‘MSOLA 수녀회’로 줄여 불렀다­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자체 내에서 대두되었다.‘화이트 사제회’White Fathers도 비슷한 문제에 봉착했다. 게다가 남자들 쪽의 상황은 훨씬 더 복잡했다. 아프리카인들뿐 아니라 서품을 받지 않은 회원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화이트회’신부 한 사람이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흑인 수사인데도 화이트 신부라고 해야 하니!”결국 그들은 1984년에, 일반적으로 쓰였던 명칭을 포기하고 본래의 이름으로 돌아갔다.‘아프리카 선교회.’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명칭 MSOLA가 언급될 때마다“아시죠? 화이트 수녀회”라는 보충 설명이 어김없이 따라붙었다. -10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