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유랑자

“난민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2013-06-05     김보연 기자

제임스 마틴이 선교사로서 동아프리카 난민들과 함께 생활한 이야기를 담았다. 전쟁의 세기가 양산한 무수한 아프리카 난민들, 그들을 돕고자 파견된 선교사. 너무 진지하고 근본적인 주제들이어서 자칫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회 난민 봉사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동아프리카 난민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진솔하고 수채화처럼 생생한지 책장을 넘기다 보면 저자와 난민들과 내가 어느새 하나가 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화에 등장하는 난민 하나하나가 마치 내 이웃들처럼 느껴지면서, 그들의 걱정거리가 내 걱정이 되고 그들의 웃음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게 된다. 그들이 울면서 지나온 내력을 풀어 놓을 때는 가슴 뭉클한 깊은 공감에 휩싸이게 된다.

지은이/제임스 마틴ㆍ옮긴이/송은경ㆍ펴낸이/정진석ㆍ펴낸곳/가톨릭출판사

14. 생명의 나무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을 부요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해주신 그 나라를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 야고보 2, 5 

 
우타와 나는 프로젝트를 공식 후원하는 작업을 하는 한편, 이런저런 이유로 지원 자격에는 미달되지만 이미 스스로의 힘으로 제품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난민들도 도왔다. 난민들 중에는 예전에 고국에서 배운 전통 기능을 활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에티오피아 남자들은 지갑과 벨트, 가죽으로 만든 자그만 십자가 따위를 만들었다. 우간다 여인들은 바닥 깔개를 짜고 짚으로 바구니를 엮었다. 모잠비크 남자들은 흑단 나무를 깎아 조각품을 만들었다. 결혼 후 길게는 6개월 동안 집 안에서만 지내야 하는 전통을 가진 르완다 여인들은 사이잘 나무를 재료로 기하학적 문양의 바구니를 엮었다. 이 바구니들은 개별 가정에서 사용하기도 하고 친척들에게 선물로 나누어주기도 했다. 가우디가 우리에게 정기적으로 가져오는 이 바구니들은 미국 대사관의 바자회에서 아주 잘 팔려 나갔다. 아고스티노 알리쿠테파는 목공 조각을 하는 모잠비크인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흑단 조각상을 만드는 또 다른 모잠비크인과 함께 일했다. 나이가 좀 더 많은 그 사람은 이름이 제카리아였다. 두 사람은 몸바사에서 조각에 필요한 고가(高價)의 자단 나무를 사기 위해 매달 버스를 타고 장거리를 여행했다. 형편이 될 때는 ‘므핀고’통나무도 함께 구입했다. 그것은 중심부가 검은, 꿀 색의 목재인 흑단이었다. 나이로비에서 조각 일을 하여 번성하는 관광업에 일조하는 케냐인과 탄자니아인도 물론 수백 명에 달했다. 그들은 동물, 동물 머리, 동물 머리가 달린 숟가락과 포크, 마사이족 전사, 아프리카인의 흉상 등등, 온갖 형태의 조각품을 생산해 냈다. 솜씨가 서툰 작품들도 잘 팔렸다. 내가 아고스티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의 작품 샘플이 담긴 큼직한 삼베 자루를 하나 들고 있었다. 그는 내가 아는 모잠비크인들과 비슷한 용모로 둥글고 오동통해 보이는 얼굴, 물기 도는 갈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나이로비의 시장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작품을 만드느냐고 물었다. 그가 불쾌한 표정으로, 자신은 그런 저질 상품을 절대로 팔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제카리아는 어릴 때부터 조각 일을 해 왔어요.” 그가 말했다. “지금은 절 견습생으로 고용하고 있죠.” 그가 자루에서 물건들을 꺼냈다. 복잡한 머리 스타일을 한 매끄러운 흑단 흉상들, 갈아서 거울같이 반짝이는 향긋한 자단으로 만든 동물들, 반짝이는 검은 얼굴이 거친‘므핀고’껍질 속에 움푹 들어가 있는 예수의 커다란 두상이었다. 과연, 도심의 시장들에 나오는 물건들과는 질이 달랐다. 나는 제카리아와 아고스티노에게 우리 매장 바깥에 앉아 조각 일을 해 볼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새 고객들에게 작업 과정을 보여주면 그들의 사업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격려하는 뜻에서 그들에게 새 조각 도구들을 제공하겠노라고 했다. 그들은 흔쾌히 동의했다. 시도는 대성공이었다. 우리 앞마당의 커다란 피쿠스 나무 밑에 앉아 흰색, 갈색, 검은색의 나무 부스러기에 둘러싸여 작업하는 두 사람 앞에 관광객들이 줄지어 섰다. 우리 매장에서 팔려고 내가 완제품을 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방문객들이 작업 중인 작품을 보고 예약해 두었다가 제품이 완성되면 다시 가지러 오는 경우도 있었다. 두 사람은 무아지경에 빠져 작업했다.

아고스티노와 제카리아는 집에 보관하고 있던 완제품들을 이따금 들고 오기도 했다. 어느 날 오후, 그들이 내게 피쿠스 나무 밑으로 좀 오라고 했다. 나가 보니 검은색의 자그만 통나무 같은 것에 삼베 자루가 덮여 있었다. 그들이 삼베 자루를 치우자 90cm 높이의 흑단 조각이 하나 드러났다. 뒤틀린 형상들로 이루어진 그것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니 손을 잡고 있거나, 밭에서 일하거나, 아이에게 젖을 먹이거나, 입맞춤하거나, 춤추거나, 나무줄기로 기어오르는 수십 명의 남녀들이 뒤얽힌 장면이었다. 참으로 환상적이었다. 내가 본 어떤 것과도 달랐다. “이건  ‘생명의 나무’입니다.”  제카리아가 설명했다. “우리네 전통의 하나죠.” 조각하는 데 석 달이 걸렸다고 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값이 너무 비쌌다. 그들이 요구하는 가격은 3만 5천 실링, 미국 돈으로 대충 5백 달러의 액수였다. 나는 그에게 우리의 고객들은 해외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때 가져갈 수 있는 보다 작은 품목이나 나이로비의 자택에 놓을 자그만 장식품들을 선호한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이것처럼 덩치가 크고 값비싼 물건은 팔리지 않을 것임을 일러주었다. “하지만 이‘므핀고’는 아주 아름다워요.” 아고스티노가 자신 있게 말했다. “분명히 팔릴 겁니다.” 글쎄, 과연 그럴까? 내가 말했다. 설사 팔린다 하더라도 우리 매장은 이런 물건을 사들일 여유가 없다. 예산이 허락지 않는다. 대금을 치르지 않아도 좋으니 매장에 전시만 좀 해 달라고 아고스티노가 말했다. 이것을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팔 수 있을 것이다. 와튼 경영 대학원을 나온 나보다 아고스티노의 사업 마인드가 더 유연하다는 사실에 다소 당혹감을 느끼면서 찬성의 뜻을 표했다. “좋은 생각입니다. 이런 걸 바로 위탁판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게 팔리도록 기도도 해주실 거죠, 브라더?”하고 그가 물었다. “물론이죠.” 우리는 힘을 합쳐 그 무거운 목제품을 매장 안으로 옮겼다. 최소한 20kg은 넘을 것 같았다. 나를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던 우간다 여인 세 명이 달려오더니 조각품을 보고 감탄하면서, 뒤얽힌 채 키 큰 그루터기를 향해 기어오르는 사람들을 손으로 더듬었다. 여인들은 동아프리카 식으로 거듭거듭 만족을 표했다. 기음(氣音)을 넣어 짧게 발음하는, “아!”하는 소리로. 5분 후, 바깥 자갈길에 자동차를 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국인 관광객 한 사람이 청록색 랜드로버에서 내려 매장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녀와 몇 분간 얘기를 나누었는데 ‘생명의 나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서 빛이 났다. “이거 정말 근사하군요.” 그녀가 이렇게 감탄하고 작품의 출처를 물었다. 나는 아고스티노를 불러들여, 조각하게 된 경위와 인물들의 의미를 설명하게 했다. 그녀는 그 작품을 4만 5천 실링에 샀다. “아, 브라더, 보셨죠?” 여인의 차가 출발하기 시작하자 아고스티노가 속삭였다.  “당신의 기도가 응답을 받았어요.”

사람이 허망한 생각에서 벗어나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궁핍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가면이 떨어지고 존재의 핵심이 드러나면서 그가 선천적으로 종교적이라는 점이 이내 명백해진다. 그를 무한히 초월적인 하느님의 신비에 묶어주고, 그를 사로잡고, 그의 궁핍을 분명히 드러내는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관심과 이어주는 끈이 그의 존재 한가운데서 펼쳐진다.     

                                                           - 메츠(Johannes B. Metz), 『가난한 영혼 Poverty of Spirit』

▲ 미코노 센터에서 판매할 수공예 목걸이를 보는 제임스 마틴 신부
미코노 센터가 문을 열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내게도 일과(日課) 비슷한 것이 틀을 잡았다. 내 방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눈부신 적도의 햇살 덕분에 혹은, 정확히 시간 맞춰 집으로 날아든 한 쌍의 이집트 따오기 덕분에(이 새들이야말로 믿음직한 자명종이다) 아침 여섯 시에 잠을 깬다. 나는 몸을 굴려 건망증 심한 어느 미국인 방문객이 남겨 두고 간 단파 라디오를 켜고 ‘BBC 월드 서비스’방송을 듣는다. 샤워하고(온수가 충분할 때), 기도하고(내가 기도를 기억해 낼 만큼 상태가 좋을 때), 예수회 동료들과 아침을 먹고(차와 바나나), 《데일리 네이션》을 훑고, 이윽고 차를 타고(지프가 작동 가능할 때) 카왕와레를 지나 칸게미로 향한다. 빈민 지역에 들어서면 나를 만나러 오고 있던 난민들과 마주치기 십상이다. 나는 그들을 차에 태우고, 우리의 면담은 지프 속에서 벌써 시작된다. 내가 혹시 못 보더라도 그들은 늘 나를 발견한다. 어느 날 한 난민이 내 지프 앞으로 돌진해 왔다. 나는 브레이크를 콱 밟았고, 차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난폭하게 궤도를 벗어나면서 그와 충돌하는 것을 간신히 모면할 수 있 었다. 그가 차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브라더, 당신은 저 ‘마타투’들보다 더 심하네요!” 미코노 센터에 도착하면 맑은 하늘에 벌써 해가 이글거리고, 그늘진 현관에는 보통 열 두서너 명의 난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대개가 여자들인데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사람들도 있고, 이른 아침부터 마타투를 타고 공예품을 가져온 이들도 많다. 나머지 사람들은 소규모 사업 허가를 요청하는 편지를 들고 서 있다. “잠보(안녕하세요), 브라더!” 오전 시간은 대개 난민들과의 면담에 할애된다. 장부 정리, 집주인이나 상인들 다루는 법, 말다툼 해결책, 새 시장의 확보 등등 자기들이 운영하고 있는 사업에 관해 자문을 구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 힘든 고비를 넘길 수 있도록 약간의 돈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수수한 목재 의자들과 나지막한 탁자가 놓인 작은 방에서 난민들을 만났다. 그곳에서 우리는 영어로, 스와힐리어로, 불어로, 거리낌 없이 얘기할 수 있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 이를테면 아랍어나 루간다어, 포르투갈어로 말하는 난민들의 경우, 보통 통
▲ 우간다 난민들을 위한 야외 수업
역을 해주는 동료 난민을 대동하고 왔다. 이렇게 난민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우리가 공동의 목표를 향해 모두 함께 일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들이야말로 내가 난민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라는 것을 나는 곧 깨달았다. 그들은 끝없이 긴 줄에 끼어 캠프에서, 유엔 사무소에서, 관공서에서, 교도소에서, 병원에서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안으로 들어가 이런저런 관리를 대면하게 되더라도 인색하게 굴면서 최대한 빨리 내보내려 하는 대접을 받기 십상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런 사람들과 마주 앉아 그들의 관심사를 최대한 주의 깊게 들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비단 돈만이 아니라 내가 그들에게 손쉽게 줄 수 있는 것은 시간이었고, 그것은 돈 드는 일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난민들이 내다 팔 물건들을 들고 왔는데, 내가 만약 두 개를 원하면 두 개가 아니라 세 개를 사라고 우기면서 그럴듯한 이유를 둘러댄다는 점에서 앨리스 나브위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제 매장은 재정적으로 잘 운영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그러한 요구를 어렵지 않게 수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설사 우리가 상품을 과하게 사들였다 해도 그 대금은 결국 좋은 목적에 쓰이고 있었다. 어느 가족이 굶주리도록 내버려 두는 것보다는 매장 선반에 바구니들이 넘쳐나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다짜고짜 돈만 바라는 난민들도 종종 찾아왔는데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난민들의 자립을 돕는다는 취지로 작업하고 있었지만 당장 지원해주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있는 사람, 주로 식품을 구입할 돈조차 없는 경우의 사람들이 여전히 많았다. 이럴 때 나는 보통 그들이 사는 지역의 본당을 찾아가도록 유도했다. JRS가 나이로비의 각 지역 본당을 통해, 형편이 절실하게 어려운 난민들에게 현금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장 돈이 필요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루는 아이를 등에 업은 한 수단 여인이 내 사무실로 와 앉더니 ‘약간의 돈’을 간청했다. 아이들 ‘학비’가 없다는 것이었다. 케냐의 공립학교들은 공식적으로는 무료였으나 그럴싸한 사업 명목으로 터무니없는 학비를 요구하곤 했다. 예를 들면 건축 기금 같은 것이었는데, 그러나 이런 건물이 실제로 지어지는 경우는 결코 없었다. 게다가 아이들한테 먹일 것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녀의 지역 본당을 찾아가 보라고 하자 그녀가 눈물을 터뜨렸다. 버스 요금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한참 통곡을 하더니 이윽고 치맛자락으로 눈을 훔쳤다. “오, 브라더”하며 그녀가 거듭거듭 간청했다. 나는 결국 그녀에게 내 개인 돈을 주었다. 현관으로 나서는 그녀의 얼굴에는 원했던 것을 얻었다는 기색이 역력했고 다른 난민들이 상황을 눈치 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게다가 나중에 보니, 그들은 안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열려진 창을 통해 쉽게 엿들을 수 있었다.) 한 르완다 난민이 내게 절차를 위반했음을 환기시켰다. “브라더, ‘돈’을 주어선 안 됩니다.” 그가 꾸짖듯 말했다. “그녀를 본당으로 보냈어야죠!” 나는 난민들을 만나는 틈틈이 매장에 나가 우리의 물건들도 자랑하고 JRS의 사명을 설명해주기도 하면서 자주 찾아오는 고객들을 도와주었다. 난민들의 실상에 대해 아주 약간 설명해주기만 해도 당초 계획보다 훨씬 많은 물건을 구입하는 고객들이 꽤 많았다. 따라서 나는 물건을 더 많이 사게 만들기 위해 이따금 죄책감이 느껴지는 방법을 동원하면서도 결코 부끄럽지는 않았다. 어느 날 제인 투시이메가 만든 나무껍질 천 가방을 유심히 살피는 미국인 여성이 있었다. 미소 짓는 얼룩말이 수놓인 가방이었다. “이걸 아이들 책가방으로도 쓸 수 있을까요?” 그녀가 거친 나무껍질 천을 만지면서 물었다. “물론이죠.” 그러한 용도로 쓰일 수 있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비를 맞아도 별문제 없겠지요?” “아마 그럴 겁니다.”나는 어설프게 대답하고는 상황을 해결하려고 필사적으로 애썼다. “그러니까 제 말은, 이 나무껍질이 그렇다는 겁니다. 나무들은 본래 비를 맞아도 끄떡없거든요.”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걸 팔기 위해서라면 무슨 얘기든 둘러대실 것 같네요, 그렇죠?” “글쎄요.” 내가 말했다. “아무튼 이 가방들은 멋지고 아주 질기고...네, 맞아요, 아마 무슨 말이든 했을 겁니다. 이걸 만드는 여인은 지금 힘든 시기를 겪고 있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 살던 집에서 쫓겨났거든요.” 우리의 고객이 가방을 세 개나 구입한 것은 당연했다. 그러니 지금 미국 어느 곳에서는 비에 젖은 나무껍질 책가방을 질질 끌고 학교로 가고 있는 소년이 있을 것이다. 오후에는 빈민 지역의 난민들을 방문했다. 일하느라 미코노 센터를 찾아오기 힘든 형편인 사람들도 일부 있었고, 어떤 때는 그들을 직접 만나 협동 작업이 잘되고 있는지, 내가 충고해줄 것은 혹시 없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난민들을 찾아가면 다툼이 있으니 판관 노릇을 해 달라, 인정사정없는 집주인에게 얘기 좀 해 달라, 고장 난 기계를 좀 봐 달라 하며 온갖 요청이 들어오기 일쑤였다. 따라서 나의 오후는 뜨거운 도시 전역을 도는 긴 드라이브로 채워지곤 했다. 피쉬 앤 칩스 판매대에 기운 없이 앉아 있다가 나를 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장사가 너무 안 된다고 하소연하는 여인, 일거리가 없어 천 조각에 파묻힌 채 새로 장만한 재봉틀을 놀리고 있는 여인 등, 만나는 사람들도 다양했다. 그럴 때는 그저 그들과 마주 앉아 그들의 좌절과 고민을 들어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열심히 들어준 다음에는 내가 해줄 수 있는 충고,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충고를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이 직면한 가난과 고통과 병마는 때로 나조차 질
▲ 케냐의 한 빈민가 가게 앞에서
려 버리게 만들었다. 희망이라곤 없어 보이고 문제들은 너무나 크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난민들을 차례로 만나다 보면, 비록 작은 것이지만 내가 도움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다행히도 나는 그들의 ‘모든’문제를 해결하는 난민 구세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일찌감치 떨쳐 냈다. 나이로비에서 일한 덕분에 이러한 깨달음을 보다 쉽게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컬하다. 만약 다른 현장에 나가 있었다면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상상했을지도 모르지만 나이로비처럼 예측 불가능하고 혼란스러운 곳에서 전능한 존재를 생각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내가 작업을 다소나마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이 깨달음 덕분이었을 것이다. 나는 열심히 일했고 그 나머지는 하느님께 맡기려고 노력했다. -14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