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민주주의의 운명(運命)?

왕실 묵인 속 쿠데타, 친(親)탁신 vs 반(反)탁신 갈등 언제까지

2014-07-07     김미진 기자

결국 또다시 쿠데타였다. 태국은 지난 5월 군부가 계엄령을 선포한 지 사흘째인 22일 쿠데타를 선언하고 이를 닷새 만에 왕실이 승인하면서 지난 1932년 입헌군주제 이후 총 19번째 쿠데타가 발생했다. 정부 수반(首班)에는 프라윳 육참총장이 지명됐다. 지난해부터 야당이 총 사퇴하고 의회가 해산한 뒤 잉락 총리마저 해임되면서 안갯속 정국에 빠졌던 태국은 이로써 또다시 역사를 반복하며 과거로 되돌아갔다. ‘친(親)정부 vs 반(反)정부’, 혹은 ‘친탁신 vs 반탁신’으로 일컬어지는 ‘레드 대(對) 옐로우’의 싸움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걸까. 이들의 갈등은 어디에서부터, 왜 시작되었을까. 그리고 태국 민주주의의 운명(運命)은 어떻게 될까.

왕실과 군부 결집, 총 19차례 쿠데타

 
태국은 전통적으로 왕권의 뿌리가 깊은 나라다. 태국에 정통한 언론가 앤드류 마셜은 “영국 등 다른 왕정과 달리 태국에서는 왕실을 칭송하지 않으면 감옥에 갈 수도 있다”고 설명할 만큼 왕권이 강한 국가다. 애왕가 연주 시 단지 ‘기립’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왕권모독 처벌법’이 적용되는 태국은 2007년 한 스위스 여행객이 국왕의 초상화에 페인트를 뿌렸다는 이유로 10년형에 처하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태국 푸미폰 아둔야뎃(87) 국왕은 1946년 즉위한 이후 68년째 재위하며 군 통수권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최소 300억 달러가 넘는 재산을 보유하여 포브스가 뽑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왕’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대대로 장교로 입대하는 왕실 자제들은 이 같은 왕과 군의 가교 역할을 담당한다. 태국 왕실은 그동안 쿠데타를 번번이 승인해 주는 대가로 왕실 권력을 유지해왔다. 지난 2006년 당시에는 쿠데타 발생 바로 다음날 승인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번에는 쿠데타가 선언되고 며칠간 왕실에서 이렇다 할 반응이 나오지 않자 군부의 정당성에 의문이 뒤따르기도 했다. 군부는 승인이 바로 나지 않자 200여 명 정도 소환한 정치운동가 및 언론인 대부분을 ‘왕실 모독죄(형법 112조)’로 왕실에 넘김으로써 거부할 수 없는 손을 내밀기도 했다. 결국 5일 만에 국왕이 쿠데타를 전격 승인하면서 또 한 번 군부는 왕실로부터 쿠데타의 정통성을 인정받게 됐다. 실제로 그동안 과거뿐 아니라 정권의 성향을 보더라도 왕실이 군부의 편을 들어주리라는 예상은 미리 짐작됐었다. 지난 2006년 실각한 탁신 친나왓 전 총리는 국왕 대신 왕세자 편을 들어 왕실 내 긴장을 촉발하기도 했고, 최근 해임된 잉락 친나왓 총리 역시 연이어 내놓은 대중 친화적 정책들로 서민층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왕실을 위협했다. 왕비 근위대 출신으로 대표적인 왕당파 군인인 프라윳 찬-오차 육군참모총장은 정부의 쿠데타 승인 이후 기자회견에서 푸미폰 국왕이 자신을 정부 수반으로 공식 인정했다며 “이제 가장 중요한 일은 국가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태국 내 최고 군정기관인 국가평화질서회의(NCPO)를 책임지고 있는 그는 지난 2010년 벌어진 친(親)정부 세력의 대규모 시위를 강경 진압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계엄령 및 쿠데타 강행에 대해서 그는 “잉락 친나왓 전 총리가 이끌던 정부와 이에 반대하는 시위대의 대치가 반년 이상 지속돼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며 “갈등이 심화되거나 폭력사태의 위협이 있을 때는 우리가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이번 쿠데타를 야기한 일등공신은 반(反)탁신 시위대 지도자인 수텝 터억수반으로 꼽힌다. 2006년 이후 군부에 의해 탄생한 민주당 정권에서 부총리를 지냈던 그는 도저히 선거로는 탁신파를 꺾을 수 없게 없자 ‘선거 없는 정부 수립’을 외치며 공공연히 과격시위를 이끌었고, 정부 청사 등을 점거하며 반역 혐의를 받았다. 지난 2010년에는 탁신파들의 시위를 유혈 진압해 살인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쿠데타 과정에서 군은 우선 ‘중립’이라는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탁신파 인사들 외에도 그를 함께 감금했다. 미국 언론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CSM)는 “선거를 부정하는 반 민주세력과 친 탁신파 간 대결 구도를 벗어나지 않는 한 태국 민주주의는 군주와 장군들 손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할 운명”이라고 분석했다. 이처럼 태국은 ‘총선 승리-재선-쿠데타 축출-정권교체-시위-정권교체’라는 전철을 또 한 번 밟게 됐다. 이에 앞서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역시 “이번 태국 정국의 상황은 단번에 해결될 수 없는 사안”이라며 “잉락 친나왓 총리와 내각 구성원 9명 모두를 제거한 것은 격렬한 정치적 분쟁을 야기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 바 있다.

위태로웠던 과거 역사, ‘친(親)탁신 VS 반(反)정부’
태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민주당(PD)은 본래 군사정권과 맞서 싸우던 정당이었다. 그러나 2001년 탁신 정권이 집권한 이후 만년 야당이 됐다. 실제로 탁신 정권은 지난 2000년 이후 총 5차례 실시된 총선에서 모두 승리를 거뒀다. 2001년 6월 6일 탁신 친나왓 전 총리가 창설한 타이락타이당(TRT)이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며 집권을 시작한 뒤, 탁신 정권은 농민과 노동자 등 저소득층에 친화적인 정책을 내놓으며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에 반해 민주당은 왕실과 군부 및 판검사로 대표되는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입장이었다. 2005년 2월 타이락타이당이 다시 총선에서 승리하며 재집권하였으나 1년 뒤인 2006년 2월 탁신 일가의 탈세 의혹으로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이에 탁신은 의회를 해산하고 4월 조기총선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그해 9월, 15년 만에 다시 쿠데타가 발생하며 탁신은 영국으로 망명하기에 이른다. 결국 2007년 5월 30일 타이락타이당은 해체 판결을 받고, 새롭게 탁신계 신당 ‘국민의 힘(PPP)’이 탄생한다. 2007년 12월 다시 총선에서 승리한 탁신 정권은 이후 반탁신 세력과 기나긴 싸움에 돌입했다. 일명 ‘옐로셔츠’라 불리는 반탁신 단체인 국민민주주의연대가 반정부 시위를 벌이자 정부는 해산을 요구하고 나섰다. 2008년 10월 대법원은 탁신 전 총리에 권력남용과 부정부패를 이유로 징역 2년을 선고하고, 옐로셔츠 시위대는 수완나품 국제구항을 약 일주일간 점거하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태국 헌법재판소가 국민의 힘 등 집권당 3곳을 선거부정 등의 혐의로 해체한다는 판결을 내리고, 의회가 민주당 아피싯 총재를 27대 총리로 선출하면서 반탁신 세력은 정권 장악에 나섰다. 이듬해 친탁신 단체인 독재저항민주연합전선(UDD), 이른바 ‘레드셔츠’들은 정부청사를 봉쇄하고 의회해산을 요구하며 반탁신 세력에 대립했다. 2009년 4월에 개최될 예정이던 아세안+3 정상회의가 이들 시위로 무산되기도 했다. 이 가운데 대법원은 태국 내 동결된 탁신 재산 766억 바트 중 460억 바트를 몰수하라는 판결을 내리고, 2010년 3월 독재저항민주연합전선이 방콕 랏차담넌 거리 집결 후 의회해산을 요구하며 반정부 시위를 계속했다. 정부가 이러한 시위대를 강제해산하는 과정에서 92명이 사망하고 1,7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2011년 7월 실시된 조기총선에서 다시 탁신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 전 총리를 앞세운 푸어타이당(PT)이 압승을 거두고, 2013년 11월 잉락 전 총리가 포괄적 정치사면법안을 승인하면서 다시 갈등의 불씨는 되살아났다. 부패 혐의로 2년 형을 선고받고 외국에 체류중인 탁신 전 총리의 사면을 염두에 둔 이 사면 법안은 탁신뿐 아니라 2006년 쿠데타 주도자 및 2010년 무력시위 진압 책임자였던 민주당 아피싯 전 총리와 레드, 옐로셔츠 양쪽 지도부를 대다수 포함하면서 양쪽 진영 모두로부터 강한 반발에 부딪혀왔다. 이 법안이 하원에서 통과된 후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고, 수텝 전 부총리는 민주당 소속 하원의원 8명과 함께 의원직을 내던지고 민중평의회 설치를 요구하며 ‘탁신 타도’를 부르짖었다. 반정부 측은 잉락 전 총리의 퇴진과 탁신체제 근절을 요구하며 약 10만여 명이 시위에 동참했다. 잉락 측은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총선을 실시하기로 했지만 2014년 ‘방콕 셧다운(shut-down)’ 시위가 벌어지고 헌법재판소는 2014년 2월에 치러진 조기총선을 무효로 판결, 결국 ‘권력 남용’이라는 이유를 들어 지난 5월 잉락 총리의 해임을 결정했다.

탁신 측, 해외 망명정부 창설?
지난 6월 8일 대표적인 ‘레드셔츠’ 운동가인 친 탁신파 주요 인물 짜끄라폽 까이 전 총리실 장관은 “국내외 쿠데타 반대 운동을 이끌기 위한 조직을 해외에 창설하겠다”고 밝혔다. 태국 현지 언론에 따르면 짜끄라폽 전 장관은 이 조직을 굳이 망명정부라 부르지 않고 ‘망명조직’이라 부르겠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그는 최근 자주 외국을 방문했으며, 쿠데타 후 해외로 피신해있는 전 전 집권당 핵심 지도자들을 만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구체적인 국가명은 거론되지 않았지만 태국 인근 국가에서 이 같은 망명조직을 동원해 전 세계적 쿠데타 반대여론을 확산시키고, 국제사회가 군 정치부에 퇴진 압력을 가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내용을 호주 언론과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이 같은 구상은 지난 5월 쿠데타 직후 탁신 전 총리의 법률 고문인 로버트 암스테르담 변호사가 “탁신 친나왓 전 총리 일가의 해외 망명정부 수립을 검토중”이라고 했던 발언과도 일치하는 내용이다. 로버트 변호사는 “군부 정권은 위헌”이므로 “해외 망명정부가 태국 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이 같은 계획을 두고 태국이나 친탁신 내부에서도 의견은 엇갈리고 있다. 인근 국가에서 이 같은 정부의 수립을 허용할지도 미지수다. 탁신 전 총리의 측근으로 알려진 훈 센 캄보디아 총리는 “캄보디아 헌법은 항구적 중립, 비동맹을 규정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자국 내에서 태국 망명정부 수립을 허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이미 밝힌 바 있다. 군 당국은 짜끄라폽 전 장관의 망명정부 발언이 나온 직후 태국주재 캄보디아 대사를 불러 캄보디아가 쿠데타 반대 운동을 지원하지 말라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러한 가운데 최근 탁신 전 총리가 일본에서 목격된 사실이 전해지기도 했다. 지난 5월 29일 탁신 전 총리가 한 여성과 함께 도쿄 거리를 걷는 모습이 일본에 머물던 한 태국인에 의해 포착됐다. 탁신 전 총리는 자신의 트위터에 “최근의 군부 쿠데타 사태에 슬픔을 느낀다”는 내용의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10월에도 도쿄의 한 호텔에 머물며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만난 적이 있다. 탁신 전 총리는 지난 2006년 쿠데타로 실각한 뒤 부정부패와 권력남용 혐의로 기소됐으나 감옥행을 피해 지난 2008년 해외로 도피 후 현재까지 외국에 머물고 있다. 한편, 군부에 의해 구금된 이후 석방으로 풀려난 여동생 잉락 전 총리 역시 계엄령 선포 직후 국외로 피신했다는 소문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파다하게 퍼졌으나, 군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출국할 수 있는 것으로 확인되기도 했다.

쿠데타 반대 시위 계속… ‘레드’ 물결
쿠데타 직후 태국의 풍경은 번화가 집회를 막기 위한 군인들의 차량과 도로 곳곳에 배치된 인력들로 가득하다. 헌병들은 반대 시위를 사전 차단하기 위해 태국 방콕 승리기념탑을 지키고 섰고, 소셜미디어(SNS)를 통한 쿠데타 반대 여론 확산에 대비하고자 정부는 페이스북과 유튜브 등 아시아 본사 및 지사에 대표를 보내 ‘검열’ 협조를 당부하기도 했다. 군부는 애초 쿠데타 반대 시위 참가자들에 대한 ‘강경’ 진압을 예고했지만, 방콕에서는 한동안 매일 같이 소규모 기습 시위가 계속 발생했다. 번화가인 아속 전철역에서 100여 명이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쿠데타 나흘째인 지난 5월 25일에는 쿠데타 이후 최대 규모의 반대 시위가 진행됐다. 시위 참가자들은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해 쿠데타와 싸운다”는 내용이 적힌 종이를 들고 서서 군권 타도를 외쳤다. 태국 군부는 6월에도 방콕에 6천여 명의 군경을 계속 배치하고 쿠데타 반대 시위에 대한 대비를 강화했다. 국가평화질서회의는 국제공항과 시내 쇼핑가 등에 군인 27개 중대와 경찰 15개 중대를 포함한 6천300여 명의 인력을 배치했다고 밝혔다. 이는 쿠데타 반대자들이 시내 곳곳에서 ‘기습 시위’를 벌이겠다고 예고한 데 따른 대비였다. 한편, 그동안 SNS를 통해 기습 시위를 주도해왔던 솜밧 분가마농은 “자신이 체포되더라도 반대 시위를 계속 하라”는 말을 남기고 지난달 6일 체포됐다. NCPO 대변인은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거나 당국과 협조하지 않는 이들은 심각한 결과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NCPO 의장을 맡고 있는 프라윳 총장은 “시위대와 대치하지 말고 사진을 찍어 신원을 파악한 뒤 체포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레드셔츠들의 시위가 있기 전, 지난해 11월부터 탁신 측 퇴진을 요구하던 ‘옐로우’ 측이 반정부 시위를 벌였을 당시에는 약 700여 명의 사상자와 함께 20여 명이 사망하는 유혈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었다. 당시 시위대가 점거한 방콕의 쇼핑가에서 수류탄으로 추정되는 물질의 폭발로 12세 어린이 등 2명이 숨지고 20여 명이 다쳤다. 또 시위대가 점거했던 라차프라송 교차로 인근 쇼핑가에서는 폭발로 12세 남자 어린이와 44세 여성이 목숨을 잃는 등 총격과 폭탄 공격으로 사상자가 속출한 바 있다. 당시 잉락 전 총리는 이 같은 사태와 관련해 “인명을 존중하지 않고 정치적 목적을 노린 테러 행위”라고 규탄했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도 태국의 폭력 사태가 연이어 발생하자 폭력 행위 중단과 책임자 처벌 촉구에 나서기도 했다. 한편, 2010년 당시에도 방콕 번화가를 중심으로 3개월여 동안 지속된 친탁신 시위를 군과 경찰이 진압하던 과정에서 약 90여 명이 숨지고 1천7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바 있다. 치앙마이대학 폴 챔버스 동남아연구소 소장은 “프라윳 총장은 레드셔츠에 다시 총을 겨누는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군 정권의 민심 달래기
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뒤로 태국에서는 총선 실시에 1년 이상 긴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지난 5월 26일 기자회견에서 프라윳 총장이 민정 이양 시기에 관해 “정치적 상황에 달렸다”며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기 때문이다. 또한 군정 측도 ‘정치 개혁’ 후 선거를 치를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태국 군부는 이후 3개월 안에 과도 총리를 임명하고 과도 내각을 구성하겠다고 지난달 6일 밝혔다. 이와 함께 45개 조로 구성된 임시 헌법안 작성이 끝났으며, 해당 초안을 검토하기 위해 특별위원회 구성 명령이 떨어졌다. 프라윳 총장은 분열 상태인 현 태국의 갈등을 조정하는 데 “최소 2~3개월”이 걸릴 것이라 내다보고 새 헌법과 과도정부를 마련하는 데는 그보다 긴 1년 정도 기간이 소요된다며 총선은 그 이후 시행할 입장임을 간접적으로 밝혔다. 앞서 잉락 전 총리는 지난 2월 조기총선이 무효로 판결 나자 7월 재총선을 추진한 바 있다. 계엄령 선언 이후 쿠데타가 발생하기 직전 태국의 니와툼롱 분송파이산 과도총리 대행은 정치적 혼란을 끝내기 위해 8월 3일로 다시 재총선일을 선거위원회에 요청했으나 바로 다음날인 22일 쿠데타가 발생했다. 반정부 시위대는 잉락 전 총리 시절 부총리 겸 상무부 장관을 지낸 니와툼롱 과도총리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중립적’ 인물을 새 과도총리로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해오기도 했다. 총선 일자가 결국 기약 없이 늦춰지면서, 태국 내 민심은 갈 길을 잃었다. 군부는 자신들의 정통성 및 정당성을 주장하며 이 같은 대중들의 분위기를 수습하고자 다양한 행사와 물품들로 관심을 애써 돌리고 있다. 지난달 방콕 시내 전승기념비 주변으로는 군복 무늬로 된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들이 시민들 사이를 활보했다. 군악대의 라이브 연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시민들은 자유롭게 공짜 음식을 즐기며 군인들과 시간을 보냈다. NCPO 측이 주최한 ‘행복을 돌려 드립니다(Return Happiness to the Public)’ 행사장 주위는 “흡사 파티장 같았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전했다. 쿠데타 이후 반군부 집결지였던 공간이 한순간 국민화합용 장소로 변모한 것이다. 앞서 방콕 산티에서는 ‘군인도 국민이다(Soldiers are people)’라는 문구가 인쇄된 티셔츠를 시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또한 잉락 전 총리가 내놓았던 쌀 고가 수매 정책을 재개하기로 하며 지난 5월부터 농민 8만 명에게 수매 대금 550억 바트(약 1조 7천억 원)를 지급하기도 했다. 상무부는 또 205개 소비자 생필품에 대해 오는 11월까지 6개월 동안 가격을 동결할 것이라고 밝혔다. 상무부는 이 같은 조치가 물가 상승을 억제하고 경기부양 및 소비 심리를 개선할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쿠데타 이후 불안 상황이 계속되면서 타격을 입은 관광산업을 위해 빳따야, 푸껫, 코사무이에 이어 태국 동부 트랏주(州)의 코창과 송클라주 핫야이, 수랏타니주 코팡안 등 추가 3곳에 대해서도 통행금지령을 해제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지난 쿠데타 왕실 승인 직후 “프라윳 총장이 그동안 불안으로 흔들렸던 태국 경제를 안정적으로 회복시키는 데 힘쓸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태국 경제의 안정적인 성장을 위해 중앙은행과 증권거래소 등 금융기관 대표들을 만나오기도 한 프라윳 총장은 앞장서서 ‘평화와 개혁’을 외치고 있다. 과연 이것이 태국의 진정한 민주주의와도 맞닿아 있는 방향일지 당장은 알 길이 없다. <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