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유랑자

“난민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2013-11-04     김보연 기자

제임스 마틴이 선교사로서 동아프리카 난민들과 함께 생활한 이야기를 담았다. 전쟁의 세기가 양산한 무수한 아프리카 난민들, 그들을 돕고자 파견된 선교사. 너무 진지하고 근본적인 주제들이어서 자칫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회 난민 봉사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동아프리카 난민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진솔하고 수채화처럼 생생한지 책장을 넘기다 보면 저자와 난민들과 내가 어느새 하나가 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화에 등장하는 난민 하나하나가 마치 내 이웃들처럼 느껴지면서, 그들의 걱정거리가 내 걱정이 되고 그들의 웃음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게 된다. 그들이 울면서 지나온 내력을 풀어 놓을 때는 가슴 뭉클한 깊은 공감에 휩싸이게 된다.

지은이/제임스 마틴ㆍ옮긴이/송은경ㆍ펴낸이/정진석ㆍ펴낸곳/가톨릭출판사

▲ 저자 제임스 마틴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응?” “다음 주 돌아가는 표를 사고 싶은데요.” 미하엘이 기대감이 묻어나는 어조로 말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여자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녀가 눈을 비비고 원피스를 가다듬었다. “다음 화요일 전에는 표를 팔지 않아요.” “열차 출발 바로 전날에요?” “네. 그 열차가 나이로비를 출발했는지 일단 확인이 되어야만 표를 팔 수 있거든요.” 우리는 잠시 고민했 다.“예약도 안 되나요?” 더러운 바닥을 가로질러 날고 있던 냅킨 한 장이 그녀의 발 옆에 앉았다. 여자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죠?” 내가 대답했다. 그녀가 방금 주운 냅킨 위에다 이름을 기록했다. “며칠에 떠날 계획인가요?” “음...글쎄요.” 실내 맞은편에 이디 아민의 초상화가 박힌 달력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도무지 날짜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오늘이 분명 화요일이지? 날짜로는 15일 아니던가? 그런데 왜 15일이 수요일로 되어 있지? 잠시 후에야 나는 그것이 1975년도 달력이란 것을 깨달았다. 저건 아무 쓸모도 없겠군. 그리하여 나는 그냥 다음 화요일이라고만 대답했다. 여자가 내 대답을 기록하더니 그 더러운 냅킨을 탁자 서랍에 넣었다.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자, 이제 예약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탁자 위로 올라가 뒹굴었다. 그 다음 날, 우리는 우간다 최북단의 아쥬마니로 날아갈 채비를 했다. 우리가 탈 비행기는 이 나라 각지를 정기적으로 왕복하며 사목자들과 적십자 종사자, 수십 명에 달하는 유엔 직원들을 실어 나르는 루터파 단체인 ‘선교 항공 협회’(모두들 MAF로 불렀다)의 비행기였다. 우간다를 죽 돌아보려면 MAF가 제공하는 이 자그만 비행기들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쌀쌀한 우간다의 새벽에 작은 버스를 탔고 버스는 우리를 영국 공군 베테랑인 한 조종사의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차를 타고 엔테베 공항으로 갔다.

나는 엔테베에서 출발하는 여행이 아주 흥미로울 것이라 기대했다. 1970년대에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비행기 납치를 시도했으나 이스라엘 특수부대의 활약으로 실패로 그쳤던 사건이 기억에 생생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잊어버리기라도 할까 봐, 케냐의 텔레비전은 싸구려 TV 영화 〈엔테베 인질 구출작전Raid on Entebbe〉을 거의 매달 방송해주고 있었다. 나는 그 비행기의 흔적이라도 남아 있으려나 궁금해졌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떨쳐 버렸다. 벌써 20년도 더 된 이야기가 아닌가. 공항이 가까워지자 이상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어두운 녹색으로 칠해진 높다란 말뚝 울타리가 공항 주위를 두르고 있어 공항 내부를 전혀 볼 수 없었다. 부서진 울타리 구멍으로 슬쩍 보니, 녹슨 비행기 한 대가 활주로에 쓸쓸하게 앉아 있었다. 조종사가 지나가는 말로 얘기했다. “아, 저게 바로 그 이스라엘 비행기죠.”그게 정말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비행기는 구(舊)공항 터미널 옆에 앉아 있었는데, 폭격으로 망가진 모습이 그 영화에서 본 것과 아주 똑같았다. 비록 폭삭 내려앉은 터미널 지붕 틈새로 키 큰 야자수들이 자라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납치 사건이 해결된 뒤에도 당국은 저 비행기를 옮길 수 없었어요. 그리고 터미널도 헐자니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그래서 저쪽 편에다 터미널을 새로 지었죠.” 조종사가 훨씬 산뜻하긴 해도 규모는 좀 더 작은 건물을 가리켰다. “그게 무슨 납치 사건이었죠?” 미하엘이 물었다. “이런, 맙소사.” 내가 깜짝 놀라 대답했

 
다. “저 유명한 엔테베 인질 구출 작전 말일세!” 독일 텔레비전은 그 영화를 미국이나 케냐의 텔레비전들만큼 자주 방송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엔테베 공항에선 물론 가방 검사 절차도 없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곧장 비행기로 걸어갔다. 플라스틱으로 된 자그만 욕실용 저울에 올라가 몸무게를 잰 것이 우리가 거친 유일한 절차였다. 우리가 그 경비행기를 탈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지 어떤지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까다롭지 않은 편안한 절차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처럼 비행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자신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비행기를 보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좌석 다섯 개의 자그만 비행기가 활주로에 쪼그리고 있고 그 옆에는 에티오피아 항공 소속 제트기가 앉아 있었다. “아주 가벼우시네.” 우리의 조종사가 말했다. “뒷좌석에 앉으셔도 되겠어요.” 나는 그 작은 비행기에 올라탔다. 안에서 보니 더 작고 연약해 보였다. 조종사가 담요, 지도, 깡통 식품들, 물병들, 비상용 응급 처치함 등, 실내의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비집고 스티로폼으로 된 소풍용 냉장고를 내게 어렵사리 건네주었다. “이게 뭐죠?” 내가 물었다.“혈액입니다.” 그가 말했다. “자이레의 적십자에 혈액을 공수할 거예요.” 우리가 자이레로 간다고? 몇 분 후 다섯 명의 승객- 미하엘과 나, 적십자 종사자, 유니세프[유엔 아동 기금--역주] 소속 의사, 우간다 정부 대표-이 모두 MAF 비행기에 비좁게 자리를 잡았다. ‘선교 항공 협회’이니 만큼 조종사의 인도 하에 간단한 기도를 올렸다. “하느님 아버지, 우리를 이 여행에서 지켜주시고 무사히 목적지까지 보내주시어 저희가 당신의 사업을 완수할 수 있게 해주소서. 지난번처럼 연료통 마개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게끔 해주소서. 아멘.” 나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특히 연료통 마개를 굽어 살펴주시기를 빌었다. 비행기에 시동이 걸렸다. 고막이 터질 듯한 굉음과 함께 비행기가 가볍게 흔들거리며 톡톡 튀듯 활주로를 질주했다. 나이로비에서 타던 내 지프가 잠깐 떠올랐다. 에티오피아 제트기를 지나고 새 터미널과 파손된 이스라엘 제트기를 지나자 비행기가 갑자기 심하게 기울며 위로 솟았다. 밑을 내려다보니 구터미널의 망가진 지붕이 보였다.

몇 분 후 우리는 울창한 우간다 정글 상공을 날고 있었다. “저게 바로 ‘루웨로 트라이앵글(Ruwero

▲ 미코노 센터에서 판매할 수공예

    목걸이를 보는 제임스 마틴 신부

Triangle)’이에요!” 조종사가 고함을 치며 가리켰다. 나이로비에 사는 우간다 난민들에게서 자주 들어 본 이름이었다. 지난날 백만 명 가까운 바간다 부족의 근거지였던 이 삼각지대는 1980년대 초에 내전의 중심 무대로 변하고 말았다. 1981년부터 5년 동안 우간다 군부가 이 루웨로 트라이앵글을 봉쇄한 후 부락들을 파괴하고 25만에 가까운 사람들을 살해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오지나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빽빽한 녹색의 정글과 우리 비행기의 자그만 회색 그림자뿐이었다. 비행기가 엘버트호수(자이레 쪽에서는 ‘모부투 세세 세코’호수라 부른다)를 지나면서 경치가 장관을 이루었지만 나는 어서 착륙하기만 고대하고 있었다. 비행기가 덜거덕거리며 불길하게 칙칙 푹푹 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자이레(현 콩고) 국경을 넘자마자 착륙하여, 가져온 혈액을 넘겨줄 예정이었다. “저기 발착장이 있어요.” 요란한 소음 속에서 조종사가 고함쳤다. 어디? 밑을 내려다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땅이 점점 가까워졌고 쿵 하는 금속성 소리와 함께 비행기가 착륙했다. 말 그대로 비행기가 내리면 그곳이 곧 발착장이었다. 가방과 상자들, 지도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내가 들고 있던 휴대용 혈액 냉장고도 휙 날아올랐으나 기체 천장과 충돌하는 것은 간신히 피했다. 덤불 속에서 한 남자가 비행기 쪽으로 달려왔다. “혈액을 나한테 주세요!” 조종사가 말했다. 그리고 시동을 그대로 걸어 둔 채 냉장고를 남자에게 건네주고는 다시 이륙했다. 우리는 곧 칙칙 푹푹거리며 전진하여 더 많은 정글과 샴바, 굽이치는 산들을 지났다. 그러다 높이 치솟은 구름 무더기를
▲ 케냐의 한 빈민가 가게 앞에서
만났다. “돌아갑니다!” 우리의 조종사가 소리쳤고, 비행기가 아슬아슬하게 기울었다. 빈 소다수 병들이 날아올라 기체 벽면에 부딪혔다. 순조로운 비행이 한 시간 더 이어진 끝에 아쥬마니에 도착했다. 이 소읍에는 무선통신 장치가 없었으므로 우리는 친구들에게 도착을 알리기 위해 도시 상공을 빙 돌았다. 밑을 보니 사람들이 집에서 달려 나와 공중을 향해 손을 흔들고는 랜드로버에 올라탔다. 우리의 작은 비행기는 자갈밭에 쿵 내려앉았다. 말라 버린 갈색 풀밭으로 불어오는 공기가 엄청나게 뜨겁고 건조했다. “나쁘진 않군.” 조종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아까 왜 구름을 빙 돌았어요?” 내가 슬쩍 물어보았다. “레이더가 없잖아요. 구름 덩어리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어요.” 그가 껄껄대며 말했다. “새 떼, 다른 비행기 등등...” 그가 멍하니 말꼬리를 흐리며 비행기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몇 분 후 우리의 친구들이 랜드로버를 타고 도착했다. 용감무쌍한 호주인 모린 수녀가 차에서 뛰어내렸다. “아이고, 반가워요! 결국 해내셨네.” 그녀가 소리쳤다. “좀 지루한 여행이었죠?” 잠시 후 우리는 아쥬

 
마니로 들어갔다. 케냐에서 볼 수 있는 소읍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작은 마을이었다. 콘크리트를 부어 세운 건물들, 판자벽에 양철 지붕을 얹은 가게들, 찢어진 옷을 입고 지저분한 거리를 쏘다니는 사람들. 읍 중심부 근처에 위치한 JRS 단지에는 낮은 울타리가 둘러져 있었다. 단지 한가운데에 자그만 콘크리트 방갈로가 하나 있고 그 주위로 수단풍의 ‘투켈’(짚으로 지붕을 이은 지저분한 오두막)들이 줄지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팀이 세운 또 하나의 작은 건물은 일종의 사무실이었는데 낡은 컴퓨터와 단파 라디오를 작동시킬 수 있도록 발전기가 갖추어져 있었다. 단파용 라디오는 그들과 캄팔라의 본부를 연결해주는 수단이었다. 이 공동체는 예수회 사제들과 신학생들(호주, 미국, 에티오피아 출신), 수녀들(호주인 두 명과 미국인 한 명), 미국인 교구사제, 평신도(독일인)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 특이했다. 이 식구들이 모두 함께 생활하면서, 몇 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캠프의 수천 명에 달하는 수단 난민들을 대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것은 종교 공동체 치고는 상당히 혁신적인 주거 형태였다. (예를 들어 유럽의 일부 예수회 공동체들은 여성들이 갈 수 있는 곳과 없는 곳을 소폭이지만 여전히 제한하고 있다.) 나는 동아프리카 예수회 형제들이 이 방면에서 앞서가고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뿌듯했다. JRS 팀은 신체적 위험이 매우 큰 상황 속에 살면서 일하고 있었다. 수단 남부의 군사 조직인 ‘수단 인민 해방군’이 세 개 이상의 분파로 쪼개지면서 분파간 다툼이 정기적으로 발발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우간다 반도들과 산적 무리들이 걸핏하면 출몰해 우간다 지역민들과 수단 난민들, 봉사자들을 대상으로 강도짓을 하고 사람을 구타하고 살해하기까지 했다. 이들은 캄팔라의 요웨리 무세베니 대통령을 지지하거나, 지역 분파 지도자들을 추종하거나, 혹은 외부와 연계 없이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무리들이었다. 내가 도착하기 바로 전 주에도 JRS 팀의 세 식구가 강도를 만났다.  내가 그곳에 간 첫날 밤, ‘자비의 자매회’소속인 호주 출신 마가렛 수녀가 식당 텐트에서 쉬쉬 소리를 내는 등유 램프 불빛 아래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당시 그녀는 아쥬마니의 활동 팀장으로 있는 호주 출신 예수회 회원 첼소 신부, 탄자니아 출신의 젊은 예수회 회원 케시와 함께 난민 캠프에 보낼 식량을 옮기고 있었다. 그들의 랜드로버에는 옥수수 가루와 밀가루가 든 커다란 자루들이 잔뜩 실려 있었다. 세 사람이 울퉁불퉁한 우간다의 도로를 달려가고 있을 때, 총을 멘 젊은이 하나가 지프 앞으로 불쑥 나타나 차를 세우라고 손짓했다. 그러나 차를 세우고 지프를 넘겨준다고 해서 안전이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마가렛 수녀는 일단 속력을 줄였다가 차가 청년과 가까워지는 순간 갑
 
자기 속력을 냈다. 차가 속력을 내자 강도가 총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아주 어린 청년이어서 기관총을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는 것 같았어요.” 마가렛 수녀가 설명했다. 차에 총탄이 비오듯 쏟아졌다. 그 와중에 랜드로버가 큰 충돌을 일으켜 타고 있던 사람들이 공중으로 치솟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들은 겁에 질린 채 마구 속력을 냈는데, 나중에 보니 첼소 신부가 팔뚝에 한 방 맞은 것 외에는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그날 늦은 시각에야 숙소로 돌아온 그들은 첼소 신부의 상처를 봐준 뒤에 랜드로버의 파손 정도를 점검했다. 지프 좌석이나 좌석 뒤에 쌓아 둔 밀가루 자루들에 총탄이 푹푹 박혀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앉아 있던 자리를 뚫은 총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상황으로 보건대 총탄이 그들의 몸을 관통했어야 마땅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랜드로버가 큰 충돌을 일으킨 바로 그 시점에 총탄들이 좌석을 관통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말해, 차가 충돌하여 세 사람이 좌석을 박차고 튀어오른 그 순간에 총탄들이 좌석을 뚫고 밀가루 자루들을 뚫고 그들 밑으로 지나갔던 것이다. 마가렛 수녀와 첼소 신부와 케시 수사는 이것을 기적 같은 일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게 바로 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쥬마니의 주 건물은 바깥에 있는 ‘투켈’들보다는 훨씬 안락했으나 수돗물이나 전기가 없었다. 전기가 없는데도 식구들은 그다지 불편함을 느끼는 것 같지 않았다. 음식은 석탄불에서 요리했고 일몰과 함께 하루가 끝났다. 그러나 물을 확보하는 일이 고된 시련이었다. 매일같이 마을의 샘으로 차를 타고 가 물통과 플라스틱 통으로 물을 길어 와야 했다. 여과하여 끓인 물은 식수로 쓰고 나머지 물은 샤워나 빨래에 이용했다. 이 집에 딸린 화장실은 아쥬마니에 수도가 들어왔던 아민 이전 시절의 유물이었다. 지금은 샘물을 물통으로 퍼부어 변기를 씻어 내렸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바닥에 구멍을 파고 목재 오두막으로 씌운 옥외 변소를 이용했다. 이 여행에 나서기 몇 달 전, 나는 메리 팻 로프터스와 함께 나이로비에서 북쪽으로 50킬로미터쯤 떨어진 나쿠루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기술학교에서 ‘그리스도교 형제회’를 위해 일하는 자원 봉사자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들도 물을 끓여 쓰거나 정교한 장치로 걸러 내고 썼는데, 그들이 고안해 낸 그 정수기를 보니 무엇이든 함부로 낭비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이로비에 거주하면서 누리는 혜택이 있다면 바로 물이 (다소나마)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이로비에 와서 맞은 첫 10월에 《데일리 네이션》을 보니, 지난 석 달 동안 도시에 공급된 물이 정수 처리가 되지 않은 물이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그동안, 사람들이 대변도 보고 빨래도 하는 나이로비 호수의 물을 그대로 받아 마셨는데도 아무 탈이 없었다는 얘기였다. 나와 함께 사는 미국인 예수회 형제가 나이로비의 수돗물을 유리잔에 받아 창가에 얹어 놓고 지켜보는 일종의 실험을 해 보았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유리잔 속에서 ‘괴상한 생명체들’이 자라더라는 것이었다. 사실 나이로비를 찾아온 사람들이 병에 걸리는 원인은, 우리가 볼 때, 대부분 물에 있었다. 하지만 오래 살다 보면 내성이 생기는 것 같아 우리로선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그러나 나이로비 외곽이나 동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는 반드시 끓이고 여과한 물을 먹어야 했다. 아쥬마니 같은 곳에서 살 때 겪게 되는 어려움이 어떤 것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물과 전기가 없어 불편한 것은 물론이고, 질식할 듯한 무더위와 특히 먼지가 큰 장애물이었다. 나이로비의 경우에도, 도시를 떠도는 붉은 흙먼지가 하루 24시간 내내 바지와 신발을 뒤덮었다. 우기가 되면 운동화나 고무장화 바닥에 진흙이 들러붙어 긁어내려면 상당한 고생을 해야 했다. 아쥬마니에서의 골칫거리는 먼지였다. 미세한 갈색 입자들이 악취 나는 공중을 맴돌다가 사람의 눈과 코, 입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다녀온 후 나는 몇 주일에 걸쳐 옷가지에 묻은 먼지를 씻어내야 했다.

첫날 밤, 나는 ‘투켈’에서 자게 되었다. 사실, ‘잤다’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투켈’ 주위를 돌아다니는 큼직한 벌레들 소리를 들으며 찢어진 모기장 속에서 ‘밤을 보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벌레들은 모기장 안까지 요란하게 밀고 들어와 틈만 나면 나를 물어 댔다. 일찍이 내가 몸바사에서 깨달은 것이지만, 모기장은 아주 큰 벌레들한테나 효과가 있을 뿐 무더운 밤을 더욱 숨 막히게 만들었다.

- 19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