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파도를 넘어’
가족의 소중함을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요즘 한국인들의 아름다운 삶과 직업에서 가치 있는 삶을 살아온 명사들을 찾아 그들의 삶과 직업에서 인생의 가치를 찾아보는 기획 연재시리즈 ‘한국인의 삶 인생열전’에서 한국도선사의 선구자 김수금 회장의 ‘내 인생의 파도를 넘어’라는 자서전을 연재한다. 이번 시리즈는 많은 독자에게 삶과 인생에 대해 잔잔한 감동을 줄 것이다.
글쓴이/ 대륙상운 회장 김수금, 대륙상운 창업자 곽명렬
여객선에서의 구사일생
해양대 합격통지서를 받고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에 얼마간의 시간을 그냥 보낼 수는 없어서 몇 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리저리 돈을 마련하여 쌀장사를 하기로 했다. 부산서 여수까지 왕래하는 배 하야부사마루를 삼천포에서 타고 가는데 여객과 화물을 적정 선적량 보다 많이 싣고 출발한 배가 하동 노량 앞바다에서 갑자기 복원력을 잃고 전복되었다. 배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하였고 사람들과 화물이 뒤 엉킨 채 가라앉고 있었다. 기관실 옆에 있던 나는 빠져 들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기관실 우측 문이 열리면서 밀려들어온 물이 나를 기관실 안으로 밀어 넣어 당황하였으나 다행히 좌측 문이 열리면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배는 빠져 나왔지만 몸은 아직도 물속에 있었고 물 밖으로 나가기 위해 방향을 찾아야 했다. 수영은 제법 할 줄 알았지만 당황하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가능한대로 숨을 참으면서 물속에서 각종화물과 허우적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수면에 비치는 빛을 향해 필사적으로 헤엄을 쳤고 겨우 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젊음은 내 생명을 건졌고 동네 바닷가에서 배운 수영이 그 위험에서 나를 구했다. 140여명의 승선자중 객실에 있던 100여명은 그대로 수장되고 갑판과 화물위에 있던 40여명만이 살아남은 엄청난 사고에서 내가 살아나는 행운이 따른 것이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그때가 19살 이었다. 물 밖으로 나온 뒤 정신없이 헤엄쳐서 육지에 올라와 보니 벌써 죽은 사람들을 덮어놓은 가마니가 눈에 띄었고 사방에서 통곡소리와 실종된 가족을 찾는 아우성이 들려왔다. 만약 그때 전복된 배에서 그대로 죽었더라면 내 인생은 그것으로 끝났겠지만 지금까지 아내와 함께 팔십 중반을 넘기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천명이라고 생각한다.똥장군지는 대학생
당시 교통부 소관이었던 학교에서는 학비는 물론 제복과 식사를 비롯하여 잠자리까지 제공하고 약간의 학용품비 까지 나왔다. 나는 그것을 최대한 아끼고 아껴 나은 돈은 집에다 가져다 드리고 그때도 방학이면 집에 가서 똥장군 지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날을 세우다시피한 바지와 칼라가 정갈스러운 해대제복의 학생이지만 여름방학에 집에만 오면 농사꾼으로의 역할을 전혀 마다하지 않았고 겨울방학에는 나무꾼이 되어 집안의 겨우살이 준비를 해놓곤 하였다. 먹고 산다는 것이 하늘만 바라본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또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고 하늘을 원망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도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의식주는 모두 자기의 손과 발이 만들어 주는 것이다. 남의 것을 탐내다가는 죄를 짓게 마련이고 그것은 바른 삶이 아니다. 나는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지만 부유한 사람을 부러워할지언정 그들의 것을 빼앗거나 거저 주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다만 저들은 어떻게 하여 저렇게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그들과 같이 더 나가 그들보다 잘살 수 있기 위해 언제나 최선을 다하였다. 입학하여 얼마 되지 않아 진해의 해양대학교가 해군사관학교로 양도되는 바람에 해양대는 인천으로 왔다. 변변한 학교건물도 없이 하인천 부근 미곡 창고를 교사대신 사용하고 숙식은 해양경비대기지에서 해결하는 등 난민 같은 생활을 하다 6개월여 후 다시 군산으로 이동하여 결국 6ㆍ25가 나던 해인 1950년 3월 군산에서 졸업하게 되었다.대한해운공사 입사
졸업 후 대한해운공사에 입사시험을 봤는데 발표가 나기 전 이미 합격자가 내정되어 있다 소문이 돌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 시험을 보고 발표를 하기도 전에 내정된 합격자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당시 정부와 사회가 혼란스러운 시기이기는 하지만 이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그대로 있다가는 멀쩡한 바보가 될 것 같았다. 합격기준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정식 발표가 나기도 전에 합격자가 정해진단 말인가. 180명의 졸업생 중 상위권성적을 유지하고 있는 내가 떨어져야할 이유가 없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해운공사를 찾아갔다. 물론 담판 지으러간 나를 괘씸하게 보고 합격시키기는커녕 다른 기회조차 주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나 자신은 물론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비정상적으로 사원을 채용하는 악습은 따져 묻고 가능하다면 바꾸어 놓겠다는 일종의 정의감도 작용했던가보다. 수소문 끝에 선원부장을 만나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했다. “저는 이번에 졸업한 해양대학 2기생 180명중 10등 안에 든 김수금입니다. 시험을 봤는데 아직 합격자 발표도 나지 않았는데 일부에서 회사에 연이 있는 사람을 우선 채용한다고 하는 데 사실입니까?” “그럴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제 실력이 모자란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합격 시켜주십시오” 선원부장은 당당한 내 모습에 호감을 느꼈던지 내 이름을 다시 묻고는 메모를 하면서 걱정 말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2기생 180명 가운데 항해과와 기관과 각 10명씩 20명을 채용하는데 무사히 채용될 수 있었고 나머지 동기들은 학교 선생님으로 취업하거나 하였다.졸업과 6ㆍ25
졸업 후 대한해운공사에서 항해사로 제일 먼저 탄 배는 가평호였다. 이 배는 미군 LST를 일부 개조하여 묵호와 인천을 오가며 석탄을 수송하는 배였다. 나라에 기반시설은 물론 적절한 운송 수단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 미군으로부터 불하 받거나 양도된 LST는 당시 해운업계 최고의 선박이었으며,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에서 육상 교통이 변변치 않아 각종 물류의 수송은 물론 몇 개 안되는 발전소나 공장에 연료를 공급하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했다. 1950년 6월 인천에서 석탄을 내리고 묵호를 향해 가는 중 27일 오전 경에 군산 앞바다를 지날 때 한국에 전쟁이 났다는 일본방송을 듣게 되었다. 한국에 전쟁이 나고 한국군이 밀리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전쟁이라니 3ㆍ8선 부근에서 간혹 국지전인 총격전이 있다는 말은 들어 왔지만 전면전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던 나는 이번에는 좀 크게 벌어졌나보다 하고 별 동요 없이 본사와 무전 교신을 하였더니 전쟁이 난 것이 사실이니 묵호로 가지 말고 부산으로 가서 해군의 지시를 받으라는 연락을 받았다. 부산항에 도착한 나는 해군에 군속이 되었고 해군본부의 지시를 받아 나해안과 동해안인근에서 각종 보급품을 운반하다가 인천상륙 후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에 따라 고성, 원산 그리고 성진까지 기뢰를 피해 보급품을 운반하며 해군으로 복무하게 되었는데, 언젠가는 기뢰를 제거해주며 앞서가던 미군소해정이 침몰하여 크게 놀라기도 했다. 그 후 특별히 더 조심스런 운항을 하였지만 영덕 앞바다에서 야간에 좌초하는 일이 발생했다 사방에서 언제 적이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 좌초된 배에는 국군에게 가지고 가는 각종 보급품이 실려 있었으니 만에 하나 발견되면 폭격당하거나 잡힌다면 어김없이 총살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배를 건져낼 방법을 찾아야 했다. 구조요청은 어림도 없는 상황이고 보니 우리 힘으로 해야 했다. 전쟁 중이라서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북괴군의 눈앞에서 살아날 방법은 영덕항에 있는 어선을 훔쳐내어 타고 도망가든지 가능하다면 좌초된 우리 배를 끌어내 탈출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다행히 전선과는 거리가 있는 곳이라 낮 동안 적들에게 발견되지는 않았다. 다시 밤이 되기를 기다려 선원들끼리 특공대를 조직하여 8명이 영덕항까지 헤엄쳐서 갔고 보초들의 눈을 피해 어선한척의 밧줄을 풀었다. 혹시라도 보초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시동을 걸지 않고 천천히 배를 밀어 그냥 떠내려가는 배처럼 보이도록 바다 쪽으로 밀어내었다. 생사가 달린 일이다. 적에게 들켜서는 안 되고 배는 밀어내야 했다. 힘도 들었지만 무엇보다도 자연적으로 밧줄이 풀려 흘러내려가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다행이 보초들이 못 보았는지 아니면 우리의 계획대로 밧줄이 풀려 떠내려가는 것으로 보였는지 우리는 무사히 좌초된 배까지 올 수 있었다. 좌초된 배에서 항해일지와 기관일지 등의 서류와 보급품을 어선으로 옮겨 싣고 부산으로 향하려는데 때마침 미군함정이 나타났고 우리는 미군의 도움으로 좌초된 배까지 끌어내어 부산으로 가서 부산의 영덕 조선소에서 수리를 하여 다시 사용할 수 있었다. 그 후로도 계속 동해안을 따라 오르내리며 피복, 휘발유, 탄약 등 국군의 보급품을 운반하고 흥남에서는 피난민을 태우고 거제도 장승포와 부산진에도 내려주기도 하였는데 훗날 휴전 후 가보니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부산의 국제시장상권 중 포목상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전쟁시작 3개월 만에 대구ㆍ부산 등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전 지역을 장악한 인민군은 점령지역에서 당과 인민위원회를 만들어 놓고 토지개혁을 비롯한 일련의 개혁조치를 하였고 미국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개최, 국제연합군 참가를 결의케 했다. 9월 15일 미군이 중심이 된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28일에는 서울을 탈환하고 10월 26일에는 한국군 일부가 압록강 근처 초산까지 진격하였지만 하루 전인 25일 유엔군의 북진이 만주공격을 위한 것이라며 중해전술로 전세가 역전되어 한국군이 오산 부근까지 후퇴하였다가 해를 넘긴 51년 3월 24일 다시 38선을 넘어 철원ㆍ금화 일대까지 진출하고 6월 23일에 소련이 휴전을 제의 휴전교섭에 들어갔다. 소련 유엔대표의 휴전제의를 받아들인 미국은 7월 8일 개성에서 예비회담이후 몇 차례의 회담을 통해 비무장지대 설치를 위한 군사경계선 설정, 휴전 감사기관 구성, 포로교환 등을 논의하였다. 휴전회담은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반대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반공포로를 석방함으로써 우리의 의지를 나타냈다. 이에 미국은 한미상호안전보장조약체결ㆍ경제원조 등을 내세워 이승만 대통령을 무마시키고, 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마침내 전쟁은 끝나고 휴전상태에 들어갔다.결혼 전 아내
삼천포에서 결혼한 지 60년을 넘겨 나와 함께 살아온 내 아내는 고무공장을 하시던 아버지의 큰딸에 대한 지극한 사랑 가운데 경제적으로 아무런 아쉬움 없이 자랐다. 여수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여수여고를 졸업한 그녀는 여고시절부터 많은 혼사가 들어 올 정도로 인근에서는 이름난 부잣집의 맏딸이었다. 삼천포에 공장을 차린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여유도 있고 지방유지로서 명망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민의원에 나가려고까지 하였으나 어머니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고 한다. 아내는 남해에서 나와 여수 이모님 댁에서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여수여고를 다니던 1948년 10월 19일 국방군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제주도 4ㆍ3사건 진압출동을 거부하고 대한민국 단독정부를 저지하기 위해 여수ㆍ순천에서 일으킨 여순반란사건으로 여수지역에는 무법천지가 되었고 함부로 나와 돌아다니기가 무서운 상황이었다. 반란의 진압을 위한 경찰과 국군의 검문, 검색 등이 철저하던 때였다. 아버지는 반란군이 인민재판을 통해 여수의 민간인을 거의 다 죽였다는 유언비어에 딸의 생사를 몰라 전전긍긍하다가 사건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소를 잡아 대접하는 등 경비를 맡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정을 하고 아는 사람을 통해 수소문하여 겨우 여수로 들어와 아내를 만나자 마자 책이고 뭐고 다 버리고 아내만을 데리고 황급히 남해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사랑하는 딸의 생사를 확인하고 집에까지 데려왔으니 안심이 되기는 하였지만 시국이 불안정하고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걱정이 된 아버지는 딸의 결혼을 서둘렀고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의 주장에 따라 나와의 결혼을 허락했다고 한다.
결혼
광복 후 5년이 지난 1950년 6월 25일 새벽 발발하여 3년 1개월간 계속된 한국전쟁. 민족의 분열과 대립이 지속되며 아직 휴전이 성립되기 전인 52년 4월 남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아내와 내가 결혼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친정동네의 주변사람들은 신랑은 대학도 나오고 직장도 좋은 곳에 다니고 있기는 하지만 시댁 될 집이 가난하기만 한 게 아니라 임질(바구니에 물건을 이고 다니면서 하는 시골의 장사꾼)하는 시어머니의 성격이 모났다며 결혼을 적극 만류하였지만 나를 마음에 들어 하신 장모님은 조금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상관없으며 신랑만 괜찮으면 된다는 주장으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시골의 유지집안 결혼식은 전쟁의 와중에도 거의 한달 간 계속되었고 우리는 삼천포로 와서 신혼살림을 꾸렸다. 해방 후 높아진 민중운동은 5ㆍ10총선을 앞두고 한층 치열해졌으며, 여수ㆍ순천사건을 비롯하여, 대구에서는 군인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50년에 이어 2차 화폐개혁이 단행되고 물가는 계속 올라 경제는 말이 아니게 나빠지고만 있었다. 결혼초기 극심한 생활고 속에 시댁에서의 결혼생활은 그야말로 혼란한 정국과도 같았다. 아니 어쩌면 당시의 아내로서는 나라의 정세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결혼 생활이 더 어둡고 혼란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시부모와 네 명의 시누이는 며느리를 맞아들인 게 아니라 마치 없던 종 하나가 들어 온 듯 집안의 온갖 일은 다 아내에게 맡겨졌다. 19살 새댁은 기본적인 식사와 청소는 물론 시부모와 다 큰 시누이들의 빨래도 아내가 도맡아야 했다. 당시 연탄이 등장하여 도시의 많은 가정이 간편하고 오래 가는 연탄을 주원료로 사용했지만 우리 집 형편으로 비싸고 귀한 연료인 연탄은 시기상조였기에 여전히 나무를 해다 밥하고 군불을 땠는데 그 모든 일은 온전히 아내 몫이 되었으며 첫아이를 임신하였지만 축하받거나 임신으로 인한 시부모의 사랑은 사치였다. 결혼 전의 꿈은 사라지고 여섯 식구 치다꺼리는 아내의 어깨를 내리 누를 것처럼 힘들고 아팠단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9살 어린나이에 아무것도 모르고 친정어머니가 보내니 시집이라고 왔으나 기대어 살아야할 남편은 배타고 나가면 며칠에서 몇 달까지 보기도 힘들고 옛말처럼 보고도 못 본 척 삼년 듣고도 못 들은 척 삼년이라지만 집안의 모든 일을 해가며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저 혼자서 마음을 다독이고 다독여도 고달픈 시집살이 퍼렇게 멍들어가는 가슴속은 아리기만하고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누군가에게 묻고 싶어도 까맣게 타버린 가슴은 그저 답답하기만 하였다.시집살이
시집이라고 온 곳은 방 두 개 부엌 하나와 별채로 방 하나 있는 집이었다. 가난한 집이 우리뿐 만은 아니었지만 부유하게 살던 딸이 깨진 솥을 솜으로 때워가며 밥을 해야 할 정도로 엄청난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마음에 친정아버지는 분풀이하듯 친정어머니를 크게 혼내고 집에서 쫓아내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장모님은 사위가 마음에 들어 결혼시켰고 시집이 가난하기는 하여도 결혼하면 가난한 사천에서 살지 않고 사위와 함께 부산으로 살림이 날줄 알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딸은 모진 시집살이를 해야만 했던 것이다. 온화한 성품의 시아버지와는 달리 시어머니는 있는 집에서 들인 며느리에 대한 콤플렉스로 유달리 심한 시집살이를 시켰다. 일상의 모든 일에 대해 다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것은 물론 굳이 필요 없거나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시키거나 하는 시어머니의 이유 없는 미움과 투박은 물론 가사를 전혀 돕지 않는 시누이들의 철없는 행동들은 시집살이를 더 힘들게 하였고 그 가운데 없는 살림을 꾸려 나가기는 더욱 어려웠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혹독한 시집살이를 시키는 것은 애지중지 키워놓은 아들을 젊은 며느리에게 빼앗겼다는 상실감과 허탈감 그리고 질투심 때문이라는데 실상 나의 어머니는 나에게 그다지애정을 갖고 있지도 않았던 것 같고 애지중지 하신 기억이 없다. 그런데 왜 그렇게 아내를 힘들게 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부잣집에서 시집온 아내에게 무엇인가를 바랐지만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이 동네 저 동네 장사를 다니면서 생기는 스트레스를 아내에게 풀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당시 미군이 남기고간 배를 개조한 “천지호”에 승선하여 몇 개월 만에 한 번씩 집에 들어오고 불과 이삼일 후엔 또다시 바다로 나가기 때문에 집안일은 거의 모른 채 오직 직장일에 매달려 있었다. 나중에 들어 알게 되었지만 아내는 부잣집 맏딸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집살이 가운데에도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용왕밥”을 짓고 산에 나무하러가서 틈틈이 뜯어 모은 나물들로 험한 바다에서 배를 타고 있을 나를 생각하며 나의 안전항해를 비는 제를 드렸다고 한다.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도무지 나를 생각할 여유가 없겠건만 남편의 안전한 항해와 귀가를 바라면서 드렸다는 용왕제 얘기를 훗날 듣고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밀려왔고 지금도 아내의 사랑과 정성에 감사할 뿐이다. - 3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