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유랑자

“난민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2014-03-06     김보연 기자

제임스 마틴이 선교사로서 동아프리카 난민들과 함께 생활한 이야기를 담았다. 전쟁의 세기가 양산한 무수한 아프리카 난민들, 그들을 돕고자 파견된 선교사. 너무 진지하고 근본적인 주제들이어서 자칫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회 난민 봉사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동아프리카 난민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진솔하고 수채화처럼 생생한지 책장을 넘기다 보면 저자와 난민들과 내가 어느새 하나가 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화에 등장하는 난민 하나하나가 마치 내 이웃들처럼 느껴지면서, 그들의 걱정거리가 내 걱정이 되고 그들의 웃음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게 된다. 그들이 울면서 지나온 내력을 풀어 놓을 때는 가슴 뭉클한 깊은 공감에 휩싸이게 된다.

지은이/제임스 마틴ㆍ옮긴이/송은경ㆍ펴낸이/정진석ㆍ펴낸곳/가톨릭출판사

존 무타부룬가와 그의 소들
나 이제 한숨이나 삼키고 흐느낌이나 마시리니.  - 욥 3,24

 
미코노 센터는 공예품을 만들거나 소규모 자영업 프로젝트에 선발된 난민들을 돕는 한편, JRS 후원 자격을 취득하지 못한 난민들이 독자적으로 제작한 상품의 판매도 도왔다. 우리는 유엔과 같은 기관에 의해 인정받은 난민들만 지원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 지원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도와줄 수 없는 난민들이 많았다. 이런 부류의 난민들에 대해선 그들의 공예품을 사들여 팔아주는 정도밖에 해줄 수 없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상품을 내다 팔 시장을 제공해주는 역할이었다. 디다스 카마군가도 그러한 난민들 중 하나였다. 그는 수놓인 원피스와 셔츠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르완다판 마돈나’의 유화를 그리는 화가이기도 했다. 르완다에서 투치족의 대학살 소식이 들려오고 몇 주가 지났을 때, 디다스가 내게 특별한 그림을 가지고 왔다고 했다. “키갈리의 마돈나예요.” 그가 말했다. 감청 색 들판을 배경으로 그려진 그의 르완다 마리아는 아몬드 모양의 눈을 가지고 있었고 수수한 블라우스와 하얀 머릿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마리아의 등에는 아기 예수가 포대기에 싸여 업힌 채 울고 있었다. 키가 크고 안경을 쓴 우간다 남자 마크 루타야도 비슷한 경우였다. 캄팔라에서 미술을 공부했다는 그는 ‘최후의 만찬’을 그렸다. 그의 그림들에 등장하는 예수와 사도들은 호리호리하고 우아한 모습의 아프리카인들로서, 모두들 우간다 복장을 하고 동아프리카 음식들이 차려진 식탁 앞에 앉아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마크의 ‘최후의 만찬’은 우리 매장에서 인기 품목이었는데 특히 종교 단체들이 많이 사 갔다. 우리는 완성작들에 그림틀을 맞춰주려고 싱이 운영하는 시내의 공방으로 그림들을 들고 갔다. 인도 출신의 쾌활한 사내로 과묵한 아내와 나란히 작업하던 싱이 마크의 작품을 보고 크게 흡족해 하더니 자기네 가게에서 팔겠다며 몇 점을 주문했다. 마크로서는 작품을 팔 시장이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우리의 고객들과 싱으로부터 특별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마크는 대단히 기뻐했다. 몰타에서 온 한 관광객이 미코노 센터에 걸린 마크의 그림들에 감탄하더니 ‘최후의 만찬’을 대형으로 그려 달라고 의뢰해 왔다. 그는 전화로 내게 그림의 치수를 설명해주었다. 마크는 그 그림에 3주를 매달렸다. 마크의 그림이 완성되어 내가 그 사람에게 전화를 했더니, 자기가 지금 시내를 떠나려 하는 참이어서 매장까지 가기가 어려운데, 미안하지만 호텔로 좀 배달 해 줄 수 없겠느냐고 했다. 내가 차를 끌고 자카란다 호텔로 갔더니 그가 주차장에서 친구 몇 사람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곧 공항으로 출발하려는 것 같았다. 내가 인사를 하고 나서 커다란 캔버스를 쫙 펼치며 마크의 작품을 자랑스레 보여주었다.

“인물들이 흑인이잖아!” 그가 경멸하는 어조로 말했다. “당연히 흑인이죠.”내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을 안사겠소. 난 당연히 백인으로 그릴 줄 알았지.” 나는 그에게 왜 백인 인물들을 예상했는지 정확한 이유를 캐물었다. 당신이 우리 매장에서 본 마크의 그림들도 모두 아프리카 인물들이지 않았느냐. “그야 물론 ‘내’가 백인이기 때문이죠.” 그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그 사람한테 다시 그리라고 하세요. 그림은 나중에 우편으로 부쳐주시고.” 그가 친구들 쪽으로 돌아서더니 출발하려고 했다. “잠깐만요.” 나는 그에게 말했다. “마크는 ‘최후의 만찬’을 나름의 독특한 양식으로 그리기 때문에 백인들이 아프리카 의상을 입

 
고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 장면으로 그리게 되면 좀 우스꽝스러울 겁니다. 그리고 내가 이 그림을 되돌려주면 마크는 분명 상처를 받을 겁니다.” 실제로 훌륭한 그림이기도 했고, 마크가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서 용기를 내어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이 먼 데까지 달려온 것도 억울했다. 나는 그에게 약속한 그림값 전액을 지불해 달라고 했다. 그는 결국 돈을 건네주더니 몰타어로 자신의 친구들에게 무어라고 투덜거렸다. 우리의 매장 덕분에 많은 난민들-가우디 루자게, 디다스 카마군가, 마크 루타야, 앨리스 나브위레, 아고스티노와 제카리아 등등-이 마침내 흑자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때때로 질병, 굶주림, 경찰의 괴롭힘 등 도저히 이겨 낼 수 없는 일들에 봉착하곤 했으므로 프로젝트의 거의 절반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및 유럽에서 우리를 지원하는 기부 단체들조차 우리의 사업을 경이로운 실적으로 인정해주었다. 우리는 매년 기부 단체들에 간략한 보고서를 제출하여 사업 내용을 설명하곤 했다. 보고서에는 아고스티노나 가우디 같은 성공 사례들뿐 아니라, 스페시 칸테그와와 살해된 그녀의 여동생 같은 사례들도 다루어졌으며, 모든 난민들이 겪고 있는 가혹한 난관들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난민들의 고충을 정말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나조차도 종종 기가 막힐 정도였다. 존 무타부룬가는 르완다에서 목축업을 하던 집안 출신의 중년 남자였다. 사무실에 찾아오는 그는 닳아서 올이 다 해진 청색의 코르덴 자켓과, 나이로비 전체를 뒤덮고 있는 붉은 흙먼지 덮인 낡은 중절모 하며 항상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존은 우리에게 소 몇 마리를 살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했다. 어떤 친구가 도시 외곽의 방목지를 무료로 쓰게 해주겠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믿기 힘든 얘기이긴 했지만 소 값이 별로 비싸지 않았고, 나이로비 시내의 방목지는 이용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게 소 네 마리와 필요한 사료, 연장들을 사도록 자본을 제공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도록 존에게서 아무 소식이 없었다. 어느 날 그가 기운 없는 몰골로 내 사무실에 나타났다. 소들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 소들이 엄청나게 목말라 해요.” 그가 말했다. 두 마리는 이미 죽어 버렸다며 한번 와서 봐주겠느냐고 물었다. 이튿날 오후, 나는 나이로비 외곽으로 몇 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소읍, 느공으로 존을 만나러 갔다. 마사이족 유목민들이 주로 사는 곳이어서, 붉은 격자무늬의 ‘슈카’차림에 기다란 가축 몰이용 막대기를 어깨를 멘 마사이족들이 먼지 이는 거리를 바쁘게 지나다녔다. 존이 자그마한 은행 앞에서 내게 손짓을 했다. 그가 내 지프에 올라탔고 우리는 푸른 느공 힐을 넘어, 풍경이 점점 더 삭막해지는 고원 맞은편으로 향했다. 나이로비는 바람기도 있고 대체로 선선했지만 시 외곽으로 빠져나오면 날씨가, 한 친구가 표현했듯, ‘아프리카 더위’로 변해 버렸다. 아프리카 하면 떠오르는 그런 더위 말이다. 산악 지대를 내려가자 마른풀과 나지막한 덤불들, 가시나무들이 있는 평탄한 땅이 펼쳐졌다. 멀리서 아프리카 영양들이 잠들어 있고 쾌청한 하늘에는 독수리들이 맴돌았다. 도로변에는 신선한 꿀을 소다 병에 담아 파는 마사이 여인들이 기대하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흙 길에 바
 
퀴 자국이 깊이 패이더니 결국에는 큼직한 바위들이 가로막았다. 억센 지프로도 도저히 달릴 수 없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주위를 살폈다. 까마득히 멀리로 작고 하얀 오두막들이 무리 지어 있었다. “제가 바로 저기에 살아요.” 존이 그쪽을 슬쩍 가리키며 말했다. 늦은 오후인데도 깜짝 놀랄 정도로 무더웠으므로 어떻게 이런 곳에서 소를 키울 생각을 했느냐고 존에게 물었다. 그는 자기가 찾아낼 수 있는 땅이 여기밖에 없었고, 공짜로 쓸 수 있는 땅인데다, 마사이족 친구들이 여기에서 소를 먹이도록 허락해주었다고 했다. 존은 매일같이 당나귀를 몰고 읍내로 가, 두 개의 플라스틱 통에 물을 채워 날랐다. 그날 우리가 읍내에서 지프를 타고 거기까지 가는 데만 한 시간이 걸렸는데 그의 집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더 가야 했다. 도대체 당나귀로 오고 가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었다. “세 시간 걸려요, 브라더. 트럭만 하나 있어도 훨씬 빠를 텐데.” 이런 곳에서 소를 키우려 했다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물도 없고 풀도 없었다. 날벌레들이 주위를 윙윙대며 물어뜯는 가운데 우리는 그의 난관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보려고 고심했다. 소들을 다른 데로 옮길 수 없는가? 안 된다. 다른 곳에 가면 풀 먹이는 비용을 내야 한다. 소젖을 팔아 돈을 좀 만들 수 있지 않은가? 안 된다. 그는 소들이 물을 마시지 못해 젖을 내지 못한다고 끈기 있게 설명했다. 그럼 당신의 이웃들은 소들을 어떻게 키우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마사이족이에요. 소들을 데리고 이동을 하죠. 하지만 우리 가족은 그런 식으로 사는 법을 알지 못해요, 브라더.” 그리하여 우리는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말없이 서서 황량한 풍경만 바라보고 있었다. 존 무타부군가는 르완다로 가는 버스표를 살 돈도 없었다. 게다가 요즘 같은 상황에서 누가 되돌아가고 싶겠는가? 그의 조국에 남은 투치족 친척들은 이미 죽고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의 아내는 최근에 아이 셋을 그에게 남겨 두고 에이즈로 사망했다. 그에게는 돈이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재주는 있었는데 바로 소 키우는 법을 안다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소를 요청한 것도 물론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존이 방목할 수 있는 땅은 인심 좋은 마사이 친구들이 제공해준 메마른 땅뿐이었다. 결국 자신의 인생에서 확실하다 싶은 것들만 따르고 근면하게 일했는데도 재앙을 맞은 셈이었다. 그것은 나이로비에 거주하는 난민들 대다수의 참상이기도 했다. 존이 실패하리라는 것은 내가 봐도 분명했다. 그러나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말로 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우리도 돈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그에게 트럭을 사주기란 불가능했다. 내가 그 얘기를 하자 존이 눈물을 보였다. 지금 상황에서는 남은 소들마저 죽기 전에 얼른 팔아 버리는 것이 최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브라더, 그 다음엔 뭘 하지요?” 그건 나도 모르겠다. 내가 말했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 답을 알지 못한다.

바람의 집

산속 이 황폐한 골짜기
무너진 무덤들 너머 성당 주위에서
희미한 달빛 속에 풀들이 노래하고 있다
텅 비어 있는 성당은 바람의 집에 불과할 뿐. 
- 엘리엇(T.S. Eliot), 『황무지 The Waste Land』

 
내가 처음부터 함께 활동한 난민 중에 가장 큰 그룹은 르완다인들이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1960년대와 70년대에 나이로비에 정착한 사람들이었다.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에 벌어진 끊임없는 폭력 때문이었는데, 이따금 잦아들긴 했지만 결코 완전히 소멸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우리 공동체의 몇몇 예수회 형제들은, 르완다인들이 난민 사회에서 우위를 점한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했지만 사실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르완다인들은 케냐에 머문 시간이 상대적으로 긴 덕분에 나이로비 난민들 가운데 가장 ‘정착된’ 사람들에 속했기 때문이다. 내가 거기 머문 기간에 나이로비로 쏟아져 들어온 새로운 난민 집단들-예를 들어 소말리아인들-은 일단 정착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자신들이 어떤 종류의 사회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 꼼꼼히 알아볼 경황도 없었다. 한번은 어느 친구가 순진하게도, “저 사람들은 왜 아직 여기에 남아 있지? 르완다의 고향으로 돌아가면 안 되나?”라고 묻기에 내가 그 상황을 알려준 적이 있었다. 그리고 몇 달 후인 1994년 4월, 그 친구는 확실한 대답을 얻게 되었다. 처음 며칠은 도저히 사실로 믿어지지가 않았다. 단편적이고 불완전한 정보들이 난무했다. 르완다와 부룬디에서 대량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소문이 이미 몇 달 전부터 나돌았다. 세계 다른 지역들에서는 이러한 소문을 무시해버렸지만 나이로비의 일간지들에는 그대로 보도되었다. 르완다 사태 초기에는 《데일리 네이션》이 키갈리에서 들어온 소문들을 상세히 열거하는 데 그쳤다. 당시 CNN은 정확한 취재 범위를 확보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르완다 수도인 키갈리에서 들어오는 전화 보고와 외교관과 외국인 거주자들이 나이로비로 탈출해 오는 장면에 주로 의존했다. 그로 인해 소수에 불과한 외국인 거주자들의 탈출을 한 민족 전체의 대량 학살보다 비중있게 다루는 것 같은 미묘한 인상을 주었다. CNN이 내보낸 화면 중에 쉽게 잊혀지지 않는 한 장면이 있었다. 나이로비의 조모 케냐타 공항에서 부티 나는 한 미국인 여성이 자그만 애완견을 앞세우고‘허큘리스’수송기에서 내리는 장면이었다. 얼마 후 마침내 르완다 본토에서 소식들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피해 인명의 수가 매일같이 수정되고 늘어만 갔다. 10만 명이 죽었고 2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30만 명이 죽고 같은 수의 난민이 고향을 떴다. 시간이 지나자 우리는 가장 믿기 힘든 최악의 뉴스가 가장 정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80만이 사망하고 백만 명의 난민이 식수와 양식도 없는 캠프에서 살고 있다, 캠프에 콜레라가 퍼지기 시작했다, 한 교회로 도망쳤던 5천 명이 집단 학살되었다, 이웃들이 서로 등을 돌렸다, 키갈리는 거의 불모지로 변했다, 르완다의 강마다 시체들이 넘쳐나고 일부는 빅토리아호로 흘러들고 있다 등등. 안전한 상황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꾸준히 저축해 왔던 나이로비의 르완다 난민들은, 가족들의 소식
 
이 끊기고 끔찍하기 짝이 없는 사진들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리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렸다. 나이로비에 거주하는 르완다 난민들에게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어쨌거나 먹고살아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예전처럼 매일같이 우리를 찾아오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의 입에 올려지는 화제는 하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무슨 소식 들어온 것 없나요?” 나이로비에 거주하는 르완다인들은 대부분 투치족이었으므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학살의 희생자들이 바로 그들의 친척들이었다. 그러나 가족들과 접촉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도 세계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뉴스만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아이러니컬한 얘기지만, 외교관들이 탈출해 오는 상황인데도 나이로비에 거주하는 르완다인들은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직접 달려가 확인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서 나는 미코노 센터를 드나들던 몇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한 여인은 친척들을 찾으러 돌아가겠다며 작별 인사를 했고, 남편이 르완다에 가서 싸우려고 되돌아갔다고 서글프게 말하는 여인도 있었으며, 남편이 탄자니아에 근거지를 둔 ‘르완다 애국 전선’에서 훈련을 받으려고 떠나 버렸다고 말하는 여인도 있었다. 몇 주 사이에 수백 명의 르완다인들이 나이로비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부분 오래 전부터 무서운 일이 생길 것임을 짐작하고 있다가 대학살이 벌어지기 전에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후투족에게 투치족 이웃들을 살해하라고 촉구하는 후투족의 라디오 방송이 이미 몇 달 전부터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친구나 친척, 혹은 나이로비 거리에서 만난 르완다 동족들과 더불어, 리루타와 단도라, 카왕와레 같은 빈민 지역들에 둥지를 틀었다. 나이로비의 예수회 형제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던 세 명의 르완다 사제가 키갈리
 
에 있는 ‘예수 센터’라는 피정의 집에 머물다가 ‘판가’(벌채용 칼)에 맞아 살해되었다. 살인자들은 예수회 형제들과 피정자들-대부분 사제와 수녀들이었다-을 인종별로 분리시킨 뒤 투치족만 살해했다. 모두 17명이 살해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르완다 대학살의 시작이었다고 전해진다. 나이로비에 있는 예수회 신학교 교장인 오거스틴 카레케지는 말을 아주 부드럽게 하는 르완다 출신의 사제였는데 나는 몸바사에서 그와 함께 휴가를 보낸 적도 있었다. ‘예수 센터’사건이 있던 그 주에 그는 키갈리에 살던 가족들을 거의 다 잃었다. 그는 헤키마에 있는 자그만 예수회 성당에서-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이 담긴 대형 벽화 앞에 서서-자신의 조국을 위한 미사를 올렸다. 몇 달 후, 카레케지 신부는 학교의 교장 직을 떠나 조국으로 되돌아갔다. 살해된 예수회 형제들을 대신해 ‘예수 센터’의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였다. ‘아프리카 선교사들’의 일원인 애일워드 쇼터(Aylward Shorter)는 자신의 책 『그리스도교와 아프리카적 상상력 Christianity and the African Imagination』에서 60세쯤 된 후투족 출신의 수녀 펠리시테 니이테게카의 이야기를 적어 놓았다. 기세니에 있는 ‘성 베드로 센터’소장이었던 그녀는 대학살 기간에 그곳 수녀들과 함께 투치족 난민들을 숨겨주었다. 후투족군 대령이었던 그녀의 오빠가 죽음을 면하려면 당장  떠나라고 지시했을 때 펠리시테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 23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