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유랑자

“난민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2014-05-07     김보연 기자

제임스 마틴이 선교사로서 동아프리카 난민들과 함께 생활한 이야기를 담았다. 전쟁의 세기가 양산한 무수한 아프리카 난민들, 그들을 돕고자 파견된 선교사. 너무 진지하고 근본적인 주제들이어서 자칫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회 난민 봉사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동아프리카 난민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진솔하고 수채화처럼 생생한지 책장을 넘기다 보면 저자와 난민들과 내가 어느새 하나가 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화에 등장하는 난민 하나하나가 마치 내 이웃들처럼 느껴지면서, 그들의 걱정거리가 내 걱정이 되고 그들의 웃음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게 된다. 그들이 울면서 지나온 내력을 풀어 놓을 때는 가슴 뭉클한 깊은 공감에 휩싸이게 된다.

지은이/제임스 마틴ㆍ옮긴이/송은경ㆍ펴낸이/정진석ㆍ펴낸곳/가톨릭출판사

 
그리고 지금, 케냐에서 떠나온 지 벌써 몇 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난민들을 만나고 있다. 물론 만나는 방식은 달라졌지만 말이다. 선선한 케냐의 아침에 수십 명씩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들, 요란한 소음을 내는 지프에 뛰어올라 그들의 집을 찾아가던 나, 먼지 이는 도로변에서 내 차를 세우던 그들, 이런 것들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대신에 나는 편지들 속에서, 기도와 추억 속에서 그들을 만나고 있다. 나는 몇몇 난민들이 놀라울 정도로 훌륭한 편지 친구임을 알게 되었다. 앨리스 나브위레는 비록 본인의 기대만큼 사업이 진척되지는 못해도 여전히 느간도에서 양장점을 꾸리고 있다. 아고스티노의 조각품들은 지금도 미코노 센터를 찾는 고객들에게 큰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최근에는 ‘생명의 나무’를 세 점이나 팔았다고 한다. 에디스 카바가느와는 편지에서 자신의 납결포 사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르완다의 가족들을 방문하려다 부닥친 문제들에 대해서도 들려주었다. 스페시 칸데그와는 여전히 어려운 상황에서도 죽은 동생의 아이를 계속 돌보고 있다고 한다. 벤자민은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로 편지를 보내와‘돈 좀’보내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여전히 위궤양을 앓고 있어 몸이 좋지 않으며 필사적으로 일거리를 찾고 있다. 참으로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마마 므지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바구니가 생각만큼 잘 팔리지 않으니 어떻게 좀 도와줄 수 없겠느냐고 했다. 이레네 무카사와, 탄자니아로 옮겨 간 엘리자벳 나키요베도 편지를 보내와, 이름이 똑같이 지미인 아들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두 지미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의 편지에는 대개 구겨진 사진이 한 장씩 들어 있고, 내게도 사진을 보내 달라고 한다. 그리고 내게 언제 자신들을 만나러 올 것이냐고 묻곤 한다. 줄 쳐진 구겨진 종이에 사연을 대필시킨 그들의 편지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항상 똑같은 표현으로 시작된다. “친애하는 브라더 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사드립니다...” 나는 답장을 쓰면서 지난날 그들과 마주앉았을 때 해주곤 했던 격려의 말을 그대로 담아 보려고 노력한다. 그들에게 전달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따금 십 달러나 이십 달러짜리 지폐를 동봉하기도 한다. 몇몇 난민들은 더 좋은 환경을 찾아 이사했다. 카비나 소코르는 그동안 번 돈을 가지고 탄자니아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직접 양복점을 꾸려 볼 생각이라고 한다. 마리 부그위자는 르완다로 다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다. 르완다 난민들 가운데는 가족을 찾으려는 일념으로 고향을 방문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우디 루자게도 친척들을 찾으려고 몇 달 집을 비웠으나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갈리 아와무’그룹을 이끄는 할리마 무테베처럼 엄청난 곤경을 겪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녀는 케냐 경찰에 의해 감옥에 갇히고 고문도 받았다고 한다. 나와 함께 일했던 난민들 중 몇 사람은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나무껍질 천에 수를 놓고 가죽 가방에 그림 그리는 일을 해왔던 활달한 우간다 여인 마리 카비이토는 내가 떠나온 이듬해에 에이즈 관련 질병으로 사망했다. 우연히 나이로비에 들렀던 한 예수회 형제가 내게 보낸 편지에서 지나가는 말로 이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러나 대다수 난민들의 소식은 알 수 없었다. 글을 못 쓰는 사람들도 있고, 종이나 우표 살 돈조차 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대부분 정신없이 바쁘다. 일자리도 찾아야 하고, 건강 유지에도 힘써야 하고, 가족들에게 먹일 음식과 집세에 들어가는 돈도 장만해야 하고. 일부는 아예 연락조차 안 닿는다. 우편함을 가지려면 매달 집세를 지불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능력이 없어 빈민 지역에 살면서도 ‘주소’가 없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매주 만났던 그 많은 난민들, 어떻게 사는지 어떤 가족들이 있는지 소상히 알고 지냈던 그들을 이제 두 번 다시 만나지도 못하고 소식도 듣지 못할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거기 있을 때는 미처 몰랐으나 이제는 알게 된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나 자신의 시련들-잠시 앓았던 것, 부모님 걱정, 일에서 느끼는 좌절감-이 내 마음을 깨부수고 열어줌으로써 난민들과 보다 깊은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점이다. 만일 내가 모든 것이 마음대로 되는 상황에 있었다
 
면 난민들의 그 깊은 사랑을 맛보기 힘들었을 것이고 내가 그들을 완전히 사랑하는 것도 힘들었을지 모른다. 결국 나는 나약함 속에서 더 큰 능력을 얻었고 그리하여 그들을 진정한 형제자매로-그리고 친구로-만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나약하면서도 강하다”고 사도 바오로는 말씀하셨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하신 말씀이 아닐까. 또 하나 분명한 것은, 난민들이 내게 사랑의 새로운 방법을 가르쳐주었다는 점이다. 순결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문제는 적어도 내 경우에는 수도 생활에서 겪게 되는 도전의 하나이다. 그런데 나는 케냐에 가 살아 보기 전까지, 다시 말해 카비나 소코르, 가우디 루자게, 앨리스 나브위레, 좀 더 나아가 벤자민 무가보 같은 사람들과 함께해 보기 전까지는 순결한 사랑에서 오는 만족이 얼마나 클 수 있는가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말하는 순결한 사랑이란 온 마음을 다해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아낌없이 돌려주는 그들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비단 수도 생활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삶에서 부딪히게 되는 도전이다. 또한 나는 우리가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엮여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수천 마일 밖에 있는 내 난민 친구들과 연결되어 있다면 텔레비전에서 담요 밑에 웅크리고 있던 그 난민 소년, 다시 말해 만나 본 적도 없는 사람과도 역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세상 모든 사람들과 엮여져 있는 셈이다. 나는 분명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아직 모르는 것들도 있다. 나는 벤자민을 어떻게 대했어야 옳은지 모르겠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서서 존 무타부룬가의 실패한 목축업에 대해 고심하고 있을 때, “그럼 이제 난 뭘 하지요?”라고 물었던 그에게 무슨 말을 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가난한 사람들이, 그렇게나 열심히 일하고 그렇게나 고생하는 사람들이, 왜 더 큰 고난과 더 큰 고통의 보답밖에 받지 못하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케냐에 머물면서 겪었던 그 아픈 경험들과 맞서는 가운데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다. 역경들에 맞서는 가운데 난민들은 비로소 내게 뭔가 다른 것, 훌륭한 것, 다시 말해 희망의 가치를 가르쳐주었다. 바로 이 희망이 그들의 작업에 그와 같은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주고, 천천히, 천천히 나아진다는 그들의 표현 ‘폴레, 폴레’처럼 그들로 하여금 계속 나아가게 해주었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동아프리카에 있는 동안 그들이 내게 전해준 것도 바로 이 희망이었다. 그리고 이 희망의 원천과 근거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나는 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를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난민들의 희망이 지금은 비록 작지만, 게다가 대량 학살과 빈곤과 절망 밑에 가려져 있을지도 모르지만, 새 생명과 더불어 언제든 분출할 채비를 갖추고 잠복하며 기다리는 물이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지난날 함께 일했던 난민들이 변함없이 나와 동행하고 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눈을 감고 그들을 떠올린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얼굴을 보고 그들의 슬픔과 기쁨을 생각하고 그들의 희망을 기억한다. 그러므로 나는 참으로 감사하다.

- 감사의 말

아프리카 사람들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법을 배운다. 훗날 언젠가 되돌아오기를 기대하면서 제공하는 작은 호의들로 균형을 이룬 신용을 먹고산다. 사람이 거의 없는 나라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생존의 법칙보다 실현 가능성이 낮은 강제명령에 불과할 것이다. 아프리카에서는 누구든 곤경에 처한 사람을 만나면 멈춰 선다. 이 다음에는 그가 당신을 위해 멈춰 설 것이므로.
               - 베릴 마컴(Beryl Markham), 『어둠 깔린 서구West with the Night』

이 책에 사연이 소개된 사람들 외에도, 나의 동아프리카 봉사 활동을 더없이 즐겁게 만들어준 많은 친구

 
들이 있었다. 나이로비 로욜라 하우스의 예수회 공동체는 내가 처음 도착한 순간부터 환영받는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었으며 나의 수도회 장상인 조나단 하쉬카와 빅토르 자카리니는 항상 크나큰 이해심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내게 운전을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조나단이었다.) 나의 영성 지도자인 조지 드루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그의 친절한 공동체(카렌에 있는 ‘므완가자 피정의 집’)는 정신없이 바쁜 일과 속에 있던 내게 절실히 필요했던 휴식을 제공해 주었다. 존 귀니, 데우스데디트 비야바릴로, 칸게미의 ‘노동자의 주보 성 요셉’본당 공동체가 매일같이 미코노 센터의 운영을 도와준 덕분에, 갖가지 ‘시다(어려움, 난관)’들을 그나마 제정신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토니 드수자와 짐 마탈리아노, 기타‘바실리카 성가족’공동체 여러분들의 따뜻한 환대에 대해서도 감사드리는 바이다. 마이크 및 제신타 딕슨 부부와 그들의 가족은 카렌의 자택을 여러 차례 개방하여 아일랜드 특유의 따뜻한 환대를 넘치도록 제공해주었다. 도마틸라 키에티는 칸게미에 있는 집으로 나를 초대하여 케냐인들의 환대가 어떤 것인지 알게 해주었다. 그리고--혹시 내가 깜박 잊고 넘어갔다면--바우만 가족(베티, 빌, 에밀)과 벨츠 가족(리사와 브렌던)도 내게 미국식 환대의 진정한 의미를 새삼 일깨워주었다. 나의 부모님이신 제임스와 엘레노어
 
마틴, 내 누이와 매형인 캐롤린과 찰스 부스카리노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그들은 내가 집에서 떠나 있었던 2년 동안 부지런히 편지를 보내주셨고, 이따금 세관을 통과하는 소포나 선물들도 보내주었다. 나의 나이로비 봉사 활동을 지원해주신 로마 ‘예수회 난민국’ 소장 마크 레이퍼와, 보스턴에 거주하는 나의 예수회 장상인 짐 라폰테인의 지원에 대해서도 감사드린다. 이 책의 원고로 말하자면, 예수회 친구들인 스티브 카트수로스와 매트 캐시디가 초고를 읽고 유용한 제안과 교정을 해주었다. 또 다른 친구들인 그레그 화이트와 팀 롱먼이 아프리카 대륙의 정치를 전공하는 정치학자들이라는 것도 내게는 행운이었다. 그들 역시도 초고를 검토하면서 아프리카 역사를 정확하게 잡아주었다. 르완다와 부룬디의 교회와 정치의 관계를 연구한 팀은 르완다 정세와 나이로비로 이주한 르완다 난민들의 참상을 논하는 데 특히 큰 도움을 주었다. 가나의 신학자인 카셀리 에사무아 씨도 초고를 읽어 본 후 ‘아프리카적’ 관점을 제공해주셨다. 탄자니아 사제인 후베르티 아케소 신부는 내 기억력 부족으로 잘못 사용된 수많은 스와힐리어를 바로잡아주셨다. 동아프리카의 내 동료들, 짐 코리건과 매디 티베리 수녀도 원고를 검토하면서 내 기억들이 정확한지 확인해주었다. 나이로비에 와 있던 메리놀 평신도 선교회원 그레그 다르와 케빈 메스트리치는 최종 원고를 꼼꼼하게 읽으면서 바꿔야 할 대목들을 지적해주었다. 나이로비에서 일하면서 글을 써 왔던 케빈은 케냐의 에이즈 상황에 대해 설명해줌으로써 이 주제를 논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존 콘웨이와 조 힐리(두 사람 다 메리놀회 신부들이다)는 내가 인용한 스와힐리 속담들의 정확성 여부를 확인해주었다. ‘아프리카 선교회(‘화이트 신부회’로 알려져 있다)’의 일원인 애일워드 쇼터에게도 감사드린다. 자신의 훌륭한
 
저서『기독교와 아프리카적 상상력』에서 인용하는 것을 허락해주셨다. 원고를 읽고 현명한 제안을 해주시고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지원해주신 제레미 랭포드 씨에게 감사드린다. 에릭 메이저와 조운 골런, 마라 나셀리도 책의 전체적인 골격을 다듬는 데 도움을 주었다.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의 웨스턴 예수회 신학교 교수이신 메그 가이더 수녀는 이 책에 담긴 몇몇 일화들, 특히 난민들과 나의 관계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도록 격려해주었다. 그녀의 빈틈없는 비판과 현명한 견해가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예수회 형제 로스 프리빌은 마무리 단계에서 원고를 검토하고 한 장 한 장 꼼꼼하게 평해주었다. 예상 밖의 일이었지만 나의 누이 캐롤린도 편집에 훌륭한 소질이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묵묵히 타이핑해 준 예수회 형제들, 봅 실리치티그와 네드 매티모에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서문을 써주신 로버트 콜스 씨와 훌륭한 사진들을 사용하도록 허락해주신 돈 돌, 마이클 코인 예수회 형제들께도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기록 보관소를 뒤져 동아프리카 JRS의 활동을 담은 적절한 사진들을 찾아내주신 로마 JRS의 마이클 물린스, 책을 아름답게 디자인해준 리즈 오키페에게도 감사드린다. 끝으로, 내 난민 친구들의 후한 인심에 대해선 그 고마움을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 내가 그들과 더불어 일할 수 있었던 것은 특혜이자 은총이었다. 이 책은 바로 그들의 책이다. - 끝

- 어휘 설명
이 책에서 스와힐리 단어를 사용할 때는 단어 뒤에 뜻을 밝혀 놓았다. 그러나 한 번 이상 등장하는 단어들의 경우, 보다 폭넓은 의미를 밝혀주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아 어휘 설명난을 만들어 보았다.
아스카리(askari): 경비원, 특히 야간 경비원. 케냐의 군인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나이로비의 밤을 지키는 ‘아스카리’는 대부분 마사이족 청년들이었다.
바라카(baraka): 축복. 동사 ‘쿠바리키kubariki’에서 나온 말.
보마(boma): 울타리. 주로 가시덤불 울타리를 의미하며, 마사이족을 비롯한 동아프리카 부족들의 작은 마을 주위에 둘러져 있다.
브와나(bwana): ‘sir’,혹은 ‘Mister’와 비슷한 뜻을 가진 이 단어는 타잔 영화 같은 데서 백인 식민주의자들을 경멸하는 호칭으로 주로 등장하지만 사실은 모든 남자들에게 사용되는 예의 바른 표준 호칭이다. ‘잠보 브와나(Jambo bwana)!’는 케냐의 일반적인 인사말이다.
푼디(fundi): 숙련공. 어떤 분야에서든 재주 많은 사람을‘푼디’라고 하는데 특히 전기 기사(‘푼디 와 스티마fundi wa stima’)에게 많이 쓰인다.  
하쿠나(hakuna): 없다. 예를 들어 ‘하쿠나 시다(hakuna shida)’혹은 ‘하쿠나 마타타(hakuna matata)’라고 하면 ‘아무 문제없다’는 뜻이다.
하라카(haraka): 빠르다. ‘하라카 하라카(Haraka haaraka)’는 ‘매우 빠르다’는 뜻이어서, ‘어서 해’라는 의미의 명령어로도 사용될 수 있다. 따라서 ‘하라카 하라카, 하이나 바라카(Haraka haraka, haina baraka)’라고 하면 ‘빨리 빨리는 복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호디? 카리부!(Hodi? Karibu!): 앞의 말은 대충, ‘들어가도 될까요?’라는 뜻이고 뒤의 말은 ‘들어와요’ 혹은 ‘환영합니다’라는 뜻이다.
잠보(Jambo):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문제없어?” 라는 뜻이지만 오늘날에는 본뜻과 상관없이 단순한 인사말로 주로 사용된다. ‘잠보’라고 하면 대답도 ‘잠보’라고 하는데, 본래의 뜻을 담고 싶을 때는 ‘닝기(Nyingi 많아요)’라고 대답한다. ‘잠보 사나(Jambo sana아주 많아요)’라고도 한다.
칼리(kali): 사납다, 맹렬하다. 사람인 경우, 난민들은 베르나데테 수녀를 ‘므칼리(mkali)’하다고 표현했다. 동물에 있어서는 나이로비 도처에 ‘므브와 므칼리(Mbwa Mkali 사나운 개)’라는 표지가 나붙어 있다. 사물에 있어서는 땡볕을 ‘주아 칼리(jua kali)라고하며 땡볕 아래서 일하는 사람이나, 미용사, 벌채꾼처럼 야외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주아 칼리’노동자라고 부른다.
캉가(khanga): 수수하고 값이 싼 천. 흔히 스와힐리어로 된 표어 주위에 기하학적 도안이 그려진 무늬로 되어 있다. 이 천은 허리에 두르는 치마나 앞치마로 사용된다. 국경일이나 교황의 방문 같은 것을 기념하여 특별한 무늬의 ‘캉가’를 찍어 내는 경우도 종종 있다.
키코이(kikoi): 양모 편직물로서 남자들이 바지 대신 허리에 두르는 전통 의상(특히 소말리아와 케냐 북부 및 서부 지역)에 쓰인다. 대부분 케냐 해안의 라무((Lamu)라는 곳에서 생산된다. ‘키코이’는 무게가 가볍고 예로부터 붉은색이나 자주색 줄무늬가 많다. 나이로비는 날씨가 이따금 쌀쌀해지기 때문에 보온용으로 이 직물을 작게 잘라 목에 두르기도 한다.
키텐게(kitenge): 주로 콩고에서 생산되는 화려한 색상의 직물. 나이로비에 수입되는 이 두터운 면직물은 여성의 원피스와 남성의 셔츠 재료로 각광받고 있다. 과일, 새, 기하학적 도안의 문양들이 두드러져 보인다.
쿠나(kuna): 있다. 예를 들면, ‘쿠나 시다(kuna shida 문제가 있다)’. 반대말은 하쿠나(hakuna) 혹은 하이나( haina).
마마(mama): ‘어머니’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어머니 같은 여성’을 뜻하기도 한다. ‘잠보 마마(Jambo Mama)!’는 극존칭의 인사말이다. 
마타투(matatu): ‘마페사 마타투(mapesa mztatu 3실링)’라는 스와힐리어에서 파생된 말로서 ‘미니버스’나 ‘대형 택시’를 뜻한다. 최초의 요금이 3실링이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마타투’는 나이로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으며, 요금이 도시 버스보다 1실링 싸서 교통수단으로 애용되고 있다. 기사들의 수당이 마일 단위로 주어지기 때문에, 복잡한 도시의 거리를 마구 속력을 내어 달린다. 케냐와 탄자니아 국경을 오가며 교역하는 소형 짐차도 ‘마타투’ 불린다.
미코노(mikono): 손. ‘므코노(mkono)’의 복수형.
므자이(mzee): ‘늙었다’는 뜻의 스와힐리어로서, 대단히 점잖은 말이다. 남자나 여자를 ‘므지’로 부를 때는 매우 존경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므준구(mzungu): ‘백인’에 대해 쓴다고 하면 가장 잘 이해가 되는 단어이다. 출처를 확인 하기는 어렵다. 영국의 한 사전에는 ‘영리한 사람’이란 뜻으로 올려져 있지만 내가 볼 때 이것은 다소 후한,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이기적인 해석이다. 내가 아는 케냐인들의 설명에 따르면 본래 ‘roundabout’을 뜻하는 말로서, 영국인들이 만든 원형 교차로뿐 아니라, 식민주의자들의 ‘에두르는’사고방식을 뜻한다. ‘키준구(kizungu)’도 일반적으로 백인을 뜻하는 단어이지만 영국인들에 대해 사용하는 ‘킨게레자(kingereza)’와 구분해 쓰인다.
폴레(pole): 유감입니다. 아주 사소한 불편 사항(남의 발에 걸렸거나, 연필을 잃어버렸거나)에서부터, 큰 비극(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따위)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경우에 사 용될 수 있는 다용도 단어이다. ‘폴레 사나(pole sana)’도 ‘대단히 애석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폴레 폴레(pole pole)’라고 하면 ‘속도를 늦추라’는 의미로 된다는 것이 재미있다.
포쇼(posho): 옥수수 가루로 끓인 죽. 케냐 서부 지역과 우간다에서는 카사바 녹말 죽이란 뜻으로 더 많이 쓰인다.
룬구(rungu): 마사이족의 전투용 곤봉. 대략 2피트 길이이며 끄트머리가 혹 모양으로 튀어나와 있다. 영국에서는 ‘놉케리(knobkerry, knobkerrie 혹 달린 곤봉)’라고 한다. 보통 가죽 벨트나 띠에 매달고 다닌다.
샴바(shamba): 작은 단위의 경작지. 농가 뒤에 딸려 있거나 자급자족용으로 쓰이는 몇 평방피트 크기 의 작은 땅도 ‘샴바’라고 한다. 나이로비 거주자들은 대체로 시골에 있는 고향집을 자신의 ‘샴바’라고 말한다.
시다(shida): 골칫거리, 문제. ‘마타타(matata)’와 같은 뜻.
슈카(shuka): 마사이족 남녀들이 몸에 두르는 일종의 전통 의상. 옛날에는 주로 무두질한 동물 가죽으로 된 의복을 입었으나 유럽의 무역상이 동아프리카에 들어오면서 마사이족도 밝은 색상에 흔히 격자무늬가 놓인 긴 옷을 입기 시작했다. 허리에 휘감아 어깨 위로 넘긴다. 남자들은 밝은 적색, 여자들은 짙은 청색을 주로 입는다.
수쿠마(sukuma): 요기용 음식. 문자 그대로‘일주일을 밀어낸다’는 뜻을 가진 ‘수쿠마 위키(sukuma wiki)’도 같은 의미로 쓰인다. 케냐 어디에서나 특식으로 통하는 ‘수쿠마’는 흔히 양배추 비슷한 지역 토산물 푸성귀에 깍두기처럼 썰어진 토마토와 양파를 넣고 볶아서 만든‘수쿠마’에는 거의 어김없이 ‘우갈리(ugali)’가 곁들여진다.
투나엔델레아(tunaendelea): 동사 ‘쿠엔다(kuenda 가다)’에서 파생된 말로서, 계속 나아지고 있다는 뜻. ‘투나엔델레아 폴레 폴레(슬슬 나아지고 있다)’라는 표현으로 흔히 쓰인다. 그러나 난민들이 이것을 영어로 표현할 때는 ‘슬슬 밀어내고 있다’고 말했다.
우갈리(ugali): 케냐의 주식인 흰 옥수수 죽. 걸쭉해질 때까지 죽을 끊인 후 케이크 모양으로 응고되도록 모양을 만든다. 이렇게 되면 맛이나 씹히는 느낌이 이탈리아 음식인 ‘폴렌타(polenta)’와 비슷해진다. 흔히 ‘수쿠마’와 곁들여 뜨거울 때 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