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파도를 넘어’
가족의 소중함을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요즘 한국인들의 아름다운 삶과 직업에서 가치 있는 삶을 살아온 명사들을 찾아 그들의 삶과 직업에서 인생의 가치를 찾아보는 기획 연재시리즈 ‘한국인의 삶 인생열전’에서 한국도선사의 선구자 김수금 회장의 ‘내 인생의 파도를 넘어’라는 자서전을 연재한다. 이번 시리즈는 많은 독자에게 삶과 인생에 대해 잔잔한 감동을 줄 것이다.
글쓴이/ 대륙상운 회장 김수금, 대륙상운 창업자 곽명렬
나무하는 아내
부산에서는 동아대 인근에 살았는데 전쟁 후 많은 것이 모자랐고 특히 연료로 쓸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나무뿐 이었던 그 시절 아내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탓에 산림녹화정책이 서슬 퍼런 가운데도 방을 데우고 밥을 해 먹어야 하는 까닭에 늘 나무를 하러 다녔지만 나무하러 가는 길에 행여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봐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는 체 얼굴을 가리고 사람들이 없는 길로 해서 산에 올라 낙엽을 긁어모으고는 하였단다. 여름이면 내리쬐는 해가 수건 두른 머리에 불을 끼얹은 것처럼 뜨거워 머리를 얻어맞은 것같이 띵하며, 타는 목은 혀가 목구멍 속으로 말려 들어가는 듯하며 귓속은 왕왕 거려 잘 들리지 않았고 겨울에 눈이라도 내리면 거추장스런 우단치마는 치렁치렁 다리를 휘감아 넘어지기 일쑤였으며 살을 에는 칼바람이 손마디와 코끝을 도려내는 듯 하는 것이 추위를 느끼기 전에 오히려 설움과 아픔이 먼저 왔고, 죽은 나뭇가지와 낙엽을 긁어모을 갈퀴가 없어 손으로 긁어모으노라면 열손가락 마디마다 피가 나고 멍이 들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었단다. 가을이라고 해서 나을 것도 없는 것이 아침저녁은 영하에 가까운 기온으로 추위를 느끼게 하다가도 한낮이면 나무를 하기에는 아직도 더위로 온몸에 땀이 흘러내린다. 심한 일교차로 견디기 힘든 것이다. 봄이면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아 질퍽거리고 진흙과 함께 달라붙는 낙엽은 걸음마저 걷기 힘들어 애써 잘라놓은 나무를 짊어지고 나를 수가 없으니 질질 끌어다 경사진 언덕에서 굴려서 내리지만 해빙기가 지나고 나면 땅이 파이기도 하여 집으로 끌고 가기에는 남자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씩 끌어다 쌓아놓으면 어느새 온몸은 비지땀으로 젖어 있곤 했다. 부잣집 맏딸로 많은 혼수를 하여갔지만 시집에서 살림을 하느라 새댁답게 멋을 내어 입어 보지도 못한 채 장에 넣어 두었던 우단치마는 나무하러 갈 때 머리에 일 자루주머니 외에 더 많은 나무와 낙엽을 가져오기 위해 일부러 입고 가야 했다. 해지기 전에 서둘러 자루에 가득 채우고 입고 간 우단치마에도 쓸어 담은 뒤 치마양끝을 모아 묶어서 또 하나의 자루처럼 만들곤 그곳에 꾸욱 꾹 눌러 담은 낙엽은 밥을 지을 때 사용하면서 한편으로는 난방재료가 되기도 한 것이었다. 치마를 자루처럼 만들어가기 위해 입어야 했던 우단치마는 그 후에도 나들이를 가거나 멋을 내기 위해 입을 기회는 없었다. 오직 산에 나무하러가는데 유용한 입는 보자기의 역할만을 하였을 뿐이다. 수도사정인들 나은 것이 없었다. 그 당시 부산 시내의 수도사정이 나쁘기도 했지만 시집근처에는 공동 우물도 없어 동아대 뒷산의 바가지 샘에 가서 물을 길어 와야 했다. 큰딸 윤희를 임신하여 부른 배에 어린 일동이를 업고 물 한 동이 이고 집으로 향하는 길이면 출렁거리는 물이 뒤에 있는 일동이 얼굴에 왈칵 왈칵 쏟아져 일동이는 물이 넘칠 때마다 기침을 하고 넘치는 물만큼이나 눈물을 쏟아내며 발걸음을 재촉하곤 하던 그 시절 드럼통 하나를 가득 채우기 위해 수없이 왕복하며 물을 긷던 그 길은 아내에게는 수난(水難)의 길이었다. 여인네들의 시집살이가 친정에서의 삶과 같을 수는 없겠지만 아내의 시집살이는 구전민요처럼 그야말로 시집살이 개집 살이요. 고추당추 맵기보다 더한 시집살이이었던 게다. 시부모를 모시는 일에 더하여 물 깃기, 나무하기 도와주니는 고사하고 이래저래 일만 만들어 주는 시누이들 그야말로 천지사방이 온통 아내를 힘들게 하는 것들뿐이었다.“앞밭에는 고추 심고 뒷밭에는 마늘심어
고추 꽃이 맵다 해도 시집살이만 못해요
시아버지 호령소리 시어머지 꾸중소리
며느리 가는 길은 가시밭 물고개
시누이는 뱀쪽새요
시동생은 꾸중 샐 세
남편은 미렁새요 자식새끼 우렁새요.
행주치마 눈에 대고 하루하루 보낸다네.
하늘이라 하상금이 화치땅에 장가가니
처갓집이 어쩌더냐
겉 대문에 범
그리고 안대문에 용
그리고 열다섯 폭 치알 치고
쉰다섯바퀴 휘장 둘러 마루 끝에 올라서니
연꽃 한 쌍 만발했네.
방안에 들어가니 인물평풍 화산평풍
쌍쌍이라 둘러치고
풍 뒤에 봉학이는 젖 달라고 쨍쨍 우니
눈물같이 나는 젖을
괄세 말고 주련마는 괄세허고 아니 주네
마부놈아 말 몰아라 하인놈아 짐 챙겨라
오든 길로 돌아가자 장인장모 썩 나서며
어제 오신 새 손님아 술이 없어 가실란가
안주 없어 가실란가 행실 궂어 가실란가.”
고난의 연속
옛날 여인네가 시집살이가 고달프면 엽전하나 꺼내 손아귀에 굴리면서 고통을 참았다고 하며 그 엽전을 인고전이라 했다는데 아내에게는 굴릴 동전 한 닢 없었다니 말을 해 무엇 하겠는가 아내와의 결혼이 요즘처럼 서로를 알아볼 연애기간이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직 부모들의 결정에 따라 하다 보니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고, 아내로서는 생면부지의 남편인 나 하나 믿고 살아야 하였으나 내가 곁에 있는 시간보다는 일하기 위해 나가 있는 시간이 더 많아 보호자의 구실을 제대로 못 해주다보니 아내의 서러움은 더욱 커지고 심신의 고통만 더하여 갔을 것이다. 행여 시집살이가 못 견딜 만큼 힘들다 하여도 남편이 곁에 있어 위로하고 달래어 줌으로 해서 견디어 나갈 수 있는 것인데 남편의 사랑을 받고 보호를 받는다는 것이 아내에게는 거의 꿈같은 일이었으며 새식구로서 받아들인 시집이 아니라 가뜩이나 어려운 생활고 속에 군식구하나 늘어난 것처럼 시어머니의 눈에는 탐탁지 않았던 것이다. 매일 매일의 삶이 고달프고 힘이 들다보니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하는 자괴감이 더욱 아내를 힘들게 했다. 갓 시집 온 새색시가 시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남편과 오순도순 살아갈 꿈을 그렸건만 남편의 얼굴 보기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요 과묵하신 시아버지와는 달리 무섭기만 한 시어머니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아내에게는 가시가 되고 생전 해보지 않았던 나무하기며 물 깃기 등 하여야 할 일은 늘 쌓여 있었으니 그 심정을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몇 번의 왕복으로 겨우 한 드럼을 채우고 어미 등에서 물벼락을 맞아가며 지친 일동이를 방에 눕혀 놓은 아내는 잠시 시간이 나면 부엌으로 나와 친정이 있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아이고 우리 엄마는 무슨 죄를 짓고 나를 낳아서 이런 집에다 나를 시집 보내가지고 이렇게 고생하게 만드나”하며 울곤 하였단다. 간혹 내가 길어다 주기도 했지만 그건 내가 집에 있을 때뿐이었다, 평소에는 시어머니는 물론 시누이 중 누구도 도와주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애초에 시어머니의 도움은 바랄수도 없었지만 다 큰 시누이들도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고나서는 하루 종일 어딘가 나가 돌아다니다가 한밤중에나 들어왔으며 어떤 때는 술에 취해 들어와서 부엌 바닥에 오줌을 싸놓는 그야말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방탕한 그녀들에게 살림을 도와 달라는 말조차 꺼내 보지도 않았다. 오직 아내 몸을 움직여 물을 깃고 나무를 하며 집안 살림을 온통 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 하려야 할 수 없을 지경으로 아내 몸은 힘들었고 정신적으로 피폐하여갔다. 잠시도 쉴 틈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신혼의 달콤함이니 사랑이니 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 채 그렇게 시집살이는 계속 되었다. 매일매일 계속되는 시집살이 가운데 아내의 눈물은 늘어만 갔고 마음 한구석에서는 차라리 이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하였단다. 극심한 생활고도 아내를 괴롭혔지만 나와 떨어져 있는 시간 속의 시집살이는 앞이 보이지 않는 정말 지옥과 같은 심정이었단다. 나는 받은 월급에서 아내나 아이들을 위해 쓰라고 용돈을 주어보지 않았다. 나의 월급봉투를 어머니에게 드렸기 때문에 당연히 어머니께서 며느리에게 살림할 돈을 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어머니는 아내에게 살림하라며 돈을 주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얼마가 됐든 나의 월급을 봉투째 어머니께 드렸건만 어찌된 일인지 어머니는 살림을 하는 아내에게 한 푼도 안 주시고 그 돈을 어디에 쓰셨는지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힌다. 당신의 손자들이건만 아이들 우유 값이나 기저귀조차도 사주지 않아 친정어머니가 사주시는 것으로 키웠고 심지어 당신은 딸들과 함께 목욕탕을 가도 아내에게는 목욕탕 갈 돈조차 주지 않았다고 한다. 아내는 시집 올 때 가지고와 아끼고 아끼던 지참금으로 쓰다가 지참금이 떨어지고 나서는 가지고 온 몇 가지 패물들을 팔아 마련하곤 하였단다. 그런 것을 알게 된 친정어머니는 속이 상하기는 하였지만 자기가 고른 사위와 잘사는 날이 오기만을 바라면서 살림에 보태 쓰라며 돈을 주시기도 하였고, 각종 살림살이에 필요한 가재도구며 반찬거리까지 몸소 만들어다 주시기도 하였단다. 한겨울에 부엌일을 하면서도 해가지고 온 나무가 아까워 밥을 할 때에만 조금씩 사용하고 더운물도 없이 손을 넣기도 어려운 냉수에 설거지를 할 때면 나무하느라 터진 손등은 차가운 물에 더 갈라져 스리고 아팠지만 참고 견디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첫 아이인 일동이를 임신하여서도 달라지지 않는 시집살이와 고모들의 출산에 문제가 많이 생겼던 것을 아는 친정에서는 아내에게 아이를 낳으면 즉시 친정으로 오라며 신신당부를 하였다고 한다. 1953년 음력 2월 만삭의 몸으로 보리밭을 매고 있던 아내는 사나흘 전부터 배가 좀 아팠지만 힘들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참고 있었는데, 그날은 좀 심하더란다. 그래서 조금 일찍 끝내고 집으로 가 시어머니에게 배가 많이 아프다고 하였더니 남들 다 낳는 아이고 좀 더 있어야 할텐데 무얼 그러느냐며 기다려 보라기에 미련스럽게도 아픈 배를 잡고 밤을 새우고는 아침에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돼서야 막내 시누이를 통해 연락해서 장모님을 모셔왔고 일동이를 장모님이 직접 받았다고 한다. 장모님은 아내가 임신한 뒤로 미리 준비하고 있던 아기용품을 건네주고 뒤치다꺼리를 하여주다가 산모밥이라고 들여온 상에 간장도 없는 미역국을 보고는 기가 막혀 하시면서 시장에 나가 미역을 포함한 각종 반찬을 사 오셔서 미역국을 끓였는데 막상 끓여내 온 미역국을 시집식구들은 아내를 먼저 먹이지 않고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이 모두 먹어버리고 아내 것은 남기지도 않았더란다. 그것을 본 장모님은 아내가 우선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안 되겠다 하시며 친정으로 데리고 가셨단다. 애를 낳은 새댁에게 시집식구들은 소 닭 보듯 하며 산후조리에 전혀 신경을 안 써주니 장모님 생각에는 이대로 두었다가는 큰일 나겠다 싶으셨을 게다. 당신은 며느리에게만 시집살이를 시킨 것이 아니었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 분위기가 어수선하여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거나 사업을 포기하는 지경에 아버지도 하시던 일을 계속하지 못하고 쉬고 계셨기 때문인지 어머니는 남편에 대해서도 그리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무슨 일에서건 아버지를 배제하는듯한 인상을 주셨다. 속을 풀 수 있는 여유란 도대체 있을 여지가 없었다. 시집갈 때 가지고간 패물은 물론 각종 혼수들을 지키기 위해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의 행동에 또한 온 신경을 써야 하는 웃지 못 할 집안 분위기와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들도록 지치고 힘든 날들 사이에 참다못한 아내는 급기야 몇 번인가 나에게 이혼을 요구했고, 그 문제로 나와의 말다툼 끝에 손찌검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나는 이혼만큼은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무엇 하나 부럽지 않게 자란 아내가 버티기에는 너무도 힘이 들었던지 내가 배를 타고 나간 사이 일동이와 윤희를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갔다간 친정어머니의 눈물과 아버지의 호통이 무서울 지음 무거운 낯을 들고 찾아간 나와 함께 돌아오는 일이 몇 번 씩이나 반복되곤 하였다. 그렇게 아내의 고생은 계속되었고 참다못한 아내는 내가 배를 타고나간 1965년 어느 날 아이 셋을 모두 데리고 친정으로 향하였다.이혼의 위기
우리의 결혼을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으셨던 장인어른도 막상 결혼식을 앞두고는 아내에게 “네가 그 집에 가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집 귀신이 되고 뼈를 묻어야 한다”며 결혼의 의미와 시집살이에서 올 수 있는 어려움에 대해 강력하게 말씀을 하신 터라 이혼을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아내는 친정아버지의 말씀을 따르기에는 시집살이가 너무도 힘들었던 것이다. 아내는 친정으로 가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정말 더는 못살겠으니 이혼하겠다고 했지만 친정아버지는 돌아온 딸에게 “세월이 가면 달라질게다. 인간사에는 인간의 힘으로 되는 일과 시간이 해결해 주는 일이 있다” “좋은 남편, 그리고 귀한 아이들과 행복하기를 바란다” “철없는 너를 가정교육도 제대로 시키지 못한 채 너무 일찍 시집을 보낸 후 늘 미안한 마음과 아쉬움도 컸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첫 번째 만남은 부모와 자식으로서의 만남이고 두 번째 만남은 부부로서의 만남이다” “첫 번째 만남의 중심은 효(孝)이고 두 번째 만남의 중심은 부화부순(夫和婦順)이다” “이제 너는 결혼을 해서 남편이 있으니 비록 지금 힘들더라도 참고 이겨내서 좋은날이 오기를 기다려야지 우선 어려운 것에서 도망쳐 다른데서 행복을 찾으려하면 너의 시집이나 또 나나 네 어미에게 불효하는 것이다. 나와 네 어미도 많은 차이가 있고 문제도 있었지만어차피 인간은 완벽할 수 없기에 서로가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살아왔다. 부부간에 서로 상대방을 완벽하게 만족시켜 줄 수 없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불화가 생기지만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서로가 상대방의 빈 반半쪽을 채워가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부부다. 네 남편이 너에게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 있을 수 있고 네가 네 남편이나 시집에 못마땅하거나 힘들고 불편한 게 있겠지만, 네 남편은 너를 보호해 주고 너는 나편을 위해 조금은 밑지고 산다고 생각하는 것이 모두 다 이기는 길이다. 언제나 너를 낮추고 겸손하게 남편을 받들고 시부모님을 이해하도록 노력하거라. 아무리 어려운 문제가 있다고 해도 서로 다름을 이해하는 데는 상호간의 믿음과 대화가 매우 중요하다” 힘들고 참기 어렵다고 해서 이혼을 생각한다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시며 당장 “시집으로 돌아가라”하셨고, 친정어머니는 그저 눈물을 흘리면서 아내를 달랬지만 아내로서는 정말 더 이상은 살 수가 없다며 여수에 사시는 작은 아버지에게 전화를 하여 이혼을 하게 하여 달라고 부탁하였단다. 그러나 작은아버지는 “아무리 네가 힘들어도 작은아버지로서 어떻게 조카사위에게 너 이혼을 하라고 할 수 있겠니?” “내가 김 서방을 불러 올테니 네가 직접 만나서 잘 얘기해 보거라”하며 작은아버지 집으로 불러 들였다. 십여 년을 살아온 시집살이가 얼마나 고되었는지 그 말을 들은 아내는 이제는 이혼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그날 밤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작은아버지 집으로 갔고 작은아버지의 연락을 받고 간 나는 장모님께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고 아내에게는 이제 다시는 그렇게 고생시키지 않겠다며 같이 가자고 설득을 했다.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결사반대와 작은아버지의 권고 그리고 돌아가면 살림을 내겠다는 나의 말에 마음이 움직였던지 결국은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다음날부터 방을 구하러 다녔는데, 어린 일동이가 느끼기에도 할머니와 따로 산다는 것이 좋았던지 어머니에게 “우리는 집 얻어 나간다, 방 얻어 나가서 따로 산다”하며 자랑을 하곤 하였다.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고 아내는 다시 한 번 최선을 다해보자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데 아는 사람을 통해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 아내가 시집살이를 견디지 못하고 이혼하였고, 심지어는 재혼까지 하였다는 소문이 번졌다. 아내는 어쩌다 시장에라도 나가면 간혹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한결같이 이혼을 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나 보다 하는 터무니없는 소문과 억측에 시달리게 되어 친구들은 물론 일가친척조차 만나길 꺼려하게 되었다. - 4부에 계속