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유랑자

“난민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2013-10-07     김보연 기자

제임스 마틴이 선교사로서 동아프리카 난민들과 함께 생활한 이야기를 담았다. 전쟁의 세기가 양산한 무수한 아프리카 난민들, 그들을 돕고자 파견된 선교사. 너무 진지하고 근본적인 주제들이어서 자칫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회 난민 봉사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동아프리카 난민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진솔하고 수채화처럼 생생한지 책장을 넘기다 보면 저자와 난민들과 내가 어느새 하나가 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화에 등장하는 난민 하나하나가 마치 내 이웃들처럼 느껴지면서, 그들의 걱정거리가 내 걱정이 되고 그들의 웃음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게 된다. 그들이 울면서 지나온 내력을 풀어 놓을 때는 가슴 뭉클한 깊은 공감에 휩싸이게 된다.

지은이/제임스 마틴ㆍ옮긴이/송은경ㆍ펴낸이/정진석ㆍ펴낸곳/가톨릭출판사

 
나이로비와 캄팔라를 잇는 노선은 지난날 케냐와 우간다, 탄자니아 사이에 형성되었던 긴장 관계로 인해 20년 가까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정세가 이렇게 된 주요 책임은 우간다의 전직 종신 대통령 이디 아민 다다에게 있었다. 그러나 이제 아민은 추방자 신세가 되었고, 탐험가 헨리 모턴 스탠리 경이‘아프리카의 진주’라 불렀던 우간다는 상당히 진보적인 지도자에 속하는 요웨리 무세베니의 영도하에 들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조국을 태평성대까지는 아니지만 그 가능성에 근접하게끔 만들어 놓았다.  몇 달 전 《데일리 네이션》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아민은 지금 사우디아라비아에 머물고 있었다. 기사에는 그의 사진도 한 장 실려 있었는데, 새하얀 이슬람 복장으로 기도하고 있는 모습이 여전히 인상적인 사람이었다.“나는 지금 대단히 독실한 신자이다”그는 기사에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아민이야 어찌됐든 동아프리카의 복잡다단한 정세로 인해 나이로비-캄팔라 노선은 1970년대 중반 이후로 줄곧 잠자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케냐의 신문들까지 이 노선의 재개통을 대대적으로 광고하고 있었고 우간다로 여행 간다는 자체가 행운인 양 인식되었다. 미하엘과 나도 보란듯이 일등석 표를 끊었고 우리에게는 2인용의 자그만 침대차가 배정되었다.

마침내 출발하는 날, 우리는 이른 아침에 느공 로(路) 변으로 나와 도심으로 가는 마타투를 기다렸다. 이윽고 만원 버스가 디젤 연기를 뿜어내며 정차했고, 버스 안에서는 자이레 대중가요의 기타 가락이 쾅쾅대

 
고 있었다. 나이로비의 마타투들은 제각기 이름을 가지고 있어 버스 옆구리에 그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대부분 미국 문화나 미국 흑인 문화에 대한 어설픈 지식이 반영된 이름들이었다. 아침에 일터로 가다가‘마이클 조던’이나‘배드 보이즈’[미국의 밴드명--역주] 뒤를 달리게 되면 약간 당혹스러웠다. 그날 아침 우리가 탄 마타투는‘투 라이브 크루’[미국의 밴드명--역주]였다. 꼼짝달싹하기 힘든 버스 안에서 우리는 큼직한 닭을 들고 있는 사내 옆에 붙었다. 바로 앞에는 늘어진 귓불에 귀 꼭대기까지 치솟은 고리를 끼운 마사이족 남자가 서 있었다.‘토우트’(차장)가 6실링씩 요금을 거두었다. 그 전까지 내가 유서 깊은 케냐 철도역에 가 본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도 등장한 바 있는 이 역은 식민지 시대의 모습 그대로였으며, 크림색 기둥들로 받쳐진 우아하지만 낡은 열차 차고를 갖고 있었다.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미하엘과 나는 차표를 들고 선 몇 사람과 얘기를 나누었다. 케냐에서 기차를 탄다는 것은 최고 부유층이 아니고는 엄두도 못 낼 대단한 일이었으므로 역에 모인 군중들도 한껏 들떠 있었다.“우나엔다 와피(어디로 가세요)?”그 중 한 사람이 우리에게 물었다.“캄팔라.”내가 대답했다.“아,”그가 부러워하는 투로 말했다.“사파리 므쿠브와 카비사.”(정말 큰 여행이네요.) 그때, 우리 앞으로 기묘한 모습을 한 사람이 지나갔다. 유럽인 아니면 미국인인데, 카렌 블릭센 시대의 정착민들이 보았다면‘원주민이 다 되었다’고 말했을 그런 유형이었다. 그는 마사이족‘모란(전사)’과 거의 흡사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본래 코카서스 인종[백인종을 가리킴--역주]의 직모(直毛)였을 그의 머리칼은 옥수수자루처럼 야무지게 땋아져 있었다. 청년의 흰 어깨에는 마사이족의 전통 의상인 붉은‘슈카’가 둘러져 있었다. 가죽 벨트에 달린 갈고리에는‘룬구’(전투용 막대기)가 매달려 있었다. 그가 신고 있는 싸구려 고무 샌들은 마사이 남자들이 주로 신는, 낡은 타이어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우리 케냐인 친구들이 보면 무어라고 했을지 궁금했다. 사실 서구 출신의 많은 선교사들도 ‘문화화’되고자 하는 포부를 갖고 있었다. 다시 말해, 현지의 언어를 익히고 풍습을 이해하고 음식을 함께 먹음으로써 현지 문화로 파고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야만 자신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서구 문화를 우월하게 보는 식민지 시대적 사고방식을 극복하고자 노력한다는 점에서 존경할 만한 목표였다. 나 역시도 그러한 접근법에 동조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저렇게‘지나치게’ 문화화되어 버리는 것도 가능할까? 나도 모르게 반어법이 튀어나왔다.“저것 봐, 마사이족이네.”내가 스와힐리어로 말했다.“아”우리와 함께 서 있던 한 사람이 말했다.“우스꽝스러워.”나머지 사람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저것도 문화화의 한 단계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어느
 
난민이 내게 물었던 말이 떠올랐다.“브라더, 아프리카인이 되려고 애쓰는 저 미국인들 말이에요. 저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린 건가요?”열차는 20년이나 잠들어 있었던 것 치고는 별로 낡아 보이지 않았다. 먼지와 때가 적당히 끼어 있고 여기저기 새로 칠한 페인트가 번들거렸는데, 70년대풍 좌석들이 놀라울 정도로 새것 같아 보였다. 우리가 배정 받은 작은 침대차에는 금속 선반이 두 개 있었고, 그것을 끌어당기면 비닐 보가 덮인 침대가 나오게 되어 있었다. 포마이카(가구등에 쓰이는 내열(耐熱)성 합성수지-역주)로 된 뚜껑 탁자 밑에는 이따금 물이 나오는 자그만 개수대가 숨겨져 있었다. 안락한 좌석들이 열 지어 있는 이등칸은 미국의 통근 열차와 아주 비슷했다. 마지막으로, 승객 대다수가 타게끔 되어 있는 삼등칸에는 딱딱한 목재 널빤지로 된 기다란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열차가 비틀대며 나이로비를 출발하자 구식 기적 소리가 뜨겁고 청명한 공중을 갈랐다. 삼등칸에서 요란한 환호성이 일었다.“넨다, 넨다(간다, 간다)!”사람들이 큼직한 유리창 밖으로 몸을 마구 내밀었다. 열차가 구불구불 휘어진 길을 따라 나이로비 도심을 서서히 빠져나가자 평소 보기 힘들었던 도시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무용 건물들의 때 묻은 뒷면, 열려진 사무실 창들에서 낡은 손수건처럼 휘날리는 더러운 커튼들, 철도를 따라 흩어져 있는 잔해들, 늦은 오후의 소나기를 예고하듯 불안하게 다가오는 구름들. 몇 분 지나지 않아 우리는 나이로비를 빙 두르고 있는 빈민 지역들로 접어들었다. 이 도시는 4분의 3이 빈민지역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따금 부자 동네들로 이어지는 상수원인 나이로비 댐, 그 주위로 늘어선 목재와 진흙으로 된 무수한 오두막들이 우리 앞에 펼쳐졌다. 옥수수를 굽고 있는 곳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가 가느다란 궤적을 그렸다. 가옥들 사이로 늘어져 있는 끈이나 철사 줄에 빨래들이 척척 늘어져 있었다. 어디를 보든 사람들이 산만하게 헤매고 다녔다. 삼등칸 승객들이 빈민 지역을 향해 소리를 지르자 사람들이 오두막에서 달려 나와 우리 기차 쪽으로 다가오며 인사말을 외쳤다.“잠보 트레니(안녕, 기차야)!”그것은 앞으로 우리가 여행하면서 자주 보게 될 광경이었다. 지정 칸에 박혀 있던 우리는 기차를 돌아보기로 했다. 통로에는 사람들이 마타투를 탄 것처럼 빽빽하게 서서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있었다. 기관차 굴뚝에서 쏟아져 나온 그을음이 미세한 검정 가루를 마구 날리는 상황이었으므로 위험천만한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가만히 보니 열차에서 백인은 우리 둘뿐이었다. 표를 받으러 온 차장이 식사
 
절차를 설명해주었다. 아침, 점심, 저녁이 식당차에서 제공된다는 것과 한 남자가 종을 치면 식사하러 오라는 뜻이라고 했다. 어떤 우간다인 부부가 우리 칸 옆에서 멈춰 서더니 우간다에 가 본 적이 있느냐고 묻고는 자신들은 탄자니아까지 들어가는 아주 긴 사파리 여행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와 있다고 설명하면서 식사 때 자기들과 합석하겠느냐고 물었다.‘므준구(백인)’를 보고 놀란 듯 보이는 케냐 여인도 옆에 와 물었다.“우나엔다 와피(어디로 가세요)?”우리의 동료 여행객들 대부분이 우간다의 친척들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어느 순간, 광대한 평원이 우리 앞에 펼쳐졌다. 동아프리카를 북에서 남으로 가르며 넓게 쪼개진 땅, 리프트 밸리였다. 많은 사람들이 동아프리카 하면 떠올리는 것이 바로 이 지역의 풍경이다. 끝없이 펼쳐지는 평탄하고 건조한 들판, 멀리서 자고 있는 수백 마리의 가젤 영양. 20세기 초반에 대담한 여행객들을 철도로 유혹했던 것도 물론 이 풍경이었다. 찰스 밀러(Charles Miller)의 『미치광이 급행열차The Lunatic Express』에 보면, 이 유혹이 멋지게 포착되어 있다.

기관차 굴뚝에서 빨갛게 단 불똥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나오는데도 승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객차 지붕으로 올라갔다. 사냥감의 양이나 다양함에서 지구상 어디와도 비교할 수 없는 곳의 경치를 온전히 구경하기 위해서였다...열차가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지나가면 선로에 가까이 있던 얼룩말들이 잠시 고개를 쳐들지만 금새 저 하던 일로 돌아가, 별로 놀란 기색도 없이 풀을 우적우적 씹었다.

먹을 것을 원하는지 물어보려고 식당차 급사가 우리 칸에 들렀다. 그는 영국의 예의범절(짧은 흰색 상의와 흰색 바지)과 아프리카의 현실(그의 상의와 바지는 둘 다 찢어져 있었고 더러운 발이 드러나는 닳은 고무 샌들을 신고 있었다)을 합쳐 놓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미하엘과 나는 식당차로 가 앉았다. 열차는 좌우로 흔들거리며 나이로비 북부의 차 생산

 
지로 높이 높이 오르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산등성이를 힘겹게 기어오르느라 속도도 떨어져 있었다. 우리 맞은편에는 부티나 보이는 케냐인 신사가 앉아 있었다. 풀먹인 하얀 식탁보 위에는 은으로 된 묵직한 식탁용 나이프와 포크가 놓여 있고‘동아프리카 철도’란 로고가 새겨진 얇은 자기 접시들이 양옆으로 펼쳐져 있었다. 모두 식민지 시대의 것들이었다. 우리는 잠시 농담을 주고 받은 후 메뉴를 의논했다. 마렝고 소스를 곁들인 닭고기,‘우갈리’와‘수쿠마’, 닭고기 카레가 선택되었다.“이 열차, 음식이 어때요?”내가 슬쩍 물었다.“먹을 만한 것 같아요?”나이로비에서도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 힘든데 열차 안이야 오죽하랴 하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그럼요, 아주 훌륭해요.”신사가 말했다. 미하엘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제가 장담합니다.”남자가 껄껄대고 웃었다.“제가 바로 케냐 철도 위생 검사관이거든요.”위생 검사관이 장담한 대로 과연 훌륭한 음식이었다.“이 다음에는 카레를 주문해 보세요.”그가 음식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제 아내가 그 비법을 소개했거든요.”나이로비-캄팔라행 열차는 일주일에 한 차례밖에 운행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가 지나가는 작은 마을들에서는 열차 지나가는 것이 대단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므준구! 므준구! 므준구다!”열차가 지나가자 지저분한 오두막에서 달려 나온 맨발의 아이들이 외쳐댔다. 이것은 동아프리카에서 피부가 흰 사람을 무조건 지칭하는 말이다. 이 단어의 유래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었다. 제일 그럴듯한 것은‘므준구’가‘원형 교차로’(traffic roundabout)를 뜻하는 스와힐리어라는 설명이다. 영국인들이 도입한 이 혁신적인 방식이 토착민들의 눈에는 너무나 특이해 보였으므로 영국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한 키쿠유 여성이 내게 말한 바에 따르면,‘roundabout'[빙 두르다, 즉, 넌지시 말하다--역주]은 서구인들의 사고방식을 아주 잘 설명해주는 개념이기도 하다). 이 단어는 서구인들의 언어를 지칭하는 다목적 용어,‘키준구’의 어근으로도 쓰였다. 케냐의 시골 사람들이“시파하무 키준구(나는 서양 말을 못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나도 들어본 적이 있다. 이 독특한 용어는 내가 볼 때,‘아프리카 말’을 배우려니 힘들지 않느냐고 내게 물어보는 서구인들에 대한 정당한 앙갚음이었다. 열차가 케냐의 고지대로 기어오르자 공기가 점차 선선해졌는데 생각보다 상쾌하고 맑은 공기였다. 1930년대에 대영제국 치하의 동아프리카를 방문하고 『먼 나라 사람들Remote People』이라는 책을 써서 상세히 기록했던 이블린 워(Evelyn Waugh)는 고지대의 기후에 대해 이렇게 적어 놓았다.“거침없이 쏟아져 내리는 지극히 영롱하고 화사한 햇빛, 여명보다 더 깨끗한 일광, 거기에는 어딘지 달의 분위기가 있고, 서늘함이란 말은 너무나 부적절해 보인다.”파도처럼 굽이치는 눈부신 녹색의 카펫이 눈앞에 펼쳐졌다. 끝없이 뻗어나간 차 농장 밭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허리를 굽히고 차를 따고 있었다. 열차가 더 높이 올라가자 마침내 우리는 첩첩이 이어진 상록수의 제방으로 들어갔다.“마치 바바리아[Bavaria: 독일 남부의 주--역주] 같아.”미하엘이 말했다. 내가 볼 때는 메인[Maine: 미국 동북부의 주--역주]이나 아디론댁스[Adirondacks: 미국 뉴욕주 북동부의 산맥--역주] 같은데. 저녁 식사를 마치고 우리 칸으로 돌아와 보니, 비닐 좌석에 깨끗하고 하얀 침대 시트가 놓여 있었다. 우리는 자려고 자리에 누웠다. 이제 바깥은 완전히 암흑이었고 칠흑 같은 하늘에 별들이 총총했다. 밤사이 열차는 우간다로 넘어와 있었다.“토로로! 토로로[케냐와 접한 우간
 
다의 도시--역주]!”우리는 급사의 고함 소리에 화들짝 잠을 깼다. 그때까지 내가 기차로 국경을 넘어 본 것은 유럽에서의 경험이 전부였는데, 유럽에서는 급사에게 여권을 넘겨주면 자는 사이에 급사가 모든 일을 처리해주었다. 그러나 동아프리카에서는 승객이 자다가 일어나 기차에서 내려, 차가운 어둠 속에서 길게 줄지어 서 있어야 했다. 졸린지 뚱한 표정의 우간다 관리가 우리의 여권에 연한 자주색의 삼각형 도장을 찍어주었는데,‘토로로, 우간다’라고 찍혀 있었다. 기차가 다시 출발했고 부드러운 흔들림 속에  우리도 다시 잠으로 빠져 들었다. 아침이 되자 우리는 창 가리개를 걷었다. 눈부신 햇살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 눈길 닿는 곳 어디나 뜨거운 바람결 속에 일렁이는 녹색의 키 큰 풀들, 습지의 갈대처럼 호리호리한 줄기 위에서 흔들거리는 파피루스 꽃들뿐이었다. 우간다 아이들이 뒤쫓아 오는 가운데 열차는 아민 시대의 황폐함이 그대로 남아 있는 국토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선로 변에는 진짜 나무줄기로 된 전신주들이 양옆으로 전선을 척척 늘어뜨린 채 힘없이 서 있었다. 노쇠한 콘크리트 건물들에는 총탄 구멍이 숭숭 나 있었다. 이것이‘아프리카의 진주’의 현실이었다. 몇 시간 후 우리는 진자의 폭포들을 지났다. 여기가 바로 1850년대에 영국의 탐험가 리처드 프랜시스 버턴 경과 존 해닝 스페케가 찾아 나섰던 고대‘나일 강의 원류’였다. 놀랍도록 가녀린 줄기를 가진 키 크고 여윈 풀들이 바람결에 흔들렸다.“이게 바로 카사바입니다. 우간다와 케냐 서부의 주식(主食)이죠.”환타 음료와 또 다른 주식을 들고 지나가던 급사가 말했다.

캄팔라는 나이로비보다 훨씬 더 지저분하고 국제화가 덜 된 도시였다. 우간다의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이디 아민 치하에서 그리고 그의 전복 이후 발발한 야만적인 내전에서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 사암으로 지어진 수수한 기차역은 총알구멍이 숭숭 얽어 있고 기관총 총격전으로 사방 벽이 깎여 나간 상태였다. 우리는 역에서 세 명의 예수회 회원을 만나 그들의 차를 타고 지저분한 거리들을 달려 하비에르 하우스로 갔다. 캄팔라의 다양한 봉사단체에서 일하는 15명 가량의 예수회 회원이 기거하는 공동체였다. 한 회원은 마케레레 대학에서 에이즈 클리닉을 운영하면서 에이즈(우간다에서는 이 병이‘슬림(slim)’으로 알려져 있다)를 연구하는 의사였다. 거기서 몇 백 미터 거리에는 에이즈 환자 전담 병원이랄 수 있는 느삼비야 병원이 있고 그곳에도 두 명의 수련 수사가 일하고 있었다. 나는 에이즈로 인해 우간다의 인구가 얼마나 심각하게 줄었는지에 대해선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캄팔라의 거의 모든 거리 귀퉁이에 관 제작소가 들어서 있는 것을 보니 상황이 짐작되고도 남았다. 도로변마다 조잡한 목재 관들이 쌓여 있었는데 개중에는 무려 열 개나 포개져 있는 곳도 있었다. 우간다의 여러 소읍에는 에이즈로 부모를 모두 잃어‘에이즈 고아’로 불리는 아이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하비에르 하우스는 동아프리카 각지에 흩어져 있는 여러 종교 단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야자수, 오렌지색 극락조화, 끝이 뾰족한 녹색의 사이잘과 알로에, 부겐빌레아들이 심어진 넓은 안뜰을 중심으로 방들이 수도원 형태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공간은 거실, 식당, 큼직한 원형의 성당(엄청나게 큰 우간다 전통 북이 제대를 대신하고 있었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자그만 정원은 특히, 다양한 종류의 바나나 나무 열네 그루를 자랑했는데 식당에서 짚 바구니로 바나나 열매를 직접 딸 수 있었다. 식당의 식탁들에는, 작고 하얀 알약-말라리아 특효약인 클로로퀸-이 가득 담긴 자기 사발들이 놓여 있었다. 공동체 식구들이 매일 복용하는 약이었다. 일주일의 캄팔라 관광이 중반쯤으로 접어들었을 때 미하엘과 나는 캄팔라 역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표를 사 놓기로 했다.‘티켓’이라고 표시된 방에는 큼직한 탁자만 하나 놓여 있을 뿐 텅텅 비어 있었다. 탁자 위에는 꽃무늬 면 원피스 차림의 한 여자가 반듯이 누워 오전 중반의 시각에 잠을 자고 있었다.“실례합니다”내가 말했다.  -18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