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유랑자

“난민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2013-09-06     김보연 기자

제임스 마틴이 선교사로서 동아프리카 난민들과 함께 생활한 이야기를 담았다. 전쟁의 세기가 양산한 무수한 아프리카 난민들, 그들을 돕고자 파견된 선교사. 너무 진지하고 근본적인 주제들이어서 자칫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회 난민 봉사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동아프리카 난민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진솔하고 수채화처럼 생생한지 책장을 넘기다 보면 저자와 난민들과 내가 어느새 하나가 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화에 등장하는 난민 하나하나가 마치 내 이웃들처럼 느껴지면서, 그들의 걱정거리가 내 걱정이 되고 그들의 웃음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게 된다. 그들이 울면서 지나온 내력을 풀어 놓을 때는 가슴 뭉클한 깊은 공감에 휩싸이게 된다.

지은이/제임스 마틴ㆍ옮긴이/송은경ㆍ펴낸이/정진석ㆍ펴낸곳/가톨릭출판사

한 에티오피아 가족이 내게 다가왔다. 게브레셀라이세와 그의 아내, 세 명의 자녀였다. 게브레셀라이세는 에티오피아에서 생산된 곱고 하얀 면직물에 갖가지 색상의 실로 수를 놓아 아름다운 셔츠와 원피스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는 정교한 십자가가 수놓인 훌륭한 영대를 만들었는데 그것 역시 에티오피아 스타일이었고, 매장으로 찾아오는 프랑스인 사제들에게 특히 인기가 있었다. 게브레셀라이세는 나무못과 다듬어진 가죽으로 걸상도 제작했다. 그는 자신이 뭐든지 만들 수 있다고 큰소리치면서, 내게 매장에 놓을 새로운 제품을 찾고 있지 않느냐고 자주 물어 왔다. 어느 날 나는 시내에 있는‘시티 마켓’에서 천장에 매다는 장식이나 집안 장식물로 많이 쓰이는 에티오피아풍의 자그만 금속 십자가를 보았다. 나중에 게브레셀라이세에게 그 십자가 얘기를 하면서 만드는 법을 아느냐고 물어보았다.“아, 물론이죠, 브라더!”내가 감탄한 그 복잡한 십자가들은 끓인 주석이나 황동으로 만든 것이었으므로 그 점을 확인해 보았다.“그러한 재료들을 구할 수 있습니까?”
“그럼요, 브라더. 문제없어요!”

 
그러나 며칠 후, 그가 들고 온 것은 주석으로 된 소다수 깡통으로 만든 십자가였다. 나는 그를 기분 나쁘게 하고 싶지 않아 그 물건을 사주기는 했으나, 이것보다는 당신이 만드는 걸상이 훨씬 좋다고 슬쩍 언질을 주었다.
내게 다가온 게브레셀라이세의 가족이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어주어 고맙다며, 왼손으로 팔꿈치를 받치고 내 손을 잡고 흔들면서 엄숙한 에티오피아 방식으로 허리 굽혀 절하면서 감사를 표했다. 그들은 암하릭어로 말했는데,‘감사합니다’를 암하릭어로 하면 대충 다음과 같이 적을 수 있다.‘아마세게날라후’그것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동아프리카 말 중에 하나였으므로 나는 에티오피아인들을 만나면 모자를 벗으면서 이 말을 하곤 했다. 혀가 구슬처럼 도르르 굴러가는 발음이 너무 재미있었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가기 전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아 가세요.”나는 안으로 들어가 그 무거운 마분지 상자를 끌어당겨 컵 세 개가 묶여진 꾸러미를 움켜잡았다. 미하엘과 버지니아와 내가 몇 시간이나 끙끙댄 끝에 한 가족 당 한 꾸러미씩 돌아가도록-적어도 우리의 계획은 그러했다-컵을 세 개씩 묶어놓았던 것이다. 컵 속에는 사진 복사한 여섯 개 언어로 된 크리스마스카드를 하나씩 넣어 두었다. 
우리가 그들 몫의 녹색 플라스틱 컵을 건네주자 그들의 눈이 빛을 발했다. 그들 뒤에 서 있던 몇몇 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게브레셀라이세와 가족들이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하고는 깊이 고개 숙이며,“아마세게날라후!”를 연발하면서 좋아 어쩔 줄 몰라 했다.
다음 순간 한 무리의 난민이 다가왔다.“브라더, 그게 뭐지요?”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면서 일어나기 시작했다.“그게 뭐예요?”“뭔데요?”나는 할 수 없이 즉흥 연설 같은 것을 해야만 했다.
“작지만 우리가 준비한 크리스마스 선물이니, 한 집에 한 꾸러미씩 플라스틱 컵 세 개를 받아 가시면 됩니다!” 
현장은 그 즉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수십 명의 난민들이 우리 쪽으로 와르르 몰려와 손을 뻗었다.
“기다려요! 기다려!”내가 소리쳤다.“집에 갈 때 나눠줄 겁니다.”
“우린‘지금’갈 거예요!”그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결국 미하엘과 버지니아와 나는 수십 개의 컵을 뻗어진 손들에 쥐여 주었고, 일부 난민들이 상자에서 컵을 직접 꺼내 가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다.
“많이 있으니까 누구나 받아갈 수 있어요!”사람들의 목소리, 플라스틱 컵이 탕탕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판지 찢어 내는 소리로 정신이 없는 가운데 내가 고함을 쳤다.“가만히 기다리면 모두가 가져갈 수 있어요!”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제 사방이 컵들로 뒤덮였다. 나는 슬슬 화가 치밀어 올랐다.“좋아요!”마침내 내가 소리쳤다.“모두들 제발 좀 앉아주실래요?”
사람들이 동작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앉아요! 제발!”
모두들 천천히 뜨뜻한 풀밭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몇몇은 이미 컵을 들고 있었다.
나는 스와힐리어로 그들에게 연설하기 시작했으나 얘기가 훨씬 더 이상해졌으므로 곧 영어로 바꾸었다.“잘 들으세요.”내가 말했다.“우리에겐 천 개의 컵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은 아마도 2백 명을 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컵들이 사방에‘굴러다니고’있습니다. 그러니 못 받게 될까 걱정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죠?”
“자, 지금부터 제가 아직 못 받은 가족들에게 나머지 컵을 나눠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컵을 이미 가진 사람들이 누구죠?”
 한 사람도 손을 들지 않았다.
“여러분, 우리는 이미 컵의 절반가량을 나눠주었습니다.”내가 흔들림 없는 어조로 말했다. “따라서 여기 있는 여러분 대다수가 이미 컵을 가졌습니다. 컵을 가진 사람은 손을 드세요.”
“이 여자가 컵을 가졌어요, 브라더!” 난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리켰다.
그런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컵을 가진 사람은 제발 손을 들어주세요.”내가 말했다.“컵은 온 사방에 있다니까요.”
사람들의 바다 속에서 손 몇 개가 올라왔다. 나는 더 화가 치밀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좋습니다. 누가 컵을 가졌는지 나는 모른다 하더라도...‘하느님’은 알고 계시니까!”          
이 신학적인 식견이 재미있게 느껴졌는지, 느닷없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알고 보니 저 사람도 지독한 고집쟁이구나 생각하고 즐거워하는 건지, 상황에 똑똑하게 대처하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은 건지, 나로선 알 수 없었다. 아마 그 두 가지 다 약간씩 작용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와아 하고 함성을 질렀다. 
“맞아요, 브라더!”“브라더 짐 만세!”“브라더 짐이‘옳아’!”“하느님께서 컵을 찾아내실 거야!” 다음 순간, 마치 큐 사인이라도 받은 것처럼 사람들의 손이 떼를 지어 공중으로 올라갔다.
나는 남아 있던 컵들을 나누어주었다. 최소한 5백 개는 남아 있었다.
모두들 컵을 움켜들고 즐겁게 자리를 떴다.“메리 크리스마스, 브라더!”
 
사람들이 모두 간 후 미하엘과 나는 그 사건을 두고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이 자리에 온 사람들은 난민 캠프에서 몇 년씩 체류했던 사람들이라는 것, 그곳에서는 거의 모든 물건이 항상 부족하게 공급된다는 것을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데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공세를 취해서라도 가족에게 필요한 것을 손에 넣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여러 캠프의 상황이 어떠한지 이미 알고 있었고, 특히 티카의 캠프 같은 곳에서 먹을 것과 필수품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내 눈으로 확인한 바도 있었다. 그들의 반응이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난민들은 정말 절박한 동기에서, 혹은 몸으로 겪은 가난을 떠올리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미하엘과 나는, 우리도 그 상황이었다면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 다음 주, 우리는 파티 때 찍은 사진을 현상했다. 난민들이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나는 그 사진들을 미코노 센터의 주 전시실에 붙여 놓았다. 사무엘이란 이름의 우간다 난민이 세 살배기 아들을 다정스레 끌어안고 함박웃음을 짓는 사진이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컵을 세어보니 무려 열네 개나 되었다. 나는 그 뻔뻔스러움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무엘이 들어와 그 사진을 보았다. “브라더, 이 사진 저한테도 한 장 주시겠어요?”
“사무엘”내가 엄숙한 투로 말했다.“이 사진에서 뭐 느껴지는 것 없어요?”
“당신들이 열어준 파티에서 제가‘즐거운’한때를 보내고 있잖아요, 브라더.”그가 말했다.
“그리고 한 집에 세 개씩만 가지라고 했는데 컵도 열네 개나 챙겼고.”
“아, 그건”그가 한 박자도 놓치지 않고 대뜸 말했다.“제가 친구들에게 가져다주려고 컵을 옮기는 중이었거든요.”

크리스마스 시즌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어느 난민 여성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전깃불도 없는 목재 오두막에 탁자 하나가 실내의 돌출부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평소 같았으면 휑하니 비어 있었을 그 탁자 중앙에 녹색 플라스틱 컵 세 개가 놓여 있었다. 내 조국에서는 시시하게 여겨졌을, 혹은 내던져 버렸을 물건인 멋없는 플라스틱 컵이 이곳에서는 이렇게나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서글퍼졌다. 하지만 우리가 이 사람들에게 이런 것을 나눠줄 수 있었다는 것이 기뻤다. 내가 컵에 주목하는 것을 그녀가 보았다.
“전 이 크리스마스 컵들을 사랑해요.”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미소를 지었다.

18. 우리 집 특식

작물 중에서는‘테프’가 관광객들의 가장 큰 관심을 끌었을 뿐 아니라, 고지대 상류층의 식탁에서도 으뜸가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에티오피아에서만 볼 수 있는 작물로서, 제일 가파른 고지에서 자랐으며 에티오피아인들의 요리 개념에 실제 이상으로 부풀려져 등장했다. 그리고 그것은 반죽을 발효시킨 뒤 두드려서 얇게 만든 에티오피아 특유의‘빵’인 ‘엔제라’의 주재료로서 귀한 손님들에게 대접되었다.
 

- 제임스 매칸(James McCann), 『경작하는 사람들: 에티오피아의 농업 People of the Plow: Ethiopian Agriculture, 1890-1990년』

 
에티오피아 난민들이 선호하는 사업은 식당이었다. 우리는 나이로비에서 멀리 외곽에 위치한 자그만 식당 세 곳을 후원했는데 도시 빈민 지역에 살고 있는 에티오피아 난민이 수천 명에 달하는 덕분에 세 곳 모두 성업 중이었다. JRS는‘엔제라’를 만드는 에티오피아 여인 사라도 후원해주었다. 에티오피아의 주식인‘엔제라’는, 기장 비슷한 곡물인‘테프’를 거품이 일도록 발효시킨 뒤 두드려서 만드는 팬케이크 비슷한 빵이다. 단도라에 있는 자신의 자그만 오두막에서 일하는 사라도 일거리가 부족하지는 않았다.
가장 최근에 시작한 사업에 속했던‘아디스 아바바’라는 식당은 나이로비의 예수회 공동체에서 크게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세 명의 형제와 한 명의 누이가 공동으로 운영했다. 에티오피아 출신인 이 사 남매는 집주인과 늘 다투는 사이였다. 어느 날 그들이 내게 자신들의 집주인과 좀 얘기해 보라고 부탁해 왔다.“그 여자, 아무래도 약물 중독자 같아요.”그들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여인이 나와 같은 미국인-노스캐롤라이나 출신이었다-이라는 것을 알고 약간 놀랐다. 그녀는 분홍색 셔닐 실[자수용 혹은 가장자리 장식용 실--역주]로 만들어진 목욕 가운 차림으로, 자신의 공동주택 문간에서 나를 맞았다. 그러고는“저 빌어먹을 에티오피아인들”을 쫓아내고 말겠다고 악을 써 댔다. 그녀는 에티오피아인들이 너무 소란스럽다고 말했다.          
내가 그녀의 말을 전해주자 에티오피아인 형제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소란을 떠는 건 바로 그 여자예요, 브라더.”나는 그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에티오피아 난민들은 열이면 열, 공손하고 목소리도 낮았기 때문이다. 이 형제들이나 그들의 고객들이 소동을 벌인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
집주인이 임대 기간을 연장해주기로 마지못해 동의한 후(그녀는 세입자들의 백인 후원자를 만나 본 다음에 집세를 올리겠다는 조건을 덧붙였다), 미하엘 쇠프와 나는 식사 초대를 받았다. 나이로비에서 영업하는 에티오피아 식당들은 음식이 아주 훌륭했으므로 대개의 경우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단, 양고기만큼은 피하는 게 좋았다. 케냐의 양고기는 대체로 냄새가 나고 질기고 역겨웠다.
우리가 도착하자 삼 형제와 그들의 누이가 식당 바깥에 줄지어 서 있었다. 그들은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하고 우리를 포옹한 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식당 안에는 향긋하고 구수한‘베르베레(양념)’냄새가 떠돌았다. 그들은 우리를 나직한 목재 식탁 양옆에 놓인 두 개의 자그만 걸상에 앉혔다. 잠시 후, 꿀을 발효시켜 만든 꿀 술 비슷한 음료인‘테즈’가 얇은 유리병에 담겨져 나왔다. 암하릭어로 손수 쓴 메뉴도 나왔다. 주 요리는 일곱 가지였다. 나는 그들에게 번역을 해달라고 했다.
“오늘은 음식이 좀 제한되어 있습니다, 브라더.”형제 중 하나가 미안한 투로 말했다. 그리고 첫 번째 특선을 가리키며 찬찬히 발음했다. “이건 양-고-기입니다.”
“이것도 양-고-기.”그가 두 번째 항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도 양-고-기, 양-고-기, 양-고-기, 양-고-기.”그가 메뉴를 죽 읽어 내렸다.
미하엘과 내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제 남은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그럼 이건?”
“아, 그건 우리 식당의 특식이죠, 브라더.” 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양-창-자!”

19. 아쥬마니

아프리카의 그 엄청난 광대함으로 말하자면, 사람이 도보로 혹은 말이나 마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었다. 
 - 엘스페스 헉슬리(Elspeth Huxley), 『티카의 불꽃 나무 The Flame Trees of Thika』   

 
그해 우리는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작은 파티를 벌인 데 이어 크리스마스 기념 판매 행사도 가졌는데, 재고품의 거의 절반을 판매하는 매우 고무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이제 미코노 센터는 나이로비 전역으로 이름이 알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매우 고달픈 시간이기도 했다. 우리가 많은 물건을 팔았다는 소식을 들은 난민들이, 이제 매장을 채우기 위해 더 많은 제품을 사들이겠지 하고 짐작하고 행사가 끝나기 무섭게 몰려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몇 주일을 그렇게 난민들 속에서 보내던 어느 날-우리가 면담한 사람을 세어보았더니 그 날도 50명이나 되었다-미하엘 쇠프가 우리도 한 일주일 쉬면서 우간다 북부나 여행해 보자고  제안했다. 아쥬마니라는 소읍 근처에 난민 캠프가 있었는데 거기서 일하는 JRS 팀이 우리에게 한번 다녀가라고 졸라 대고 있었다. 물론 그때까지 계속 사양해 왔지만.
그동안 분주하고도 성공적인 크리스마스 시즌을 보냈으니 잠시 휴가를 가지면 달콤한 휴식이 될 터였다. 또한 캠프에서 장기간 머무는 난민들이 어떤 고충을 겪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도 될 것 같았다. 이 여행의 또 한 가지 매력은 바로 길다는 데 있었다. 캄팔라까지 26시간동안 기차를 탄다고 하니 모험심이 꿈틀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긴 기차 여행이 될 터였다. 사무실 벽에 걸어 놓은 아프리카 지도를 더듬어 보니 우리의 여정은 엄청나게 다양한 지형을 통과하게 되어 있었다. 나이로비의 빈민 지역들을 구불구불 통과한 동아프리카 철도는 리프트 밸리를 건너, 차농장이 펼쳐지는 서늘한 고산지대를 기어오르고, 나일 강을 건넌 후에야 캄팔라로 접어들었다. 게다가 비행기가 아니라 기차여서 더 좋았다. 동아프리카의 비행기는 요금도 비쌀 뿐더러 위험하기까지 했으니까. -17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