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소중함을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요즘 한국인들의 아름다운 삶과 직업에서 가치 있는 삶을 살아온 명사들을 찾아 그들의 삶과 직업에서 인생의 가치를 찾아보는 기획 연재시리즈 ‘한국인의 삶 인생열전’에서 한국도선사의 선구자 김수금 회장의 ‘내 인생의 파도를 넘어’라는 자서전을 연재한다. 이번 시리즈는 많은 독자들에게 삶과 인생에 대해 잔잔한 감동을 줄 것이다.
글쓴이/ 대륙상운 회장 김수금, 대륙상운 창업자 곽명렬
장자(莊子)가 “오십구비(五十九非)”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나이 60이 되면 지난 59년 동안의 비(非)를 깨달아야 한다는 뜻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내 나이 80을 넘었으니 나는 59년이 아니라 적어도 79년 동안의 잘못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내가 이 자리를 빌려서 이런 글을 쓰는 것은 너희에게 교훈을 남기려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바다와 함께 살아온 내게 바다와 배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내 가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1977년 11월 목선인 “대륙호”를 양도받아 예인업을 시작한지 만 3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너희들이 함께 해주어서 20여 척의 예인선을 갖춘 그럴듯한 모양을 갖춘 회사로 키워왔지만 회사가 커지는 만큼 우리 부부의 품을 떠난 너희와의 진솔한 대화는 많이 멀어진 것 같구나. 내 나이 80을 넘고 너희들 어미도 나와 결혼 한 지 60년 세월 속에 퍽이나 늙어 버리고 말았다. 지난겨울 너희 형제들이 나와 너희 어미를 위해 준비한 “금강혼식” 때는 행여나 행사에 소홀함이 있어 친지들에게 누가 될까 염려하는 마음이 앞서 벅찬 감격을 미처 느끼지도 못한 것 같구나. 오늘 새삼 고맙단 말을 하면서 한 인간으로 태어나 세상을 살면서 겪은 또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는 우리의 이야기를 너희에게 남겨 주어 너희와 너희 아이들에게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수억의 인구 중 우리가 가족이 될 수 있었던 것에 대하여 감사하며 우리 가족의 별나다면 별난 “가족애”를 조금은 더 깊게 간직하고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에 펜을 들었다. 너희와 함께 살면서 겪은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이야기가 있기도 하겠지만 지금 돌이켜 보아도 안타깝고 가슴 아팠으며 저절로 미소 짓게 하는 일도 제법 많았다는 생각이다. 이 모두가 우리의 이야기이며 우리 가족의 생활 아니겠니? 다른 이들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아닐지언정 내가 살았던 것에 대한 기록으로 내가 사랑하는 가족, 우리를 흥분하고 감동하게 하고 또 힘들게 하며 때로는 벅찬 감격을 느끼게 하였던 그 삶의 여정들을 다시 한 번 반추하며 우리 가족과 사람에 대해 그리고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함께 할 수 있었음을 감사하는 특별한 계기를 만들고 싶구나.
- 갑오년 봄, 김수금ㆍ곽명렬 -떠나온 내 고향 삼천포
경부선을 타고 부산에서 내려 남해고속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창원과 함안을 지나 진주에 이르게 된다. 동쪽은 함안군ㆍ마산시, 서쪽은 하동군, 북쪽은 산청군ㆍ의령군에 접한다. 나의 고향 사천은 이곳 진주에서는 고성군처럼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요즘은 사통팔달한 도로망과 대전에서 통영으로 가는 고속도로가 있어 인천에서부터 가는 길도 그리 멀지 않지만 예전 내가 살던 시절의 사천은 말 그대로 시골구석의 이름 없는 시골이었다. 경남의 동맥을 이루는 남강(南江)이 진양호(晉陽湖)를 만들고 시의 중앙을 서쪽에서 북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또, 하동군과 경계를 이루는 덕천강이 남동쪽으로 흘러 진양호로 유입되고, 남강으로 유입되는 나불천ㆍ영천강ㆍ정수천ㆍ향양천 등이 있다. 북서부에서 흘러든 남강에는 홍수조절과 관개용수 공급 등을 위해 1970년대에 건설된 남강댐과 인공호수인 진양호가 있다. 사천시는 1956년 사천면에서 읍으로 승격하고, 1995년 5월 삼천포시와 사천군이 합쳐 도농복합형의 통합시가 되면서 현재의 사천시가 되었다. 부산~순천 간의 남해고속도로가 시의 서부 중앙을 관통하여 마산ㆍ진주ㆍ순천으로 통하고, 진주~삼천포 간의 국도가 시의 동부를 남북으로 지나며, 사천과 고성을 잇는 국도가 시의 동남 방향으로 연결되어 있다. 철도는 경전선 철도가 곤명면을 경유하여 시의 서북부를 지난다. 모충공원과 남일대 해수욕장을 연결하는 해안도로가 있어 교통이 편리하고 사천공항 부근에는 항공산업 단지가 조성되어 항공기 정비 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나는 바다가 가까운 삼천포 향촌면에서 자랐다. 8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남일대 해수욕장과 함께 리조트가 들어서서 제법 붐비는 곳이지만 당시에는 바닷가가 근처에 있었지만 산골에 더 가까운 마을이었다.우리 家系는
나는 김영(金寧)김씨의 자손으로 관조는 신라김씨의 시조 대보공 김알지의 35세손이시며 신라 제56대 경순대왕의 8세손으로 고려 인종 원년에 한림원에 오르고 병무시랑(현 국방차관)으로 큰 공을 세워 위국공신이라 하여 광록대부 평장사의 벼슬에 오르고 김녕군에 봉군된 문열공 김시홍의 27대손이니 너희는 28대손으로 기록될 것이다. 선조대의 각종 관직에 등용되신 분들을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항일독립운동의 의병대장 벽산 김도현, 한일 합방 이후 광복회 혈맹 단체를 조직하여 독립군 양성 사관학교를 설립하신 문중 열사 김한종, 기미독립운동 33인 중 김병도, 대한민국 건국 후 14대 대통령 김영삼을 비롯해 국무총리와 각 부처 장관과 대법관, 국회의원, 공군 참모총장, 공군 대장과 육군대장 등 정치, 교육, 문화 예술계 및 국가 경제발전에 기여한 경영인 등 어느 문중보다도 충신, 공신이 많은 명문거족으로 충(忠), 효(孝), 신(信), 의(義)를 종훈으로 삼고 신라 왕손으로부터 명가의 후예로서 높은 자긍심을 가지고 화합하고 단결하여 고려와 조선조 및 현세에 이르기까지 국가와 사회에 헌신 봉사하면서 조상의 빛난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혈족이다. 나는 김영 김씨 집안의 충의공파 26대손이신 아버지(김학순)와 어머니(차우악)의 사이에서 칠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아내의 고향은
결혼 전 아내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이 있는 남해군 창선면에 살았다. 아내가 살던 1950년대 당시에는 육지 사람들이 다가가기 어려운 남해의 한 섬마을이었다. 지금은 이름난 휴가지로 사시사철 어느 때이고 남해대교를 넘거나 삼천포대교를 건너 쉽게 찾을 수 있지만 1968년 해상공원으로 지정되기 전까지는 관광지로는 물론 어촌으로도 그리 이름난 곳은 아니었다. 동쪽은 통영시, 서쪽은 한려수도를 사이에 두고 전라남도 광양시ㆍ여수시, 북쪽은 사천시ㆍ하동군과 접하고 빼어난 절경을 갖추고 있는 68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 남해는 주민의 대부분이 큰 섬인 남해도와 창선도에 거주하고 있다. 1973년 남해대교가 개통되면서 육지와 직접 연결되었고, 1980년 창선교가 놓이면서 남해도와 창선도가 연결되어 이제는 가히 남해 교통과 관광의 중심지가 되어 관광명소로서 이름난 곳이다.
아내의 성장기
옥색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바닷가를 덮고 있는 모래사장과 해마다 봄이면 붉디붉은 해당화가 높고 낮은 구릉지를 뒤덮는 남해도 창선면 그곳이 내 아내가 자란 곳이다. 일제의 압박 가운데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대이지만 아내의 집안은 보기 드물게 부유한 남해 부잣집이었다. “이른 새벽 통근차 고동소리에 고무공장 큰아기 벤또밥 싼다 하루 종일 쭈그리고 신발 붙일 제 얼굴 예쁜 색시라야 예쁘게 붙인다나……” 하는 가사가 처량스러운 [고무공장 큰아기]라는 신민요가 생길 만큼 고무 산업이 번성하던 시기, 아내의 집안은 삼천포에서 큰 고무공장을 하고 있었다. 1919년 서울 원효로에 대륙고무 공업사가 설립되어 고무신을 만들기 시작하고 1920년에 원산의 조선고무공업사에 이어 1921년 서울에 한성고무, 반도고무, 경기고무, 태창고무 부산에 선반고무, 평양에 시선고무, 동아고무 등이 있었고 경남지역에서는 아내의 집안에서 운영하는 천일고무가 있었다. 부유한 가정환경은 아내에게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을 채워 주었고, 아내는 당시 먹고 살기조차 힘들어서 보통사람들은 엄두조차 내기 힘든 이화여대 진학을 꿈꾸고 있었다. 친정아버지인 곽종거는 집안의 맏딸인 아내에게는 든든한 후원자이자 최고의 조력자이었지만 6.25이후 기지촌이 생기면서부터 여성의 고학력이 사회적 안정이나 여성의 지위 향상이라는 것 보다는 대학에서 신문물에 잘못 물들어 양공주가 되기 십상이라는 사회적 분위기, 특히 시골에서는 자식들 중 아들이 서울로 가는 것은 큰사람이 되거나 돈을 벌러 간다고 생각하면서도 딸자식이 서울로 가는 것은 자칫하면 신세 망친다는 심각한 경계의 대상일 뿐이었기에 아내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남달랐던 아버지였음에도 대학진학보다는 차분히 살림이나 배워 시집가라며 대학진학을 허락하지 않으셔서 오직 집과 학교만을 오가며 아내는 대학진학의 꿈을 포기한 채 가사를 도우며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나의 어린 시절
아버지는 당시 일본은 경제부흥과 함께 각종 건설토목경기가 활발한 반면 조선에서 일자리 만들기가 쉽지 않아 한국인 인부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건축 사업을 하셨다. 당시로는 퍽 늦은 나이인 34살에 결혼식도 하지 못하고 어머니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신 아버지는 열심히 일을 하셨지만 조선 사람에 대한 차별과 전쟁으로 인한 국력의 쇠진 등으로 점차 경기가 나빠져서 큰돈을 벌지는 못하셨고 그럭저럭 생활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1925년 일본 나가노 현에서 태어난 나는 일본의 소학교에 다녔는데 단순히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멸시와 따돌림을 받기 일쑤였다. 일본인 선생은 그런 나에게 “네가 조선인이므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을 억울해 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서 그들을 이겨라”하면서 나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애국이니 애족이니 하는 거창한 이유보다는 같은 사람이고 한 학교에 다니는데 나를 놀리는 것이 분하고 화가 나서 그들에 대해 분노와 적개심에 감정적으로 맞대응할 생각도 했었지만 극단적인 경우 어린 학생들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적 감정으로 일이 크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을 대하는 일본인들의 행태를 보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바보처럼 가만히 있거나 무조건 피하는 것은 그들에게 계속 약점으로 나타나 나를 괴롭히는 행동을 중단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괴롭히는 행동이 늘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단호하게 “하지마라. 난 너희들 생각처럼 바보도 아니고 그렇다고 힘이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한편 이후에도 나를 계속해서 괴롭히거나 약을 올리면 선생님께 말씀드리겠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들이 우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들에게 감정적으로 흥분하여 폭력적인 언어로 맞받아치지 않는 것이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였다. 그 후에도 그들은 놀려댔지만 나는 흥분하지 않고 무심히 외면하고 몇몇 그렇지 않은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일본인 선생님의 말대로 힘으로 이길 수는 없는 일, 그래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다보니 자연스레 많은 시간을 공부에 매달리게 되었고 한편 속으로 “그래 너희들이 멸시하는 조선인이 얼마나 우월한지를 보여주고 말테다”하는 각오를 가지고 공부에 매달렸고 그것은 학업성적으로 나타나 늘 일등을 차지하게 되었다.돌아온 고향
11살 되던 소학교 3학년 때 아버지의 사업이 힘들어지면서 우리 가족은 고국으로 돌아와 40여 일가친척이 모여 사는 삼천포에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는 일손을 거의 놓으셨고 우리 가족의 생계는 힘들어져 가고 있었다. 나는 삼천포 소학교에 다니면서도 일본에서의 습성대로 오직 공부에만 매달렸고 덕분에 소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경쟁률 높은 진주사범에 응시할 수 있었다. 나의 계획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으나 의대에 진학하면 학비가 문제였기 때문에 졸업 후 선생님이 되면 당장 경제적으로 나아져 먹고 사는데 걱정이 없어질 것 같은 생각에서였다. 갑오개혁 이후 신 학제 실시에 따라 1895년 4월 교사양성을 목적으로 [한성사범학교관제]가 제정, 공포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방침에 따라 연차적으로 각 도에 관립사범학교가 설치되기 시작하여 1940년 4월 6일 진주에 관립진주사범학교를 개설하고 5년제의 심상과 [소학교 졸업자가 입학]와 1년제의 강습과, 6년제의 부속소학교를 두어 초등교원을 양성하도록 하였는데 본과와 속성과 학생에게는 학비가 지급되고 전원을 기숙사에 수용하였으며, 졸업 후 취직이 완전히 보장된다는 특전 등으로 다른 관공립학교에 비하여 지원자가 많아서 경쟁률이 대단히 높았었다. 24명이 응시하여 4명만이 입학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합격은 하였고 학비 등을 국비로 지원받기 때문에 당장 학비걱정은 덜어내었다. 내가 다닌 진주사범은 이후 1950년 4월 1일에 공립에서 국립으로 이관되고, 1962년 3월 1일에 2년제의 진주교육대학으로 승격ㆍ개편되었다. 나는 학교기숙사에 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해 공부에 매달렸지만 방학 때면 집에 와서 손바닥만 한 밭에 나가 똥장군을 지고 거름을 나르면서 어린 나이지만 부지런히 농사일을 도왔으나 기울은 집안형편을 일으켜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칠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형제 많은 가난한 시골집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농촌에 주저앉아 살게 되면 가난한 농부 그 이상 아무것도 될 수가 없었다. 농사일은 힘든 것에 비해 얻어지는 것이라고 겨우 허기를 채울 정도였고 그나마 한겨울과 보릿고개에는 식량이 떨어지는 경우도 허다한데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덩치가 큰 편은 아니었지만 무슨 일을 하던지 늑장을 부리거나 요령을 부리며 회피하는 일은 없었던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최고의 결과를 얻기 위해 나름대로 “됐다”라는 자신감과 성취감이 생겨야 그 일을 그만두거나 다른 일을 하는 조금은 고집스런 아이였기에 배우고자 하는 열망만으로 진학을 한 것이 아니라 얼른 배워서 선생님이 되어 월급을 받아 가난을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가정형편만 되었다면 의대를 갔겠지만 사범학교에 간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결국은 무엇보다도 학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책과 의복은 물론 밥값을 제하고도 일원정도 남을 정도였으니 정말 없는 학생들에게는 제격인 셈이다. 사범학교의 이 같은 혜택은 광복 후 1년 반 정도까지 계속되었으며 나중에 학제 변경으로 6년제로 바뀌었다.해양대학생 김수금
1945년 사범학교 2학년 때 광복이 되었다. 해방을 맞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환희와 희망의 기대만큼 자유를 찾게 되고, 또 새로운 조국으로 건설되고 발전되리라 믿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로 인한 민족 분열과 그때까지도 남아 있던 친일파들의 새로운 세력화 등으로 사회질서가 혼란한 가운데 1946년에는 콜레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또 흉년마저 겹쳤으며, 1948년 2월과 3월에는 5ㆍ10총선거를 방해하려는 좌익계의 시위와 폭동으로 전국이 소란한 가운데 심각한 치안불안상태가 지속되는 등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였었다. 나는 선생이 되어 안정적인 삶을 누려보겠다던 꿈을 접었다. 일제하에서의 조선인은 그저 목숨부지하며 살아가기 바쁘고 정치라든가 사업가로서의 영역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사회가 혼란스럽고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하기는 하였지만 이제 일제를 벗어나 나라가 독립을 하였으니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게 되면 무언가 큰 꿈을 꿀 수 있고 또 그것을 실현시키는데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았다. 물론 쉬운 길도 있고 그저 되가는 대로 운명이라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편하게 주저앉아 쉬운 일만 하면서 비전 없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집안 살림도 피고 나라에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사범학교4학년 때 진해에 있는 해양대(당시이름은 고등해운 양성소)를 가기로 하였다. 일반대학에 진학하여 건축가나 판, 검사 또는 의사가 되는 길도 있었고 실력도 충분하였지만 해양대학교에서는 사범학교와 마찬가지로 공부는 물론 먹고 입고 자는 것을 모두 해결해주기 때문에 우선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서 해양인으로서 다양한 기회가 올 것으로 생각한 나는 국가경제와 산업발전에도 기여하며 나의 발전을 꾀하는 길을 찾고 싶었다. 원치 않게 강대국들의 개방 압력에 견디다 못해 억지개방을 하고 주변국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왕을 협박하고 황후를 시해하며 합방을 하게 했던 일본이 우리 민족을 억압하고 우리의 자원을 가져가기 위해 부설한 철도가 지금 우리의 발이 되고 있는 것이 결코 좋은 일도 아니고 고마워해야 할 일은 아니지만 문을 닫고 앉아 그대로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비록 집에서 학비를 대주지는 못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빈곤을 탈피하고 나의 미래를 개척해나갈 필요가 있었기에 다른 대학과는 달리 공부하는 동안 아무걱정 없도록 나라에서 학비를 비롯한 옷과 잠자리까지 제공해준다는데 마음이 크게 끌렸던 것이다. 학교에서 학비는 고사하고 먹을 것 입을 것은 물론 잠자리까지 제공해 준다는데 그야말로“이게 웬 떡이냐”이었던 것이다. 거기다 나라에서 그렇게 해준다면 그만큼 나라에서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니 졸업 후에도 특별히 걱정할 일은 없을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4학년 때 시험을 봤다. 해양대는 서울과 진해 두 곳 중 선택해서 시험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진해에서 시험을 봤고 진해지역에서 1등으로 합격을 하였다. - 2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