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유랑자

“난민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2013-11-29     김보연 기자

제임스 마틴이 선교사로서 동아프리카 난민들과 함께 생활한 이야기를 담았다. 전쟁의 세기가 양산한 무수한 아프리카 난민들, 그들을 돕고자 파견된 선교사. 너무 진지하고 근본적인 주제들이어서 자칫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회 난민 봉사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동아프리카 난민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진솔하고 수채화처럼 생생한지 책장을 넘기다 보면 저자와 난민들과 내가 어느새 하나가 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화에 등장하는 난민 하나하나가 마치 내 이웃들처럼 느껴지면서, 그들의 걱정거리가 내 걱정이 되고 그들의 웃음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게 된다. 그들이 울면서 지나온 내력을 풀어 놓을 때는 가슴 뭉클한 깊은 공감에 휩싸이게 된다.

지은이/제임스 마틴ㆍ옮긴이/송은경ㆍ펴낸이/정진석ㆍ펴낸곳/가톨릭출판사

 
이튿날 미하엘과 나는 인근의 캠프촌을 방문했다. 수단 남부에서 온 수십만의 사람들이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 다닥다닥 붙어 있는 먼지 쌓인 텐트-유엔에서 제공해준 파란 텐트-에서 살고 있었다. 내가 거기에서 본 첫 광경은 말 그대로 숨이 막힐 듯한 풍경이었다. 메마른 평원 위에 눈 닿는 데까지 하염없이 펼쳐지는 그곳은 그야말로 난민들만의 도시였다. 누런 먼지 구름과 요리하는 화덕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 자락들만이 그 풍경을 깰 뿐이었다. 마가렛 수녀가 캠프 중 한 곳을 구경시켜주었다. 우리는 천천히 걸어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나이로비의 빈민 지역과 흡사했는데 다만 이곳 아쥬마니에선 활기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달랐다. 난민들은 하릴없이 기다리고만 있는 듯 보였고 몽롱한 무력감이 캠프 위를 떠도는 것 같았다. 그 주일은 아쥬마니의 다른 날들처럼 천천히, 그리고 유유히 흘러갔다. 어느 날 아침, 우리는 JRS가 운영하는 학교 중 한 곳을 방문했다. 수단 아이들 수백 명이 나무 아래 놓인 소박한 벤치들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또 하루는, 해질 녘에 나일 강으로 나가 보았다. 기울어 가는 햇살 속에 어디선가 개코원숭이들이 깩깩거리고 여자들이 토기 단지로 물을 긷고 있었다. 우리의 체류 마지막 날인 주일에는, 커다란 나무 아래 난민 몇 명을 앉혀 놓고 첼소 신부가가 미사를 집전했다. 가벼운 바람이 불어오자 죽은 나뭇잎들이 서걱거리고 먼지 구름이 일었다. 하느님의 중재를 기원하는 그들의 소박한 기도는 30분 동안 계속되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위독하신 어머니를 위해, 혹은 잃어버린 내 자식들을 찾게 해 달라고. 우리는 월요일에 다시 그 작은 MAF 비행기를 타고 엔테베로 돌아왔고 마침내 캄팔라에서 나이로비행 열차에 올랐다. 곡절이야 어찌됐든 우리의 표가 결국 제대로 예약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20. ‘빨리빨리’는 복이 없다
 속담은 어떤 공동체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거울이자, 남들에게 자신을 보여주는 무대이다.
 - 패트릭 칼리롬베(Patrick A. Kalilombe)의 『아프리카 말로 하는 신학 Towards an African Narrative Theology』 중에서

케냐의 일상적인 인사말인 ‘잠보’에는, ‘안녕하세요’라는 일반적인 뜻 말고도 다른 의미가 하나 함축되어 있다. 이 말은 본래 ‘문제 혹은 힘든 일’을 뜻하는 스와힐리어이다. 따라서 “잠보?”라고 인사하면 “무슨 문제가 있으세요?”라는 뜻으로도 받아들여진다. 여기에 대한 대답도 보통‘잠보’이지만 때로는 ‘닝기’라고도 한다. ‘힘든 일이 많다’는 뜻이다. 힘든 일을 뜻하는 말로 ‘시다’나 ‘마타타’도 있다.

‘하쿠나 마타타’의 본래 뜻은 ‘걱정이 없다’는 뜻이다. 디즈니 영화 〈라이언 킹 The Lion King〉의 팬들이 알면 기분 좋을 얘기지만[이 영화에 ‘하쿠나 마타타’라는 제목의 노래가 나온다--역주]

 
실제에선 음악성이 좀 떨어지는 ‘하쿠나 시다’라는 표현이 더 많이 쓰인다. 힘든 일이나 걱정거리를 뜻하는 단어가 이처럼 많다는 것은, 케냐의 삶을 설명하는 데 이 단어들이 그만큼 효과가 있다는 뜻이다. 에스키모어에는 눈을 뜻하는 단어가 백 개나 있다는 사실이 일찌감치 확인되었듯 말이다. 동아프리카라는 인간의 요람은 때로, 문젯거리와 혼란의 요람으로 보였다. 물론 가난, 질병, 무주택, 기아, 폭력, 정치적 불안정 등 보다‘마시다 마쿠브와(큰 문제)’들이 존재한다. 이런 것들은 난민들이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문제들이었다. (여기에다 경찰과 지역 케냐인들에 의한 괴롭힘까지 추가해야 완벽한 목록이 될 테지만) 그러나 대화에 좀 더 자주 오르내리는 ‘시다’는, 부패와 식민주의로 휘청거리는 빈국이라면 어디서나 만연해 있는 보다 사소한 문제들을 의미했다. 시동이 걸리지 않는 차, 켜지지 않는 전등, 닫히지 않는 창문, 오지 않는 버스, 문을 열지 않는 관공서(직원들이 있는데도 일하지 않는 경우) 등등.  
그 결과, ‘폴레(pole, 원 발음은 ‘poh-lay’)’라는 스와힐리 단어가 케냐에서 가장 흔하게 쓰이는 말이 되어 버렸다. ‘미안하다’는 뜻의 이 다목적 용어는 거의 모든 상황에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발이 부딪혔을 때 “폴레, 브라더!”잔을 깨뜨렸을 때, 좀 더 심각한 상황으로는, 일자리를 잃거나, 중병에 걸리거나, 심지어 배우자가 사망한 경우까지도 ‘폴레’를 사용한다. 흥미로운 것은 ‘폴레 폴레’라고 하면 ‘천
 
천히’혹은‘속도를 줄이라’는 뜻이 된다는 것이다. 난민들에게 사업이 어떻게 되어 가느냐고 물으면 으레 나오는 대답이 ‘투나엔델레아 폴레 폴레(슬슬 나아지고 있어요)’였다. 한번은 ‘와이야키 웨이’를 달리다가 표지판과 마주쳤는데, 전방에 도로 공사가 진행 중이니 주의하라는 뜻으로 ‘폴레 폴레’(속도를 줄이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도로 공사가 몇 달 진행된 후에 보니 표지판이 두 동강 나 있고 그중 한쪽만 남아 있었다. 결국 ‘폴레(미안합니다)’로 되어 버린 셈이었다. 실제로 중대한 실수나 혼란이 너무 많다 보니 일부 외국인 봉사자들 사이에 이런 표현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이번에도 아프리카가 승리했다.”이것은 어떤 일을 계획대로, 다시 말해 제때 혹은 당신이 원했던 방식으로 완수할 수 있을 것이라 가정했다가 낭패를 보았을 때 사용되곤 했다. 예를 들어 아침에 일찍 일어나 일찌감치 일터에 도착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해 보자. 그런데 집에 있는 물탱크에 밤새 물이 채워지지 않아 수돗물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물통으로 찬물을 부어 샤워하느라 삼십 분이 걸리는 바람에 당신은 결국 평소보다 더 늦게 출근하게 되었다. 당신이 어렵사리 직장에 도착했을 때 친구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번에도 아프리카가 승리했군.” “오, 노(Oh no)”.  이것은 우리 사무실 청소를 담당했던 친절한 케냐 여성 버지니아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예기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을 때 그녀에게서 자동적으로 나오는-그러나 엄청나게 자제된 목소리로-이 ‘오, 노’를 들을 때마다 내가 정말 케냐에 와 있구나 하고 실감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미코노 센터의 현관문을 따고 들어간 버지니아와 나는 문 아래쪽에서 물이 새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매장으로 들어가 보니 바닥에 더러운 물이 3cm 가량 고여 있었다. “오, 노.”버지니아가 말했다. 그 전날 버지니아가 수도꼭지들을 틀어 놓았다는데 물탱크들이 텅 비어 있었다. 불행하게도 그녀가 수도꼭지 잠그는 것을 소홀히 하여 밤새 물탱크들이 넘치고 개수대와 바닥까지 물이 넘친 것이었다. 매장 바닥에 전시해 놓은 짚 돗자리, 바구니, 깔개들이 모조리 못 쓰게 되었다. 미코노 센터로 이사 온 직후, 뒷문 앞에 쇠 대문을 달아 달라고 현지인 ‘푼디(인부)’에게 부탁한 적이 있었다. 칸게미에는 강도가 자주 발생했는데, 우리에게는 난민들에게서 산 물건들뿐 아니라 컴퓨터와 금고도 있었으므로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컴퓨터와 금고는 매장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는 위치에 있었다. 어느 날 오후 난민의 집을 방문하고 돌아와 보니 ‘푼디’가 뒤쪽 현관에서 연장을 챙기고 있고 버지니아는 바닥에 떨어진 돌 조각들을 쓸어 내고 있었다. ‘푼디’가 집 외벽 밑으로 깊은 구멍들을 파면서 생긴 쓰레기들이었다. “퀴샤(끝났어요)!” 인부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런데 뭔가가 좀 잘못된 것 같았다. 그가 쇠창살이 얼마나 튼튼한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을 때 내가 새 대문을 열어 보았다. 대문은 안쪽으로, 다시 말해 집 쪽으로 열리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집에 달린 뒷문이 ‘바깥으로’ 열리게 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이제 뒷문을 사용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오, 노.”내가 대문을 열자, 열려 있던 뒷문과 대문이 탕 부딪히는 것을 보고 버지니아가 말했다. “자, 이걸 어떻게 하면 좋죠?” 내가 ‘푼디’에게 물었다.“이래 가지고는 아무도 밖으로 나갈 수가 없잖아요.” “그래요, 브라더.” 그가 흡족한 투로 말했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지요!” 이처럼 사소한 ‘시다(문제)’들이 이어짐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보다 인간적이고 수용적인 인생관이 생겨난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일이 잘못되고, 늦어지더라도 누구나 으레 그러려니 하기 때문에 큰 소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내 지프는 걸핏하면 고장 나고 과열되거나 타이어에 펑크가 나서, 싱 씨의 BP[세계적으로 유명한 석유 회사인 ‘브리티시 피트로울리엄(British Petroleum)’--역주] 주유소를 급히 찾아야 할 때가 많았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미코노 센터에서의 약속에 늦곤 했다. 그러나 난민들이 언짢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쿠나 시다(문제 없어요), 브라더!” 그리고 나 역시도 한 두 시간 혹은 하루 이틀 기다리게 되더라도 안달하지 않는 법을 깨쳤다. 어떤 상황이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 늦더라도 결국에는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난민들은 늘 내게 말했다. “폴레 폴레(천천히 천천히).” 어쩌면 난민들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일이 늦어진다고 걱정하면서 지낼 필요가 있을까? 결국에는 다 되게끔 되어 있는 것을. 급하게 산다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예전에 버지니아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하라카 하라카, 하이나 바라카.” 대충 옮겨 보자면 이런 얘기다. ‘빨리빨리’는 복이 없다.

21. 돈 좀 주세요.

우리 인생의 결실은 자기가 한 말을 돌아보고 자기가 한 일의 가치를 의문하는 능력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완전히 믿는 사람은 아무 결실도 맺지 못하게 되어 있다.  -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새 명상의 씨앗 New Seeds of Contemplation』

2년째로 접어들면서 나는 케냐에서의 생활이 마음 편하게 느껴졌다. 미코노 센터의 일은 정말 즐거웠다.

 
수백 명의 난민들과 그 자녀들, 배우자, 이웃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관심사도 알게 되었다. 이제 그곳은 우리 예수회 공동체만큼이나 편안하게 느껴졌다. 한 아일랜드인 가족을 알게 된 것도 내게는 행운이었다. 카렌 근처에 살고 있던 마이크와 제신타 딕슨 부부가 짐 코리건과 미하엘 쇠프와 나를 자주 초대하곤 했던 것이다. 그들의 집에서 함께 보낸 시간들은 빈민 지역에서 일하는 데 절실히 필요한 강장제와도 같았다. 제신타도 이따금 나이로비에서 열리는 바자회에 우리의 매장을 배치해주어 미코노 센터를 도왔다. 당시 우리는 이러한 바자회들에 점점 더 많이 참여하고 있었다. 내가 사귄 또 한 명의 친구는 예수회 공동체에서 안내원으로 일했던 도마틸라 키에티였다. 돌이켜 보건대 그녀는 내게 케냐 사회를 제대로 알게 해준 완벽한 가이드였다. 악수하는 적절한 요령, 케냐의 각종 음식을 제대로 먹는 법, 케냐 내의 다양한 인종 집단들의 차이, 언어 문제(그녀는 내게 급한 대로 써먹을 수 있는 키쿠유어 인사말을 몇 개 가르쳐주었는데, 항상 큰 효과를 보았다)등 문화적으로 미묘한 사항이나 동아프리카 특유의 전통이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 때면 나이로비 출신의 도마틸라가 항상 답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도마틸라의 업무에 속했다. 내가 나이로비에 온 초기에 ‘호디(들어가도 됩니까)?’와 ‘카리부(어서 오세요)’때문에 한바탕 난리를 치를 때 도와주었던 사람도 바로 그녀였다.        

도마틸라는 나를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해준 최초의 케냐인이기도 했다. 그녀가 나의 방문을 위해 하루 종일 준비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그날 저녁에 나온 음식들은 다음과 같았다. 우갈리, 수쿠마, 소고기 스튜, 샐러드(케냐의 샐러드는 당근을 얇게 잘라 산더미처럼 놓고 그 위에 마요네즈를 살짝 뿌린 것이다), 차파티스(납작하게 빚은 밀가루 반죽을 프라이팬에 익힌 것). 식사를 하면서 그녀가 말하기를, 케냐에서는 차파티스를 성탄절에 먹는 것이 전통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인도 음식이 케냐의 특식이라니 참 희한하다고 했더니 도마틸라가 기겁을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차파티스가 케냐 고유의 음식이라고 우겼다. 결국 그녀의 손님은 이 논쟁에서 여성에게 져주는 것이 신사의 예의라고 결론 내리고 넘어갔다.

신앙인들 모임에서 일반적으로 ‘영성 지도자’로 알려진, 다시 말해 나의 영성생활- 특히 기도-에 관해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사람도 한 명 알게 되었다. 그는 다름 아닌 미국인 예수회 사제 조지 드루리였는데 당시 그는 카렌의 예수회 피정의 집에서 일하고 있었다. ‘므완가자(스와힐리어로 ‘빛’이란 뜻)’라고 불리는 이 집은 예전에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저자 카렌 블릭센의 소유지였던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이 피정의 집 건물을 지은 것은 블릭센 남작 부인이 아니라 그 후에 집주인이 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블릭센의 수수한 집을 너무 작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므완가자’는 느공 힐 산자락의 꽤 넓은 부지에 위치해 있는데 그곳 뒷마당에서 내려다보이는 경치는 내가 볼 때 동아프리카를 통틀어 최고의 풍경이었다. 이 풍경 앞쪽에는 극락조 식물, 분홍색 치자나무, 하이비스커스 덤불, 쇠뜨기나무, 야자수, 키 큰 노퍽 소나무들로 이루어진 멋진 정원이 있었다. 멀게는 높이 솟은 유칼리나무들이 향긋한 냄새를 공중으로 뿜어내며 연푸른 느공 힐을 둘러싸고 있었다. 화사한 뻐꾸기와 태양조들이 재잘대고, 양지바른 안뜰 한가운데에 놓인 돌 수반(水盤)에는 이따금 벌새들이 첨벙거린다. 나는 2주일에 한 번씩 ‘므완가자’를 찾아가 영성 지도를 받았다. 삼촌같이 푸근한 뉴잉글랜드 사람 조지 드루리는 마치 그 정원으로 파고드는 산바람처럼 잔잔하게 나의 영성 생활에 영향을 주었다. 내게 도움을 준 이 모든 사람들, 마이크와 제신타 딕슨, 도마틸라 키에티, 조지 드루리, 아프리카에 와 있던 나의 예수회 형제들이 말할 수 없이 고마웠다. 그 당시 내가 케냐에 머물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 중 하나에 부딪혀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는데 그 사건의 중심 인물은 바로 벤자민 무가보라는 사내였다.

워낙에 애처로운 사람들로 가득한 나라였지만, 르완다 출신의 젊은이 벤자민이야말로 내가 아는 가장 불쌍한 난민 중 하나였다. 그는 항상 몸이 아픈 사람이어서 나이를 정확히 짐작하기도 어려웠지만 아마 스무 살 아니면 서른 살쯤 되었을 것이다. 그는 보기 딱할 정도로 비썩 말라 있었고, 커다란 갈색 눈은 늘 점액질이 끼어 있고 충혈돼 있었다. 그는 만날 때마다 항상 같은 옷차림-찢어진 흰 셔츠와 때 묻은 푸른색의 폴리에스테르 바지였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그가 가진‘유일한’ 옷이었다-에 얇은 밑창의 샌들을 신고 있었다. 샌들에는 누르스름한 접착테이프가 둘둘 감겨 있었는데 그 테이프마저 갈라져 있었다.

 
벤자민은 내가 아직 루이제 수녀의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던 때부터 드나들기 시작했다. “브라더, 오늘은 제가 몸이 아파요.” 그는 늘 꺼칠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지역 보건소에 가 보려고 하니 돈을 좀 달라고 했다. 심한 위궤양을 앓고 있는데 약값이 아주 비싸다. 의사의 처방전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먹을 것을 살 돈도 좀 주겠느냐?. “돈 좀 주세요.”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그는 가족이 전혀 없다고 했다. 투치족인 그의 가족은 모두 오래 전에 르완다에서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이런 얘기의 사실 여부는 그의 나이만큼이나 판단하기 어려웠다. 벤자민은 결혼도 못한 채 시내 맞은편 느간도에 있는 앨리스 나브위레의 집 근처 자그만 목재 오두막에서 홀로 살았다. 그가 미코노 센터를 찾아오면 그를 피하는 르완다인들도 있었다. 보다 건실하게 살아가는 동족들에겐 그가 다소 당혹스러운 존재로 여겨지는 것 같았다. 우리가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을 후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당장 달려와 신청서를 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벤자민에겐 장사나, 공예, 혹은 사업에 필요한 기술이나 경험이 전혀 없는 듯했다. 그런데도 그는 호텔이나 식당, 목공소, 기계 정비소, 인쇄소 따위를 하겠다며 걸핏하면 구겨진 더러운 종이에 비뚤비뚤 자필로 신청서를 작성하여 제출하곤 했다. 그러나  그런 사업과 관련해 뚜렷한 경험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매번 그의 신청을 반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고개를 떨구며 똑같은 질문을 했다. “그럼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 20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