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유랑자
“난민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제임스 마틴이 선교사로서 동아프리카 난민들과 함께 생활한 이야기를 담았다. 전쟁의 세기가 양산한 무수한 아프리카 난민들, 그들을 돕고자 파견된 선교사. 너무 진지하고 근본적인 주제들이어서 자칫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회 난민 봉사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동아프리카 난민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진솔하고 수채화처럼 생생한지 책장을 넘기다 보면 저자와 난민들과 내가 어느새 하나가 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화에 등장하는 난민 하나하나가 마치 내 이웃들처럼 느껴지면서, 그들의 걱정거리가 내 걱정이 되고 그들의 웃음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게 된다. 그들이 울면서 지나온 내력을 풀어 놓을 때는 가슴 뭉클한 깊은 공감에 휩싸이게 된다.
지은이/제임스 마틴ㆍ옮긴이/송은경ㆍ펴낸이/정진석ㆍ펴낸곳/가톨릭출판사
나는 우리가 후원하는 난민들의 모든 사업에 큰 기대를 걸었다. 새로운 사업이 하나씩 출범할 때마다 열심히 일에 매진하여 식료비와 집세를 넉넉히 조달하는 난민들의 모습을 그리곤 했다. 그러나 다소 서구적이랄 수 있는 나의 이러한 기대는 무의미한 기대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아프리카의 삶은 가장 양심적인 사람들의 앞길에조차 장애물을 집어던져,‘평범한 일’을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민들은 끈덕진 인내력으로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난민들에게 형편이 어떠냐고 물으면 어김없이 나오는 대답이 있었다“투나엔델레이아, 폴레이 폴레이”(슬슬 나아지고 있어요). 미국인들 같았으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을 일들이 아프리카에서는 언제든 닥칠 수 있는 상황으로 받아들여 졌다.“형편이 좋지 않아요, 브라더.”나무껍질 천에 동물 도안을 수놓아 살아가던 우간다 여인 제인 투시이메가 하루는 이렇게 털어놓았다.“집주인이 우리를 쫓아내서 지금은 아이들과 함께 거리에서 살고 있답니다.”“오늘은 제가 몸이 좀 아프네요.”에티오피아 남자 한 명이 기침을 쿨럭거리며 말했다.“폐결핵에 걸렸거든요.”사실 난민들을 들여다보면 이러한 상황에서는 지극히 합리적이랄 수 있는 실존주의적 세계관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것은 근면과 욕심으로 이루어진 기묘한 복합물이었다. 집에서든 밭에서든 사업장에서든 열심히 일해야만 성공한다고 생각하는 이러한 정신의 절반은 그들이 조국에 있을 때 체득된 것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손에 넣을 수 있을 때 붙잡아라’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캠프에서 오래도록 체류하는 동안에 체득된 교훈이었다. 음식이든 옷이든, 물질적 지원이란 것은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찾아올지 알 수 없다. 우간다 여인 로이스 아두파가 자신이 하는 일에 전기 재봉틀이 많이 필요하다고 하기에 우리는 그녀에게 믿을 만한 제품인 싱거 241N을 제공했다. 그녀가 옷을 수선하는 데 써 온 중국산 재봉틀은 끊임없이 고장을 일으켜, 사용하는 시간보다 수리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고 했다. 그녀가 새 재봉틀을 받고 나서 몇 주 후, 우리는 나이로비 외곽의 가치에라는 전원 부락에 있는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세 자녀의 어머니인 로이스는 시내에 있는 여러 개신교 분파 중 하나에 속해 있었고, 종교 단체에 가입해 있다는 표시로 항상 하얀 면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다녔다. 로이스가 나를 조그만 목재 오두막으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앉으라고 했다. 잠시 후 내 앞에는 구운 땅콩으로 만든 죽과 쇠고기 스튜가 놓여졌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난민들이 내놓는 음식을 먹기가 좀 불안했다. 케냐에서 가장 흔한 질병인 식중독이나 간염이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민이나 현지 친구들, 혹은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내놓는 음식을 거절하기 어려워 결국에는 받아들이곤 했다. 그것도 내 일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로이스의 집에서 식사를 하게 된 나는 음식을 너무 많이 먹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앞에 차려진 쇠고기 스튜는 아마도 로이스가 며칠을 벌어야만 장만할 수 있는 음식일 터였다. 내가 아껴 먹으면 그녀의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는 것도 보여줄 수 있고, 남은 음식을 로이스와 아이들이 맛보게 해줄 수도 있으리라. 식사를 하던 나는, 전깃불도 켜지지 않은 그녀의 오두막 중앙에 새 싱거 재봉틀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포장 박스도 뜯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컴컴한 방 한가운데에는 싸구려 중국산 재봉틀이 천 조각들 사이에 놓여 있었다.“로이스.”내가 물었다.“왜 새 재봉틀을 사용하지 않죠?”“전기가 안 들어오거든요.”처음에는 너무 놀라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윽고 내가 최대한 예의를 갖추려 애쓰면서 차근차근 물어보았다.“그럼 왜 우리한테 전기 재봉틀을 부탁했어요?”로이스가 차근차근 설명하기를 지금은 비록 전기가 들어오지 않지만‘언젠가는’나도 전기를 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기회가 아니면 내가 또 언제 전기 재봉틀을 가질 기회가 있겠느냐? 그녀의 논리에 동의하지 않기도 힘들었다. 어쨌거나 나는 지나치게 근시안적인 사고에 대해선 방어를 하고자 노력했다. 그러한 사례 중에서도 가장 불행했던 경우로, 비상금을 마련하려고 JRS가 기증한 장비를 팔아버린 난민이 있었다. 그렇게 하고 싶은 유혹이야 물론 들겠지만 내가 볼 때는 어떤 수를 쓰더라도 피하는 것이 옳았다. 그래서 르완다 출신의 아이 어머니 스페시 칸테그와가 재봉틀을 팔아 버렸다고 고백했을 때 나는 화가 잔뜩 치밀었다. 왜 그렇게 한치 앞만 보느냐? 미래의 돈벌이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것 아니냐?“정말 어리석군요.”내가 말했다. 스페시는 나의 열변을 끈기 있게 듣고 있었다. 그리고 내 얘기가 끝나자, 자신이 재봉틀을 팔아버린 이유를 들려주었다. 튀어나온 앞니 두 개 사이가 많이 벌어져 있어 용모가 아주 독특해 보이는 스페시는 말수가 적은 여인이었다. 어느 날 그녀가 내 사무실로 들어왔는데, 붉은색과 오렌지색의‘캉가’보에 아이를 들쳐 업고 있었다. 그녀가 목과 허리에 맸던 포대기 끈을 재빨리 풀더니 등에 있던 아이를 단번에 앞으로 끌어당기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블라우스 단추를 열고 아기에게 젖을 물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혀 짧은 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는지 설명했다.“스페시라 불러주세요.”작년에 그녀는 여동생과 함께 프로젝트를 하나 따냈다. 두 사람은 스페시의 집에서 중앙아프리카 스타일대담한 도안의 직물, 목선에 수가 놓인의 원피스를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많은 르완다 난민들이 그러하듯 스페시도 1970년대 중반에 부모와 함께 케냐로 이주해 왔다. 1973년, 르완다 정부가 국내에서 투치족의 사회참여를 크게 제한하는 조치를 취한 것과 때를 같이 하여, 후투족 폭도들이 르완다의 학교에 다니는 투치족 학생들을 쫓아내려고 각지의 학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스페시 가족을 비롯한 수천 명의 투치족이 조국을 등져야 했다. 다른 난민들과 마찬가지로 이 르완다인들도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를 마련할 수 없었다(무서워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도 물론 많았다). 그리하여 이들도 난민이 끊임없이 밀려들어 오는 나이로비에 남게 되었다. 그러나 케냐 정부는 여전히 그들(과 그 자녀들)을 케냐에서 거주한 기간에 상관없이 난민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이제는, 최근 르완다에서 발생한 대학살로 인해 새로운 난민들이 케냐로 들어왔다. 르완다인들은 나이로비에 와서도 동포들에게 집을 개방하는 전통을 그대로 따랐다. 스페시는 이미 여동생과 조카딸을 데리고 살고 있는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새로 도착한 친척 다섯 명을 그 좁은 집에 받아들였다.
스페시가 살고 있는 빈민 지역에는 케냐의 빈민들도 많이 살고 있었다. 그녀의 이웃 중 하나가 마사이족 남자를 데리고 있었는데 그 이웃이 일하는 동안‘아스카리’일을 맡았다.“그 마사이는‘므칼리 사나’였어요”(아주 사나웠어요). 어느 날 스페시의 질녀가 플라스틱 물 컵을 들고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그만 실수로 컵을 떨어뜨렸는데 그것이 그‘아스카리’의 머리에 맞고 말았다. 사람들이 모두 마사이족 남자를 보고 깔깔댔다. 비웃음에 격노한 그는 나무에 올라가 있던 스페시의 질녀를 끌어내려 구타하기 시작했다. 이웃들이 스페시의 동생에게로 달려왔다.“당신 딸이 맞고 있어!”스페시는 이 대목을 되풀이해 말하면서 훌쩍거렸다. 그녀의 여동생이 달려가 딸에게서 사내를 떼어 내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러자 마사이족 남자가 윗도리에 손을 넣더니 주방용 칼을 꺼내 들고 스페시의 여동생의 목을 베어 버렸다. 결국 스페시는 고아가 되어 버린 질녀까지 보살피게 되었으나 먹을 것을 사줄 돈조차 없는 처지였다. 나는 스페시를 잘못 판단했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나이로비에 머무는 동안 수도 없이 든 생각이지만, 그녀와 같은 처지에 직면했다면 나 자신도 똑같은 선택을 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브라더 짐이 화낼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재봉틀을 팔아 어린아이를 먹일 것인가? 아니면, 질녀에게 먹일 것은 없지만 재봉틀을 그대로 두어 브라더 짐을 기쁘게 해줄 것인가? 그것은 선택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젖 먹는 아기를 내려다보며 사연을 다 들려준 스페시가 고개를 들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조용하게 말했다.“브라더, 이것이 제가 재봉틀을 판 이유랍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새 싱거를 주실 수 있나요?”유엔 난민 고등판무관 사무소는 조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난민들의 합법성을 입증하는 증서를 발급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 증서를 소지하고 있더라도 난민들을 괴롭히는 케냐 경찰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난민들을 괴롭히고 감옥에 가두고 구타했으며, 뇌물을 강요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케냐 정부는 말리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케냐에 도착하고 몇 달 후에 대통령 다니엘 아랍 모이가 일련의 공식 성명을 발표했는데 나이로비의 난민들특히 우간다인들을 차량 도둑이라고 비웃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강도짓을 일삼는 것은 바로 케냐 경찰이었다. 내 친구 중에 덴마크인 여성이 있었는데, 어느 날 나이로비의 한 가게에 들어갔다 나와 보니 그녀의 차가 저만치 가고 있었다. 그녀는 직접 뛰어 쫓아갔고, 마침내 차가 멈추었다. 그런데 그곳은 총독 관저였고 낄낄대며 차에서 내리는 두 사람은 바로 경찰이었다.
어느 날 오후, 수단 국경 근처 로키초그지오 캠프 출신의 존 크리스천이라는 수단 남자가 우리 사무실에 찾아왔다. 스물다섯 살의 존은 키가 크고 충혈된 눈을 하고 있었다. 그의 사촌 한 명은 이미 루이제 수녀의 장학 프로그램에 등록해 있었다. 존은 수단 출신 남녀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이었는데, 대단히 세밀하고 화사한 색상의 수채화들이었다. 나중에 우리는 그가 하는 일을 후원하기로 하고 물감과 붓과 종이를 사주게 된다. 사무실에 처음 찾아왔을 당시 존은 아콜리어를 영어로 통역해줄 친구를 대동하고 있었다. 얘기 도중에 그는 케냐 경찰에 체포당했던 일을 들려주었다. 존은 통역하는 친구를 통해 차근차근 사연을 이야기했는데 경찰이 자신의 유엔 증서를 빼앗아 찢어 버렸다고 했다. 이야기를 마친 존이 고개를 떨군 채 흐느꼈고 그의 앙상한 검은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나이로비에 거주하는 난민에게 닥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유엔 증서가 없으면 언제 교도소에 끌려갈지 알 수 없었다. 경찰서에서도 경찰들은 존의 머리에 총신을 갖다 대고 발사하며 그를 괴롭혔다고 한다. 통역자가 말을 더듬었다.“그래서 지금 그는…. 에… 이 단어가 뭐더라?”그가 양손을 뒤집어 보였다. 나는 청소부로 일하는 케냐 여인 버지니아를 불러 도움을 청했다.“키지위.”통역자가 스와힐리어로 말했다.“귀머거리.”버지니아가 말했다.“귀가 멀었단 뜻이에요.”
카디자의 아들
태초에 성령께서 물 위에 머무시어 거룩하게 하는 힘을 주셨나이다.
- 가톨릭 미사 경본: 부활절 성야 미사의 ‘세례수 축복’ 기도문 중에서
카디자 나키요베는 짚을 꼬고 염색하여 화사한 색상의 돗자리를 만드는 여인이었다. 방에 까는 큰 것부터 테이블용의 자그만 것에 이르기까지 크기도 다양했고 스타일이나 형태도 다양했다. 카디자는 거의 매주 미코노 센터로 우리를 찾아왔다. 그 무거운 돗자리들을 낡은 이불보에 둘둘 싸 등에 짊어지고 말이다. 그녀가 보를 풀어내면 흠집 많은 쪽모이 세공 마루 위로 돗자리들이 무지개 폭포처럼 좌르르 굴러 내렸다. 분홍색, 밝은 녹색, 노란색으로 짜진 것, 짙은 보라색과 베이지색으로 된 것, 카민 적색과 오렌지색으로 된 것. 그녀는 재능이 탁월했으므로 그녀의 돗자리들은 케냐인들이나 외국인 고객 모두에게 인기가 좋았다. 카디자는 세 살배기 어린 아들을 둔 우간다 출신의 붙임성 있는 젊은 여성이었다. 처음 나를 찾아온 날 그녀는 편지를 한 통 들고 왔다. 많은 난민들이 그렇게 하듯 그녀도 글을 깨친 친구-사실상 대서인 역할을 했다-에게 부탁하여 자신의 생각을 적어 온 것이었다. 이런 유의 소개서는 마치 사도 바오로의 서한들처럼 화려한 인사말로 시작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친애하는 브라더 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사드립니다...”서두는 항상 이러했다. 그러고나서 약간 변화를 주어,“....주님의 축복으로 이렇게 당신 앞에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에게 너무나 친절하신 당신에 대해 항상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마지막에는“브라더, 당신과 당신의 가족들에게 인사드립니다. 모두들 안녕하신지요? 부디 제 인사를 전해주시기 바랍니다.”이런 식의 얘기가 지면 한쪽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뒷면으로 넘어가서야 청탁 내용이 나왔다. 사업 프로젝트, 의료 지원, 식료품과 아기 옷 살 돈, 재봉틀 수리할 돈, 아이들 학비나 집세 낼 돈. 카디자의 청탁 내용은 같은 우간다 여성 두 명과 함께 더 많은 돗자리를 생산할 수 있도록 후원해 달라는 것이었고 우타와 나는 그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어느 날 카디자가 아기를 가졌노라고 말했다. 그녀가 결혼했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으므로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꼬치꼬치 캐물어선 안 된다는 것을 그 무렵에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브라더, 만약 이 아기가 사내아이라면 이름을 제임스 마틴이라고 붙여줄 거예요. 여자 아이면 우타라고 부를 거고요.”이거 큰 영광이네요, 내가 말했다. 그러나 그런 이름을 가진 아프리카 아이가 사방으로 뛰어다닌다는 것이 도무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제임스 마틴’은 아무래도 이상했다.‘우타’는 어떨지 몰라도... 카디자가 서너 달 가까이 나타나지 않았다. 난민들은 그녀가‘실종되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가 아기를 안고 내 사무실에 나타났다. 나는 그녀가 한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얘가 바로 제임스 마틴이에요!”그녀가 깔깔대며 아기를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아기를 품에 안고 그 태연한 갈색 눈을 들여다보았다.“우리 지미에게 세례를 주어야 하지 않겠어요?”카디자가 물었다. 사실 나는 사람들을 억지로‘개종시키려’드는 선교사는 결코 아니었다. 그런 식의 공격적인 개종 방식은 가톨릭 선교사들의 경우 오래 전에 포기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본인이 세례를 받겠다는데 그것까지‘말리고’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쨌거나 그리스도교인이라면 새로운 사람을 자신의 신앙으로 불러들이고 싶은 게 사실이니까. 그리하여 나는 지미에게 세례를 주는데 동의했다.“그런데 우리가 이슬람교도거든요.”카디자가 말했다. 이게 무슨 소리?“네, 저는 이슬람교도예요. 하지만 지미는 세례를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적어도 신학적으로는 기묘하기 짝이 없는 경우였다. 나는 이런 경우를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카디자에게 이슬람 신앙을 포기하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그것은 바람직하게 생각되지 않았으므로 나는 좀 더 나은 접근법을 택했다. 세례는 아이에게 있어 매우 중대한 결정이라는 것을 그녀에게 알려주기로 한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이 지미를 그리스도교인으로 만들고 싶다니 반가운 일이긴 하지만 단순히 나를 기쁘게 해주려고 아이에게 세례를 주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지미에게 세례를 줄 생각이라면 일단 당신부터 그리스도교에 대해 좀 알 필요가 있다. 당신 동네의 성당을 찾아가면 어느 정도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몇 주 후, 그녀가 다시 내 사무실에 나타났다.“너무너무 기뻐요!”그녀는 제임스 마틴의 세례식이 주일에 있을 예정이라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얘기했다. 대부가 되어주실 거죠? 물론이다, 그런데 당신은? 당신은 어떻게 하기로 했느냐?“오, 전 벌써 세례를 받았어요!”그녀가 대답했다.“제 세례명은 이제 엘리사벳이에요. 성서에 보면 마리아의 사촌이 이 이름을 가졌죠.”그런데 그녀가 계속해 말했다. 지미가 세례식 때 입을 옷이 좀 필요할 것 같다. 나는 기꺼이 그녀에게 5백 실링을 건네주었다. 주일이 되자 나는 지미를 다시 품에 안을 수 있었다. 물론 세례대 위에서 말이다. 그리고 본당신부가 아기의 머리 위에 성수를 붓고,‘제임스 마틴’이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들어온 것을 환영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세례가 끝난 후 우리 예수회 공동체는 엘리사벳과 아기 지미, 그녀의 나머지 가족들을 초청해 음료수와 비스킷을 대접했다. 몇 주가 지났다. 이번에도 우간다 여인이 사내아이를 데리고 나를 만나러 왔다.“얘는 제임스 마틴이에요.”이레네 무카사가 말했다. 나는 반가웠다. 그러나 우간다 출신의 빈틈없는 내 친구 앨리스 나브위레의 시각은 달랐다.“카디자에게 그런 세례복을 사주는 게 아니었어요.”어느 날 오후 사무실에서 그녀가 내게 말했다. 나는 그녀가 가져온 홀치기 염색제품을 막 사들인 참이었다. 그녀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어리둥절해졌다.“왜 안되죠?”“제 얘기 좀 들어보세요, 브라더.”그녀는 마치 백치나 지독하게 머리 나쁜 아이한테 얘기하는 투로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카디자와 이레네가 애들 이름을 제임스 마틴이라고 지었고, 당신이 그들에게 애들 옷을 사라고 돈을 주었으니 어떻게 되겠어요, 브라더? 조만간 나이로비 시내에 제임스 마틴이라 불리는 아기들이 수도 없이 생겨날 게 뻔하잖아요?” -12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